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볼 진(診) 꽃 화(花) : 암살자들(4)
간밤에 월하회에서 전갈이 오고.
남궁가주는 즉시 창궁무애단과 천풍대연단 단주를 불러들였다.
“적습이네. 황도의 태복령이라는 자가 진화의 목에 천금을 걸었다는군.”
남궁가주의 말에 두 단주가 크게 놀랐다.
하지만 두 단주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랐다.
“이제 그 미친 작자의 모가지를 따 오면 됩니까?”
창궁무애단의 단주, 단애구검(斷崖九劍) 호방련이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 으르렁거렸다.
창궁무애단은 유사시엔 남궁세가 모든 무사들을 모을 수 있는, 남궁세가 최대 무단이었다.
또한 남궁세가에서 가장 유명한 무단이기도 했다.
남궁세가의 모든 대외 임무를 수행하며 귀천성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로를 세운 무단이었기 때문이다.
창궁무애단이 남궁세가의 ‘움직이는 방벽’이라 불리는 건, 방어를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장소건 그곳에 남궁세가의 뜻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한편.
“단원들을 모아야겠군요.”
천풍대연단은 외부에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창궁무애단이 움직이는 방벽이라면, 천풍대연단이야말로 철옹성을 만드는 방벽이라.
그들은 평소 잠삼현과 남궁세가 일대의 경계를 맡으며, 귀천성과의 전쟁에서는 양주 전체의 방어를 주도했었다.
그들은 때때로 상대의 성을 무너뜨리기도 했으니.
“다른 때였다면 창천원의 경계를 제왕무적단에 맡기겠으나, 태복령이라는 자가 황도의 모든 암살문에 의뢰를 넣었다 하네. 그중에는 살인시문, 소리마제 놈이 직접 올 수도 있다는 정보가 있었네.”
“남궁의 허락 없이 잠삼현을 넘어오는 놈들이 있다면, 족족이 그 사지를 찢어 버리겠습니다.”
천풍대연단 단주 우뢰검(雨雷劍) 현월평은 역대 단주들 중 가장 천풍대연단에 알맞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제왕무적단주는 어디 있습니까?”
“안상범이 암살왕과 연관이 있지 않나. 그놈까지 진화에 대한 의뢰를 들었다 하니…….”
“아! 그놈 잡겠다고 나갔습니까?”
단애구검 호방련은 호현기와 호명기 형제의 아버지였다.
그들 형제처럼 호방련 또한 젊었을 적 남궁경의 곁을 지켰으니, 남궁경이 어찌 행동했을지 눈에 선한 듯했다.
“……제왕무적단주는 없는 셈치고, 세가 방비에 단단히 애써 주게.”
“존명!”
“존명!”
남궁가주의 말에 창궁무애단과 천풍대연단 단주들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인기척이 사라지고, 남궁가주의 뒤에 숨어 있던 남궁경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아니라고 의심하는 놈이 하나도 없냐? 내가 언젠가는 저 새끼들 대가리도 깨 버릴 거요.”
남궁경이 집무실을 나가고 없는 두 단주를 향해 이를 갈았다.
“암살왕과 소리마제를 속이려면, 세가 안팎으로 너와 제왕무적단의 존재를 완전하게 속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전력으로 보이기 위해 두 단주까지 속인 것이다. 그동안은 절대 눈에 띄지 말고 청림에 숨어 있도록 해라.”
“존명.”
남궁가주의 명에, 남궁경이 가신으로서 그 명을 받들었다.
“그런데 형님, 그 태복령과 왕비 년은 이대로 둘 것이오?”
남궁경이 불만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러자 남궁가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황가 혈통에 빌붙어 얻어 낸 권세로 남궁을 건드렸으니. 힘없이 얻은 권세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알려 줘야지.”
남궁가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신(宇神).”
“예, 가주님.”
“오왕부에 대한 감시를 늘려라.”
언제든 원할 때 죽일 수 있도록.
“존명.”
남궁가주의 머리 위에 있던 사내가 공손하게 답하고 사라졌다.
우신은 천리호정단 단주를 부름이었다.
그리고.
“백경(白鯨).”
“예, 주군.”
남궁가주의 부름에, 어둠 속에 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서각주 남궁희였다.
“암풍을 보내, 왕비에게 남궁을 건드린 대가가 갈 것이라 전하라. 그년이 마음 편히 있으면 곤란하니까.”
“존명.”
백경은 고혼암풍단 단주를 부르는 말로, 백경일 때의 창서각주 남궁희는 칼날보다 시리고 날카로웠다.
직계만이 그 정체를 안다는 천리호정단과 고혼암풍단주에게도 명이 내려지며, 이로써 남궁세가 오 대 무단이 한 번에 움직이게 되었다.
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궁희까지 모두 나가고.
