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따를 화(化) : 수면 위로 떠오른 진실(3)
십팔 년 전.
하늘은 어찌하여 무도한 자들에게 큰 힘을 주었는지.
사방에서 무도한 자들이 들끓었다.
선과 악이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에서 그 경계의 질서가 무너졌다.
강자는 약자에 대한 인의를 잊었고, 사람들 간에는 신의가 사라졌다.
이를 바로 잡을 황제는 방종함에 절제를 잃었고, 신하는 황제에 대한 충의를 잃었다.
문화와 질서는 흐려지고 이성과 절제는 무너졌으며, 세상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약육강식의 야만과 살육의 본성만이 들끓게 되었다.
결국엔 신하가 황제의 존엄을 무너뜨려 혁명을 외쳤다.
제국이 무너지고, 모든 세상이 혼돈에 빠졌다.
하남성 낙양(洛陽).
궁인의 복색을 갖춰 입은 여인이 차마 민망하고 죄송한 기색으로 침상에 앉은 여인을 재촉했다.
“마마.”
“후우…….”
상궁 나인의 재촉과 아이를 꼭 안고 떼어 놓을 줄 모르던 여인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히잉. 히잉.”
안겨 있던 어미의 불안을 알아서인지,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이구, 우리 왕자님, 우리 영특한 왕자님이 어미의 심기가 좋지 않은 걸 느꼈나요? 아니에요, 나쁜 일이 아니랍니다.”
여인이 말을 알아들은 듯 금세 칭얼거림을 멈춘 아이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맞은 두 번째 겨울이었다.
왕실의 사내아이가 첫 돌까지 살아남았다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바로 등에 인주를 찍는 것이다.
아이가 더 크기 전에 작은 크기로, 붉디붉은 색료를 넣고 앞으로 무탈하게 클 수 있도록 홍복(紅福)을 비는 것이다.
이 시대의 아이는 태어나 일 년이 첫 고비, 그다음 다섯 해가 두 번째 고비, 조금 자라서 십 년이 세 번째 고비라.
첫 번째, 두 번째 고비엔 병마와 굶주림으로 죽고, 세 번째 고비에는 전쟁에 휘말려 죽을 가능성이 컸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왕실의 아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여인이 상궁 나인에게 아이를 주고, 명성 높은 법사가 달궈진 인두에 색료를 넣었다.
그 옆에는 궁의가 얼음주머니와 가시나무 껍질을 발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아기 왕자님, 조금만 아프고 말 거예요. 걱정 마세요.”
상궁 나인의 목소리에 안정을 얻던 아이의 뽀얀 등에, 의원이 달궈진 인두를 찍었다.
치이익.
뽀얀 살갗이 살짝 타들어 가고.
“으아아아아앙-----!”
자지러질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여인이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귀한 얼음주머니가 아이의 등에 대어졌지만, 아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허허허, 고놈 목청 하나는.”
“조왕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방 안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는데, 조왕이라 불린 사내는 같이 무릎을 꿇으려는 여인을 말리고 아이를 받아 안았다.
“흐에에에엥--!”
“허허, 이놈, 아비를 보는데 인사를 하진 못할망정 계속 그리 울 것이냐?”
“흐엥! 흐에엥-!”
“그래, 그래, 아팠구나, 아팠어. 하지만 네 형제들도 하였고, 아비도 했고, 아비의 형제들도 한 일이다.”
“흐에에에엥-!”
“음,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구나. 그리 아프냐?”
조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음주머니를 떼어 보자 살갗이 붉긴 하지만 화기는 가신 듯 보였다.
“이놈, 가만 보니 속은 게 분해서 우는가 보구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 같으냐? 허허허, 요놈 성질머리가 나를 꼭 닮았구나. 허허허허!”
조왕은 유쾌하게 웃으며 아이의 오동통한 볼을 쓰다듬었다.
조왕 호방한 웃음소리에 아이도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잠시 후 아이는 한참 용을 쓴 것이 피곤했는지 조왕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허허, 녀석아. 이 아비의 품을 침대로 쓰는 것은 네 형제들 아무도 못 해 본 일이다.”
“광영임을 알 것이옵니다.”
