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생긴 그대로 진(眞) 근심 화(禍) : 과거를 쫓는 사람들(5)
다음 날.
오왕부에는 큰 소란이 일었다.
칠왕자가 남궁세가와의 포구 거래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이다.
“그자들 때문에 왕부가 허구한 날 시끄럽군.”
“어제 이왕자비마마와 칠왕자님을 연달아 만났다지?”
“사실상 이왕자비마마의 패배로군.”
“칠왕자님은 그 무림의 정의무학관인가 뭔가에서 친분을 쌓았나 보지!”
“이왕자님은 거기 안 갔나?”
“…….”
누군가의 물음에 성을 내던 신료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오왕부 사람들 중 이왕자가 남궁세가의 직계를 희롱하다가 팔이 부러졌던 일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제까지는 이왕자가 제갈지현을 비로 얻어 오고 칠왕자는 정의맹 무인들에게 포로나 다름없는 처지로 돌아왔기에, 결론적으로는 이왕자의 승리라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기껏 얻은 무림인 신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칠왕자가 무림에서 쌓은 인맥을 과시하게 되었으니.
이왕자파, 아니 왕비파 신료들이 입을 꾹 닫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남궁 공자가 우리 왕자님들에게 처음부터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무슨 뜻인가?”
“그게 아니라면 두 분 왕자님들과 꼬여도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삼왕자님은 태어나 지금껏 왕부를 벗어나신 적이 없는데 언제 남궁 공자를 만났겠나?”
“나도 괜히 해 본 말일세, 답답해서!”
사실 남궁 공자가 아니라도 두 왕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사람은 몇 없었다.
그들에게 아부하여 뭔가를 얻을 속셈이 아니라면, 누가 그 오만한 망나니들을 좋아하겠는가.
왕비파 신료들마저 왕비를 보고 있는 것이지 왕자들을 보고 모인 이들은 아니라.
서로 입 밖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신료들은 처음부터 왕자들에게는 기대를 접었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이왕자비마저 실패하자 실망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왕부에서 누구보다 실망이 큰 사람은, 바로 제갈지현일 것이다.
탕-!
“내게는 삼왕자와 거래를 할 듯 여지를 두고선, 곧바로 칠왕자의 편을 들어? 그자가 날 농락했구나!”
제갈지현은 보기 드물게도 분을 참지 못하고 표출하고 있었다.
“마마…….”
제갈지현을 따라와 궁녀가 된 양선이 안타까운 듯 그녀를 보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비교당할 일도 없었을 거다. 남궁진화, 그자가 일부러 날 먼저 보고 곧바로 칠왕자를 본 것이 확실해!”
제갈지현의 눈빛이 불길을 뿜듯 타올랐다.
왕비파 신료들의 입에서 벌써 무림 세가에서 신부를 얻은 것이 무용하지 않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남궁세가와의 거래는 제갈지현에게 기대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제 놈들 또한 아무것도 못 해 놓고 제갈세가가 뭐 어째?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자들이 입만 살아서는! 애초에 왕부와 제갈세가의 거래엔 남궁 따윈 있지도 않았다고!”
제갈지현이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녀를 제일 속상하게 하는 건, 제갈세가를 무시하는 신료들의 인식, 그 자체였다.
“마마, 마마의 능력은 앞으로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양선의 위로에도 제갈지현의 굳은 얼굴을 풀리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다. 포구를 얻으면 일은 편해지겠지만, 중요한 건 결과야. 좀 돌아가긴 해도 대세에는 지장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어. 문제는 그렇게 애를 써 봤자, 여기 신료들의 머릿속을 싹 바꿔 놓지 않는 이상은 제대로 인정받기는 글렀다는 거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그것이 싫어서 그토록 원했던 제갈세가마저 떠나왔는데, 여기서마저 그렇게 된다고?
끔찍했다.
‘절대,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어.’
제갈지현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 * *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러운 자소궁과 자순궁의 분위기와 달리, 자승궁은 떠들썩한 연회라도 벌어진 듯 즐거웠다.
일왕자는 요 며칠 동안 존재감이 없었다.
기껏 주최하는 연회에선 삼왕자가 팔이 부러지는 소란이 일었고, 다음 날 대전회의에서는 칠왕자보다 먼저 나서지 못했다.
게다가 남궁세가와의 거래권마저 칠왕자의 것이 되었으니, 그가 즐거울 일은 없을 터였다.
칠왕자가 거래권을 들고 자승궁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하하하하! 아우가 영민한 사람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형제간의 우애를 생각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군.”
일왕자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칠왕자를 반겼다.
