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구휼할 진(賑) 불행 화(禍) : 악몽에서 깨어나는 법(2)
산과 산 사이에 모여 있는 작은 집들.
곳곳에 농사를 짓는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들.
서늘한 공기가 만드는 정적 속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 외엔 개울 소리와 새소리가 전부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삐------이!
마을의 제일 꼭대기 집으로 작은 새가 날아들었다.
파닥파닥.
바쁜 날갯짓으로 창가에 내려앉은 새는, 하얀 손이 내주는 먹이를 먹고 다리에 숨긴 전서를 내주었다.
“오. 이런…….”
단아한 옷차림에 자애로운 표정, 온화한 인상의 중년 문사.
백의를 입은 제갈무진, 아니 혼현마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시가 벌써 독수를 완성했다는구나.”
“환마제께서, 벌써 말입니까?”
맞은편에 있던 순박한 인상의 소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완벽하지 않다 했거늘……. 쯧.”
혼현마제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자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제가 다시 ‘당장은 어렵다’고 전서를 보내 볼까요?”
소년이 하는 말에, 혼현마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 딴에는 자신의 곤란함을 해소해 주고자 나섰는데, 하기 싫은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기 때문이다.
“허허허! 그럴 것 없다. 이리 채근하는 것을 보면, 그 작자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구나. 어쩔 수 없지.”
혼현마제가 소년에게 고개를 저었다.
소년이 아니라도,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을 참이었다.
“야희성녀가 움직였다는구나. 환마제도 환마제지만, 장안은 중원 정벌의 중요한 교두보다. 이대로 당하게 둘 수야 없지.”
혼현마제가 눈을 빛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차비를 하올까요?”
혼현마제를 살피던 소년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한 제물과 같이 움직일 것이다. 수오, 네가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예. 차질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수오라 불린 소년이 공손하게 답했다.
달리듯 나가는 발걸음이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녀석의 첫 강호 출두인가? 허허, 좋아할 만했군.’
혼현마제가 흐뭇한 얼굴로 수오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순박한 소년은, 뇌평과 한문혜에 이은 혼현마제의 세 번째 제자였다.
죽은 뇌평은 무공은 뛰어나나 성격이 너무 급하고 아둔했으며, 잡혀 간 한문혜는 재능은 쓸 만하나 생각이 깊지 못하고 교활하기만 했다.
수오는 나이는 어리지만, 앞선 이들과 달리 매사 차분하고 생각이 깊었다.
조금 느리긴 하지만 결과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아이이니, 이번에도 제 마음에 차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남궁진화와 소림 현오가 장안에 있다고? 허허허. 일이 재밌게 되었구나.”
유쾌하게 웃는 혼현마제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 * *
급하게 집무실을 뛰쳐나온 적호단주와 현무단주가 장가 부락으로 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는 전부 치웠지만, 여전히 지독한 죽음의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죽음의 냄새라는 건 특별할 것이 없었다.
가시지 않은 지독한 혈향과 온갖 부패물의 냄새.
자연사라면 모를까.
신체가 훼손되거나 장기가 몸 밖으로 나온 상태라면 죽은 직후부터 그런 냄새들이 풍겨 오기 시작한다.
다행히 현무단과 적호단이 빠르게 시체를 모으고 합장을 했기에, 남은 냄새들은 모두 비극의 찌꺼기들뿐이었다.
다만, 유독 한 집에서는 아직도 생생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단주님, 저기입니다!”
단원의 안내에 따라 달려간 적호단주와 현무단주는, 안의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벌써 치우면 어떡해!”
적호단주 팽치가 얼굴을 구기며, 시체를 싸매고 있는 단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때, 한쪽에 누군가 더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 왜 소리를 질러요!”
적호단에서 단주에게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남궁진혜, 네가 먼저 왔냐?”
“예!”
적호단주가 조금 민망한 듯 묻자, 남궁진혜가 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조사 다 끝났으니까 내렸죠. 타살입니다.”
“타살?”
남궁진혜의 말에 적호단주의 눈썹이 들썩였다.
정의맹 본부에서 각종 사건의 뒤처리를 하고 의선문과 협업까지 하면서, 본의 아니게 시신에 대한 지식을 쌓게 된 적호단이었다.
힘쓰는 것 못지않게 머리도 좋은 남궁진혜는 적호단주도 신뢰할 수 있는 조사관이었다.
적호단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남궁진혜를 보는 현무단주에게, ‘한번 믿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니까 대들보에 목을 맸더라고요. 무공도 높지 않은 사람이 주변에 먼지 자국 하나 건들지 않고 목을 매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게다가 저기…… 어디서 죽었는지, 신발엔 흙이 있는데 바닥은 깨끗하고. 발버둥친 흔적도 없고, 목에 있는 시반도 목을 맨 줄이랑 다른 겁니다.”