조왕이 자신의 품에 편히 잠든 아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모습에, 여인 또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몰라도 하는 수 없지. 아비가 아들을 안아 주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을. 이 참담한 시국에 너라도 나와 왕실의 기쁨이 되어 주었으니 벌써 효자로구나.”
“전하…….”
새근새근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니, 조왕 또한 여느 아버지처럼 가슴이 뻐근해졌다.
부자의 모습을 보는 여인의 눈도 먹먹했다.
제 품에서 편히 잠든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온기.
자신을 걱정하는 사랑하는 여인의 눈길.
잠시 근심을 잊고 행복감에 젖었던 조왕은,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 역자 놈이 감히 칭제(稱帝)를 했다는구려.”
나지막한 조왕의 말에 여인의 안색이 흐려졌다.
황도에서 쫓겨 나와 피신을 한 참에 황도에서는 황제가 바뀌었다니.
시국이 점점 그들에게 불리했다.
“종이 주인을 죽이고 주인의 일가는 이리 밖으로 떠도는 처지가 되었으니. 형님께서 마침내 마음을 먹으신 듯하오.”
“그럼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어찌 되긴. 형님의 곁에서 싸워야 하지 않겠소. 신하 놈의 눈을 피해 낙양까지 내려와서야 겨우 황실의 일족 노릇을 하지 않았소. 이제라도 내 몫을 해야겠지.”
단단하게 결심이 선 조왕의 눈빛에, 여인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곧 제자리를 찾으실 겁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이 녀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지.”
잠든 아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조왕의 입가에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맴돌았다.
“나라의 중대사가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아비 노릇을 해 준 자식들이 없구나.”
“어찌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전하께오서 이룩한 대업을 왕자들 모두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정화, 그대 또한 고생이 많아. 우리는 반드시 제국을 되찾을 것이오. 그때까지만, 조금만 참으시오.”
“신첩은 그저 전하께서 바라시는 일이 무사 형통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분에 넘치는 광영을 누리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래.”
여인의 말에 감동한 조왕이 그녀를 품에 안아 어깨를 토닥였다.
제 품에 와 준 것만도 과분한 여인이건만, 임신 중에 피난에 오르는 고초를 겪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어떤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견뎌 주던 여인이라.
소박한 말 한마디에도 감동을 담은 아내의 말은 피로에 지친 조왕에게 더없는 위안이 되어 주었다.
잠시 후, 한 나인이 침전에서 아이를 데려 나갔다.
조왕과 여인은 실로 오랜만에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날.
짧은 하룻밤은 그조차 평안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우당탕탕! 쿵! 쿵!
“마마! 마마!”
숨소리도 죽여야 할 왕과 비의 침전 밖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누구냐!”
“마마! 마마! 습격이옵니다! 왕자마마가! 왕자마마께서 납치되셨습니다!”
“뭐라!”
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여인은 벌벌 떨리는 몸으로 기다시피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아가! 내 아기가……!”
“찾아라! 왕자를 찾아라!”
비록 역란을 피해 목숨을 구원하러 피난해 오기는 했으나, 왕의 후계가 납치된 일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낙양으로 피난 와 있던 조왕은, 제국 재건의 적정자라며 나선 황제의 친형제이자 가장 아끼는 아우 한유수였다. 게다가 그의 품에 잠든 왕비는 하남대부로 제후와 다를 바 없는 권한을 가진 조위련의 금지옥엽이라.
왕실의 후계이자 하남 대부의 외손이 납치된 일은, 세상의 질서마저 바꾸었다.
* * *
“제국이 귀천성과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당시의 조왕, 현 황제 폐하께서는 군권을 가진 대장군이셨고, 제 부친이신 하남대부는 황실의 금권을 쥐고 계셨으니까요.”
“흐음…….”
조 교위에게 황실의 비사를 들은 남궁가주가 한숨을 뱉었다.
“황실의 관여에 그런 비사가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제게 꺼내신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갑니다만…… 역시, 물어야겠지요?”
남궁가주가 힘없이 웃었다.
애초에 사례교위가 왜 갑자기 남궁세가에 나타났겠는가.
그는 처음부터 남궁진화를 보러 왔다고 말했었다.
