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맛 좋은 음식 진(珍) 따를 화(化) :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은 빠지지 않은 좋은 이야깃거리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돌발적인 변화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깊이 빠져드는 법이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만큼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 이별 이야기이다.
돌발적인 변화는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나아가지 않고, 점점 쌓여 가는 이유들이 이별을 만들어 낸다.
한 번도 사랑에 빠진 적 없는 사람들도 드물지만, 사랑을 해 본 사람들 중 이별해 보지 않은 사람은 더 드물다.
다만 이별을 겪은 사람들의 감정은 공통적이지 않다.
이별은 사랑과 달리, 극단적 분노와 증오를 남기거나 혹은 짙은 미련을 남긴다.
저자에 나도는 남녀상열지사 중에, 불륜녀와 남편에게 복수하는 현모양처의 변신이나 상단주의 아들 대신 행차 나온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혹은 오해로 헤어진 연인이 다시 사랑을 꽃피우는 이야기가 인기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별한 자들의 공통적인 감정이 있다면, 헤어진 연인에게 ‘과거와 다르게 완전히 잘나가는 나’를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점이랄까.
“여기, 패황권문의 나하연은 알 테고, 저쪽은 소림 마라승의 제자인 현오, 그 옆엔 남궁세가의 직계인 창천화룡 남궁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 그리고 이쪽엔 하북팽가 직계인 팽수, 팽신 형제야.”
당혜군이 전보현에게 일행을 소개했다.
집안과 스승, 별호까지 품격 있게 소개하는 것이, 어쩐지 평소 일행을 향한 그녀의 언행과 매우 달랐다.
평소 당혜군은 일행을 향해 ‘미친년, 뚱뚱땡중, 양자 놈과 그 떨거지, 힘만 센 쌍둥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우리도 입이 있는데.
-척 보기에도, 우리가 입을 열까 봐 선수를 친 것 같네만.
진화 일행은 단번에 당혜군의 의도를 눈치챘다.
“모두 정의무학관에서 수학 중인 동기들이야. 종남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이지.”
당혜군이 전보현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는 처음의 당황스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전보현이 묻지도 않은 근황까지 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전보현의 반응은 당혜군이 원하는 대로였다.
“아,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군요.”
정의무학관은 중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도 무림 최고의 출세가도라.
중소 문파 출신들은 물론이고 명문 대파에서도 자식이나 제자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 따로 선발 비무 대회용 무사부를 구할 정도였다.
입관만 하면 정의맹 무단에 들거나 요직으로 들 수 있으니, 관직에 나가지 않는 이상 이만한 출세도 없었다.
심지어 진화 일행은 면면이 중원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문 대파 출신이지 않은가.
전보현의 얼굴에는 진화 일행을 향한 놀람과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혜군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자기가 밝혀 놓고 저런 반응은 뭐지?
-당최 어느 장단에 춤 춰야 할지 모르겠군.
남궁구와 현오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렇게 만난 거, 가, 같이 밥이나 먹을래?”
“아, 저는…….”
“괜찮아! 부담 갖지 마! 우리도 대충 때우려고 하는 거니까.”
당혜군이 어색한 얼굴로 전보현에게 식사를 권했다.
진화 일행은 전혀 식사를 할 예정이 아니었던지라,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왜! 어차피 처먹을 거, 그냥 들어가!’
방금 전까지 현오의 먹성을 구박하던 그녀는, 입 모양으로 협박까지 하며 일행을 만두가게로 밀어 넣었다.
-질척거리는 쪽이 당 소저였군.
-헤어지기 아쉬운 모양이니, 협조해 주자고.
현오와 진화가 순순히 만두가게로 들어가고, 그 뒤를 나하연과 팽가 형제가 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구과 남궁교명이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 만두 먹기 싫은데 말이야.
-이건 빚으로 달아 두지.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상대의 약점을 쥘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혜군이 한숨을 쉬며, 전보현과 따로 자리를 잡았다.
* * *
“저기…… 잘 지냈어?”
“아예, 전, 늘…….”
단둘이서만 얼굴을 마주하자, 생각 이상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지냅니다.”
“어머니 건강은 어떠셔?”
“늘…… 그렇죠.”
“아, 그래?”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전보현의 대답에서, 당혜군은 그의 사정이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당혜군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헤어졌던 이유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무얼 기대했던 것일까.
안타깝게 헤어진 연인의 운명 같은 재회?
‘바보 같은 년.’
당혜군은 이제야 이전보다 더 파리한 전보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 밑의 검은 그림자도 짙어지고, 이전보다 더 말랐다.
