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구휼할 진(賑) 불행 화(禍) : 악몽에서 깨어나는 법(6)
현무단주의 집무실.
이제는 적호단주와 함께 쓰다가 진화가 마상 노인을 고문하는 고문실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정의맹 장안 본부에서 가장 중요한 방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곳에 지금 적호단주와 현무단주를 비롯해서 종남파와 중소 문파 장문들, 면족과 장족 부락 대표자들까지, 장안 무림의 대표들이 모두 모였다.
진화도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을 대표해서 함께 자리했다.
“비밀 통로라니…….”
현무단주가 표정을 굳혔다.
진골장의 정리를 주도한 곳이 현무단이라, 현무단주는 미리 비밀 통로를 알아내지 못한 데에 책임감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것에 대해 현무단주의 책임이라 말하는 이는 없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관으로 입구를 가리고, 다른 사업장과 이중, 삼중으로 연결시켜 놓은 것을 어떻게 찾았겠어, 인림보다 오래된 것을.”
적호단주가 현무단주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때, 진화가 끼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현오를 구하러 갈 사람들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놈들의 공격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진화는 현무단주의 위로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이긴 장안 무림 모두가 마찬가지라.
진화의 말에 화제는 금방 전환되었다.
“현오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곳의 방비가 쉽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누가 그걸 모릅니까?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된 거냐는 거지요!”
“그렇게 중요한 사람을 왜 미끼로 보낸 겁니까?”
많은 중소 문파 장문들이 정의맹의 작전을 책망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장안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쪽으로 전력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는 의도라.
“그동안의 실종에 환마제가 관여한 정황증거를 가지고 움직였던 겁니다. 최대한 환마제가 찾을 만한 조건에 맞추다 보니 현오가 참여하게 된 것이고요.”
“흐음, 그렇다면 작전을 성공이나 하든지…….”
적호단주의 말에도 몇몇 사람들이 구시렁거리듯 불만을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모두 결과론적인 것들뿐이었다.
세상 어느 임무도 위험부담 없이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잔소리를 붙이는 건, 책망이 아닌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현무단주와 달리, 적호단주는 그런 말을 얌전하게 들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하필, 장가 부락이 습격을 받아서 말입니다. 우리가 그쪽으로 전력을 빼지 않았다면 작전은 성공적이었겠죠.”
“흐음.”
“적호단주는 그게 무슨 뜻이오? 장가 부락을 괜히 구했다는 말이오?”
적호단주의 말에 한 사람이 대번에 버럭 소리를 높였다.
제가 거북한 소리를 하는 건 괜찮지만, 듣는 것은 싫은 모양이었다.
이기적이고 드센 사람들.
“우리 정의맹은 연맹 문파를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적호단주는 그들 하나하나를 노려보듯,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정치적인 말싸움이라면 정의맹 본부에서도 이골이 나도록 겪어 본 일이었다.
적호단주의 매서운 말에, 이제까지 기세가 등등하던 중소 문파 장문들이 슬며시 그의 눈을 피했다.
이제까지 현무단주를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오던 그들은, 현무단주와 다른 적호단주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허어, 이거 참.”
“대체 어찌하자는 것인지…….”
중소 문파 장문인들이 헛기침을 하며 현무단주를 흘깃거렸다.
그들은 이제라도 현무단주가 나서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제까지 그들이 어떤 식으로 지내 왔는지 알 만한 모습이었다.
‘운해의 유순한 성정에 기대어 지금껏 현무단에 전투를 미뤄 온 게지! 그러니 장가 부락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동안 지원 하나 오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적호단주가 중소 문파 장문인들을 싸늘한 눈길로 보았다.
적호단주는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 네놈들은 스스로 싸우지 않고 못 배길 것이다!’
많은 문파와 사람들이 모인 전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 주도권을 쥐고, 희생을 감수하거나 강요하면서 집단을 하나로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귀천성과의 전쟁은 당연히 정의맹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 일이었다.
“정의맹의 우선순위는 현오의 구출입니다.”
적호단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탕-!
“말도 안 되는 소리!”
중소 문파 장문인들이 탁자를 내리치며 흥분했다.
“당연히 우선은 장안이 되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요!”
“장안의 방비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도 않으시는 겁니까?”
그들은 정의맹이 그들을 버리기라도 한 듯 난리였다.
“장문인, 장문인께서도 뭐라 말 좀 해 보시지요!”
몇몇 사람들이 종남파 장문인을 재촉했다.
하지만 종남파 장문인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죄로다, 여죄로다!’
이제까지 장안 무림의 여론을 움직이던 이가 바로 죽은 일장로였으니, 장안 무림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사람 또한 죽은 일장로라.