문제는.
‘경이와 제수씨…… 아니, 진화 그 녀석이 더 문제로군. 과연 받아들이려고 할까?’
자신과 가족들은 그렇다 해도, 남궁경과 팽연화 부부가 진화에게 쏟는 사랑과 진화가 두 사람에게 보이는 애정을 곁에서 봐 왔기에, 남궁가주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의 아드님이 확실합니다.”
“증거는 있습니까?”
“애초에 황도에 남궁진화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 황후마마와 꼭 닮은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닮았습니까?”
남궁가주의 말에 조 교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설마 황자님이, 황후마마와 그리 닮았을 줄은 몰랐거든요.”
조 교위의 말에 남궁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조 교위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그렇군요. 하나!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고 많습니다. 그저 닮은 외모가 아니라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확실한 증거를 내놓기 전엔 절대 진화를 내줄 수 없다는 듯, 남궁가주의 눈빛이 단호했다.
조 교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궁가주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속을 감추는 것이 닳고 닳은 조정 대신들보다 더 능숙하군. 황제의, 그것도 황후 사이의 적통 황자다. 그간 적통 황자를 보살펴 온 것만으로도 크게 치하를 받을 것인데…… 무슨 생각이지?’
단순히 동생 내외의 아이를 빼앗기기 싫어서라기엔, 진화가 황자가 되었을 때 남궁세가에 가져올 이득이 훨씬 많았다.
하여 조 교위는 남궁가주의 의도를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황후마마는 보기 드물게 역천지체를 타고나셨지요. 황자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무림에는 광마제가 역천지체를 찾았다는 사실이 꽤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꼭 닮은 얼굴에 물려받은 체질, 게다가 그 눈.”
“눈?”
“황후마마의 눈도 가끔 빛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천뢰제왕신공으로……!”
“같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조 교위의 물음에 남궁가주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리마제와의 전투 때, 왜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가 했더니.
진화만 살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 교위의 말처럼, 진화 외에, 남궁호명이나 다른 천뢰제왕신공을 익힌 사람들 중 눈 속에 번개를 품은 이는 없었다.
“천자의 아들입니다. 황제 폐하의 확신이 있다면, 감히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못할 것입니다.”
“……소리마제에게 장부가 있습니다. 진화가 광마제의 최종 제물로 그자에게 납치된 것이라면, 반드시 그 장부에 기록이 남았을 겁니다.”
남궁가주의 신중한 말에 조 교위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살인시문이라는 것이 황도에 있다지요? 태복령을 심문하고 있으니, 지금쯤 금군들이 의심되는 곳은 샅샅이 뒤지고 있을 것입니다.”
“흐음…….”
사실 누구라도 진화를 보기만 한다면 황제와 황후의 아들이라 확신하겠지만, 황실의 일이 그리 허술하게 처리되진 않는 법이었다.
황제까지 나섰으니.
금영들이 진화에 대한 정보는 물론 연관된 모든 것을 파헤치고 있을 것이고, 황도의 암살문이란 암살문들은 모두 그 제물에 관한 것을 토해 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증좌가 나타날 때까진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겠습니다.”
남궁가주의 말에 조 교위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이렇게까지 설명을 했는데,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라니.
“다른 이도 아닌 천자의 아들이오! 폐하께서 찾으신단 말입니다!”
조 교위는 남궁가주의 태도가 괘씸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궁가주가 이어서 하는 말에, 조 교위가 눈을 크게 떴다.
“폐하를 뵙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다만, 진화가 아닐 경우…… 모두가 받을 상처, 특히 진화가 받게 될 상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말이었다.
물론 조 교위와 황제 또한, 일이 잘못되어 황후가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하긴 했었다.
하지만 남궁가주는 동생 내외도 아닌, 진화를 우선하여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이 힘들고 아팠던 아이입니다. 그래서 동생 내외는 물론이고 남궁세가 모두의 아픈 손가락과 같은 아이입니다. 지금도 남궁세가의 양자로, 제 딴에는 이리저리 처신에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부디 진화의 사정을 헤아려 주시지요.”
“…….”
남궁가주의 부탁과도 같은 말에 조 교위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천자의 아들!
