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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02)화 (202/425)

남궁마제

볼 진(診) 꽃 화(花) : 암살자들(1)

사람은 오감 중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어둠, 보이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진다.

무림인들이 암살자를 조심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둠에 숨어서, 상대가 보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내리니까.

암살자가 겁이 나는 건, 결코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어둠이 소용없다면.

그들의 은신을 훤히 볼 수 있다면.

그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면.

고수들은 결코 암살자를 겁내지 않았다.

쉐에에엑--!

진화는 제 목을 노리는 비수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은 감각의 차원이 달랐다.

암살자는 충분히 빨랐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진화에게는 비수에 손가락을 얹기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파지지직--!

푸른 번개가 번뜩이고.

“크앗!”

툭.

암살자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비수를 놓쳤다.

진화의 침상 위로 비수가 떨어졌다.

휘이익-!

진화는 물러서는 암살자를 쫓아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검은 복면 속 암살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맹수의 눈 속에서 푸른 번개가 내리치는 것이, 그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진화의 천뢰장이 그의 심장을 때렸기 때문이다.

퍼---억!

쿠-웅!

암살자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진화의 방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공자님!”

건넛방에 있던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자던 행색 그대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진화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엉망이 된 침상과 살짝 탄 듯한 냄새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암살자의 존재는,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대체 누가!”

남궁교명이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암살자를 노려보았다.

“일단 살려 놨으니 데려가서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글쎄.”

쓰러져 있는 암살자를 보며 진화가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진화가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들이 등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에…… 헉!”

오왕부의 호위병들이 이제야 도착했던 것이다.

“암살자다--!”

“적습이다! 다른 놈들이 있는지 찾아라!”

누구 하나 진화와 일행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고, 쓰러진 암살자를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목소리를 높여 오왕부의 소란을 키운 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교위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쓰러져 있는 암살자를 들고 나갔다.

“개판이군.”

남궁구가 오왕부 군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갑주를 주렁주렁 걸친 교위라는 자가 군사들을 이끌고 자소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다못해 오왕의 궁은 자원궁이건만.

이 모습 하나만 보아도 오왕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남궁세가의 이름으로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다! 거기! 침상부터 정리해라! 아니면 다른 별채를 내주든가! 왕부의 처리가 어찌 이리 더디고 어설프단 말이냐!”

남궁교명은 이제야 쭈뼛쭈뼛 들어오는 궁인들에게 화를 내었다.

* * *

보이지 않는 공포를 더 무섭게 만드는 건, 인간의 상상력이었다.

태복령의 머릿속엔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지는, 혹은 사지가 찢겨 나가는 끔찍한 죽음이 그려졌다.

“소, 소신은…… 그게…….”

태복령이 덜덜덜 떨리는 입술을 겨우 떼려는데.

스릉-!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태복령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을 스치는 끔찍한 상상과 함께, 태복령의 심장은 황제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맞춰 몸 밖으로 튀어 나갈 듯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가운 검 끝이 목에 닿았다.

“히이익!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수십 년간 황제의 곁에서 권세를 누린 경험이 태복령을 움직였다.

태복령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리는 대신, 더욱 바짝 몸을 낮추었다.

머리 위에서 제 목을 죄고 있는, 추상같이 지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복령, 짐이 뭘 통촉해야 하는지 말하라.”

은밀하게.

정말로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오직 한 사람에게만 한 의뢰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황제가 그걸 어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복령의 머리가 살기 위해 부지런히 굴러가는데, 그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오, 오직 충심이었습니다!”

검이 조금 더 태복령의 목을 파고들었다.

“오, 오왕부의 왕비께서 부탁을 해 오셨습니다. 황후마마와 너무, 너무도 닮은 사람을 보고 놀라서, 혹시나 하여 연통을 해 온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고 싶을 때에는, 구 할 이상의 진실에 섞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법이었다.

“황후와 닮은 사람이라. 가만…….”

황제는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혼란한 시절이라, 왕부의 일개 궁녀를 떠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겁에 질린 태복령의 얼굴을 보자니, 왕비의 옆에서 태복령과 비슷한 얼굴로 떨고 있던 한 소녀가 기억났다.

