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환마제 여시(5)
쉐에에엑--!
“죽어! 이 개자식들아!”
시퍼런 도깨비불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남궁진혜가 사방으로 뿌리는 검기였다.
“크아아악!”
적호단 중에서도 제일 먼저 장가 부락에 도착한 남궁진혜는 벌써 몇 남지 않은 귀천성 무사들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쥐 새끼 같은 놈들! 벌써 다 튀어? 어떻게! 왜! 니들이 벌써 다 튀어!”
쉐에에에엑---!
콰광!
마지막 살아남은 이를 죽이며, 검은 기와로 된 작은 집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그 집에 사는 사람, 집이 무너져 슬퍼할 사람, 모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아…….”
뒤늦게 현무단과 적호단이 모두 도착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폐허뿐이었다.
남궁진혜가 분풀이로 몇을 죽이긴 했으나, 제대로 된 놈들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추적해.”
“충!”
적호단주의 명에 적호단원 몇이 사라졌다.
하지만 적호단주도 알았다.
잠시 뒤 적호단원들이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한 채 돌아오리란 것을.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
“이 개자식들…… 귀천성 놈들이 틀림없군.”
적호단주 팽치가 이를 갈며 말했다.
외부에 나간 장족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전멸(全滅)의 방식.
귀천성 휘하 어쩌고 따위가 아닌, 진짜 귀천성의 방식이었다.
“환마제든 뭐든. 귀천성 개들이 있는 게 분명하군. 쓰불 새끼들.”
수레바퀴 뒤로 자신의 손가락만큼 가늘고 작은 팔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적호단주가 욕지거리를 참지 못했다.
매일 전장을 살아가는 무림인이었지만, 어린아이의 시체를 매일 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때, 현무단주 운해가 적호단주의 곁으로 왔다.
“선배님.”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붉어진 팽치의 눈을 보며, 현무단주 운해는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약하지만 금방 털어 내는 자신과 달리, 강인한 선배는 죄책감조차 제 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적호단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현무단주의 예상과 달랐다.
“대체 왜, 왜 하필 장족 부락일까? 대체 뭘 노린 거지?”
“예?”
“놈들이 왜 여길 노린 걸까? 피해 상황을 분석해 보면…… 아! 쓰펄! 그게 될 리가 없나?”
뭔가 생각나는 대로 뱉어 내던 적호단주가, 주변을 보면서 작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누가 죽었는지, 뭐가 없어졌는지, 귀천성이 노린 것이 뭔지.
뭘 알아야 하는데, 그걸 알 만한 사람이 모두 죽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으아아아아----!”
짐승의 울음 같은 악성이 울렸다.
다급하게 달려온 장족들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외부에 있다가 지금 막, 모든 가족과 친지 들이 싸늘한 주검이 된 것을 안 터였다.
“아아아악! 안 돼--! 안 돼---!”
어린 자식을 잃은 아비가 목놓아 울부짖었다.
슬픔과 원한에 사무친 비명을 들으며 적호단주가 한숨을 쉬었다.
“저래서야…… 어쩔 수 없지.”
당장 귀천성 놈들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도 시급했지만,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유족들에게 슬퍼할 시간을 빼앗을 순 없었다.
대신 적호단주는 다른 곳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 개자식들. 대체 어느 구멍으로 들어온 거지?”
적호단주가 서슬 퍼런 눈을 부라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 * *
주루의 제일 꼭대기 층, 제일 안쪽 방.
중년인이 안내한 곳으로 가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루에 어울리지 않는 고요하고 한적한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거대한 탁자와 묵직해 보이는 의자. 그리고 장식장 몇 개가 전부였다.
술과 화려한 안주들이 준비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주전자와 찻잔 몇 개가 전부였다.
드르르륵.
주인의 권도 없이, 진화가 의자를 빼서 앉았다.
“허허, 무척 자유분방하신 분이군요.”
“여기까지 우리를 데려와서 정체도 밝히지 않은 사람에게, 딱 그만큼의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그렇군요. 실수는 우리가 먼저 했구려.”
그리고 중년인의 기도가 변했다.
위엄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본인은 월하회의 회주, 정소팔이라 하오.”
“…….”
중년인의 자기소개에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갑자기 위엄 있어진 말투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정……소팔.’
‘거짓말이지.’
‘가명이 너무 성의가 없어서 대꾸를 할 생각을 못 하겠네.’
진화 일행이 띠꺼운 눈으로 중년인을 보았다.
그에 중년인지 능청스럽게 웃었다.
