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구휼할 진(賑) 불행 화(禍) : 악몽에서 깨어나는 법(5)
진화는 아주 오랫동안 싸워 왔다.
이전 생의 평생.
제물이라 정해진 운명,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세가와 정의맹 내 진화를 몰아내려는 세력 그리고 진짜 적.
진화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그의 진짜 적이었지만, 진화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내부에서 배척하는 세력이었다.
계속해서 주변 모든 사람을 적대하고, 원망하고, 이용당하는 삶.
그 속에서 진화는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는 세상을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제 몸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생각한 것조차, 제게 올 죽음의 안녕이 아니라 광마제의 파멸이었으니.
진화는 늘 저보단 제 주변만을 보고 살았다.
지켜야 할 사람과 죽여야 할 사람, 모두 제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온 뒤.
진화는 더 필사적으로 제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챙겼다.
지금까지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비록 이전 생보다 몸은 어려졌지만, 전쟁에는 더 익숙해졌고 적을 죽일 이유도 더 분명해졌으니까.
“크아아아악---!”
진화가 소리를 지르는 마상 노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크윽. 지, 지금은 몇 시지? 날이 밝았나?”
마상 노인이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묻는 모습이, 고통에 못 이겨 헛소리를 하는 모습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 시간이라는 게 마상 노인에게는 몹시 중요했는지, 그는 전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고 진화에게 시간을 물었다.
“큭. 끄아아아악--!”
마상 노인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커헉! 컥! 컥!”
영겁 같은 고통이 지나가고, 마상 노인이 목에서 피를 뱉으며 기침을 해 댔다.
진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물론, 마상 노인의 질문에 답을 해 준 적도 없었다.
“크윽. 시, 시간…….”
“…….”
조용히 마상 노인을 보고만 있던 진화가 마침내 일을 열었다.
“언제를 찾는 거지?”
진화의 물음에 마상 노인이 눈을 떴다.
잘 떠지지 않는 듯, 게슴츠레 한 눈이 진화를 향했다.
“허, 허억…….”
곧 죽을 듯 숨을 몰아쉬며, 마상 노인이 진화를 보았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이를 드러내며 웃으려는 듯 입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구, 궁금한 것을 보니…… 시간이 마, 많이 흘렀구나…….”
마상 노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친 듯했다.
“…….”
진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마상 노인을 보았다.
“끄아아아아악!”
물론 진화의 뇌전도 여전했다.
진화가 무심한 얼굴로 마상 노인의 손톱 밑에 박힌 바늘을 뽑았다.
까맣게 탄 바늘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동강이 났다.
바닥엔 그런 바늘이 꽤 있었다.
진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 바늘을 들었다.
그때.
“자, 잠깐! ……헉. 헉. 헉!”
매번 새로운 바늘이 나올 때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지옥.
마상 노인 또한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새로운 말을 꺼냈다.
“하, 하나씩, 주고받는 건 어떤가? 주고받아…….”
마상 노인이 진화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그런 마상 노인을 빤히 보던 진화가 바늘을 내려놓았다.
“현오가 있는 곳은?”
진화의 질문에 마상 노인이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진화의 손이 다시 바늘로 향하자, 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 진골장 본부!”
마상 노인의 말에 진화가 눈썹을 까닥였다.
진골장의 본부는 며칠 전 마상 노인을 잡아 온 그곳이었다.
이미 적호단과 현무단이 그곳을 샅샅이 뒤졌었다.
“비, 비밀 통로가 있다,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마상 노인의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제 현오를 구하면서 확인해 볼 일이었다.
진화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상 노인이 다급하게 진화를 붙잡았다.
“시, 시간-! 시간이 어찌 되었나?”
“이틀 지났다.”
“……허어!”
겨우 이틀.
억겁처럼 괴로웠건만, 겨우 이틀이란 말인가.
마상 노인이 힘을 빠진 듯 허탈한 한숨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흐. 크흐흐흐흐!”
미친 것인가.
진화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마상 노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다 죽어 가는 듯하던 마상 노인이 고개를 번쩍 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리부리한 안광을 뿜으며 진화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내가 이겼구나!”
진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겼어! 이게 곧 역천대법이 시작될 거다. 그 전에 환마제께서 이 장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일 것이다-! 네가 늦었어!”
마상 노인이 악을 쓰듯 진화에게 소리쳤다.