오직 진화를 확인하고 데려갈 생각만 하고 있던 조 교위에게, 처음으로 남궁가주는 물론 남궁세가가 진화에게 품고 있는 깊은 애정이 와닿았다.
생각에 빠진 듯, 조 교위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조 교위가 아닌, 황제의 외숙 조정호의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 역시, 오래도록 잃어버린 자식을 기다리신 분들입니다. 하나, 황자님 본인의 충격이 가장 클 것이라는 가주님의 말도 옳습니다. 당장 황자님을 모셔 가지 않겠습니다. 조금 더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려 보지요.”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쪽이 감사합니다.”
조정호가 깊게 고개를 숙여 남궁가주에게 감사를 표했다.
* * *
어두컴컴한 밀실.
횃불이 켜지고, 군사들과 궁인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기대 있던 여인이 몸을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사들이 들어와 여인을 끌어냈다.
“이, 이거 놔라!”
겁에 질린 여인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감히 뉘의 몸에 손을 대는 게냐! 나는 왕비다! 오왕의 정비란 말이다!”
하루아침에 자소궁에 발이 묶이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금군에 의해 황도로 끌려왔다.
그리고 계속 어둠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왕비는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
태복령이 역모에 얽혔나.
아니면 그 일이 발각되었나.
자신은 아무 연관이 없다.
실제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또한 저와 그 일을 연관 지을 사람도 없었다.
‘없어! 없어! 나는 죄가 없어!’
“이거 놓지 못할까! 내가 누군지 알고, 아악!”
패악을 부리듯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는 오왕비를 끌어낸 군사들이 바닥에 그녀의 몸을 눌렀다.
“조용히 하시오.”
“으윽! 읍! 윽!”
무감정한 말과 함께, 궁인들이 그녀의 입에 천을 쑤셔 넣고 단단히 묶었다.
놀라 발버둥을 치는 오왕비의 사지도, 궁인들이 꽁꽁 묶어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젊은 여자 궁인들이 오왕비의 양쪽 팔을 잡고 단단히 버텼다.
“읍읍!”
그때였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더 많은 내관과 궁인, 군사 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땅바닥에 억지로 처박힌 오왕비의 머리 앞으로, 황금 가죽신과 황금 용포가 보였다.
‘……!’
오왕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난리를 치던 것과 달리, 오왕비는 그저 바닥을 파고 들어갈 듯 몸을 낮췄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황제의 손짓에 따라 오왕비를 잡고 있던 궁녀들이 그녀의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흑!”
한때는 무섭게 연모했던 얼굴을 마주했건만, 오왕비의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황제의 손이 거칠게 오왕비의 턱을 움켜쥐었다.
“으윽!”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오왕비의 표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황제가 그녀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맞군. 그때 황후에게서 황자를 받아 간 궁인이로구나! 감히 천자의 아들을 훔치고, 궁궐을 차지하고 있었단 말이지!”
“윽!”
오왕비의 턱을 쥔 황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오왕비는 턱이 부서질 듯한 고통에 신음했지만,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는 황제의 안광에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태복령과 네년! 절대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피육을 저며 젓을 담그고, 산 채로 돼지우리에 먹이로 던질 것이다! 천하디천한 마부의 집안이니, 삼족을 모두 미친 말의 발굽 아래에 던져 주마! 네년의 아들들 또한, 내 아들이 당했던 고통을 네년 앞에서 똑같이 당하게 해 주마!”
“흐, 흐윽!”
전신에서 쏟아지는 지독한 증오와 살기에, 오왕비는 눈물을 흘리다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황제는 그런 오왕비를 던지듯 놓고, 군사들에게 명했다.
“이년은 태복령의 옆에 던져 놓고,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토하게 하라. 그리고 오군에 있는 오왕과 이년의 자식들도 잡아 와라.”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천자의 분노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황제의 손에는 금영이 보내온 문서가 구겨져 있었다.
그의 아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빼곡하게 적힌 그 보고서를, 황제는 주먹으로 움켜쥐고 놓을 수 없었다.
“내 아들을 데려와라! 조 교위에게 당장, 황자를 데려오라 전하라!”
황제가 포효하듯 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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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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