남궁경이 남궁희가 있던 자리를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 암살 의뢰, 하오문에서도 받았을까?”
“받기야 했겠지. 하나 하오문은 현재 사패천 휘하의 문파다. 정사 연합을 깰 것이 아니라면 의뢰를 거절했을 거다.”
“그건 다행이네. 아무리 헤어졌어도 전 마누라를 죽이는 건 너무하잖아.”
남궁경의 말에, 남궁가주 또한 안타까운 눈빛으로 남궁희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경아, 준비 잘해라. 오랜만에 본가에 손님이 많이 올 듯하구나.”
“걱정 마슈.”
남궁가주의 말에, 남궁경이 맹수처럼 살기를 번뜩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 * *
다음 날, 남궁세가로 손님이 찾아왔다.
기다리던 손님이 아닌, 남궁세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다.
손님맞이는 잠삼현, 아니 양주 땅을 밟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수많은 무사들의 입을 통해 진화의 위험이 알려진 터였다.
“남궁세가를 찾아오셨다고? 아, 이 양반아! 여기가 전부 다 남궁세가인데, 세가 안에서 또 세가를 찾나?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잠삼현에 들어선 사례교위 조정호는, 남궁세가로 가는 길을 물었다가 괜히 핀잔만 당했다.
포구에서부터 벌써 두 번째였다.
“허어! 양주의 인심이 참으로 사납군!”
조정호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질문에 답도 없이 떠나 버린 사람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황도였다면 그에게 소리를 친 것만으로 무례를 따져 묻고도 남을 권세가였지만, 이곳에서 그는 남궁세가를 찾아온 불청객이라.
스스로 연락도 없이 왔다는 인식 정도는 있었기에, 조정호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그러면서 절대, 지금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살피는 사람들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영 신경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허어! 참.”
사람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찌릿찌릿한 시선이 느껴지니.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조정호는 저자에 거의 모든 사람이 저를 감시하듯 보는 것을 보며, 결국 남궁세가는 혼자 힘으로 찾기로 결정했다.
주변의 도움을 포기하고도, 조정호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남궁세가 장원을 찾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저자를 쭉 걷는 것만으로, 남궁세가의 의천문(義天門) 앞에 당도한 것이다.
의천문의 앞에서, 남궁세가의 무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쇼?”
이제까지의 사람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를 살피는 곱지 않는 눈빛에, 조정호가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허허허허! 이거 손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조정호는 사례교위를 증명하는 패를 보여 주고, 다른 몇몇의 ‘누구쇼?’ 하는 물음과 시선을 견디고서야 남궁가주의 앞에 갈 수 있었다.
중간에 조정호의 얼굴을 알아본 남궁세가 상단 소속 가신이 아니었다면, 몇 사람을 더 거쳤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조정호의 노고와 불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가주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가에 잠시 신경이 날카로워질 만한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너그럽게 이해 바랍니다.”
남궁가주의 말에, 조정호는 불편한 심경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러운 황도 조정의 물을 먹은 사람답게.
하필 세가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 연통도 없이 찾아온 자신의 탓이려니.
‘어쨌든 조카를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조정호가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폐하의 명을 받고 외행을 나왔다가, 남궁세가에 알아볼 일이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
“그렇습니까? 허허허! 어쨌든 남궁세가에 잘 오셨습니다. 그래서, 본가에 알아볼 일이란 게 무엇인지요?”
조정호의 말에, 남궁가주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친근하게 묻는 어투에도 남다른 무게감과 신뢰감이 함께 느껴지니.
‘역시 무림 제일세가라 불리는 곳의 가주답구나.’
조정호가 속으로 감탄하며, 응어리진 마음을 살짝 풀었다.
“이곳에 남궁진화라는 이름의 공자가 있지요? 그 공자를 한 번 만나게 해 주시겠습니까?”
조정호가 남궁가주의 태도에 화답하듯 정중하게 물었다.
그 순간.
남궁가주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덩달아 방 안의 공기까지 차가워졌다.
“……스스로 교위라 주장하는 분께서, 우리 진화는 왜 찾는 것이오?”
조정호가 남궁가주에게 느낀 신뢰와 호의적인 감정도 함께 식어 버렸다.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와 아래위로 그를 째려보는 차가운 눈빛.
이전의 사람들과 같은 그것이었다.
대체!
애 얼굴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든지!
남궁가주는 아까 전 조정호를 알아본 가신을 한 번 더 부르고서야, 조정호에 대한 불신의 시선을 풀어 주었다.
“허허허허! 이거, 미안합니다.”
너스레를 떨며 사람 좋게 웃는 모습.
그러나 이번에는 조정호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조정호를 향해, 남궁가주는 민망한 듯 웃으며 진짜 불편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허허, 이거 참. 실은 세가에 생겼다는 신경 쓰일 일이, 우리 진화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남궁……진화와요?”