“환마제 님의 진짜 무서움은 정신 지배다! 순박한 농민을 반란군으로 만든 것처럼, 선량한 백성을 살인자로, 악마로도 만드는 것이 그분이다! 이제 곧 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겠지. 선량한 모든 이들이 네놈들을 공격할 거다! 장안에, 살아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거다-!”
진화는 마상 노인이 소리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아직 역천대법은 하지 않았다는 거군. 아니, 환마제가 곧 역천대법을 하겠다는 말인가? 어쨌든 지금이 환마제가 가장 약할 때겠구나.”
진화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진화가 웃는 모습을 보며,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던 마상 노인이 그대로 멍하니 진화를 보았다.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
‘주인님이 가장 약할 때라고? ……이놈은 뭔가를 아는 건가?’
마상 노인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무엇보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진화가 ‘장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말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죽을 거다!”
마상 노인이 저주를 내리듯 말했다.
하지만 진화는 되레 그를 이상하게 보았다.
“그게 왜?”
흑요석처럼 맑고 투명한 검은 눈.
그건 정말로 어떤 감정도 없이 마상 노인을 보고 있었다.
“그, 그건…….”
진화의 물음에, 마상 노인이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맑은 눈에 비친 저를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고 모골이 송연해졌을 뿐이다.
* * *
진화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건, 마상 노인만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악----!”
안에서 들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으며, 적호단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적응되지 않는 소리.
안에 있는 인물을 생각하면 더 적응할 수 없었다.
“이상하지 않나? 어린 녀석이 저렇게 태연하게, 당연한 듯이 사람을 고문하는 게.”
적호단주의 말에, 남궁진혜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그를 보았다.
“이제 약관도 되지 않았어. 아니, 그 이전부터 저 녀석은 너무 자연스럽게 사람을 죽이고 살인을 받아들여.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저 녀석. 광마제의 제물이라고 했지?”
“다섯 살에 할아버지의 손에 구출되어 왔죠.”
“그때의 원한을 기억하기에, 너무 어리지 않아?”
적호단주의 말에, 남궁진혜가 피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웃겨서는 아니었던 듯, 이전보다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호단주를 쏘아보았다.
“나이는 상관없어요. 그때 우리가 본 진화는 산 채로 죽어 가고 있었어요.”
그때 진화의 모습은, 남궁세가 모든 식구들에게 가장 아픈 기억이었다.
“끔찍한 모습이었죠. 그런데 제일 끔찍한 건, 진화가 그걸 고스란히 기억한다는 거예요.”
진화가 가진 기억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남궁진혜는 그것만으로도 아픈지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 모습에 적호단주 또한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더욱더, 저게 정상인 것 같으냐? 다섯 살 때까지의 기억으로, 저렇게 누군가를 서슴없이 고문하는 게?”
귀천성의 악마들 중에 특별히 잔인한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어딘가 망가진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특별히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적호단주가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것인 듯했다.
하지만 남궁진혜는 오히려 적호단주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상이 뭔데요?”
“뭐?”
남궁진혜가 멍청한 얼굴로 되묻는 적호단주의 얼굴에 입꼬리를 말았다.
“웃기잖아요. 저도 그렇고 단주님도 그렇고, 우리 다들 ‘비정상’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라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과, 우리와 다르다고 진화에게 비정상이라고 하는 건가요?”
“…….”
남궁진혜의 말에 적호단주가 할 말을 잃었다.
남궁진혜도 적호단주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와 달리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어린 녀석이 벌써 이 지독한 전쟁에 익숙해진 눈을 하고 있어. 그 제물실이라는 곳에서 당한 것 외에, 전쟁이라곤 겪어 본 적 없는 녀석일 텐데. 마치 고목의 뿌리에서 어린 나무 줄기가 올라온 듯이, 얼굴만 말갛지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눈이야.”
“우리 가족은 진화가 겪은 고통, 경험을 나이나 횟수로 계산하지 않아요.”
“가족이라면 저 녀석의 인생을 걱정해야 하지 않나?”
“…….”
이번에는 남궁진혜가 아무 말 없이 적호단주를 뻔히 보았다.
그러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한결 편안해진 눈빛으로 전호단주를 보았다.
“진화가 가족들이나 남궁세가에 애착이 깊죠.”
진화의 문제라면 식구들도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을 이룬 세계가 작은 원이라면, 저 녀석은 중심이 비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적호단주는 남궁진혜가 진화의 문제점을 인정하길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남궁진혜가 하려는 건, 그런 인정이 아니었다.