봇짐에는 약재와 서책이 가득했다.
“어허! 난 죽을 뻔하지 않았나! 그런 내게 만두 좀 양보하면 어디 덧나나?”
“안 죽었잖아.”
“이런 사-바 세계를 안 넘어가서 유감이라는 건가?”
현오와 진화가 하나 남은 만두로 붙었다.
남궁교명이 얼굴을 가리고 새 만두를 주문하고 있었다.
“…….”
“……사실 저건 만두 안 먹으면 죽는 병이 있는 땡중이야. 그 옆엔, 양자 출신이라 식탐이 좀 있어.”
망할 새끼들.
당혜군은 소리 내지 않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저를 버린 과거 연인 앞에 내보이기에 참으로 창피한 놈들이 아닌가.
그나마 멀쩡한 허우대만 보였을 때 헤어지지 않은 제 판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렸다.
“없다니까 왜 그래요!”
“아, 그냥 한번 둘러만 본다니까.”
“귀찮게 왜 이래? 아줌마야말로, 먼저 터지고 싶어?”
“아악!”
만두가게 주인이 밀쳐진 가운데, 딱 보기에도 저자의 왈패처럼 보이는 이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왈패들의 수가 십수 명은 넘어 보였다.
“아, 쓰불, 우리 애를 건드린 놈들이 여기로 들어간 걸 본 사람이 있다니까.”
비단으로 된 도포를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살에 걸치고만 있던 남자가 제일 앞에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사내는 색색가지 실로 긴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린 동시에, 화려한 머리 장신구로 얼굴 한쪽의 흉악한 문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와 귀, 눈썹을 뚫은 장신구가 험악한 외양을 더 괴기스럽게 만들었다.
사내가 뱁새 같은 눈으로 가게 안을 샅샅이 훑자, 안에 있던 손님들이 그자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뒤에서 나온 어린 소년 하나가, 사내에게 수군거렸다.
“포사 형님, 저기.”
소년은 아까 진화에게 손을 꺾인 이였다.
복수를 위해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소년은 붕대를 감은 손으로 진화 일행을 가리켰다.
포사라 불린 사내가 진화 일행을 보았다.
“오오, 깔쌈한데? 안 알려 줘도 눈에 딱 띈다.”
진화를 본 포사라는 사내가 눈을 번쩍 뜨며 히죽거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이들도 킬킬대며 그를 거들었다.
“흐흐흐흐! 소문이가 물건은 기가 막힌 걸 골랐네요.”
“멀리서 봐도 후광이 나네.”
“그냥 잡아서 팔면 값이 더 나오겠는데요.”
왈패들의 말에 당혜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화 일행 또한 왈패들의 등장부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들에게 검을 뽑을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다가오면 누군가의 사지를 부러뜨리든가, 깔끔하게 정체를 밝히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부나방들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눈이 먼 듯.
왈패들은 앞에 있는 것이 촛불인지, 산불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여어, 이게 누구야?”
타악-!
왈패 중 하나가 습관처럼 전보현의 뒤통수를 때리고, 당혜군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전가장 약팔이 아냐? 네가 여기서 여자를 만나?”
“하, 병신 새끼! 지도 남자라고. 클클클!”
전보현을 향한 일방적인 조롱에, 당혜군이 기가 막힌 듯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이야, 가까이서 보니 이 여자도 인물이 괜찮네. 이봐, 이런 병신 놔두고, 나는 어때?”
왈패의 희롱이 결국 선을 넘어 당혜군에게 닿았다.
“……허!”
“다, 당 소저.”
당혜군이 참았던 숨을 토하고, 전보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동시에 당혜군이 손을 휘둘렀다.
퍼---억!
“억!”
목울대를 맞은 사내가 신음을 내며 물러섰다.
빈 공간으로 몸을 일으킨 당혜군이, 정확하게 사내의 천궁과 백회, 인중을 때렸다.
퍽! 퍽! 퍽!
사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당혜군의 손에 목이 잡혔다.
“커헉! 무슨, 이 미친……!”
말은 나오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사내가 작은 당혜군의 손에 꼼짝도 못 하고 아등바등했다.
“뭐야!”
“이런 미친년이! 그 손 놓지 못해?”
진화 일행을 향해 가던 왈패들이 그제야 당혜군에게 눈을 돌렸다.
쉐에에엑---!
당혜군이 왈패의 목을 쥔 채, 제게 달려드는 이들의 얼굴에 은화대침을 날렸다.
퍽버퍽! 퍽!
