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환마제 여시(6)
“정녕 이래야겠는가!”
월하회주 정소팔도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는 듯 무서운 눈으로 진화를 노려보았다.
“그대들의 사사로운 우정 놀음이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게 될 걸세!”
월하회주가 진화를 향해 소리쳤다.
제후나 왕에 버금가는 권력과 부를 지닌 남궁세가.
운이 좋아 그 남궁세가의 양자로 들어가 모든 것을 누리게 된 청년.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무위,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남궁진화를 향해 정소팔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매순간 백성들은 잔혹하게 죽어 가고 있는데, 아주 조그만 위험부담도 지지 않으려는 남궁진화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방을 나가던 남궁진화가 정소팔을 돌아보았다.
서늘한 비소마저 아름다웠으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사로운 우정 놀음? 당신들이야말로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건 아니고?”
귀천성에 원한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남궁진화의 말은 정소팔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놈들이 만드는 지옥이라면, 우린 그 한복판에 있었어. 위험 감수? 당신은 아직도 정말 위험한 게 뭔지 모르는 것 같군. 경고하지, 날이 밝기 전에 현오가 간 곳에 대해 알아 와.”
월화회주는 여전히 남궁진화가 억지 요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궁진화의 눈에서 푸른 번개를 보는 순간,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월하회로 돌아와서도, 월하회주는 한동안 진화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월하회주는 지금도 남궁진화가 비치던 순수한 증오를 생각하면 몽골이 송연해지는 듯했다.
“회주님. 회주님!”
호위무사로 있는 월하회 표석당주 등소위가 큰 소리로 월하회주를 불렀다.
월하회주는 등소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가시가 박힌 듯 진화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대체 내가 뭘 모른다는 걸까?”
“후, 아직도 아까 그 애송이의 말을 생각 중이십니까?”
“애송이? 그냥 애송이가 아니었네. 남궁세가의 보물로 온갖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컸다고 했는데, 그건…… 사랑만 받고 큰 애송이가 할 눈이 아니었어. 광마제의 제물이었다고 들었는데, 뭔가 더 있었던 걸까?”
월하회주가 눈빛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 모습에 등소위가 한숨을 쉬었다.
“후, 남궁 공자의 무위가 확실히 우리 예상보다 위였던 것은 인정하지요. 하지만 그래 봐야 겨우 약관도 살지 못한 애송이입니다. 그 나이 때에는 우정이 세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등소위는 회주가 지나치게 남궁세가 소공자의 말을 신경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월하회주의 생각은 달랐다.
“그 애송이가, 우리의 기감을 완전히 속이고 발밑에 뇌전을 번뜩였네. 현무단주가 있었다지만, 장안 인근을 벌집 털듯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문제는, 그런 자가 우리 일을 그르치고자 한다면, 우리만 곤란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세.”
“그렇게 염려되신다면, 정의맹이나 남궁세가 쪽으로 협조를 구해 보시죠.”
말 안 듣는 아이를 마음대로 혼낼 수 없다면 보호자를 찾으면 된다는 말이었다.
월하회주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등소위는 여전히 남궁진화를 좀 힘이 센 어린아이 보듯 했다.
월하회주는 구태여 등소위의 생각까지 고치려 하지 않았다.
당장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늦네. 당장 오늘 밤에 현오를 찾으려고 마상 노인의 가게를 뒤질 기세던데…… 쯧! 골치 아프게 되었군!”
월하회주가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표석당주 등소위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행방을 알려 주지 마시죠. 아니면 해 뜨기 직전까지 기다렸다 알려 주시든지.”
“허! 그러다 우리에게 쳐들어온다면?”
“설마요.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다소 성의 없고 안일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남궁세가와 정의맹의 체면을 봐서도, 월하회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장안 인근의 귀천성 소속 문파를 순식간에 십수 개나 정리해 버린 추진력.
거기에 소속 문도들을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았던 잔인한 손 속이었다.
“현무단주를 통해서 정보를 주는 것으로 하지.”
월하회주는 진화에게 명분을 주지 않는 선에서 시간을 지체시키기로 했다.
“이번에 여우사냥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네. 성녀님과 영석당 무사들이 올 때까지, 근방에 있는 월하회 전력도 모두 준비시켜 놓게. 정의맹이 우리 일을 방해하게 둬선 안 되네.”
“정보를 정체시키고, 정의맹의 움직임까지 파악해 놓겠습니다.”
“무력 충돌은 안 되네. 우리 무사들의 목숨을 귀천성과의 싸움이 아닌 다른 일에 써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등소위가 명을 받고 나갔다.
등소위가 나가는 모습을 보며, 월하회주가 안타까운 듯 한숨을 쉬었다.