“다른 줄?”
“예. 다른 줄로 죽이고 나서 목을 맨 게 확실합니다. 어떤 환장할 놈들인지, 위장하는 데에 성의도 없어요.”
남궁진혜가 욕지거리를 섞으며 이죽거렸다.
적호단주화 현무단주의 표정이 자살을 들었을 때보다 더 심각하게 변했다.
“왜 하필 이 사람이지?”
“사람들 행적을 조사하는데,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세 명 중에 하나였어요.”
“첩자로 의심받던 사람이라는 건가?”
“우리는 의심을 안 했는데, 장가 부락 사람들 사이에서 의심이 컸죠.”
남궁진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사 중에도 남궁진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해 벌벌 떨던 사람이었다.
첩자를 할 수 있는 간담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 남궁진혜가 죽은 시체를 향해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의심 가던 용의자를 죽였다? 입막음일까?”
적호단주의 물음에 남궁진혜가 고개를 저었다.
“확인 결과 진짜 첩자가 아니었습니다. 행적을 밝히지 않은 건, 마누라와 자식이 죽는 동안 바람피우러 간 걸 들킬까 봐 그런 거고요.”
“죽어도 싼 놈이네.”
“그래도 첩자는 아니죠.”
남궁진혜가 아쉬워한 이유였다.
차라리 진짜 첩자가 입막음 당해 죽은 거였다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그럼 진짜 첩자가 의심을 피하기 위한 것. 아니면 눈이 돌아간 장가 사람들 중 하나가 원한으로 죽인 것. 둘 중 하나인가?”
적호단주의 눈빛이 밖에서 구경 중인 사람들을 향했다.
장가 부락 사람들 모두가 멀건 가깝건 혈연관계가 있었다.
그러니 장가 부락 사람들은 전부 남자의 유가족인 동시에 남자의 죽은 아내와 딸의 유가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현무단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요?”
“뭐?”
현무단주의 말에 적호단주가 무슨 뜻이냐는 듯 물었다.
“사람들이 장례를 치른다고 바쁘다지만, 장가 부락엔 현무단원들도 많았습니다. 첩자를 찾는다고 적호단원들도 돌아다녔고요. 지금 뭔가를 하기엔,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현무단주가 남궁진혜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도 남궁진혜가 장가 부락을 이 잡듯이 들쑤시고 다니던 차였다.
누군가 나쁜 일을 도모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큰 시기였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이쪽에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듯, 자꾸 일을 만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 건 보통 더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시선을 돌리려고…….”
현무단주의 말에 적호단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현오!”
“진화!”
“……어?”
현무단주와 적호단주가 갑자기 나온 다른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남궁진혜가 지하여장군 같은 얼굴을 하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우리 진화가 지금 그 영감탱이 족친다고 갔다는데, 이 새끼들이 우리 진화를 노린 게 틀림없습니다!”
“……진화를? 왜?”
“남궁 공자가 위험해……질까요?”
“어쨌든! 그럼 놈들이 노리는 게 뭐겠습니까? 하필 진화가 인림에 갔을 때에 장가 부락을 습격하더니, 이제는 진화가 진골장을 노리는 때에 이런 사단을 만들어? 우리 진화를 노리는 거면, 내가 진짜 이 새끼들을 가만 두나 봐라!”
남궁진혜가 이를 갈며 사방에 살기를 뿌렸다.
현무단주와 적호단주는 그런 남궁진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누가 들어도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라.
-그냥 남궁 공자 중심으로 끼워 맞춘 거 아닙니까?
-이 새끼가 하는 말, 반은 그냥 흘려. 머리는 좋은데, 거의 쓰질 않으니까.
적호단주의 말에 현무단주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남궁진혜의 말이 전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장가 부락 습격은 몰라도, 이번 건 확실히 이상합니다.”
“중요한 일을 위해서 우리 시선을 돌리는 거라…… 그럼, 이번에 남궁진화가 물고 달려간 것도, 진골장 놈들이 일부러 유인한 걸 수도 있나?”
“……!”
적호단주가 던져 본 말에, 본인은 물론이고 현무단주와 남궁진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지금 당장 단원들 이끌고 진골장으로…….”
“쓰불! 우리 진화 건드리는 놈은 반드시 변사체로 만들어 주마!”
적호단주가 심각한 어조로 명을 내리기도 전에, 남궁진혜가 달려 나가고 없었다.
“후우, 일단 가지.”
남궁진혜를 잡고 호통을 치기엔, 시간이 없었다.
