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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12)화 (212/425)

남궁마제

벼슬할 진(進) 응할 화(和) : 횡보행호거경(1)

사방에 깔린 금군.

그들을 보는 진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자신이 황자고, 황제와 황후가 찾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날 리 없었다.

진화는 지금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기분이었다.

친부모라니.

이전 생에서는 없던 일이었고, 상상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진화는 뭔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황명을 받아 황도에 와야 했다.

심지어 부모님까지 함께 황명을 받은 터였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화의 온 신경은 부모님의 안전에 쏠려 있었다.

‘역천제가 부활했다니! 할아버님이 어떻게 그를 찾으러 가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천마제가 부활했다면 광마제도 곧 깨어날 거다. 귀천성이 전쟁을 시작할 거야!’

다급하게 변화하는 상황과 진화를 조여 드는 위기감 속.

진화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진화의 모습을 어른들이 모를 리 없었다.

툭.

남궁경의 손이 진화의 어깨에 얹어졌다.

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궁경을 보자, 옆에 있던 팽연화도 진화의 손을 잡았다.

“우리 아들, 걱정하지 마렴.”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비가 널 지켜 주마. 황제가 아니라 황제 할아비라도 널 건들 수는 없다.”

어머니의 따뜻한 위로와 아버지의 듬직한 허세.

“…….”

진화가 금세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부모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정호도 보고 듣고 있었다.

‘정말로 황자님을 많이 아끼는군.’

사랑받고 커서 다행이다.

조정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아무리 그래도 사방이 금군들인데, 황제 할아비라니……. 남궁가주의 염려가 과한 것이 아니었어. 조심해야지.’

조정호는 진화와 함께 마차에 오르는 남궁경, 팽연화 부부와 금군들을 뚫고 달려오던 남궁진혜를 훑어본 뒤, 더욱 힘을 주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일단 하남 조씨 장원으로 갈 것입니다.”

조정호가 힘을 내어 일행을 이끌었다.

* * *

진화와 남궁경, 팽연화 부부는 곧바로 황궁에 들지 않고, 조정호를 따라 하남 조씨의 장원으로 갔다.

“정식 입궁까지는 조금 더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입조 전에 황궁 예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장원에 도착한 뒤에 나누시지요.”

조정호의 설명에 남궁경, 팽연화 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구에서 하남 조씨 일문인 듯한 사람이 조정호에게 뭐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도 황제와 이야기가 된 듯싶었다.

하긴, 황제를 만나고 황제의 아들임을 확인받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있나.

다만 조정호가 진화와 부부에게 간단하게나마 이동 중에 설명을 하는 것은, 그들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잠시 후.

금군의 호위를 받은 진화 일행이 하남 조씨 장원에 도착했다.

“와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황후와 사례교위의 친부이자 황제의 스승이라는 태사 조위례의 장원이었다.

애초부터 하남 조씨 일문은 이곳 하남과 홍농 일대를 아우르던 대호족이었으니.

낙양에 있는 하남 조씨의 장원은 황궁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장원 정문에는 황제가 직접 내린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학장원(賢鶴場院).

“어서 오십시오.”

현학장원 가솔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당장 마중 나온 가솔들의 수만 해도 수백 명을 넘었으니.

진화와 남궁경, 팽연화 부부는 물론 남궁세가의 호위들과 적호단까지, 한꺼번에 초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조정호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손님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적호단과 남궁세가 무사들은 별채로 안내되고, 조 교위는 진화와 남궁경, 팽연화 부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작은 문 하나를 넘어가자, 더 많은 사람들이 진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쪽빛의 청순한 문사의를 입은 노인이 눈에 띄었다.

근엄한 얼굴로 진화를 향해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그가 바로 하남 조씨의 수장이자 진화의 외조부인 조위례인 듯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조위례가 남궁경, 팽연화 부부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뒤에서 수많은 하남 조씨들이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어이쿠! 별말씀을요!”

놀란 남궁경, 팽연화가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설마 태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인사를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조위례는 한참 동안 허리를 들지 못했다.

“은인들의 은혜를 어찌 다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남 조씨들이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은혜는 저희 부부가 받은 것이 더 큽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단지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조위례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어서, 양쪽 어른들의 고개가 점점 더 깊게, 깊게 내려갔다.

결국 남궁경이 힘을 주어 조위례를 일으키고서야 양쪽의 절이 끝이 났다.

그리고 조위례의 눈이 진화를 향했다.

“황자님, 황자님…….”

“…….”

진화는 저를 황자라 부르는 노인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무표정하고 근엄한 얼굴.

하지만 역시나 눈빛과 목소리에 물기가 촉촉하고, 진화를 향해 뻗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결국 진화가 조위례의 손을 잡았다.

“황자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집에, 잘 오셨습니다.”

집…….

진화의 마음에 조위례의 말 한마디가 깊게 남았다.

단단하게 굳은 땅바닥에 던져진 돌같이, 당장 어떤 변화를 만들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변함없이 근엄한 노인의 눈빛과 떨리는 손끝에서 전해지는 진심이, 진화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것만은 확실했다.

조위례는 가장 좋은 별채를 진화와 남궁경, 팽연화 부부에게 내주고, 그들은 물론 남궁세가 호위와 적호단에게까지 극진한 대접을 했다.

“모란만찬입니다. 이곳 하남의 가장 유명한 음식이지요. 계란채를 모란처럼 펼친 열여섯 가지 다른 국물 요리에 다시 열여섯 가지 고기 요리를 번갈아서 맛보는 것입니다. 실제 모란꽃을 장식으로 사용하지요.”

“어머. 우리 진화의 이름도 꽃 중의 꽃이라는 의미의 화(花) 자를 썼는데!”

