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따를 화(化) : 수면 위로 떠오른 진실(5)
남궁세가의 매응이 하늘을 날았다.
하룻밤이면 중원 전역을 오갈 수 있는 매응이 정의맹과 남궁세가를 부지런히 오갔다.
하룻밤 사이에 천하가 달라졌다.
-역천마제가 부활했다!
남궁가주는 반가운 마음으로 제왕검의 전서를 받았다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물론 그가 제왕검에게 보내는 전서에 담길 내용도 예사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때에 자리에 없었던 제왕검을 원망한 것도 잠시, 남궁가주는 제왕검에게 알려야 할 내용을 적었다.
-황궁에서 진화를 찾음. 진화가 실종된 황제의 아들일 가능성 높음. 황실에서 소리마제의 장부 확보.
“아, 이런!”
제왕검에게 보낼 전서에 그간의 일을 적은 남궁가주는, 깜박했다는 듯 다시 붓을 들었다.
-소리마제와 살인시문 습격. 처단함. 아버지 없이.
마지막에 짙은 방점을 찍은 남궁가주가 싱긋이 웃었다.
그리고 매응의 다리에 달린 작은 통에 전서를 넣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정의맹은 아버지의 전서와 내 전서를 한 번에 받는 건가? ……난리가 났겠군.”
남궁가주는 지금쯤 정의맹이 초토화되었을 군사부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역천마제의 부활과 실종된 황자가 남궁에 있었다는 내용이니.
얄미운 제갈가주는 소리마제의 장부에 중점을 두겠지만, 남궁진휘는 꽤 놀랐을 것이다.
‘흐흐.’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아들이 놀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동생의 말처럼 자신은 고약한 아비가 맞는 듯했다.
게다가 정보가 한꺼번에 간 것이, 정의맹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돌아올 매응에는 두 개의 정보를 고려해서 대책을 보내올 것이다.
다음 날 날이 밝기도 전.
남궁가주의 예상대로 정의맹에서 급전을 보내왔다.
“흐음…….”
전서의 내용은 남궁가주의 예상대로였다.
다만 남궁가주의 입에서 침음성이 나온 건, 그의 바람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 * *
남궁가주의 예상대로 간밤에 정의맹은 난리가 났었다.
탕-!
“내가 직접 맹주님께 갈 것이네. 자네는 급속히 연맹회의를 소집하게! 어서!”
정의맹 총군사인 제갈가주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제갈가주는 나가던 걸음으로 부군사 남궁진휘에게 명을 내렸다.
그런데 남궁진휘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고 있나?”
“……지, 진화가…….”
남궁진휘는 보기 드물 정도로 멍-한 얼굴이었다.
“아, 놀랍긴 하네. 하지만 축하할 일이 아닌가. 이것을 잘 엮어서, 황실의 손에 있는 소리마제의 장부를 우리가 가져오는 것이 시급한 일이네.”
제갈가주도 그 내용에는 놀라긴 했다.
다만, 그의 감상은 ‘보통 자질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역시 보통 출신이 아니었군.’ 정도뿐이랄까.
제갈지현의 시모가 되는 오왕비가 끌려갔다는 소식에도 덤덤했던 제갈가주니, 별로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진화는…….”
“부군사, 정신 차리게! 역천마제가 부활했어!”
제갈가주가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 남궁진휘에게 큰소리를 내었다.
곤경에 빠진 제 여식과 남궁진화, 그리고 황실.
그들보다 중요한 것이 중원과 천하였다.
귀천성의 부활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어서 연맹회의를 소집하게. 살인시문에 남아 있는 흔적을 조사할 조사단을 구성하고, 황궁이 가지고 있는 소리마제의 장부를 가져올 방법을 찾아야 하네.”
“후우, 못난 모습 보였습니다.”
제갈가주의 단단한 눈빛에, 남궁진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남궁진휘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냉철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에 제갈가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마제가 깨어났다면, 곧 중원에 모습을 드러낼 걸세. 다른 마제들 역시 그 밑에 모이게 되겠지. 놈들의 움직임을 쫓는 데에, 그 장부는 꼭 필요해! 알겠나?”
제갈가주가 확인하듯 묻자, 남궁진휘가 슬쩍 입꼬리를 말았다.
가끔 이렇게 제갈가주가 자신을 이끌어 줄 때마다, 그가 좋은 지도자이자 상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가에 연락해서, 진화에게 협조를 구해 놓겠습니다. 정의맹 차원에서 장부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다른 방법도 마련해 두는 것이 좋으니까요.”
“좋군! 움직이세.”
남궁진휘의 말에 제갈가주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갈가주 또한 조금만 자극을 줘도 잘 따라오는 남궁진휘가 기꺼웠다.
다만 제갈가주의 속내는 조금 복잡했다.
좋은 수하이자 믿음직한 후계자.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아들 제갈후현이 이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뜬금없이 소집된 회의였지만, 빠진 곳은 없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평소와 같은 다툼도 없었다.
연맹회의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이 역천마제에 대한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일의 처리는 무엇보다 빨랐다.