“하하하하! 거짓말 같지만 진짜네. 정소팔, 본명일세. 정월 보름에 내 부모가 소를 받고 나를 팔았거든. 여기, 노예시장에서.”
“아…….”
“흠, 흠, 뭐 그런 이야기를 갑자기…… 흠흠.”
팽가 형제가 눈을 떼구루루 돌려서 중년인의 시선을 피하고,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뻘쭘한 듯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진화만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중년인을 보고 있었다.
중년인지 진화를 보며 싱긋이 웃었다.
“이제 십이좌회에서 누가 나서실지 알았겠군. 우리는 성녀님을 모시고 있소.”
성녀라는 말에, 그제야 진화가 눈빛에 이채를 띠었다.
야희성녀(夜熙聖女).
십이좌회의 사람들 중 가장 신비에 싸인 인물이라.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 외에, 나이나 출신, 심지어 무림인인지 관의 인물인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대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조차 알려진 것이 없었다.
“월하회는 이 거대한 무법지대를 지배하는 전주로 존재하지만, 실은 밤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모임이지. 우리의 주인은 당연히 성녀님이시고. 그동안 십이좌회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통제하는 동시에, 귀천성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소.”
중년인의 설명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한 역할이라면, 이제까지 야희성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십이좌회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진화 일행과 정의맹에 가장 필요한 능력을 가졌기도 했다.
진화가 얼굴을 가린 모자를 벗었다.
“남궁진화라고 합니다. 광마제의 제물실 출신이죠.”
진화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찰나였을 뿐.
중년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진화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오, 음……. 곡해해서 듣진 말고.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이야기는 좀 부담스럽군.”
“허, 그게 정월 소팔 아저씨가 할 소리십니까?”
진화보다 남궁구와 일행이 더 어이없다는 듯 중년인을 보았다.
“하하하! 이쯤이면 정답게 서로 인사를 나눈 셈인가? 이제 본론에 들어가 볼까?”
분위기는 전보다 더 나빠졌지만, 중년인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진화 일행이 기가 막힌 듯 중년인을 보았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꺼낸 말은, 진화 일행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우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환마제 여시가 노예시장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오.”
진화와 일행의 눈빛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환마제 여시. 무려 이십 년 동안 보이지 않던 놈이지. 어찌나 신출귀몰하게 모습을 바꾸고 정체를 숨기는지…… 놈의 진짜 정체와 얼굴은 아직 그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소.”
“진짜 정체와 얼굴을 모른다고요?”
“환마제의 ‘환’ 자가 환장할 환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닐세.”
중년인이 슬쩍 냉소를 흘렸다.
“환마제에 대해 얼마나 아나?”
“글쎄요.”
“정의맹은 놈의 과거에 대해 관심이 없더군. 여시가 처음 등장한 것은, 무림이 아니라 조용한 어느 시골 민가였네. 조용하고 순박한 마을이 갑자기 들불처럼 일어나 관에 반란을 일으키고, 농사를 멈추고 약탈을 시작했지. 관에서 마을 사람들을 제압했을 때는, 이미 늦었네. 제정신인 사람들이 없었거든. 그런 마을이 하나둘 늘어나고 종국에는 수십이 되었네.”
수십의 마을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중년인의 말에 진화 일행의 눈이 커졌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제정신 아닌 눈깔을 하고 ‘백화’라는 신을 모시더란 말이지.”
“백화교! 그게 환마제 여시였군요.”
“사람들을 미혹하는 무공은 처음부터 최고였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공력까지 무시무시한 고수가 되었지. 그런데 환마제 여시가 무서운 것은 그의 환술이 아니야. 놈이 환술로 만들어 놓은 무고한 사람들이지. 환마전(幻魔殿)에 그놈을 위해 어떤 미친 짓도 대신해 줄 허수아비가 얼마나 있을지 알 수가 없거든. 그게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놈의 진짜 힘이네.”
중년인의 말에, 진화는 정의맹인 번번이 환마제를 놓쳤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진화 일행을 따로 불러서 이런 것을 설명해 주는 이유도.
“그를 알아보신 겁니까?”
“아니. 여전히 환마제는 알아내지 못했네. 다만 환마제의 개가 눈에 띄더란 말이지.”
중년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진화는 그의 능청스러운 표정 위로 차가운 살기가 스쳐 간 것을 보았다.
“환마제의 개?”
“놈이 백화교 교주 노릇을 할 때부터 옆에 데리고 다니던 심복이 하나 있어. 그 심복이 일 년 전, 이 노예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네.”
