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생긴 그대로 진(眞) 근심 화(禍) : 과거를 쫓는 사람들(2)
자원궁 대전.
잔치로 한창 즐거운 때였건만, 예기치 못한 사건에 대소 신료들이 무거운 얼굴로 회의에 참석했다.
왕비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들이 굳어 있었지만, 일왕자파나 칠왕자파는 어제 숙취가 남았는지 귀찮은 기색들이 역력했다.
단상의 오왕마저도 심드렁한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왕비가 따로 불러 처결해도 될 일을…….”
“불미스러운 일로 심기를 불편케 하여 송구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다른 이도 아니고 삼왕자의 상해 사건입니다. 아녀자가 어찌 정사에 관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저, 공정한 처결만 바라옵니다.”
왕비가 침울한 표정으로 오왕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자식이 다쳐 마음이 상한 어미의 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에, 오왕은 그럴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또 속고 말았다.
“들라 하라.”
오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휘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퉁퉁 부운 얼굴로 팔에 부목을 댄 삼왕자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아바마……!”
“잠깐.”
들어오자마자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떼려던 삼왕자를 오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왕자는 잠시 기다리라.”
오왕의 말보다 심드렁한 오왕의 표정에 상처를 받은 듯, 삼왕자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잔뜩 분노한 눈빛이 오왕의 시선을 따라 대전 입구를 향했다.
그곳엔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이 느긋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망할 자식들! 목을 베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다!’
삼왕자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제 어마마마와 신하들이 남궁세가가 뭐라 뭐라 하는 말을 들었지만, 하나도 귀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오늘 대전에서 저들을 죽이지 못하면 따로 병사를 부려서라도 진화 일행을 죽이리라 마음을 먹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뿐이었다.
-눈깔 깔아.
“헉!”
놀란 삼왕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몸을 휘청거렸다.
삼왕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진화가 삼왕자를 향해 싱긋이 웃었다.
-허! 혹시 어제 저놈 팔 부러뜨리면서 얼굴도 몇 대 쳤어?
-울다가 퉁퉁 부운 모양이군.
-어이구, 우리 왕자님, 많이 아프셨나 보네. 어제 소리가 빠-각 하는 게, 두 군데 부러뜨린 게 맞다니까. 한 군데가 부러졌으면 뚝- 소리가 났을 텐데.
-뭐가 중요해? 얼굴이 저렇게 부을 줄 알았으면, 티 안 나게 몇 대 더 쥐어 팰 걸 그랬군.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삼왕자의 얼굴을 힐끗거린 후 전음으로 킬킬거렸다.
그러면서 겉모습만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게를 잡고 진화의 호위를 섰다.
진화가 여유롭게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화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왕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왕자파, 아니 왕비파 신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소리쳤다.
“다른 곳도 아닌 궁 안에서 왕자님께 상해를 입히다니! 오만방자한 남궁진화와 무뢰배들에게 죄를 물어 주십시오, 전하!”
“죄를 물어 주십시오, 전하!”
“직접 상해를 가한 자는 목을 베어 효수하시고, 남궁진화는 마땅히 태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엄히, 죄를 물어 주십시오, 전하!”
“엄히 죄를 물어 주십시오, 전하!”
한 사람이 나와 주장을 하면 다른 신료들이 모두 나와 목소리를 키웠다.
요는, 진화와 남궁구에게 장을 때리고, 남궁교명을 당장 처형하라는 소리였다.
“남궁세가의 공자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오왕이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진화에게 물었다.
그냥 잘 마시고 놀다 가면 될 것을.
오왕의 말투에는 이런 일을 만든 진화에 대한 책망이 섞여 있었다.
진화는 그런 그들이 모습이 한 편의 웃긴 연희(演戲) 같았다.
“저들이 뭔가 착각한 듯싶습니다, 전하.”
진화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음? 착각?”
내내 심드렁하던 오왕이 처음으로 눈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에게도 이 모든 것이 유희 같은 것인가.
웃는 얼굴 그대로, 진화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전의 공기마저 서늘하게 식어 내리는 듯했다.
그때.
“감—히! 오왕부가 무슨 권리로 남궁에 죄를 묻는단 말인가--!”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는데, 진화의 목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동시에 진화의 기운이 대전에 있는 모두를 감싸듯 스쳤다.
