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맛 좋은 음식 진(珍) 따를 화(化) :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1)
장안 본부로 하나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월하회와 한림회에 섭외된 풍수가들과 학사들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정의맹 진법가들은 출발하지도 않았다.
“새 사람이 몰려오고 있군요.”
“주루와 객잔을 다시 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적호단주의 말속에 가시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시국에 술과 향락을 팔 생각 하느냐는 책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월하회주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사람들이 활기를 찾겠지요. 당장 먹고살 일도 필요할 것입니다.”
월하회주의 말에 적호단주가 놀란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월하회주는 적호단주가 아닌 힘을 내 일하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활기를 찾으면, 슬픔도 차차 뒤로 밀려나겠지요. 그리하면 언젠가 다시 웃을 날도 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무인과 상인의 차이였을까.
복수를 위해 검을 드는 무인과 달리, 백성들은 일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슬픔을 극복했다.
언뜻 힘없는 자들이 전쟁을 감내하고 견디는 법같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건물을 올리고 다음에 먹을 곡식의 씨를 뿌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손이 터져라 검을 휘두르는 무인들보다 약해 보인다 할 수 있을까.
적호단주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런 의미로, 언제 떠날 테냐?”
“…….”
진화는 한동안 적호단주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저 사람들 보이지? 자리가 없어. 정의맹 진법가들 오기 전에, 어서 별채 비워라.”
“…….”
진화는 진법가들이 출발할 때까지 복귀를 미뤘다.
제갈지현이 가는 길에 뒤통수를 날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호위라니.
하지만 결국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고, 진화와 일행은 짐을 싸서 길을 나서야 했다.
* * *
무림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정도, 사도, 마도, 그리고 흑도.
물론 대부분 무림인들은 흑도를 무시했고, 특히 정도인들에게 흑도는 ‘도’가 아니다.
그들은 무림인이라기엔 생각과 행동이 얕았고, 도를 논하기엔 신념과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흑도도 무림의 일 도(一道)를 담당하는 이들이라.
그들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누구든 될 수 있었다.
“으아아악-!”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포구.
어느 한 객잔의 앞에서 웬 비명이 울렸다.
진화가 제 주머니를 노리는 좀도둑의 손목을 꺾어 버린 것이다.
“아아악! 내 손! 내 손-!”
좀도둑이 비틀어진 손가락을 붙잡고 고함을 질렀다.
도둑은 진화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주위에 소년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마도 한 패거리일 것이라.
세상이 하도 흉흉하니, 나이 어린 도둑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바로 옆까지 저런 녀석의 접근을 허용하다니, 내가 만두에 정신이 팔린 건가.’
진화가 제 앞에서 김을 모락모락 풍기는 만두와 눈물을 매단 채 저를 노려보는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벌써 제 주머니를 노리는 손을 꺾어 버린 것도 세 번째.
‘확실히, 이전 생이었다면 단숨에 팔을 잘라 버렸을 텐데. 나답지 않게 살기 없이 접근하는 이들에게 무방비했군.’
진화가 스스로를 통렬하게 반성했다.
그동안 현오가 만두를 한 입 베어 물고 다가왔다.
“손 속이 너무 과하오. 손이 저치들 밥벌이인데, 그 손을 망가뜨리면 쓰나. 부디 저 인정머리 없는 시주에게도 자비를 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환마제에게 잡혀 며칠 굶은 이후로, 현오는 무섭도록 식탐을 발휘 중이었다.
이번엔 안이 촉촉한 육즙으로 가득한 고기만두였다.
소년이 고기만두와 맨질맨질한 머리의 현오를 번갈아 보았다.
결코 좋은 생각을 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쓰불, 재수가 없으려니까!”
아픔에 땀을 뻘뻘 흘리던 소년이 바닥에 침을 택- 뱉으며 말했다.
“이 동네서 내 손을 이렇게 만들고 너희가 괜찮을 것 같아?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소년은 매섭게 진화와 현오를 노려보며 인파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패거리로 보이던 이들이 금세 소년의 모습을 가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남궁구가 소년을 향해 감탄했다.
“거참, 앞으로 전형적인 흑도 악당이 될 유망주로군.”
“죽이는 게 나을까?”
남궁교명이 소년이 사라진 곳을 향해 눈을 빛냈다.
“넌 그렇게 생긴 얼굴로 살벌한 말 좀 하지 마!”
“내가 어떻게 ‘그렇게’ 생겼다는 거지?”
“네가 옆에 있었으면 저런 놈들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할 만큼, ‘그렇게’?”
남궁교명과 남궁구가 금세 투덕거렸다.
이제는 둘의 그런 모습이 제법 익숙했다.