종남파 장문인은 죽은 일장로의 죄가 여기까지 이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놈들이 장안을 어떤 방식으로 공략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붙잡혀 있는 현오를 어찌할지는 확실하지요.”
“마상 노인, 그자가 장담할 정도의 공격이 아닙니까! 분명히 규모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총력을 기울여 대비해야만 합니다!”
적호단주의 말 한마디에, 중소 문파 사람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정의맹 적호단주로서, 우리는 현오의 구출 작전에 나설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낸 정보를 모두 전달했으니, 각 문파들이 나서서 총력을 기울이면 되겠군요.”
“뭐, 그런…… 우린 다 죽어도 좋단 말이오?”
“저, 정식으로 정의맹에 항의하겠소! 우리가 무너지면, 정의맹이라도 무사할 성싶소?”
적호단주는 배알이 뒤틀려서 장안 무림의 모든 요구를 묵살했고, 장안 무림 사람들은 곧 죽을 사람들처럼 노발대발했다.
‘아, 선배님,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현무단주는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진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드드드득.
의자가 밀리는 이질적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진화를 향했다.
“여기 더 있다간 시간만 지체될 듯하군요. 정의무학관 관도생 전원은 지금 당장 현오를 구하러 갈 겁니다.”
진화는 제게 모인 시선을 향해 통보하듯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철없이 소리인가!”
“관도생들끼리 어딜 간다고! 지금 중요한 문제를 의논 중인 걸 모르오?”
“남궁 공자는 때와 장소를 가려 자중하시오.”
중소 문파 장문인들이 진화를 철없는 애송이 보듯 타일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은 하나같이 절정을 넘은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최근까지 성 근처의 귀천성 휘하 문파를 전멸시키며 실력을 증명한 바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중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관도생들의 이탈을 바라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의 차이.
그 앞에서 진화의 대응은 적호단주와 달랐다.
사아아아아-----.
온몸이 서늘해지는 한기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옭아맸다.
그들은 순식간에 이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챘다.
“공자, 이게 무슨 짓이오!”
“왜요?”
누군가의 외침에 진화가 태연하게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듯 순진한 얼굴.
하지만 사람들을 압박하던 한기가 이제는 등골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강해졌다.
“관도생들이 여러분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나요?”
“뭐, 뭐?”
진화의 물음에 장안 무림 사람들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허를 찔린 사람들처럼 절절맸다.
그들도 자신들의 주장이 뻔뻔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의맹은……!”
“정의맹은 정도 무림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정파 무인들의 연맹이죠. 그러니 각자, 때와 장소에 맞게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화가 서늘한 눈빛으로 물으며, 더 많은 음기를 자극했다.
“큿!”
“적호단주는 가만히 계실 작정입니까?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우리를 압박한다고 될 일이오? 남궁 공자를 막으시오!”
정강이뼈가 시릴 정도의 압박을 견디느라, 곳곳에서 신음이 났다.
몇몇 이들은 악을 쓰듯 적호단주를 찾았다.
하지만 진화에겐 그들의 말이야말로 무례했다.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의 신변과 관련된 사안은 제 결정과 책임하에 있고, 누구도 그걸 강요하거나 제지할 수 없습니다. 회의는, 필요한 분들이나 많이 하십시오. 계속 반대를 하시려거든, 저를 말려 보시든가요.”
진화가 툭 던지듯 말하고 완전히 회의석을 벗어났다.
남궁이 아닌 이들을 위해 싸우는 건 지긋지긋했다.
진화는 저들이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해 와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적호단주와 현무단주는 당당하게 자리를 뜨는 진화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능력이 되면 날 멈춰 보라지.
자신감이 온몸에 드러났다.
“정말 이대로 나가려고?”
“……문제 있습니까? 이곳보다 대비할 곳이 많은 남궁세가에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회의를 진행하진 않습니다.”
진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진화는 적호단주가 먼저 약속한 지원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평화적으로 회의가 끝이 나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들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장안 무림이 귀천성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 아니라면, 다른 것엔 관심이 없었으니 말이다.
적호단주는 말간 얼굴을 한 진화를 보며, 어쩐지 남궁진혜가 떠올랐다.
“단주님도 그냥 저처럼 하십시오.”
주도권 싸움은 심력 소비가 크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진화는 적호단주에게 짧은 충고를 남기고 회의장을 나갔다.
‘너처럼 하라고?’
적호단주가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장안 무림 사람들이 수치심과 분노를 드러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장안 무림 무인들을 움직일 지휘권만 가져오려는 생각이었는데, 설득이 더 어렵게 되었군.’