아주 잠시였지만.
뼛속까지 시릴 듯한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전해지자, 무공을 모르는 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진화의 기운이 모두를 스치고 사라진 후에도,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착각하시는 듯한데, 남궁세가는 오왕 전하가 다스리는 백성이 아닙니다.”
“으윽…….”
진화의 눈이 오롯이 몸을 떨고 있는 대소 신료들을 내려다보았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무림인이라는 작자들은 실로 이렇게 인간 같지 않단 말인가.
뼈가 얼어붙는 고통을 떠올리면, 병사를 부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징벌을 주장하던 왕비파는 물론, 상황을 관망하며 구경하려던 다른 신료들까지, 진화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이 회의는 전하의 손님으로 온 남궁세가를 향해 전하의 아들인 삼왕자가 뱉어 낸 막말에 대한 치죄와 마땅한 사과를 논하는 자리여야 할 것입니다.”
진화의 눈이 삼왕자를 향했다.
기세등등하던 삼왕자가 겁에 질려 잔뜩 몸을 웅크렸다.
내리깐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다 왕비를 찾는 것을 보며, 진화가 코웃음을 쳤다.
“호로 새끼? 천한 무부?”
움찔.
삼왕자의 몸이 크게 떨렸다.
“왕자는 본 공자의 말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을 듯하오. 지금껏 남궁의 면전에서 그런 소릴 지껄이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오직 황제 폐하와 오왕부를 향한 남궁세가의 충정과 자비 덕분이니까.”
진화의 목소리가 낮고 조곤조곤하게, 대전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에 박혀들었다.
이건 진화가 그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경고였다.
첫 번째 경고는 부러진 삼왕자의 팔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오왕부와 함께해 온 우정을 생각하여, 심한 처벌까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가 싱긋 웃으며 오왕에게 말했다.
진화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오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혼란한 전국을 진정시킨 황제의 혈족이라기엔 잔뜩 겁을 먹은 눈빛이 가소롭기까지 했다.
‘나약하군. 이제까지 남궁세가를 방패로 살아남고 고마운 줄 몰랐다면, 앞으로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진화의 눈이 오왕은 물론 좌중을 오시(傲視)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진화의 말에 입도 벙긋 못 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 오왕을 향해 양주를 다스리는 제후라 해야 마땅하다 주장했으나, 지금은 누구 하나 진화에게 그 말을 주장하는 이가 없었다.
그때, 한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소자가 아뢰올 말이 있습니다.”
칠왕자 한문혜였다.
칠왕자 또한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다른 이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어제 바로 곁에서 참담한 상황을 보고만 있었던 소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돼, 됐으니, 와, 왕자는 하, 하려는 말을 해 보라.”
오왕이 말을 더듬거리며 칠왕자를 재촉했다.
그는 힐끗힐끗 진화의 눈치를 보면서, 칠왕자를 이용하여 이 상황을 어떻게든 넘어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일왕자 형님이 베푸신 연회에 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몇몇 주흥이 과한 이들도 있었나이다. 삼왕자 형님도 그만 주흥이 넘쳐, 남궁 공자에게 다가가 말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칠왕자를 따라, 그의 곁에 있던 신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왕의 눈치를 읽어 살아가는 이들답게, 그들은 칠왕자가 때를 잘 맞춰 나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어서 뒤늦게 일왕자도 나섰다.
“소자도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말해 보라.”
일왕자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한 것은, 진화 때문은 아닐 것이라.
그 또한 자신이 한발 늦었음을 알아챘다.
“연회의 주최자이나 맏형으로서 아우가 손님에게 범한 실례를 막지 못했으니, 그 죄가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하오나 불민한 아우와 몇몇 신료들이 주장은, 손님께 더 큰 실례를 범할 수 있어, 뒤늦게 나섰나이다. 삼왕자가 아바마마께서 친히 초대한 손님에게 무례를 범했으니, 마땅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또한 이를 막지 못한 소자에게도 벌을 내려 주십시오!”
“통촉하여 주십시오, 전하!”
일왕자파와 칠왕자파가 삼왕자의 죄를 청하며 판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오왕은 왕비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왕비보다는 자신이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던 듯.