“남궁세가의 포구를 함께 쓰자니.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나?”
일왕자의 물음 끝에 살짝 날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칠왕자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토끼가 주춤할 때 거북이들이 힘을 합쳐 성을 쌓는다면, 곧 차이를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옳은 말이야. 기껏 빠른 발을 가지고 태어나서 달릴 줄 모른다면 쓸모가 없지. 그에 반해 우리는 꾸준히 달려왔고 말이야.”
일왕자는 습관처럼 호탕하게 웃으면서 칠왕자의 말에 동의했다.
공허한 웃음소리보다, 말끝에 달린 씁쓸한 미소가 훨씬 의미 있어 보였다.
그렇게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일왕자는 빈껍데기 같은 웃음을 걷어 버렸고, 칠왕자는 얼음처럼 냉랭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둘은 잠시 동안 서로 민낯을 드러내고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분간 손을 잡지.”
“망나니 둘을 치워 버릴 때까지입니다.”
칠왕자와 일왕자가 서로를 마주 보고 만족스레 웃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 달리, 칠왕자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남궁진화, 대체 어디까지 계산했던 거지? 고작 거래권 하나로 이왕자와 삼왕자의 실책을 부각시키고, 내게 거래권을 쥐여 줌으로써 제갈지현의 오왕부 첫 출사도 망쳐 버렸다. 거기에 거래권을 핑계로 한다면 일왕자가 내 손을 잡을 거라더니. 진짜로 이렇게 되지 않았나!’
그중에 칠왕자에게 해가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남궁진화가 뭘 노리는 건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는 거랄까.
‘대체 그자의 속셈은 뭐지?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관계가 좋지 못한 것은 알고 있지만, 제갈지현에 대해서는 사사롭게 원한을 가질 일은 없는데…… 이왕자와 삼왕자를 의식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정말로 오왕부를 분열시킴으로써 당분간 남궁세가의 뒤를 안정시키려고 하는 건가?’
칠왕자는 끊임없이 진화의 의도를 의심했다.
제갈지현처럼, 그 또한 제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의 원한은 이미 없어진 시간에 생긴 것이었고, 칠왕자가 그것을 알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볼밖에. 일단 나와 일왕자가 힘을 합친다면, 왕비는 어쩌지 못해도 왕자들이나 제갈지현 정도는 밟을 수 있을 터.’
칠왕자는 모든 것이 진화의 의도대로 되어 가는 것을 잊고, 일단 제게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 * *
같은 시각.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 또한 오랜만에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제 오왕부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났으니, 본가로 돌아갈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교명, 너는 바로 집으로 갈 거냐?”
“그럴 생각이다. 마침 상단의 배가 단양포구에 들어 있는 때니까.”
“이장로 아…….”
남궁구가 말을 하다 멈췄다.
남궁경옥이 이장로 자리에서 쫓겨난 지 꽤 되었지만, 아직 입에 붙은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궁구가 남궁교명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마음을 비웠는지, 남궁교명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괜찮다. 게다가 아버지 본인도 상단의 일에 만족하고 계신다. 어쨌든 아버지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집안의 가업이었으니까.”
남궁교명의 말처럼, 남궁경옥은 물론 그 윗대부터 장남인 남궁진명까지 모두 배를 타고 상단을 움직였다. 심지어 남궁진명은 청해상단의 단주를 넘볼 정도로 수완이 좋고 상재가 밝았다.
오히려 남궁교명이야말로 남궁경옥의 집에서 튀는 존재였다.
진화의 시선이 남궁교명에게 향했다.
남궁교명은 지난번 진화가 남궁도를 죽인 이후로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걸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후로 남궁교명은 진화에게 단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고 윗전으로 깍듯하게 모셨기 때문이다.
“나도 몰랐는데, 의외로 배 위가 편안하더군. 나중에 상단 무사들을 단련시켜서, 남궁세가에 수전을 전문으로 하는 무단을 창설해도 좋을 듯하다.”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보네! 적성이 딱 그쪽인 거 보면, 피로 전해지는 선천적인 기질도 무시하지 못한다니까.”
남궁교명이 편안하게 말을 받자, 남궁구 또한 밝은 얼굴로 금방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궁교명이 진화를 힐끗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흠흠, 구, 너는 책을 싫어하지 않나? 그 피는 다 어디로 간 거냐?”
“아, 난 모계 혈통이 좀 더 강한가 봐.”
남궁구는 오늘도 책 속에 파묻혀 있을 아버지 창서각주 남궁희를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남궁교명은 그런 남궁구를 보며 주먹을 떨었다.