애초에 정의무학관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최대한 노닥거리며 가는 길.
참 한가로운 오후 분위기였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따지고 보면 쟨 양자잖아. 땡중이야 그렇다 쳐도, 여기 명문 세가 사람들이 수두룩한테, 쟤한테만 귀티가 느껴지나? 왜 쟤한테만 자꾸 도둑이 붙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 같았지만, 다분히 진화를 공격하는 듯한 말투였다.
“당 소저는 말을 좀 삼가시오.”
“따지고 보면 당 소저도 ‘그렇게’ 생긴 부류다.”
“씨-이!”
당혜군이 진화의 역성을 드는 팽가 형제를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팽가 형제가 양손을 들고 물러섰다.
그러자 나하연이 그녀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이해해라. 혜군이 오늘따라 예민한 것이 수상쩍겠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지나는 곳이 진가현이기 때문이다. 혜군이 평소보다 여성성에 자신감이 떨어지는 장소지. 그래서 남궁 공자에게 한층 더 질투심을 느끼…….”
“말하지 마-!”
당혜군이 급하게 나하연이 입을 막는 시도를 했다.
“아니,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수상할 것도 없었는데.”
“진가현? 뒷이야기가 흥미로우니 계속해라.”
팽가 형제가 거대한 팔을 뻗어 당혜군을 막았다.
당혜군이 이곳에 와서 유독 진화에게 시비를 걸듯 예민하게 군 것도 사실이라.
진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흥미로운 얼굴로 나하연을 보았다.
“진가현. 혜군이 어릴 적 데릴사위를 청했다가 통쾌하게 차인, 아픈 과거가 있는 곳이다.”
“아아악! 미쳤어? 그런 걸 왜 말해!”
당혜군이 귀까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한 번 차였다고 물러서는 건, 참된 여자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적어도 열 번은 차이고도 도전할 수 있어야 하지.”
“넌 열 번도 넘게 차였잖아!”
“정확하게 남궁세가에 열세 번 차였지만, 본인에게는 두 번밖에 안 차였다.”
“퍽이나 자랑스럽냐!”
나하연이 당당하게 하는 말에 당혜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버럭 했다.
언제 그렇게나 본가에 혼인의향서인지 뭔지를 보낸 거지.
이제야 알게 된 진화도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런 와중에, 진화는 또다시 살기 없이 접근하는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이번에는 죽일까?’
진화가 순식간에 뒤를 돌았다.
“저기…… 혹시, 당 소저?”
휙!
진화가 수기를 담아 뻗으려던 손을 황급히 내렸다.
이번에 접근한 사람은, 진화를 노린 것이 아닌 당혜군의 지인인 듯했다.
“넌? 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당혜군은 청년과 마주하고, 곧 터져 나갈 듯 붉어진 얼굴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혜군과 정반대로 아래로 축 처진 눈.
큰 키에 마른 체구, 순박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설마 저 사내가 당 소저를 찬, 그 사람?”
“그렇네.”
팽수의 질문에 나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련의 여주라기엔 당 소저가 너무 사납지 않나?”
“하필 여기서 만나다니…… 역시 사람은 평소에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니까. 업보로다.”
거기에 남궁구와 현오가 한마디씩을 더 보탰다.
그들의 대화는 당혜군과 청년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어갔다.
“아, 하하, 저는 전가장의 둘째, 전보현이라고 합니다.”
청년이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진화와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순박한 인상에 근육이라고는 없을 듯한 마른 체구.
하지만 진화에게 내민 손에 꽉 들어찬 굳은살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 * *
한편.
무너진 인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장원.
제법 넓은 장원에는 독한 약 향이 풍겨 나올 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서 지독한 약 향의 출처인 듯한 탕약기를 들고 한 소년이 나왔다.
절뚝절뚝.
불편한 걸음으로 나온 소년은, 무너지던 인림에서 탈출한 수오였다.
그는 다리가 아닌 복부가 불편한 듯 한 손으로 옆구리를 받쳤다.
게다가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한 것인지 부쩍 해쓱한 행색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끄으으으으. 으아아아악!”
그때 방 안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놀란 수오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 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가 가득했다.
게다가 탕약 냄새를 가릴 정도로 달큰한 향기가 정신을 어지럽게 했는데, 방 안 곳곳에 태워 놓은 앵초의 냄새인 듯했다.
스승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수오가 피워 놓은 것이었다.
“끄으으으으……!”
혼현마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감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진화의 현천섬뢰를 온전히 다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승님! 스승님, 정신이 드십니까?”
수오가 곁으로 달려가 혼현마제의 손을 잡았다.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도록 붕대에 칭칭 감겨 있는 손이지만, 그것도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헉! 헉!”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던 혼현마제가 눈을 떴다.