“들으라. 왕자의 신분으로 만인의 모범이 되었어야 할 삼왕자가, 주흥에 취해 감히 짐이 초대한 손님에게 무례를 범하고 이를 거짓으로 아뢰었다. 삼왕자는 남궁세가의 손님에게 마땅히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석 달간 궁에서 근신토록 하라!”
“아, 아바마마!”
“황공하옵니다, 전하!”
오왕의 말에 삼왕자가 세상이 무너진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대소 신료들이 목소리를 높여 벌을 받아들였다.
오왕 또한 이것으로 이 불편한 자리를 이만 파하고 싶었다.
그렇게 모두의 요구와 압력으로 말미암아, 삼왕자는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을 향해 억지 사과를 해야만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붉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 생전 처음 해 보는 사과라는 걸 입에 담는 삼왕자.
그런 삼왕자를 압박하며 어서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오왕과 신하들.
기회를 잡은 칠왕자와 뭔가 아쉬워하는 일왕자.
“하하! 기가 막힌 광대놀음 같군.”
대전을 나오며, 진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궁구와 남궁교명도 통쾌하면서도 미묘하게 불편한 표정이었다.
“오해를 하게 하여, 불쾌감을 주고 물의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그게 대체 무슨 괴변인지…….”
“사과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멍청한 놈이었던 거지!”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사과 같지 않은 사과에 대해 냉정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들 또한 삼왕자의 사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삼왕자의 사과를 받으려 애를 쓰느니, 그들은 기꺼이 남은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쪽을 택할 것이었다.
“분위기만 보려고 한 건데, 이러다 전부를 적대한 것 아니야, 도련님?”
남궁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오왕까지 도망치듯 나가는 것을 보았기에, 괜히 일을 크게 키워서 진화의 입장이 곤란해진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는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한 건 전부 다 봤어.”
“봤다고?”
대체 뭘, 어떻게 본 거지?
자신들이 본 것은 진화가 모두를 겁박하는 광경뿐이었는데.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오왕은 고명조차 받지 못한 반쪽짜리. 오왕부라는 작은 가문의 가주일 뿐이야. 커다란 궁궐을 우물 삼아, 우물 안 왕 놀이를 하는 중이시지. 오왕의 신하라는 원로들은 오왕에 대한 관심이 떴어. 대신 일왕자와 칠왕자 사이에서 헤매고 있더군. 이번에 칠왕자로 기운 듯하지만.”
진화의 말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들 또한 그런 느낌을 받긴 받았었다.
“왕비 쪽 신하들은 왕자들에 대한 충성심이 없어. 내내 왕비의 얼굴을 살피기 급급하더군. 칠왕자는 의외로 그 일파를 다 잡고 있었어. 이번 일로 약삭빠르게 오왕의 신뢰도 샀고.”
“칠왕자보다는 일왕자의 세력이 더 크지 않았어?”
“그놈은 타고난 조건은 좋지만 멍청해. 정통성을 내보이려고 일부러 오왕의 외모, 말투, 성격을 흉내 내는 것부터가 글러먹었어.”
무능해서 신료들의 신뢰를 잃은 오왕을 흉내 내서 무얼 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 닮은 외모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면 나았을 것을.
진화가 퉁퉁한 볼살을 떨며 웃는 소리까지 흉내 내던 일왕자를 생각하며 혀를 찼다.
“그럼 역시 손을 잡는 건, 한문혜야? 그놈은 좀 찜찜하지 않아?”
“글쎄. 꼭 어떤 놈의 손을 잡아 줘야 하는 건 아니니까.”
한문혜라…….
진화가 한문혜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그가 귀천성과 끈이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좋은 기회를 주었으니, 혼현마제와 함께 있던 그놈에 대해 물어야겠군.’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이 느긋하게 자원궁을 나갔다.
그때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궁녀 하나가 그들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자순궁에서 남궁세가의 손님께 ‘잠깐 시간을 청한다.’ 전하셨습니다.”
자순궁은 이제 신방을 차린 이왕자의 궁이라.
멍청한 이왕자가 대전 회의를 마치는 때를 맞춰 진화를 청했을 리 없으니, 지금 진화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이는 제갈지현이 분명했다.
진화가 입꼬리를 올리고 궁녀에게 다가갔다.