“현무단은 종남에서 복귀 중입니다.”
“백호단은 여전히 청성에 있습니다. 놈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있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청룡단은 임무 중입니다. 아시겠지만, 중원 전역의 역천비록을 회수 중인데, 몇 가지는 사패천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흐음. 맹에 남아 있는 무단은 세 곳인가?”
제갈가주와 남궁진휘가 보고를 하고, 맹주를 비롯한 문파의 장문인이나 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형식이었다.
중원 무림에 제갈가주보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 낼 인물이 없었으니.
모순적이게도 진짜 다급한 상황에 오고서야 모두의 신뢰가 제갈가주와 군사부를 향했다.
“황도로 조사단 겸 호위단을 보내고, 십이좌회와 사패천에 따로 전서를 보내겠습니다. 지금은 놈들이 완전히 힘을 찾기 전에 개별적으로 죽이는 것이 최선입니다. 종남에서 환마제를 죽이고, 남궁세가에서 소리마제를 죽였으니…… 일단은 남은 마제들의 행방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속가 제자들과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얻은 정보는 개방으로 보내겠습니다.”
“개방은 백매단과 협조해서 움직이겠소.”
“관건은 소리마제의 장부를 얻는 일인데…….”
맹주의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남궁진휘에게 닿았다.
“적절한 조치는 모두 취해 두었습니다.”
“부탁하겠네.”
남궁진휘가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의맹주가 감사의 의미를 전했다.
마치 귀천성과의 전쟁 때처럼, 전쟁을 치르듯 보고와 통보로 진행된 연맹회의 마치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할 일을 위해 바쁘게 흩어졌다.
제갈가주와 남궁진휘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제갈가주가 슬쩍 남궁진휘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정말 그들을 보낼 건가?”
“그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남궁진휘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하지만 어쩐지 단호해 보이기까지 한 입매에, 제갈가주가 피식 웃고 말았다.
“훗, 어지간히도 동생을 내주기 싫은가 보군.”
“…….”
제갈가주의 말에 남궁진휘가 굳게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화가 떠나야 하는 날.
마지막 만남은 아닐 것이라 믿으며 아쉽게 마차에 올랐다.
마차를 이용해 육로로 움직인다면 거의 석 달 거리라, 뱃길과 육로를 타고 최단 거리를 가기로 한 터였다.
마지막으로 남궁가주가 말을 출발하려는 조 교위를 붙잡았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정말 꼭, 같이 가야 하는 겁니까?”
“황명입니다.”
조 교위는 조금 의아한 눈으로 남궁가주를 보았다.
진화가 걱정된다고 하기엔 조금 과했기 때문이다.
“저놈의 목숨은 조 교위께서 한 번은 살려 주신다고 했지요?”
황제의 명에 의해, 진화의 부모인 남궁경과 팽연화까지 황도로 가게 되었다.
남궁가주가 걱정하는 쪽은 진화가 아닌 동생인 듯했다.
조 교위는 남궁가주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 말했습니다만…… 하하하, 뭘 그렇게 걱정하시는지요. 동생분의 성품이 화통하여 황제 폐하께 무례를 범할 수 있다지만, 무려 황자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분입니다. 황자님을 봐서라도, 어지간해서는 황제 폐하께서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아무래도 진화는 다른 이를 구해야 할 듯해서 말입니다.”
“……네?”
“허허허! 아닙니다.”
조 교위가 의아한 듯 남궁가주를 보자, 남궁가주는 그저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잘 부탁드립니다.”
남궁가주의 의미심장한 인사를 뒤로하고, 조 교위는 진화 가족이 탄 마차를 출발시켰다.
* * *
조 교위가 황도에 출발을 알렸을 때, 황제는 황후에게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어, 어떻게! 그 아이가! 그 아이가 진정 살아 있는 것입니까? 아아!”
굵은 이슬방울이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황후가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후!”
놀란 황제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황후를 부축했다.
주변에서 놀란 궁인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국의 천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다니!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이가 바로 황후였다.
경국지색(傾國之色), 해어지화(解語之花), 일고경성(一顧傾城).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만으로도 보는 이를 사무치게 만드는 것이, 세상에 미인을 가리키는 말들은 오로지 황후를 가리키는 듯했다.
수많은 후궁을 두고서도 황후에 대한 황제의 애정은 조금도 시들어짐이 없었으니.
천하제일 미인이라 칭송받는 미모와 어진 성품, 하남 조씨 일문의 금지옥엽.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제국의 여인이었다.
다만 황후에게 단 하나 단점이 있다면, 황후가 낳은 적통 황자가 없다는 것.
이전의 정비에게 얻은 아들이 하나 있기는 했으나, 적통 황자가 없다는 것은 황제의 약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후는 아들을 잃으면서 심병을 얻은지라, 황제의 서슬이 무서워 누구도 그녀에게 적통 황자를 낳으라 말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제 황제와 황후의 단 하나 있는 약점마저 일거에 해결이 되었으니, 온 황도가 들썩일 일이었다.
