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볼 진(診) 꽃 화(花) : 암살자들(5)
아침.
잠에서 깬 진화는 습관적으로 기감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주방에서 숙수들을 닦달하고 있는 대숙수.
꼼꼼하게 천화정을 정리하는 덕진 할매.
익숙한 하녀들과 하인들.
그 사이로 오늘은 직접 주방을 살피는 어머니 팽연화의 기척까지.
진화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제 방으로 천화정에서 유일하게 익숙하지 않은 존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발걸음처럼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들어와라.”
진화의 답이 있고, 역시나 어린 소녀가 들어왔다.
까만 머리를 단단하게 땋고, 물과 따뜻하게 데운 수건이 담긴 쟁반을 야무지게 들고 들어오는 손.
까무잡잡한 피부와 저를 보고 동그랗게 뜬 눈.
낯이 익었다.
“너는…….”
“아, 이, 이전에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명해 주신 인사가 이리 늦었습니다.”
꾸벅.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이는 모습에, 진화는 소녀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남궁도와 남궁문을 잡는 데 미끼 역할을 해 준 부인과 그 딸.
당시 진화의 허리쯤 왔던 어린아이가 남궁도의 수하들을 속이고 그들이 숨어 있는 장소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임신한 어머니의 배를 감싸고 있다, 저를 보고 그때도 이렇게 인사를 했었다.
“그렇구나. 그…… 어머니의 몸은 괜찮고?”
진화의 물음에,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남동생을 낳으셨습니다. 벌써 뛰어다녀요.”
“벌써?”
소녀의 말에, 이번에는 진화가 깜짝 놀랐다.
“가주님과 가모님, 마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일찍 보고 싶으시다 전하래요.”
“그래.”
소녀가 전하는 말에 진화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준비를 마치고 소녀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진화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많이 밝고 어른스러워진 소녀.
다행이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남궁문의 여식이 결국 창천원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쫓을까.
아니면 죽여서 위험을 없앨까.
대가가 제왕검과 남궁가주의 목숨이라면, 진화는 그게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었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 다르니까. 안상범을 미리 잡아들인 것은 실로 의외였다. 가주님과 아버지를 믿어 보자.’
진화는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직 남은 시간 동안 잘 살펴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의외로 남궁문의 딸에 대한 불안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남궁문의 노역장을 기웃거리던 그녀에게 안상범이 접근해 온 것을, 그녀가 먼저 고해바쳤기 때문이다.
남궁가주가 그녀를 신뢰하게 된 이유였다.
“영이 고것이 영특하게 제 할아버지에게 먼저 알렸잖아요. 예쁜 도련님의 은혜를 저버리면 안 된다나? 흐흐흐, 덕진 할매가 그 말을 듣고, 쟬 천화정으로 데려왔잖아요.”
식당으로 가는 길.
쫄래쫄래 바쁘게 다니는 소녀를 보며, 진화를 데리고 가던 하인이 알려 준 말이었다.
쓸데없이 부지런해서 어릴 적 진화의 개미를 숱하게 날려 먹은 작자였지만, 변함없이 눈치 빠르게 진화의 시선이 닿은 곳을 놓치지 않았다.
“너무 어린데…….”
“어려도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요. 꼼꼼하기는 또 어찌나 꼼꼼한지……. 아침부터 도련님 드릴 수건을 데웠다가 식혔다가……. 하인들 사이에선 덕진 할매 후계자라 불릴 정도입니다.”
도련님께 지극정성인 것까지 덕진 할매와 똑 닮았다며, 하인이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진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먼저 알렸다라…….’
여전히 독살 위험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순 없었지만, 진화는 더 이상 소녀를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했다.
* * *
“우리 아들, 잘 잤니?”
어머니 팽연화의 인사에, 진화의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간밤에 평안하셨어요?”
팽연화는 물론 남궁가주와 가모 하후민에게 인사를 건넨 진화가 뭔가를 찾는 듯 눈을 굴렸다.
그 모습에 팽연화가 생긋 웃음을 보였다.
“아버지라면, 간밤에 임무에 나가셨단다.”
아버지 남궁경을 찾고 있었던 듯, 진화가 팽연화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진화가 남궁가주를 보자, 남궁가주가 조금 있다 설명하겠다는 듯 눈짓을 보냈다.
본래도 질문이 많지 않았던 진화는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남궁경이 없는 것과 함께, 오늘 아침엔 이상한 일이 또 있었다.
진화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아침 식사 자리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분은 사례교위이신 조정호 나리란다.”
“……남궁진화라 합니다.”
남궁가주의 소개에 진화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조정호를 살폈다.
조정호는 저를 수상쩍은 눈으로 살피는 진화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진화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 한 군데 각진 곳 없이 매끄러운 얼굴.