“아!”
궁녀는 가까이 다가오는 진화를 홀린 듯 쳐다보았다.
진화가 싱긋이 웃으며 궁녀에게 말했다.
“주인에게 ‘싫다.’ 전해라.”
“……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궁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진화와 일행은 이미 앞서서 가 버렸다.
제갈지현의 청을 거절하고 진화가 즐거운 듯 웃었다.
어떤 놈의 손을 꼭 잡아 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제갈지현의 손을 잡아 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한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왕비야. 삼왕자의 굴욕을 보고만 있을 거라면 그 자리에는 왜 나온 거지?”
“왕위에 가까운 이왕자에게만 애정을 쏟는 거 아니야?”
“글쎄, 이왕자가 왕위에 가까운 건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따지면 삼왕자도 같은 입장인데…….”
“그놈이 특별히 더 멍청한가 보지.”
진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서 남궁교명이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그는 아직도 그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곱씹고 있는 듯했다.
‘내 기운에 겁을 먹었다기엔, 처음부터 너무 겁을 먹은 눈이었는데…….’
진화의 시선이 잠깐 자소궁을 향했다.
* * *
진화 일행이 대전을 떠난 후.
왕비 또한 급하게 자소궁으로 돌아왔다.
“왕비마마!”
거의 뛰다시피 달려온 왕비의 기색에 조 상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리는 왕비는 조 상궁의 목소리마저 듣지 못하는 듯했다.
“물을 가져와라!”
조 상궁이 궁녀에게 명하고, 궁녀가 물을 가져오자 급하게 왕비의 입가에 대었다.
“너희는 잠시 물러나거라.”
“예, 마마님.”
잠시 후,
“조 상궁, 강 내관을 들라 해.”
“예, 왕비마마.”
왕비는 속을 좀 가라앉히자마자, 강 내관을 찾았다.
그는 사가에서부터 집안일을 봐 주던 총관이었다.
“찾아 계셨나이까, 왕비마마!”
강 내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을 고르고 있던 왕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년! 그년의 눈을 하고 있었어!”
서슬이 퍼런 왕비의 눈빛에, 강 내관이 놀란 듯 물러섰다.
그리고 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지요.”
“그년이라고!”
강 내관의 말에도 왕비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 내관은, 왕비가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할 대상은, 여태껏 단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남궁의 그 양자라는 놈이, 그년과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저 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그 눈! 그게 어디 닮아진다 해서 닮아질 눈이야? 그 눈동자까지 꼭 빼닮았다고!”
어느새 왕비의 눈엔 붉은 핏발이 섰다.
지독한 증오가 눈빛에서부터 쏘아져 나왔다.
하긴, 그녀가 ‘그 눈’을 얼마나 증오했던가.
왕비는 그 눈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지금껏 믿고 있었다.
왕비가 되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이 자리에 만족한 적이 없었다.
“아버님께 연락해서 알아봐라. 그때, 납치했던 그 황자가 어찌 되었는지!”
“……아가씨!”
강 내관이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이미 지난 일을 들추는 건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그건 절대 무덤까지 덮고 가야 했다.
“양자라고 했다, 양자! 그때 황자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지금 그놈과 비슷한 또래가 맞을 거다.”
“불가능합니다. 놈들은 데려간 아이를 반드시 죽인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인해! 아이를 진짜 죽였는지, 확인하라고!”
강 내관의 반대에 왕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핏발이 선 눈.
이제 와 보니, 왕비의 입술도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아이가 살아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위험할 일이야. 그러니까 확인하라는 것이다!”
“마마…….”
“그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외모였다. 그러니 절대! 황자여선 안 된다! 그 아이는 살아 있으면 안 돼! 그러니까 확인해야 해! 절대, 절대, 그분이 알아봐선 안 돼!”
왕비가 횡설수설하듯 말했다.
강내관은 이제야 왕비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복령께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절대! 절대 새어 나가선 안 돼.”
“예, 왕비마마.”
강 내관이 굳은 얼굴로 나가자, 왕비는 참고 있던 불안을 터뜨렸다.
식은땀으로 젖은 그녀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안 돼. 이제 와서 절대…… 안 돼…….”
“아가씨……!”
조 상궁이 울먹울먹한 얼굴로 왕비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