-이 눈치 없는 놈! 공자님 계신 데서 꼭 ‘피’가 어쩌고 해야겠냐!
남궁교명의 전음에, 남궁구가 그제야 진화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진화는 마지막 남궁구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흘릴 참이었는데, 괜히 눈치를 보는 남궁교명과 남궁구 때문에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고 한결 공손해진 남궁교명이 불편한 순간이 바로 이런 때였다.
“나야말로 괜찮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들이면 충분한데, 거기에 창천패까지 있으니까.”
진화는 안 봐도 될 눈치를 만들어서 보는 두 멍청이들에게 창천패를 흔들어 보였다.
그에 눈치 빠른 남궁구가 금방 태세를 전환했다.
“그렇지. 도련님은 온화한 작은사모님의 얼굴에 제왕무적단주님의 성질머리를 공평하게 닮았으니까.”
“뭐? 제왕무적단주님이 저 정도라고?”
차라리 이전처럼 비꼬는 거였다면 나았을 것을.
진화는 남궁교명이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라는 걸 알기에 더 기분 나빴다.
진화의 눈빛이 가늘게 변하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그날 밤.
기분 좋게 잠이 들었던 진화는, 제 머리 위에서 쏘아져 내려오는 강렬한 살기에 눈을 번쩍 떴다.
푸-욱!
이불을 날려 검을 막아 낸 진화는, 이불에 싸인 인영을 태워 버릴 기세로 천뢰장을 쏘았다.
파—앗!
화르르르-!
순식간에 재가 된 이불이 침상에 닿기도 전에, 진화의 목으로 비수가 날아들었다.
파지지직----!
진화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히고, 눈동자에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 * *
천하를 굽어볼 수 있는 까마득한 높이의 삼 층 명당.
검은 팔각의 지붕 아래에서 태복령 곽구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감, 서두르시지요.”
“알겠네.”
늙은 내관의 재촉에, 태복령은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때 같았으면 황제의 부름에 구름 위를 걷는 듯 사뿐사뿐 앞을 나갔겠건만, 오늘은 어찌 된 것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인 양 거북스러웠다.
깊은 밤.
황제가 은밀하게 부르는 것은 두 가지 경우였다.
은밀하게 맡길 일이 있거나, 은밀하게 죽일 일이 있는 경우.
다른 때였다면 황제의 총애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었겠으니, 근래에 오왕부에 있는 딸이 희한한 부탁을 해 온 것이 내내 걸렸다.
하지만 눈치 빠른 내관 앞에서 불안한 티를 낼 순 없었다.
태복령이 안으로 들어가자, 내관은 정전을 지나 황제의 집무실로 그를 안내했다.
기다란 복도 끝에 하늘을 보듯 고개를 들어 올려야 볼 수 있는 황금의 용좌.
‘저 자리에 내 핏줄이 앉을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뭐. 용상만은 못해도 왕좌는 눈앞에 있잖아. 내 핏줄이 왕좌에 앉을 테니, 이만하면 천한 마부 출신이 크게 출세했지. 흐흐흐!’
창문 틈으로 보이는 용좌를 향해 선망의 눈빛을 보내던 태복령이, 이내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는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던 것을, 지금은 턱없이 높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황금으로 장식된 붉은 문 앞에 서자, 태복령은 다시 오금이 저려 오는 듯했다.
스르르.
말도 없이 문이 열렸다.
내관의 눈짓에 태복령이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태복령이 긴장감을 숨기며 절을 올렸다.
그러나 황제는 태복령의 인사를 무시하듯, 조용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절을 한 그대로 태복령의 몸이 바싹 움츠러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태복령이 고개를 숙인 채로 떼구루루 굴렸다.
그리고 한 식경 정도가 흘렀을까.
태복령의 등이 땀으로 다 젖었을 즈음.
황제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태복령, 그대가 내 곁에 있은 지 삼십 년이 좀 넘었던가?”
“예, 황상 폐하.”
밤늦게 계속되던 업무에 마지막 방점을 찍은 황제가 마침내 붓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때까지 엎드려 있는 태복령을 내려다보았다.
은은한 촛불 사이로도 느껴지는 강렬한 안광에, 태복령은 마치 어두운 숲에서 맹호의 눈을 발견한 듯 몸이 떨려 왔다.
태복령이 덜덜 떨리는 손끝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가 물었다.
“말하라. 그대가 왜 내 아들의 일을 들추고 다니는가?”
“……!”
태복령은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하지만 황제를 기다리게 하면 ‘죽는다’.
죽음의 공포가 태복령을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