“그대의 딸이, 내가 왕부 시절 왕비의 곁에 있었던가?”

태복령은 살기 위해 냉큼 그 말을 받았다.

“그, 그러하옵니다! 그때 제 딸이 황후마마를 뫼셨습니다!”

딸을 왕비마마로 높여 부르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챙길 때가 아니었다.

“황자를 보았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이제 와 알아보기엔, 시간이 꽤 흘렀지 않나?”

“그, 그래서였습니다! 황후마마와 너무 닮은 얼굴에 시, 실종되신 황자님과 비슷한 나이이나, 그자가 무림인인지라. 괜히 그 중차대한 일을 들추어 폐하와 황후마마의 심기만 어지럽힐까 저어되어, 소신이 먼저 확실히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되었으나, 소신의 충정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필사적으로 찾으려고 했던 변명이, 한번 입에서 풀리자 그다음은 술술 이야기가 풀어졌다.

오히려 변명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본래 황제는 미리 죽일 자를 정해 놓고, 어떤 변명도 듣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런 황제가 저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것을 보면, 그 일과 자신의 연관성까지는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오로지 추, 충심에서 나선 일이었습니다! 다른 뜻은 추호도 없었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엎드려 비는 태복령의 몸은 낮았으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황후를 닮은 무림인이라…….”

황제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그건 황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양주에 있는 남궁세가의 남궁진화라 했습니다.”

“남궁진화…….”

태복령이 재빨리 알고 있는 것을 뱉었다.

남궁진화의 이름을 읊조리던 황제가 다시 한참 말이 없자, 태복령 또한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황제가 태복령의 목에서 검을 치웠다.

“태복령은 조사 결과에 대해 짐에게 상세히 보고하라.”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나가 봐도 좋다.”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태복령은 제가 죽다 살았다는 걸을 알았다.

저승 문턱을 밟았다가 살짝 벗어난 느낌이 이러할까.

명당을 나온 태복령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쓸었다.

끈적끈적한 땀과 함께 붉은 피가 보였다.

“후우. 이제 이 일을 어쩐다?”

어쨌든 황제마저 남궁진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본래도 그랬지만, 이젠 정말로, 남궁진화가 황자여선 안 된다!’

태복령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남궁진화가 황자인지 아닌지.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밝혀지기 전에 남궁진화가 죽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집안, 자신이 움켜쥔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다행히 무림인은 일찍 죽는다지?’

태복령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집으로 온 태복령은 가장 믿는 총관을 불렀다.

“놈에게 전해, 의뢰를 바꾼다고. 황자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할 필요 없이, 그냥 남궁진화를 죽이라고 해.”

태복령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저와 제가 이룬 집안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게 설사 황제의 아들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예, 주인님.”

“늘 그렇듯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예.”

태복령과 함께 이 집안을 일으킨 총관이 충실하게 답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니, 지금에 와서는 표정에 두려운 기색 하나 없었다.

“그놈만 아니야. 혈수문과 하오문, 살곡 할 것 없이 모든 암살문에 다 의뢰해라. 천금을 써도 상관없다. 아니, 놈을 먼저 죽이는 곳에 천금을 줄 것이라 전해!”

“예, 주인님.”

전에 없이 다급해 보이는 주인의 모습에, 총관의 표정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태복령이 나간 후,

황제의 검이 옆에 있는 화홍란을 베었다.

“충심이라.”

황제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걸렸다.

“거짓을 말할 때만 말을 더듬는 버릇은 여전하군.”

싸늘한 비웃음과 함께 황제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감히 제까짓 게 천자의 앞에서 거짓을 말하다니.

수십 년을 입안의 혀처럼 제게 충성하던 태복령의 배신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프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지존의 삶이란 그러한 것이기에.

적어도 이 황궁엔, 신하의 충성을 믿을 만큼 어리석은 지존은 없었다.

“금영.”

황제의 부름에, 그의 그림자에서 조용히 인영이 솟아올랐다.

“태복령의 움직임을 샅샅이 살펴라.”

황제의 명과 함께, 인영은 그림자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위위.”

“예, 폐하.”

“조 교위를 불러라.”

“예, 폐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있던 늙은 환관도 움직였다.