* * *
진골장의 본 장원.
몇 개의 주루와 객장, 도박장과 노예경매장을 겹겹이 두르고, 그 안에 요새처럼 자리한 거대한 장원이었다.
다만.
퍼----엉!
팽가 형제와 나하연이 마음먹고 주먹을 휘두르자,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문은 없었다.
“비켜--!”
주루 하나를 그대로 뚫고 들어간 팽가 형제와 나하연이 진골장 대문을 날려 버리자, 진골장의 무사들이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에 당혜군이 은화대침으로 주루 이 층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계단마저 막혔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위에서 뛰어내리는 이들을 향해 마음껏 검을 휘둘렀다.
뛰어내리기 위한 큰 자세는 치명적인 빈틈을 노출했고,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그들의 급소를 노리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진화 일행과 함께 온 적호단원들도 처음에는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러려니 다가오는 무사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챙-! 챙챙---!
진화 일행이 진골장 무사들을 밀어내며 진골장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마상 노인과 그 수하들이 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행패요---!”
사자후같이 울리는 마상 노인의 노성에, 싸움이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진화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행패? 우리는 그저 정의맹을 농락한 간 큰 노예상인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것뿐이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개소리를 하다니.
진화의 말에, 마상 노인보다 함께 있던 남궁구를 비롯한 일행이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상 노인의 얼굴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닥치시오! 우린 분명 손해를 감수하고 정의맹의 일에 협조했소. 그런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놓고, 정의구현이라! 지금 이 인림과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말이오?”
단단히 화가 난 듯, 마상 노인이 협박조로 물었다.
하지만 진화에게 전쟁은 협박거리가 되지 못했다.
“협조라…… 나도 너무 당당하게 호의를 베풀기에 그런 줄 알았더니, 어째서 한 사람을 빼 놓았지?”
“한 사람을 빼 놓았다? 그럴 리 없소! 아니면 다른 곳에 팔려 갔겠지. 나는 진골장에 들어온 정의맹 사람들을 모두 내주었소.”
“그래? 어쩌면 그쪽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정말 우릴 농락한 것이 아니라면, 노예장 문을 열어 확인시켜 주겠나?”
진화야말로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현오도 현오지만, 눈에 보이는 위험 요소는 모조리 치워 버리고 싶은 것이 진화의 진심이라.
“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상 노인이 진화의 억지를 거절하는 순간.
진화의 눈이 기다렸다는 듯 번뜩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 눈으로 열어서 확인하는 수밖에!”
쉐에에엑-----!
진화는 마상 노인이 말을 바꾸기 전에 검기부터 날렸다.
“장주님!”
“커억---!”
날카로운 검기가 곧장 마상 노인을 향하고, 무사들이 몸을 던져 그 앞을 막았다.
진화나 일행의 생각보다 진골장 무사들의 충성심이 높은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떻게 하려는 거야?
-현오가 내공을 쓰지 않는 이상 우리가 찾기는 힘들어. 현오가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도 없고.
-그럼 여길 완전히 없애려는 거야?
남궁구의 전음에, 진화가 마상 노인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내놓을 때까지 검을 휘둘러야지.”
진화의 눈이 살기로 매섭게 빛나고, 마상 노인 또한 지지 않고 진화를 노려보았다.
“이 인림을 없애려는 시도가 진즉부터 없었을 성싶으오? 나라도, 정의맹도, 이 인림을 없애지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오.”
마상 노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들자, 진골장 사방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무수히 많은 무사들이 검을 들고 쏟아졌다.
“와아아아아--!”
지금까지와 달리, 사나운 기세를 뿜는 무인들이었다.
착. 착. 착. 착. 착.
낮은 담벼락과 높은 주루 위에는 활을 든 사병들마저 있었다.
“뭐야? 이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남궁구가 놀란 눈으로 사방을 보며 물었다.
다른 일행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사람이라고 했소? 어디 한번 잘 찾아보시오.”
마상 노인이 진화를 향해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함정인가?”
“어리고 겁 없는 짐승일수록 덫에 잘 걸리는 법이지.”
지난번 진화를 조롱하던 그때와 비슷한 눈빛과 표정이, 진화의 심사를 뒤틀었다.
“허!”
자신만만한 마상 노인을 보며, 진화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진화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얼마나 많은지도 모를 무사들과, 자신들을 겨누는 화살들.
“함정이라고?”
“오, 당연히 어린 맹수의 숨통을 끊을 검도 준비해 뒀네.”
마상 노인의 뒤로 거대한 덩치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상 노인이 진화와 일행을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겁이 많군.”
진화가 매서운 눈으로 마상 노인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