조정호가 놀라고 당황스러운 눈으로 남궁가주를 보았다.
“글쎄, 황도에 사는 어떤 미친 늙은이가 우리 진화의 목에 천금을 걸었다지 뭡니까? 실제로 진화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있어, 세가 전체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습니다.”
남궁가주가 서늘하다 못해 살벌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매서운 눈빛이 조정호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조정호는 미처 남궁가주의 눈빛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허! 대체 어떤 미친 늙은이랍니까!”
조정호가 정말로 화를 내며 물어보자, 오히려 남궁가주가 당황하고 말았다.
다행한 점은, 이제야 완전히 조정호에 대한 불신이 사라진 것이랄까.
그날.
남궁가주는 예기치 못한 손님에게 별채를 내주었다.
남궁세가가 기다리고 있던 손님은 오늘은 오지 않을 듯했다.
* * *
깜깜한 어둠 속.
구중궁궐 심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겹겹이 싸인 성벽과 인의 장벽을 뚫고.
검은 복면을 쓴 사내들이 그림자에 스며들어 빠르게 달렸다.
휙--! 휙!
스르르륵.
복면인들은 창이 없는 건물 앞을 지키고 선 금군들을 쓰러뜨리고, 그들을 조용히 풀숲으로 끌어갔다.
잠시 후, 네 사람이 금군과 같은 복장을 하고, 금군처럼 그 앞을 지켰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미끄러지듯 문 안으로 들어갔다.
스스스스슷---!
계단을 내려간 뒤, 문 하나 없는 어두운 통로에 바람 소리가 났다.
십여 명의 사내들이 바닥에 발을 딛지 않고 스치듯 지나는 소리였다.
그들은 횃불이 켜진 철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멈췄다.
철문에 귀를 댄 자가 손가락을 폈다.
하나.
문 앞에는 간수 하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셋과 둘.
움직이는 자의 숨소리가 셋이고 움직이지 않는 자의 숨소리는 둘이라는 뜻이라.
아마도 묶여 있는 죄인 두 명과 그들을 지키는 간수가 세 명 더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정보를 주고받은 복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툭.
문 앞에 있던 복면인 둘이 품에서 수면향과 연초를 꺼내 불을 붙여 던졌다.
파사사사삿----!
“으앗! 이게 뭐야!”
문 앞에 있던 간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복면인들이 순식간에 문을 넘어 들어갔다.
쉐에에엑---!
복면인들은 당연한 듯, 빠르고 단호하게 간수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앵!
계획에 없는 소리였다.
누군가의 눈이 커졌을 때.
복면인들 중 둘은 순식간에 죄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연기 속에 어렴풋이 의자에 묶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누가 그들의 목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여기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일 것이니까.
죄인을 노린 복면인의 검이 목을 향했다.
그때.
휘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복면인의 눈이 커졌다.
그건 다름 아닌 그의 팔이 날아가는 소리였다.
“함정…… 컥!”
무어라 말을 하려던 복면인의 목이 달아났다.
챙-! 챙챙--!
“제압이 여의치 않다면 모두 죽여라.”
죽은 복면인의 바로 앞, 죄인의 자리에서 난 목소리였다.
스르르릉-!
문이 활짝 열리고, 연초의 연기와 수면향이 모두 흩어졌다.
그리고 쓰러진 횃불과 꺼져 있던 횃불들이 환하게 켜지면서, 안의 상황이 드러났다.
쉐에에엑-!
챙챙---!
흑의 복면인들은 간수라 생각했던 금군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묶여 있는 죄인이라 생각했던 인물은, 낡은 천을 벗어 던지고 화려한 금룡포를 드러냈다.
황제였다.
황제는 서늘한 눈으로 죽은 복면인들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히이이익-!”
황제의 옆에서 진짜로 묶여 있던 태복령 곽구윤은 시체를 보고 기겁했다.
방금 전 그는, 저를 죽이려는 칼날이 코끝까지 닿았었다.
죽기 직전 금군의 손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 않았다면, 지금 저 시체들과 함께 쓰러져 있었을 것이라.
태복령 곽구윤은 아직도 그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금군에 끌려 황제의 앞에 무릎 꿇리는 동안에도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폐, 폐하,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태복령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비 맞은 쥐 새끼처럼 애처롭고 비루하게 몸을 떠는 모습을, 황제는 무덤덤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조용히 물었다.
“짐은 방금 그대를 살려 주었다. 그러니 말하라, 구윤. 짐이 황자와 남궁진화에 대해 조사하라 명한 날, 왜 남궁진화를 죽이라 했는지!”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횃불이 비친 탓일까.
태복령을 노려보는 황제의 눈빛이 횃불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