혼자 다른 빛을 받는 듯 대리석처럼 흰 피부.
시원스럽게 쭉 뻗은 오뚝한 코.
산이 선명하고, 가만히 있어도 웃고 있는 듯 끝이 올라간 입술.
‘무엇보다 저 눈!’
하늘이 그린 반달처럼 완벽한 호선을 그린 눈에 얇지만 선명한 쌍꺼풀.
백자처럼 맑고 매끄러운 흰자와 흑요석을 박은 듯 빛나는 눈동자.
티 없이 맑고 선명한 눈을 보자니, 황도에 있는 누이가 절로 생각났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짙고 산이 선명한 눈썹이랄까.
하지만 저 눈썹 또한 황제의 그것과 똑 닮지 않았는가.
‘같다. 얼굴이, 눈이 같다!’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조정호의 시선을 살피며, 진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평소 넋을 잃은 듯 저를 보는 이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에, 진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진화의 물음에 조정호가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이런, 시, 실례했소. 공자의 얼굴이…… 내가 아는 사람과 너무도 닮아서…….”
조정호의 말에, 진화보다 다른 가족들이 먼저 반응했다.
“어머, 우리 진화와 닮은 이가 있단 말인가요?”
“허허허, 우리 진화처럼 어여쁜 이가 세상에 또 있다니. 그래도 분위기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 진화처럼 정순한 기운이 배어 있는 사람은 어딜 가도 찾기 힘드니까요.”
“아…… 예.”
남궁가주가 조정호에게 진화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다만 자랑이라는 것이, 진화에게 사사로이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부터 정의무학관 저자를 마비시켰던 시험 이야기까지, 하나같이 진화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들이라는 게 함정이랄까.
진화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조정호는 그 모습마저 눈을 떼지 못했다.
아침 식사 내내.
남궁가주는 진화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권하고, 가모 하후민은 진화가 좋아하는 것들을 앞쪽에 모아 주었다.
팽연화는 식사 내내 진화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양자지만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하더니.’
조정호가 그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보았다.
고기와 버섯에 손이 많이 가는 식성이 황제를 닮았고, 중간중간 제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황제를 닮았다.
‘자꾸 그렇게 생각해서인가? 앞태, 옆태, 하다못해 속눈썹까지 누이와 똑 닮았구나!’
조정호는 오왕부의 왕비가 어떻게 첫눈에 진화를 황자로 의심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황후의 얼굴을 아는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아들이라 할 정도였다.
‘안 돼! 속단하기는 너무 일러. 무려 천자의 아들이다!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확신이 설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해!’
조정호는 당장 진화의 손을 잡고 황도로 가자고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그러는 동안, 진화는 점점 더 날카로운 눈으로 조정호를 보고 있었다.
‘대체 뭐지? 수상한 작자로군. 황도의 사례교위라 했지만, 교위가 귀천성의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경계해야겠어.’
진화는 조정호가 수상한 기미라도 보이면 곧바로 베어 버리리라 생각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 * *
조정호는 내내 진화의 곁에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대신 식사 때마다 진화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진화는 자꾸 제 주변을 맴돌며 저를 관찰하는 조정호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그렇게 조정호와 진화가 서로를 관찰 혹은 감시하며 하루를 보내는 동안.
낮이 지나고 다시 깜깜한 밤이 찾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잠자리에 드는 듯하던 진화가 번쩍 눈을 떴다.
조정호 때문에 창천원 전체에 기감을 펼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진화는, 창천원의 기운이 흐트러지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수상한 작자가 움직인 건가?’
창천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
빠르게 담을 통과하는 기척을 느끼며, 진화가 검을 잡고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창천원을 들어온 기척이 천화정으로 다가왔다.
“……!”
쉐에에에엑-----!
진화가 다짜고짜 검기부터 날렸다.
익숙하지 않은 기운.
어머니가 있는 곳에 침범한 것만으로도, 진화에게는 그자를 공격할 이유가 충분했다.
스슷-!
퍼-----엉!
진화의 검기를 피한 인영이 급히 다른 쪽 풀숲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진화의 시선이 그를 놓치지 않았다.
쉐에에엑----!
휘이익!
진화의 검기를 피해, 검은 복면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진화도 땅을 박차고 올랐다.
챙-! 챙!
파지지지직--!
진화는 공중에서 단검을 휘두르는 복면인의 공격을 검의 방향을 바꿔 막아 내고, 왼손에 모은 뇌전을 복면인의 명치에 꽂았다.
퍼---억!
쿵!
복면인이 땅에 처박히듯 떨어졌다.
하지만 안심할 시간은 없었다.