“아이는, 아이는 건강한가요?”
“남궁세가에서 부족함 없이 커서, 무림에서 알아주는 신진 고수라 하오.”
“아아, 무림이라니! 다, 다치진 않았을까요?”
벌써부터 황자의 걱정부터 하는 황후를 보며, 황제가 천천히 하나하나 답해 주었다.
다만 진화가 귀천성의 제물이 되어 당한 일만큼은 알리지 못했다.
심병이 들어 몸이 약해진 황후에게 더한 충격을 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황자가 묵을 방을 꾸며야겠습니다. 궁이 준비되기 전에, 제 궁에서 묵게 해도 되겠지요?”
“이를 말인가.”
“제 손으로 직접 꾸며야겠어요. 아! 황자를 귀하게 키워 주신 분들의 처소도 제 손으로 해야겠어요! 아아, 이 은혜를 다 어찌할까?”
“황후의 뜻대로 하시오, 내 마음도 그대의 마음과 같으니.”
황제는 벌떡 일어서서 의지를 모이는 황후를 보며 기꺼운 듯 말했다.
그렇게 한참, 황후가 상기된 얼굴로 황자에게 해 주고 싶은 것들을 늘어놓고, 황제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이어 갔다.
늘 사이가 좋은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웃음이 끊이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만 황제의 일과가 늘 여유가 없어 오래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내 나중에 다시 오겠소.”
황제가 아쉬움에 황후의 얼굴을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후가 황제의 손에 자연스럽게 얼굴을 묻었다가 배웅을 위해 함께 일어섰다.
일어선 황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리고 조용히, 조심스레, 참았던 것을 물었다.
“……황자를 납치한 이들은 다 잡아들였나요?”
황후의 물음에, 황제가 흠칫했다.
황제는 일의 전말에서 황후가 충격받을 만한 것은 모두 숨겼다.
하지만 총명한 황후는 그 마음마저 헤아리고 있다가, 마지막에서야 한마디 물은 것이다.
“……연루된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였소. 귀천성이라는 불측한 무리가 남아 있으나, 무림과 협력하여 곧 모조리 처단할 것이오.”
“그들의 신분이 높아 벌이 가벼워질까요?”
“……!”
황제는 황후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뭔가를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제게서 뭔가를 눈치챈 것일까.
황제의 눈을 보며, 황후가 애처롭게 미소를 흘렸다.
“폐하께서 신첩에게 숨기실 때는, 필시 제가 가까이한 자들이 있었겠지요. 그들에 대해 말을 할 때 제 눈을 피하셨습니다. 신첩, 무지하고 어리석으나 폐하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지요.”
애써 힘을 내어 웃는 황후를 보며, 황제의 눈빛도 금세 촉촉해졌다.
그리고 황후를 살포시 품에 안았다.
“그렇지. 그대만큼 나를 아는 이도 없지. ……태복령과 그 집안이오. 여식이 한때 그대의 궁녀였소.”
황제의 말에 황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경란이…… 그렇군요.”
황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충격이 작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황제를 마주 안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걱정 마시오. 황자가 오면, 그 아이에게 물을 것이오. 원수들을 모조리 잡아다 그 아이의 앞에 꿇려 놓을 것이오. 그리고 황자가, 그리고 우리가 괴로웠던 만큼! 천자의 아들을 해한 자가 어찌 되는지, 세상에 본보기를 보일 참이오!”
“언제나 폐하를 믿습니다.”
한때는 친자매처럼 지낸 동무였던 여인의 얼굴이 황후의 머릿속에 스쳐 갔다.
곽경란에 대한 원망만큼,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아아, 아가! 내 아들!’
황후는 한참 황제의 품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침상에 엎어져 펑펑 울고 싶었지만, 자신은 어미였다.
이제 자식을 되찾았으니, 어미답게 강해져야 할 터였다.
“황자와 은인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요. 황실 가족들은 물론 대소 신료들의 가족까지 모두 초대하는 큰 연회를 크게 열어야겠습니다!”
황제의 품에서 고개를 든 황후가 씩씩하게 말했다.
* * *
진화 가족과 조 교위가 낙양 포구에 내려서자, 많은 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금군이 포구를 빼곡하게 둘러싼 가운데, 하남 조씨 일문이 제일 먼저 그들을 맞았다.
그리고.
“진화야----!”
그들 모두를 뚫고 남궁진혜가 달려왔다.
“……적호단이 온 것입니까?”
진화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남궁경은 진화의 물음에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우에에에엑--!”
남궁경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배 반대편에서 속을 비우고, 팽연화가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사이.
“누, 누님!”
“진화야! 내 동생! 이게 무슨 날벼락이니!”
당황한 군사들을 뚫고, 남궁진혜가 진화를 끌어안았다.
남궁진혜의 말에 조 교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흠흠.”
불편한 헛기침 소리.
숨이 턱 막히는 순간, 진화의 눈에 낯익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남 조씨 일문의 옆으로 당당하게 적호단이 자리하고, 적호단주 팽치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적호단이 아닌 척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