“허어! 우리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월하회는 ‘진화 일행이 종남파 사태를 정리하면서, 현무단주와 종남파 장문인이 그들에게 휘둘린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중요한 역할을 주어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자 미리 만났던 것인데, 어째 관계가 더 틀어진 듯하니.
“서둘러 적호단주를 만나야겠군.”
어차피 적호단주가 왔으니, 정의맹의 대표자는 적호단주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호단주와 회동을 갖기로 결정하고도, 월하회주는 계속해서 남궁진화가 번뜩이던 번개를 떨쳐 낼 수가 없었다.
* * *
‘여긴 대체 뭐야!’
현오는 기운으로 후각을 차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광경이 워낙 충격적이다 보니, 피 냄새가 눈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잘못 잡혀 왔다는 사실이다.
‘동남동녀 제물을 모으는 게 아니었어?’
마제들이 모은 제물이 어찌 되는지 모를 현오가 아니었다.
진화와 함께 광마제의 제물실에서 인생의 첫 기억부터 구출되기까지 보았던 것이 제물들이었다.
꿀렁거리는 고약한 독수에 산 채로 집어넣어지는 제물들.
울부짖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발버둥을 치거나 상관없었다.
모두 검은 독수 속에서 버둥거리다가 녹아 들어갔었다.
‘정성스럽게 일일이 목을 따서 거꾸로 매달아 피를 뺀다고? 이런 쓰불, 어떤 변태 같은 놈의 소굴에 잘못 걸렸군!’
거대한 욕조에 피를 받는 것을 보며, 현오가 이곳에 저를 판 이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때, 한쪽 석벽이 열리면서 계단으로 누군가가 내려왔다.
“물건이 새로 왔다고?”
높은 미성이 새소리처럼 동굴을 울렸다.
그리고 곧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새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여자였다.
촤르르르---.
여자가 걸을 때마다, 귀와 목, 팔, 다리에 한 수백 개의 장신구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사치스러운 변태인가 보군.’
걸친 옷보다 장신구가 더 많은 여인을 보며, 현오가 입을 삐죽거렸다.
여자가 촤르르- 걸을 때마다, 현오의 머릿속에서 오성반점 수백 개가 왔다 갔다 했다.
여자가 욕조에 있는 피를 찍어 먹어 보기 전까지는.
‘으헤헥-!’
피순대에 선지만두는 봤지만, 사람 피를 마시는 여자라니.
현오가 기겁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여자가 뒤에 따라온 거대한 사내를 향해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좋네. 애들이 몇 명이지?”
“서른 명 정도 됩니다.”
사내의 말에 여자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안 돼, 모자라. 이 정도로는 사흘도 못 버틸 거야. 몇 놈 더해.”
“정의맹 놈들이 인림에 나타났습니다. 월하회 놈들도 보이고요. 지금은 위험합니다.”
“알아!”
사내의 말에 여인이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매서운 눈길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내가 못 버틴다고! 이거 봐, 이거! 벌써 상하기 시작했어!”
촤르르르르----!
여인이 팔을 들자, 손목에 감겨 있던 것들이 흘러내렸다.
그에 드러난 손목은 바싹 메말라서 허연 껍질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제 얼마나 남지 않았어! 독수가 완성됐어. 곧 혼현마제가 제물을 보내 올 거야. 길어 봐야 열흘, 그것도 못 버텨?”
“아닙니다. 만발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여인이 손목을 보이며 짜증스럽다는 듯 묻자, 사내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열흘이라고?’
현오가 귀를 번뜩이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눈물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인과 사내는 주변에 갇힌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도살장에 차례를 기다리는 가축을 보는 듯, 그저 스윽- 한번 보고 지나칠 뿐이었다.
여인이 지나가다 현오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현오가 얼굴을 숙였다.
“스님?”
여인은 현오의 민머리와 승복을 보고 눈썹을 실룩거렸지만, 그뿐이었다.
“하긴 중이 무슨 상관이야.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나머지는 사흘 후에 잡아.”
“예.”
여인의 말과 동시에, 거대한 사내의 뒤로 있던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욕조를 끌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다른 쪽의 석벽이 열리자, 넓은 통로가 나타났다.
여인과 함께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피가 가득 찬 욕조를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무사들만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현오는 사내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혹시 사내가 눈치챌까 기척도 줄여 가면서, 눈만 도르르 굴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야. 그래도 아까 혼현마제 어쩌고 한 걸 보면, 내가 영 잘못 팔려 온 건 아니라는 말이지? 그럼 아까 그 피는 다 뭐야? 여자는 누구고! ……설마 저 여자가 환마제 여시인가?’