“일 년 전이라…….”
“일 년 사이, 장안에는 별 변화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무법지대는 좀 다르네. 갑자기 어떤 놈이 눈에 띌 정도로 쑥쑥 크더란 말이지.”
“그자가 누구입니까?”
“진골장(璡骨帳) 마상 노인. 일단 그 늙은 여우부터 사냥하려는데, 함께하겠나? 현오가 팔려 간 곳도 마상 노인의 가게 중 하나일 걸세.”
“…….”
진화가 말없이 중년인을 보았다.
밤을 움직이는 상인회의 수장이라더니, 상당히 능숙했다.
환마제의 과거를 알려 주고 그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준 뒤, 무고한 사람들을 들먹이며 정파 무인들의 정의감을 자극했다.
그리고 환마제가 아닌 그의 수하를 들먹이며 문턱을 낮추었다.
마지막엔, 현오의 안위를 언급하며 발을 빼지 못하도록 하는 집요함까지.
과연.
‘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장사치답군.’
진화의 눈이 냉정하게 식었다.
“우린 현오부터 구할 것입니다.”
진화의 말에 중년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도와주지. 마상 노인의 가게를 뒤지면 될 걸세. 어떤 가게인지까지 우리가 알아주겠네.”
“우리가 드릴 것은요?”
진화의 물음에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야 한다.
진화가 상인의 공평(公平)한 거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듯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현오의 정체에 대해 흘렸으면 하네. 그 정도면, 환마제도 정체를 드러낼 듯하거든.”
“뭐요? 그럼 현오는 어떡하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중년인의 말에 남궁교명과 남궁구가 벌떡 일어났다.
팽가 형제 또한 흉흉한 기세로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진화 또한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중년인을 쏘아보았다.
“현오의 정체라면 무얼 말합니까? 소림?”
“……천살지체.”
중년인의 말에 진화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이런 미친 아저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한마디라고 흘러나가면 아저씨부터 죽여 주겠어!”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가 중년인을 향해 살기를 뿜었다.
그러자 중년인의 곁에 있던 호위들도 참을 수 없다는 듯 투기를 발산하며 진화 일행을 노려보았다.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놈이 서두르고 있네. 그래서 이번에 꼬리가 잡힌 것이고.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장담할 수 없네.”
중년인이 간절한 어조로 진화에게 말했다.
하지만 진화는 얼음처럼 차디찬 눈빛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라면, 정의맹에 협조를 구하셔야 할 일이군요. 다만 그 전에 한마디라도 새어 나간다면, 귀하에게 죄를 물을 것입니다.”
“이십 년 만일세! 이번에 반드시 잡아야 해!”
“천살지체를 빼앗기면, 앞으로 백 년은 사라지겠죠. 어쩌면 무림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네! 자네, 전혀 모르는군, 환마제의 진짜 무서움을! 그자를 죽이면, 당장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을 살릴 수 있네!”
중년인이 간절한 어조로 진화를 설득했다.
하지만 진화는 그런 중년인을 향해 비소를 날렸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모르는군, 천살지체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진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린 현오를 구하러 가야겠습니다. 당신이 현오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 준다며 우리 앞을 막았으니, 그건 알려 줘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당장, 우리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될 테니.”
진화가 중년인을 향해 서슬 퍼런 살기를 번뜩였다.
* * *
한편.
현오는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려서, 검은 천이 덮어진 채 다른 노예들과 함께 우르르- 끌려온 차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현오는 제게 일어난 일들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려라!”
목적지에 온 것인지, 노예상인 듯한 사내들이 현오를 비롯해서 사 온 노예들을 끌어내렸다.
사방이 꽉 막힌 돌벽.
“이리로!”
현오는 그제야, 그들이 끌고 온 곳이 어딘가의 동굴 같은 곳임을 알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진짜 잘 쫓아오고 있는 거 맞아?’
현오가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함부로 기운을 풀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아무리 눈을 굴려도 저를 따라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미치겠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큽!”
‘피 냄새! ……지독하군!’
코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피 냄새가 동굴 안쪽에서 풍겨 오고 있었던 것이다.
현오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잡으며 얼굴을 구겼다.
‘부처님, 사부님, 도와주세요! 망할 놈들, 두고 보자!’
현오가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사내들에게 끌려 동굴 안쪽으로 갔을 때.
“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림이 아니라 육림(肉林)이었던가.
천정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체들의 목에서 피가 떨어지고, 그 아래엔 새빨간 피가 욕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오는 다시금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