‘황후마마의 오라비인 사례교위 조정호를 찾으시다니. 태복령의 말을 믿으시는 겐가? 만약 진실로 그분이 황자님이라면…… 천하에 다시 피바람이 불겠구나. 이십 년 전 전쟁 때보다 거센, 지존의 복수가 시작될 것이니.’

늙은 환관은 황제가 태복령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미루어 짐작했다.

지존의 분노는 겨우 늙은 마부의 목숨 하나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 * *

날이 새기도 전에, 진화에게 암살자가 들었다는 소식이 궁궐 담을 넘었다.

그리고 이상한 소문도 함께 담을 넘었다.

진화에게 암살자를 보낸 범인이 새로운 이왕자비 ‘제갈지현’이라는 소문이었다.

낮에만 해도 제갈지현이 진화에게 물을 먹었다는 말이 파다했으니, 과격한 무림의 여식이 암살자를 동원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진화와 원한을 쌓은 오왕부 사람이라면 이왕자와 삼왕자도 있었지만, 오왕부 사람들의 무림에 대한 인식이 제갈지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림 출신이니까 암살자를 불렀을 것이다? 허! 내가 고작 포구 하나로 그런 어설픈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비마마…….”

“내가 어리석긴 했다. 일을 너무 쉽게 보았어. 이왕자의 오만함을 보고서도, 왕부의 인식까지 계산하지 못한 거야.”

제갈지현이 입술을 깨물며 분을 삭였다.

곁에서 시녀인 양선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제갈지현의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 일이었다.

소문과 상관없이, 당사자인 진화는 제갈지현을 전혀 의심하고 있지 않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선, 우리 손에 암살자를 내줄 리도 없고, 암살자를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군.”

“그럼 어쩌게? 역시…… 납치할까?”

“…….”

남궁구의 말에 진화는 잠시 남궁구를 빤히 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역시, 칠왕자를 납치했을 때부터였을까.

“그냥 지켜봐. 곧 의뢰를 한 사람이, 뒤처리를 하기 위해 나서겠지. 우린 의뢰자가 누군지 알아낸다.”

진화의 말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빠르게 움직였다.

늦은 밤, 자소궁.

왕비는 제 비취 목걸이와 귀걸이, 머리 장식과 예닐곱 개의 반지를 빼서 탁자 위에 놓았다.

“보셨지요? 그리해서 죽일 수 있는 인사가 아닙니다.”

거울 속에 있는 인영이 왕비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밴 것이, 어쩐지 왕비의 실패를 조롱하는 듯했다.

“양자라 한들, 무림에서 제왕이라 불리는 자의 손자입니다. 무림의 신룡으로 명성이 자자하지요. 고작 오군 구석탱이에서 왕 놀이나 하고 있는 자들이 노릴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제 보니 명백한 조롱이었다.

창백하게 굳은 왕비의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사내가 누구인지 알았기에.

왕비는 사내의 무례한 말투도, 오왕부에 대한 조롱도 모두 참고 물었다.

“……그대는 할 수 있나?”

“흐흐흐흐, 나는 왕 놀이나 하는 돼지 새끼와 달리, 진짜 왕이지.”

거울 속에서 검은 칠을 한 사내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오만하게 웃었다.

소름 끼치는 사내의 모습에, 왕비는 그만 눈을 감을 뻔했다.

하지만 사내의 말처럼, 그는 진짜 왕이었다.

암살왕 교혼.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이자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왕비는 이를 질끈 깨물고, 거울 속 암살왕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천금, 아니 만금이 들어도 상관없다. 놈을 죽여라.”

“흐흐흐흐, 좋아.”

왕비의 말과 함께, 사내는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거울 속에서 사라졌다.

암살왕이 다시 나타난 곳은 자소궁의 지붕 위였다.

파드드드득-!

전서구 하나가 사내의 팔에 앉았다.

사내는 그것을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아비는 천금인데, 딸은 만금이라. 아비보다 딸년의 통이 더 크군. 애송이의 예쁜 목에 제법 큰돈이 걸렸어. 흐흐흐흐.”

암살왕의 눈이 이제 막 불이 꺼지는 별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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