처음엔 하나만 느껴지던 기척이, 창천원 뒤쪽에서 수십 개씩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화가 검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한 것은, 사방에서 남궁세가 무사들이 이미 창천원을 빼곡하게 에워쌌다는 것. 그리고 낯선 인기척들이 나타난 곳이 다른 곳도 아닌 청림(靑林)이라는 것이었다.
‘스승님!’
진화가 청림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그때.
진화의 뒤쪽, 진화가 나온 천화정에서 모골이 송연한 살기가 날아들었다.
‘……!’
진화가 뒤를 돌아보는데, 검은 등이 진화의 앞을 막았다.
* * *
천주산 자락에서부터 내려오는 청림.
겹겹이 성벽과 담장, 그리고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경계를 서는 앞쪽과 달리, 남궁세가의 뒤편은 푸르디푸른 숲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적들의 침입을 허용한 적 없는 남궁세가였다.
바로 청림 때문이었다.
온갖 기관진식과 함께 의도적으로 음과 양의 조화를 비틀어 놓은 그곳을, 하늘의 이치 속에 태어난 생물이라면 뉘라서 견딜 수 있으랴.
땅에 흐르는 음기와 양기는 걸음과 함께 뼈를 얼릴 듯 차다가도 온몸을 태울 듯 들끓었다.
게다가 나무에 흐르는 습한 기운은 음습한 안개를 만들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침입자는 한 걸음도 떼기 힘든 숲에서 금방 멈춰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숲을 흐르는 공기의 부조화 속에서,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청각과 후각, 통각을 잃어 가며 천천히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것도 모자란다면, 청림을 지키는 주인이 천벌과 함께 시체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리리라.
“허, 참. 오랜만에 제자가 왔다는데, 재수탱이 가주 조카가 왜 청림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는지 궁금했는데…….”
어슬렁어슬렁.
궁둥짝을 긁으며, 청림의 주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요즘 암살자들은 참 목숨 귀한 줄을 몰라.”
제왕의 밀검(密劍).
그러나 의천검주라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한 사내, 남궁호명이 집 앞마당을 침입한 남자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침입자는, 여전히 남궁호명이 어떻게 저를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이미 들켰으니.
침입자, 아니 암살왕 교혼은 천천히 미끄러지듯 그림자를 타고 남궁호명 앞에 섰다.
“숲에 기어들어 온 다른 놈들은 네가 끌고 온 놈이 아닌가?”
남궁호명의 물음에 암살왕 교혼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른 놈들은 대체 누구야? 다들 널 따라 들어온 듯한데. 놈들은 몰랐나 보군. 귀가 멀고 통각이 잘리지 않는 이상, 청림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한데 말이야.”
남궁호명은 처음부터 암살왕 교혼이 올 것을 알고 있던 사람 같았다.
아니, 남궁세가 전체가, 암살왕 교혼과 그를 쫓아온 다른 무리를 알고 있었던 듯했다.
쉐에에엑--!
챙! 챙-!
안개가 조금 걷히더니, 막힌 물꼬가 트이듯 숲 전체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콰----엉!
“아, 그놈들. 숲은 망치지 말라니까.”
남궁호명이 숲 한쪽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암살왕을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네 귀와 코, 혀를 망가뜨린 놈이 지금 다른 놈을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야. 그놈이 이번에는 네 대가리를 부순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 숙부인 내가 대신 부술 수밖에.”
암살왕 교혼은 아까부터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사방에 깔려 있는 푸른 기운이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걸어오는 저 남자에게 이제까지 단 한마디도 못 하고 있는 이유였다.
‘청림에 저런 자가 있었다니! 제왕검도 아니고, 대체 저자는 누구지?’
암살왕 교혼의 검은 눈동자가 조용히 떨렸다.
그때.
퍼-------엉!
우르르르르—쾅! 쾅---!
창천원의 안쪽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마치 하늘이 분노한 듯, 푸른빛이 끊임없이 번쩍거렸다.
“이런, 쯧.”
번개를 본 남궁호명이 심각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리고 여유가 사라진 얼굴로 암살왕 교혼을 노려보았다.
“번개가 저렇게 사나운 것을 보면, 내 제자가 화가 많이 났나 봐.”
남궁진화가 저렇게 분노할 일은 제 식구들과 관련한 일뿐이라.
남궁호명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어서 끝내자고.”
창궁무애단과 천풍대연단이 남궁의 방벽, 철옹성이라 불리는 건, 남궁의 검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
전쟁 이후 처음으로 제왕의 밀검이 검을 들었다.
숲에서는 제왕무적단이 침입자들의 인기척을 모조리 지워 가고 있었다.
콰광광---쾅!
하늘에서 다시 번개가 내리치고, 남궁호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암살왕 교혼의 목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