“그런 걸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뭐?”
“태풍(颱風). 태풍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태풍의 중심, 태풍의 눈이죠. 우린 그거면 됩니다.”
남궁진혜가 적호단주를 향해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적호단주가 멍하니 남궁진혜의 웃는 모습을 보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정적을 깨며, 마치 마지막을 알리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오, 지금쯤이면 입을 열었겠어요.”
남궁진혜가 반가운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적호단주는 그때까지도 남궁진혜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를 아직도 남궁진혜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태풍의 눈이 가장 안전하다고? 그거면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남궁진화만 안전하면 주변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대체 무슨 놈의 집구석이……!’
“허어!”
적호단주가 황당하다는 듯 진화와 남궁진혜가 있을 집무실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걸 알지 못하는 듯했다.
* * *
새로운 노예들이 이곳으로 오고, 이틀이 지났다.
즉, 새로운 노예들을 죽여 다시 피를 채워야 하는 날이 된 것이다.
“으아아악--!”
“아악--!”
비명이 동굴 속을 울렸다.
철렁거리며 사슬이 요동치는 소리와 섞여 몹시 소란스러웠다.
왼팔에 붕대를 감은 사내, 비표의 지휘 아래 무사들이 노예들을 사슬에 거꾸로 매달고 목을 베고 있었다.
“호호호, 오늘이 마지막이로군.”
온몸에서 색기를 뿜고 있는 여인이 피를 쏟아 내는 노예들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감축드립니다, 주인님.”
비표가 여인을 향해 말했다.
환마제 여시는 분명히 ‘안’에 있었건만, 비표는 여인을 향해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여인도 당연한 듯 비표에게 하대를 했다.
“혼현마제가 거의 다 왔다는구나. 대신, 야희성녀, 그 귀찮은 여자도 함께.”
“야희성녀 말입니까?”
“월하회 놈들이 저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불평하는군. 호호호호.”
여인은 혼현마제가 불평하는 모습이 퍽 웃긴다며, 큰 소리로 웃기까지 했다.
혼현마제와 야희성녀의 이름을 편하게 들먹이는 모습이, 마치 그들과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비표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동굴 안쪽, 현오가 눈을 감은 채로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현오는 몸이 사슬에 감긴 채 환마제의 옆에서 자는 척까지 해야 하는 터라,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아니, 정신을 차린 걸 들키는 즉시 죽을 것이다.
“……으으…….”
현오가 필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그가 신음을 내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편안하게 자고 있다면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 환마제 여시의 악몽경에 당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천살지체인 현오의 악몽은, 소림의 불마대법 속이라.
환마제가 악몽경으로 불러들인 불마대법의 대오각성(大悟覺醒)이 되레 본능만 남아 있던 현오의 이성을 깨운 것이다.
“만년독수는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혼현마제가 도착하는 즉시, 역천대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돼--!”
비표의 말에 여인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이번 역천대법은 그 어떤 방해자도 있어선 안 돼! 야희성녀, 그 더러운 계집도, 월하회와 정의맹의 벌레들도 전부!”
방금까지 웃고 있던 여인은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역천대법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목소리에서마저 그녀의 분노와 걱정, 기대가 느껴지는 듯했다.
“역천대법을 치르는 칠 주야. 이제 때가 되었어. 이번에는 정말 어떤 방해꾼도 있어선 안 돼. 다 죽여야, 죽여야 안심이 돼. 이번에도 실패하면 안 된다고! 이젠 정말 끝이야!”
여인이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말했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불안에 떠는 모습에, 비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명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인이 중얼거리기를 그만두고, 비표를 불렀다.
“비표, 안 되겠어. 숨기는 걸로는 부족해.”
“예.”
표독스러운 얼굴.
하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건, 여인의 눈빛이라.
“전부 죽여 버려라.”
“…….”
여인이 비표를 향해 말했다.
여인의 눈에서 새하얀 연기가 타고 있는 듯했다.
“내일, 혼현마제가 도착할 거다. 내가 역천대법을 시행하는 동안, 너는 사혈객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전부 죽여 버려! 월하회든 정의맹이든, 거기서 절대 나오지 못하게!”
“존명.”
비표가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이번에는 결코 방해하도록 두지 않을 거야.”
여인과 환마제 여시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안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현오는…….
‘이제 진짜 어쩌지? 이러다가 진짜 꼼짝없이 죽겠네!’
“으으으…….”
딱 맞는 시점에 신음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