적호단주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회의장에 기운을 풀었다.
잠시 후.
회의가 끝나고 모두 밖을 나왔다.
회의장을 나가는 이들의 면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하나같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마치…….
“한증막에서 탈출하는 사람들 같네.”
남궁진혜가 바쁘게 나가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회의가 이렇게 오래 걸려요?”
남궁진혜의 말에 적호단주와 현무단주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지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들은, 약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남궁은 회의를 얼마나 짧게 하는데?”
적호단주가 약간 가시가 돋친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남궁진혜는 적호단주의 말투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숙부님이 시원하게 칼춤 한번 추고 나면 금방 끝나죠!”
남궁진혜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숙부님이면, 남궁진화의…….”
“아버지죠, 우리 진화랑은 전혀 안 닮았지만요.”
개뿔.
남궁진혜의 대답에 적호단주는 입을 다물었다.
“……검을 안 든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현무단주가 지친 얼굴로 허탈한 듯 웃었다.
* * *
잿빛 무복을 입은 일련의 무인들이 숲길을 빼곡하게 에워쌌다.
고요한 정적 사이로,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뒤.
조용한 숲길에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스스스스슷--!
바람과 함께 신호가 전달되고, 수풀이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마차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들의 한복판으로 왔다.
“지금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검을 든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를 멈춰라-!”
무사들이 말과 마부, 마차의 창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쉐에에에엑---!
“크아아아악!”
“아악!”
마차의 근처에 가기도 전에, 제일 먼저 뛰어들었던 무사들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검은 피풍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있던 마부가 다시 팔을 휘둘렀다.
쉐에에에엑--!
파팍-!
마부의 소매에서 나온 반짝이는 실선이 둥근 회오리를 그릴 때마다, 무사들의 목과 사지가 하나씩 떨어졌다.
“크아아악!”
“이놈---!”
잿빛 무복을 입은 무인 중 하나가 마부의 실선을 향해 검기를 쏘았다.
채----앵!
탕! 탕! 탕! 탕!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것과 함께, 마부의 부서진 실이 근처 무사들의 몸에 박혀 들었다.
푹! 푹! 푹!
“으억!”
“현홍사다! 모두 물러서라!”
검기를 날린 무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당주님!”
휘이이익-!
챙! 챙!
당주라 불린 잿빛 무복의 무인은, 유려한 몸놀림으로 마부의 현홍사를 피했다.
파라라라락-!
월하회 표석당주 등소위의 검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마부의 소매를 파고들었다.
“엇!”
피풍의 안에서 앳된 음성이 당황한 듯 탄성을 내었다.
동시에 표석당주의 검을 피하느라 말의 고삐를 놓쳤다.
히이이이잉---!
말이 놀란 듯 날뛰었다.
마부가 허겁지겁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당주님--!”
물러섰던 무인들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마부석으로 다가갔던 표석당주가 그대로 땅에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이마에 찍힌 붉은 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히이이이잉---!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흥분한 말이 표석당주의 시체를 짓밟았다.
“당주님! 이놈---!”
월하회의 무사들이 검을 들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에 뛰어가지 못했다.
쉐---------엑!
풀숲에 칼날 같은 바람이 지나고, 물러서 있던 무사들의 몸이 허물어졌다.
쩌어어억.
나무가 쓰러진 것과 동시에.
투둑. 툭. 툭.
잘려 나간 수풀과 함께 허리, 다리, 가슴, 얼굴…… 어디 할 것 없이 양단된 이들의 몸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흩어졌다.
숲이 겁에 질린 듯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섬뜩한 정적 속에, 마부의 목소리만 울렸다.
“워- 워---!”
푸르르르륵.
마부는 겨우 말을 진정시켰다.
말을 진정시키느라 피풍의가 살짝 흘러내리며, 십사오 세 정도의 소년이 잔뜩 상기된 얼굴을 드러냈다.
소년은 민망한 듯 웃으며, 마차 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말을 모는 것이 처음이라…….”
소년의 사과에, 마차 안에서 중년 남성의 자애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허! 괜찮다. 처음이지 않느냐. 그건 그렇고, 월하회 녀석들이 제물을 움직인다는 것만 알아내고, 내가 이 길을 지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구나. 야희성녀는 내가 흘린 소문을 듣고 저쪽으로 움직인 모양이야. 이참에 얼른 도망하자꾸나. 허허허허!”
“하하, 예. 이번에는 제대로 몰아 보겠습니다.”
혼현마제 제갈무진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의 제자 수오도 유쾌하게 웃으며 고삐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