현오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때, 사내의 시선이 현오에게 향했다.
‘……!’
현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
“대주님?”
“……가지.”
잠시 현오 쪽을 보던 사내는 곧 수하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고서야, 현오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현오가 작게 안도했다.
하지만 아직 여자가 나가지 않았으니 안심할 수 없었다.
“곤란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처님, 지금 제자가 몹시 곤란해요.”
현오가 혹시 몰라 등을 돌린 채 몸을 말았다.
붉게 변한 눈을 들킬세라, 얼른 눈을 감고 염불을 외웠다.
* * *
탕-!
남궁교명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갔다.
“그 인간들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일단 뒤져. 깡그리.”
진화의 냉랭한 말이 떨어지자, 정의무학관 일행은 물론 적오단주가 지원해 준 적호단원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비켜!”
퍼-억!
팽수가 팔을 휘두르자, 그들을 앞을 막던 중년인이 단숨에 나가떨어졌다.
“으악!”
“습격이다! 습격이다!”
겁에 질린 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곧 진골장에 있던 무사들이 모두 튀어나왔다.
챙-! 챙-!
“웬 놈들이냐!”
진골장의 경비대장이 검을 들고 소리쳤다.
그때.
파지지지직---!
“크앗!”
생전 처음 겪는 뇌기와 온몸이 화끈거리는 고통에, 경비대장은 겨우 검을 놓치지 않은 채 뒤로 밀려났다.
“누구……!”
경비대장은 뒤의 말을 채 잊지 못했다.
혼이 빨려 들어갈 듯 아름다움과 천벌이 내릴 듯한 공포를 동시에 보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경비대장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긴 진화가,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했다.
“정의맹 지부와 거래하는 상인들은 네놈들이 사 갔다. 전부 내놔.”
“크읏! 개소리 집어치…… 크아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비대장은 몸속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진화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사 온 노예들, 어디 있어?”
“내가…… 말을…… 할…… 것 같나?”
“그렇다면 죽어라.”
이가 부서졌는지 피를 흘리면서도 정보를 뱉어 내지 않는 경비대장의 모습에, 진화가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려는 그때.
쉐에에에엑---!
퍼-----엉!
진화가 제게 날아들 검기를 쳐 내자, 검기는 진화의 기운에 밀려 한쪽 벽을 부쉈다.
녹색 비단 장포를 걸친 노인의 바로 뒤에 있는 벽이었다.
“정의맹의 젊은 피들이 왜 내 사업장에 왔을까?”
내 사업장.
그 말이 아니라도, 진화는 노인이 월하회주가 말하던 마상 노인임을 알아보았다.
“네놈들이 정의맹 소속 상인들을 사 갔더라고. 그들은 어디 있지?”
“글쎄. 미안하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일이로군. 노예의 출신과 배경을 알고 사 오지도 않거니와, 이미 사 온 노예를 대가없이 내주는 경우도 없소.”
“……목숨값이래도?”
“난 이미 살 만큼 살아서, 노예의 값으로는 턱도 없을 것 같소만?”
진화의 검이 겨눠지는 순간에도, 마상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에, 진화가 검을 휘둘렀다.
“크억!”
진화가 옆에 쓰러져 있던 경비대장의 목을 그은 것이다.
“너희 전부의 목숨을 말하는 거다.”
진화의 말에 마상 노인이 굳은 얼굴로 진화를 노려보았다.
“노예상인의 노예를 대가 없이 건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오?”
마상 노인이 진화를 향해 살기를 뿜었다.
그에 진화가 미소를 흘렸다.
“상관없어. 정의맹은 우리 사람을 찾는다는 명분이 있으니까.”
“명분?”
“내가 너희 전부를 죽여도 되는 명분.”
말과 동시에 진화가 마상 노인의 살기를 뇌전으로 태워 버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뇌전이 마상 노인을 향하던 그때.
“도련님!”
남궁구가 진화를 향해 달려왔다.
“사람들을 찾았어!”
-현오가 없다!
크게 떠드는 말과 달리, 전음으로 전하는 진짜 본론.
남궁구의 표정이 굳어 있는 이유였다.
불길한 느낌과 함께, 진화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 진화의 귀로 마상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찾아? 찾는 사람이 없을 텐데?”
진화가 눈을 크게 뜨고 마상 노인을 보았다.
그러자 마상 노인이 진화에게 싱긋이 웃어 보였다.
“허허허!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오. 정의맹 사람들이 내 사업장에 있었다니. 내 사비로 값을 치르고 그들을 내주지. 그러면 이제…… 우릴 죽여도 되는 명분은 사라진 것인가?”
마상 노인이 진화를 조롱하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