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구휼할 진(賑) 불행 화(禍) : 악몽에서 깨어나는 법(1)
진화는 입 안쪽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구, 그…… 정소팔인가 뭔가 하는 인간 찾아.
진화는 울컥 솟아오르는 화를 겨우 누르고, 남궁구에게 짧게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 저를 비웃는 마상 노인이라는 자를 보았다.
녹색 비단 장포 안으로 마른 듯하지만 제법 단단한 기세가 느껴지고, 파르르- 떨리는 입가가 꿋꿋하게 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뼈가 시릴 정도의 음기를 견디는 노예상인이라…….’
진화가 마상 노인을 향해 사르르 웃었다.
언제까지 저를 비웃을지 보자.
진화가 독기를 뿜듯 마상 노인에게 보내는 음기를 늘렸다.
“정의맹 사람들을 순순히 내준다니, 다행이군. 하마터면 오늘 바쁠 뻔했어. 당신의 사업장을 전부 다 뒤져야 하는 줄 알고 아찔했거든.”
“허허허! 그건 본인이 더 아찔할 일이로군. 아직도 정신이 산란하니, 이제 그만 내 사업장에서 나가 주겠소?”
“정의맹 사람들을 확인하는 대로 곧장 물러나 주지. 정의맹이 평범한 노예상을 괴롭힐 이유는 없으니까.”
진화가 티 나지 않게 다리를 부들거리는 마상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듯 먼저 등을 돌렸다.
마상 노인이 안도의 한숨을 쉴 찰나.
“아, 그런데…….”
진화가 갑자기 돌아보았다.
“요즘 노예시장에서 약관 전후의 젊은 남녀만 찾는 손님이 있던가?”
자비는 개뿔, 저를 놀리려는 수작이었던가.
갑자기 돌아본 진화에 마상 노인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허어, 글쎄올시다. 젊은 남녀를 찾는 이들은 많지. 젊고 튼튼한 이들은 쓰임새가 많아서.”
“하긴.”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가 이제 거의 한계점이라.
마상 노인의 이마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보며 진화가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그럼 또 보자고.”
진화가 일행과 함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동시에 진화의 얼굴도 무섭게 굳었다.
“크윽!”
“장주님!”
진화의 등 뒤로, 마상 노인의 신음과 그의 수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노예상인일 리 없지.”
어지간한 무인도 견디기 힘든 고문을 티 없이 받아 낸 마상 노인을 생각하며, 진화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이 조롱은 다음번에 꼭 갚아 주지!’
진화의 눈동자 속에서 사나운 번개가 날뛰고 있었다.
* * *
막무가내로 쳐들어간 한 장원.
쉐에엑----!
퍼---엉!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채의 대문도 단순에 날려 버렸다.
그러자 안채에서 눈에 익은 사람들이 급히 나왔다.
“공자-!”
저를 향해 큰 소리를 내는 중년인을 보고, 진화가 단숨에 그의 코앞까지 날아갔다.
“이게 무슨……?”
“현오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우릴 속인 건가?”
월하회주가 입을 떼기도 전에 진화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살기마저 배어 있어, 월하회주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월하회주의 멀끔한 얼굴을 보자니, 진화는 속에서 천불이 이는 듯했다.
“무슨 소리? 그건 이제부터 그쪽이 알아봐야지!”
퍼---엉!
말과 동시에, 진화가 팔을 휘둘러 건물 기둥 중 하나를 날려 버렸다.
말 그대로 기둥 가운데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터져 나갔다.
“이보시오!”
월하회주가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렀지만, 진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진화의 뒤에 있던 일행도 진화를 말릴 생각이 없는 듯, 월하회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의든, 능력 부족이든 상관없다. 현오를 찾아내. 그게 아니라면, 귀천성의 첩자로 간주하고 전부 죽여 주지.”
“말이 심하시오!”
표석당주 등소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러자 진화의 눈이 그를 향했다.
“헙!”
천둥 번개가 치는 하늘처럼, 푸른 번개가 번뜩거리는 눈동자와 마주한 표석당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지금은, 말만 심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야.”
경고와 협박이 섞인 진화의 말에 표석당주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진화의 눈에서 들끓는 살기가 진심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월하회주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고의가 아니오. 어찌 된 연유인지 알아보고 다시 정보를 알아내겠소. 한 가지, 현오에 대한 정보는 차단 중이니, 결코 놈들에게 정체를 들키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건 약조할 수 있소.”