“스승님!”
“헉. 헉…….”
붕대가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 혼현마제는,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한쪽 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정신이 드셨습니까?”
“……내가 ……당한 건가?”
혼현마제는 당장 수오의 물음보다 망가진 제 몸이 먼저 눈에 들어온 듯했다.
“허어!”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뒤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솟아올랐다.
‘내가 당한 것인가? 그 애송이에게! 내가, 이 혼현이 고작 제물 따위에게!’
“까드드득.”
곱씹고 곱씹을수록 치솟는 분노에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의 그건, 남궁진화가 맞느냐?”
“……송구합니다. 저는 번쩍이는 섬광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혼현마제의 물음에 수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허허허!”
이번에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눈이 부신 섬광이라면, 제가 마지막에 본 것과 동일했다.
혼현마제는 마지막에 아찔할 정도로 뜨거운 그것을 피해 겨우 몸을 날릴 수 있었다.
“남궁진화라…….”
벌써 두 번.
환마제는 죽임을 당했고, 자신의 일이 어그러진 것도 벌써 두 번째라.
“유, 육체가 많이 망가지셨습니다. 일단 몸부터 추스르시지요.”
수오가 탕약을 내밀었다.
혼현마제는 수오가 내민 탕약을 가만히 바라보다, 얌전하게 그것을 마셨다.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역했지만, 맛을 보니 하나하나 농과 염을 방지하는 약재들이라.
혼현마제가 한쪽 팔이 있어야 할 곳이 허전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망가졌군.”
“……스승님.”
“되었다. 처음부터 약해 빠진 육체였다. 이참에 시간을 두고 제대로 연마하면 된다. 그보다…… 그 혼돈지체의 이름이 남궁진화라 했던가.”
혼현마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광마제, 그 미친 늙은이가 섬뜩한 괴물을 만들었구나. 단순히 경지를 밟은 것이 아니라, 경지 너머 천상을 밟은 놈이야! 반드시 걸림돌이 될 위인이로다. 으드득! 광마제의 손에 넘기기도 위험한 놈이 되었구나.”
혼현마제의 눈이 붉게 빛났다.
“수오야, 소리마제에게 연통을 보내거라.”
“뭐라 할까요?”
“광마제가 깨어나기 전에, 놈을 완전히 없애라 전해.”
혼현마제의 명에 수오의 눈이 커졌다.
제왕검에게 당한 육체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광마제.
진화는 그런 광마제의 최종 제물이었다.
마제들이 서로의 최종 제물을 건드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저…… 스승님, 최종 제물을 없애도 될는지요?”
“아깝지만 그건 그냥 두기에 너무 위험해. 차라리 일찍 죽여서, 새로운 제물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혼현마제의 말에 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화에 대한 공포라면, 수오의 옆구리에도 남아 있지 않았던가.
“어차피 필요조건일 뿐이다. 육신을 빼앗길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을 것인지. 그건 모두 제 손에 달린 일이지.”
혼현마제가 야릇한 미소를 띠고 방 한구석에 있는 어두운 형체를 보았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형체가 고개를 들었다.
혼현마제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순 없지만, 작은 형체는 본능적으로 제가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느꼈다.
“조건은 모두 동일하다. 어떠냐, 네가 환마제가 되어 볼 테냐?”
혼현마제의 물음에 구석에 있던 형체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현마제가 붉은 눈을 빛내며 요요하게 미소를 지었다.
붕대가 감기지 않은 그의 눈이, 제갈무진의 눈이었다가 곧 사악한 노인의 그것이 되었다.
혼현마제의 명을 받은 수오가 장원으로 나왔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는 피리를 힘껏 불었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이내 높은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내려왔다.
“이것을 주인에게 전해 주렴.”
수오가 고깃조각을 새에게 먹이며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엌 한쪽, 문이 닫힌 광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새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다.
“워, 워. 알았어. 조금 더 떼어 줄 테니, 힘내서 가야 한다?”
수오가 웃으면서 광문을 열었다.
그곳엔, 본래 이 장원에 있었을 사람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수오가 그중 하나의 살점을 떼어 새에게 먹이고, 광문을 닫았다.
“낙양까지 한 번에 날아가렴.”
파다다다다닥---!
새가 힘껏 날아올랐다.
낙양은 황제가 있는 가장 번창한 도시라.
소리마제는 그곳에서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대반격에도 무사히 숨어든 이들 중 하나이니, 무리 없이 남궁진화를 죽일 수 있으리라.
“그 괴물, 하루라도 빨리 없어져 버려라. 후후후.”
수오가 쑤셔 오는 옆구리를 잡으며,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파리한 안색에 두 눈이 붉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