살가죽을 뚫는 소리라기엔 너무 큰 소리와 함께, 당혜군에게 덤비려던 왈패들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들은 사지가 마비된 듯 움직이지 못하고, 또르르 눈알만 굴려서 제 얼굴에 박힌 대침을 확인했다.
“으으, 으…….”
왈패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신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 모습에, 당혜군 쪽으로 가던 왈패들이 그대로 멈춰 섰다.
“하아! 이건 또 뭐야?”
왈패들 사이로, 포사라는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뭐야, 계집. 꼴에 무림인이야?”
다른 왈패들과 달리, 포사라는 사내는 당혜군의 손 속에 전혀 겁을 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뱁새같이 작고 가는 눈으로 당혜군을 샅샅이 살폈다.
당혜군은 저를 훑듯이 보는 사내와 그 뒤의 왈패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감히 저자의 쓰레기 따위가 저를 향해 저런 눈빛을 하다니, 그동안 독심화의 독기가 유해지긴 했나 보다.
“어중간하게 도와주면 네가 더 괴롭겠지?”
당혜군이 전보현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당 소저…….”
“걱정 마. 뒤탈 없이 전부 죽여 주고 갈 테니.”
전보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혜군은 손에 쥐고 있던 왈패의 목을 가뿐하게 비틀었다.
으드득.
당혜군의 손에 목이 잡혀 있던 왈패가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바닥에서 몸을 비틀었다.
당혜군이 열 손가락 사이에 은화대침을 꺼내며, 겁을 먹은 듯 굳어 있는 왈패들 앞으로 나섰다.
“네놈들 손으로 손목을 비튼 다음,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려 빌어. 쓰레기 같은 목숨, 제발 살려 달라고.”
당혜군의 말에 포사라 불린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하하! 계집, 말하는 본새가 예사롭지 않네? 어디, 한가락하는 계집인가 봐?”
사내는 흥미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 당혜군을 핥듯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 순간, 은빛 무언가가 날아와 그의 혓바닥에 박혔다.
푸욱.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죽이기 전에, 빨리 빌어라, 쓰레기.”
당혜군이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독심화 당혜군.
적에 대해 자비가 없고, 손 속이 악랄하기 그지없다 하여 붙여진 별호였다.
하지만 포사라는 사내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손으로 혓바닥과 얼굴에 박힌 은화대침을 뽑아 거기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간이 크네. 무림인인가 봐?”
뱁새 같은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당혜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천당문의 당혜군이다.”
“호오, 그래? 이거, 생각지도 않은 거물이네.”
당혜군이 제 가문과 이름을 말하자, 사내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능글맞은 표정으로 싱글거렸다.
“그런데 어쩌나? 내 뒤에도 거물은 있어. 이 몸의 뒤에는 남궁세가가 있거든. 천하제일 남궁세가.”
사내의 말에 당혜군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이의 입에서 나온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라.
“남궁……이라고?”
당혜군의 반응에, 사내가 당당하다 못해 오만한 태도로 웃었다.
“그래, 너도 들어 봤지? 집안끼리 문제로 확산되기 전에 네가 사과하는 게 어때?”
들어만 봤다 뿐인가.
당혜군은 지금, 그 ‘남궁세가’가 사내의 뒤에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엔, 남의 일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이 악당 같은 얼굴로 일어서서 웃고 있었다.
당혜군의 자리에서 난 소란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당혜군과 왈패들을 살피며 말했다.
“음, 어쩌지?”
“가서 도와야 하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일어날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멋진 모습 보이도록 놔둬야 하는 것 아닌가?”
보통은 그 반대지만, 아무도 나하연에게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저 앞에 있는 자는 좀 위험해 보이는군.”
현오는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그때였다.
앞에 있던 자의 입에서 ‘남궁세가’의 이름이 나온 것은.
“역시…… 위험한 자였군.”
현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팽수가 입을 열었다.
“포사, 어디서 들어 봤나 했더니, 사람을 죽이는 늑대 포사로군.”
“식인 늑대?”
“하남에서 강도, 방화, 교살, 독살……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헤치고 재물을 탐하던 사파 고수로 악명이 자자했지. 나중에 악행이 점점 수위를 넘어 사패천의 눈 밖에 나서 축출당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자가 어떻게 남궁세가의 이름을 들먹이지?”
생각지도 않은 거물이라.
팽수의 말에 놀라는 듯하던 일행의 눈이 자연스럽게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을 향했다.
마지막 만두를 입에 넣은 진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만두보다 못한 버러지가 감히 무얼 입에 담았는지, 주제를 물어야겠군.”
진화가 눈빛을 반짝이며 강렬한 존재감을 뿜었다.
일행은 그것이 살기라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