현오가 없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월하회주의 표정에는 혼란스러움과 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진심이 묻어나는 월하회주의 말에도 불구하고, 진화는 살기를 풀지 않고 오히려 그를 향해 싸늘한 비소를 날렸다.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 천살지체에 대해 놈들이 알게 되는 게 문제가 아니야. 현오가 언제까지 그걸 억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천살지체는 단순히 체질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림의 정순한 내공 수련과 불마대법에도 불구하고, 현오는 때때로 끓어오르는 살욕을 견디려 만두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현오가 위험해지기 전에 찾아내야 할 거야.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밤엔 다른 사람들이 장사를 하게 되겠지.”
진화는 월화회주와 안채 어딘가를 노려보며, 시릴 정도로 차디찬 협박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원을 나가는 진화를 보며, 월하회주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그리고 사색이 된 얼굴로 부서진 기둥 뒤편을 보았다.
그때, 기둥 뒤편에 있는 방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주답지 않은 실수를 하셨군요.”
온화한 여성의 목소리가 단호한 어조로 월하회주를 질책했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남궁 공자가…….”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그런……!”
야희성녀의 말에 월하회주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궁세가의 공자가 야희성녀의 존재를 알고서도 그 앞에 있는 기둥을 날렸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우연인 줄 알고도 내려앉을 뻔했던 심장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벌떡거리기 시작했다.
야희성녀(夜熙聖女).
십이좌회의 일인이자, 월하회를 비롯한 중원 밤의 어머니.
살아 있는 무림의 영웅이자 전설을 향해 서슴없이 협박을 해 대는 그 공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저, 정의맹과 남궁세가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겠습니다. 이건…….”
“제왕검 그 늙은이는 재밌다고 웃을 거고, 정의맹주도 대충 웃으면서 송구하다고 하고 때우겠죠.”
“하지만 성녀님!”
“그만. 이번엔 이쪽이 실수한 겁니다.”
야희성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월하회주는 물론 표석당주와 호위들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적호단주도 경솔했어요. 어떤 경우에도 천살지체를 내줘선 안 됐는데. 요즘 아이들은 왜 그렇게 겁이 없는지……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합니다. 혼현마제가 움직이고 있어요.”
“모든 눈을 집중시키겠습니다.”
야희성녀의 말에 월하회주가 냉정을 되찾고 결연하게 답했다.
밤의 눈이 혼현마제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야희성녀는 혼현마제의 움직임을 막아설 생각이 없었다.
“혼현마제나 환마제나, 모두 우리가 죽였던 이들입니다. 그 역천대법이 대체 어떤 것이기에 죽였던 놈들이 되살아난 것인지, 이번 기회에 확인해야겠어요. 그 전에 현오를 구해야 합니다.”
“만월의 의지대로 하소서.”
야희성녀의 말에 월하회주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공손하게 읍니다.
혼현마제가 나타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 * *
탕--!
“빌어먹을!”
적호단주 팽치가 문을 부술 듯이 닫고, 욕지거리를 뱉으며 들어왔다.
집무실에 있던 현무단주 운해가 놀라지도 않고 물었다.
“오늘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진화가 월하회에 현오를 찾아내라고 한바탕 난리를 친 모양이야.”
“네?”
“현오를 놓쳤어, 월하회 놈들이! 젠장!”
진화 일행이 오는 동시에 현오에 대해서 들은 적호단주는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월하회라면……?”
“십이좌회에 온다는 지원이 그 망할 할마시더군! 천살지체를 내주다니 무슨 생각이냐고 한바탕 뜯기고 왔어. 누가 놓칠 생각으로 했겠냐고!”
퍼-억!
“아……!”
적호단주의 말을 들으며 현무단주의 얼굴도 심각하게 굳었다.
일이 꼬일 대로 꼬였지만, 그들의 실수였다.
적이 쳐들어와 장가 부락을 덮칠 줄 몰랐고, 그들이 빠진 사이에 월하회가 끼어들 줄도 몰랐고, 놈들이 월하회의 눈까지 속일 줄 몰랐다.
전부, 몰라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제기랄-!”
쿵!
적호단주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의자를 내리치자, 의자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할마시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내가 안일했던 거다.”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잘못한 거지요. 그런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현오를 찾아야 합니다. 남궁 공자 일행은 어찌하고 있습니까?”
“어쩌긴. 마상 노인한테 쪽 좀 당했나 봐. 월하회에 찾아가서 기둥 하나를 날려 버리고, 이제는 인림 근처로 오는 산적, 마적, 귀천성 휘하 문파 가릴 것 없이 두들겨 패고 있어.”
적호단주의 말에 현무단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을 왜요?”
“마상 노인이 명분을 없앤다며 순순히 우리 사람들을 내준 모양이야. 어디서 꼬라지가 뒤틀린 건지, 겨우 생각해 낸 방법이 그 모양인지. 노예시장에 들어갈 노예를 끊어 놓겠다는군.”
말을 하던 적호단주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기가 걸렸다.
곱게 생긴 얼굴에 그런 성질머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괜찮은 겁니까?”
이미 진화의 손 속을 아는 현무단주가 불안한 듯 물었다.
“정의맹이 정의구현 하겠다는데 어쩌겠어? 정의맹이 관여하지 않겠다는 건 노예시장 한정이니까…… 그 전에 현오를 찾아야지. 젠장!”
결국 현오에 대한 걱정으로 귀결되는 결론에, 적호단주가 자책을 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야희성녀께서 나서 주시면 곧 현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괜히, 정보력 하나로 십이좌회에 든 할마시가 아니니까.”
적호단주의 간절한 이면에는 야희성녀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정보에 관해서 그 귀신같은 할마시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쪽팔리긴 하지만, 지금은 그쪽에 매달려 볼 수밖에 없었다.
“남궁 공자……는 별걱정 없겠지만, 괜한 분풀이에 다치는 이들이 있으면 곤란합니다. 좀 말려 보시지요.”
“허! 그놈을 내가?”
현무단주의 걱정스러운 요청에, 적호단주가 어림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에 현무단주가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남궁진혜에게 요청이라도 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남궁진혜?”
남궁진혜의 이름이 나오자, 적호단주가 작게 이를 갈았다.
“그 새끼 지금 장가 부락에 있는 첩자 찾겠다고 미친개처럼 날뛰고 있다. 네가 가서 좀 말려 보지그래?”
“…….”
적호단주의 되물음에 현무단주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결국 지금은 월하회에서 현오에 대해 알아 올 때까지 두 남궁의 미친 널뛰기를 보고만 있어야 할 판이라.
“하아.”
“후우.”
적호단주와 현무단주가 동시에 한숨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깐, 서로를 위로하는 침묵이 흐르고.
적호단주가 눈빛에 이채를 띠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느낌이 쎄-한데, 이쪽이 아니야.”
“이쪽이 아니라니요?”
“장가 부락에 첩자를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쎄-한 놈이 하나도 없어. 다들 하늘이 무너질 듯이 그러고 있고, 다른 문파 사람들도 조용하고.”
“그런데 뭐가 이상한 겁니까?”
적호단주의 말에 현무단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본래 첩자가 ‘나 첩자요.’ 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찾기 힘든 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전부터 적호단주의 저 ‘쎄-한 느낌’이 귀천성에 한해서 꽤나 믿을 만한 것도 사실.
현무단주는 적호단주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때, 집무실 문을 열리며 적호단원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단주님, 첩자로 의심되던 사람 중 하나가 목을 맨 채 발견되었습니다!”
적호단원의 말에, 적호단주와 현무단주가 벌떡 일어섰다.
그 시각.
진화에게도 누군가 빠르게 달려왔다.
“도련님, 없대!”
“그게 무슨 말이지?”
진화는 남궁구의 뜬금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찌나 바쁘게 달려왔는지, 남궁구도 곧바로 말을 전하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후우. 한 사람이 없대. 마상 노인한테서 받아 온 우리 쪽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없대!”
남궁구의 말에 진화의 눈이 번뜩 뜨였다.
“당장 적호단주에게 지원 요청하지.”
“어쩌게?”
“다 같이 있는 중에 하나가 비잖아. 진골장에 다시 가 봐야지.”
진화의 말에 산적들을 묶고 있던 일행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툭.
“으악!”
나하연과 당혜군도 잡고 있던 산적들을 던지듯 두고 진화에게 왔다.
“부디, 동행하게 해 주겠소?”
“그 뚱땡이가 거기서 굶고 있는 건 좀 너무하죠.”
“당장 가지.”
적호단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원을 주는 건 적호단주의 마음 아니겠는가.
진화와 일행은 적호단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진골장을 전부 부숴서라도 현오를 찾아낸다.”
“예!”
파견 나온 동의생들의 장은 여전히 진화라.
진화의 명에 일행이 우렁차게 답했다.
달려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신이 난 듯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