조위례의 말에 팽연화가 적절하게 맞장구를 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렇습니까. 반가운 우연이군요. 황후께서도 함자에 같은 자가 들어갑니다. 하남의 꽃 중의 꽃이라, 났을 적부터 자태가 남달랐지요.”

조위례는 조심스럽게 진화의 친모인 황후의 이야기를 꺼내며, 촉촉한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이렇게 연이 이어지다니, 천륜이 달리 천륜이 아닌가 봐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진화는 아직 친모의 이야기가 낯설었으나, 팽연화는 달랐다.

어쩌면 애지중지 키운 아들을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상황이었건만, 팽연화는 오히려 조위례의 조심스러운 말들을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치며 이어받았다.

조위례는 그런 팽연화에게 시시때때로 감사를 표했다.

팽연화가 시종일관 진화만을 살피며, 진화가 최대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밤중에 조용히,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찾으실 겁니다. 두 분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황자님을 만나고, 은인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 하십니다. 다만 정식 입조까지 시간을 둔 것은,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황자님과 은인들을 불쾌하게 만들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험담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황실 예법에 무지한 것을 이유로 진화와 남궁세가를 헐뜯는 것을, 황제가 반기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밤중에 황궁에 들어가심을 불쾌하게 여기지 마시고, 부디 너그럽게 이해 바랍니다.”

“이해합니다! 하고말고요.”

“오히려 저희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위례의 말에 남궁경, 팽연화 부부는 물론 진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팽연화는 조위례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들어 있는 미안함을 읽었고, 조위례는 흐뭇한 눈빛으로 그 또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진화는 조위례를 비롯해서 황실이 남궁경, 팽연화 부부를 말만 은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신경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제 인생에 나타난 이물질 같은 존재들을 향한 진화의 경계심이 다시금 누그러졌다.

그렇게 황제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남궁경은 조정호를 따라 현학장원에 있는 교위들의 훈련을 구경하러 갔고, 팽연화는 조위례와 담소를 좀 더 나누기로 했다.

진화는 불편한 자리를 피해 익숙한 얼굴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어떻게 너희들까지 온 거지?”

“이렇게 한 조로 묶인 모양이에요. 당분간 적호단에 소속되어 함께 움직이게 되었어요. 그……쪽도, 복귀를 한다면 같이 움직이게 되겠죠.”

진화의 물음에 당혜군이 이전과 같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진화를 비롯한 갑 조와 함께 묶이는 것에 대해 한결같이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오히려 진화를 지칭할 때는 더 껄끄러워진 모습이었다.

진화는 그런 당혜군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한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거기엔 간식으로 내어 온 경단에 혼이 팔린 현오가 있었다.

“응? 아아, 음, 그렇다고 마냥 숨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역천마제의 부활 소식이 전해진 마당에,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현오였다.

혼현마제가 역천마제를 위해서 천살지체를 찾는 것이 다 알려진 마당 아닌가.

진화는 현오가 정의맹을 떠나온 것이 불안한 듯했다.

“마냥 숨어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

“아니, 그리할 수 없네! 나도 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놈들이 두려워서 피하고 싶지 않네. 부처님이 주신 삶을 소중히 해야지…… 숨어서 만두만 먹고 살 수 없네. 구운 고기와 삶은 고기, 이 맑은 고기탕까지 전부 먹고 살 것이란 말이네!”

“…….”

비장하게 말해 봤자, 결국 이제는 만두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이유가 분명했다.

진화와 일행이 식욕에 목숨을 거는 현오를 한심하게 보았다.

지금에 와선, 살생의 욕구를 식탐으로 옮긴 것이 소림의 뜻이 아닌 현오의 자의가 아닌가 싶었다.

“황도에 영 볼일이 없는 것도 아닐세. 여기에 그 유명한 백마사가 있지 않은가.”

그곳의 불마대법 맛도 볼 것이라며, 현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백마사가 유명해?”

“그럼. 중원 삼 대 관음의 성지가 아닌가.”

“관음의 성지? ……저, 절에 그런 게 있어도 되는 건가?”

남궁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자 현오가 펄쩍 뛰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도 모르나!”

현오의 말과 함께, 일행이 조용해졌다.

아마도 몇몇 일행은 남궁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허어! 관음보살님, 이 색기 가득한 무식자들, 욕정에 눈먼 중생들을 용서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현오의 염불 소리에 일행이 더욱더 시선을 피했다.

“걱정 마시오, 남궁 공자. 그대가 황자가 되어 변모하더라도, 나의 충만한 욕정, 아니 연정은 결코 변치 않는다오.”

진화는 나하연의 속삭임을 못 들은 척하며 별채를 나왔다.

내가 저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찾아왔단 말인가.

진화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황도에 와서 처음으로 크게 내쉬는 한숨이었다.

* * *

금영이 조용히 서신을 황제의 앞에 놓았다.

그것은 태사 조위례가 보내온 것이었다.

황자와 그의 현재 부모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들에 관한 말이 있을 터였다.

황제가 신중한 얼굴로 서신을 펼쳤다.

“황자는 오히려 경계심이 높고, 부모는 시종일관 황자를 살핀다라…… 부친은 경지를 넘은 고수에, 모친은 황실 여인 못지않게 사려가 깊고 현명하다.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의 감정보다 황자를 우선하고, 세 사람 사이에 깊은 애정을 보여…… 허어!”

황자와 그 부모에 대한 조 태사의 평가가 적힌 서신이었다.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면서도 박한 면이 있는 조 태사의 보기 드문 고평가에, 적힌 내용이 반가우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세 사람의 정이 몹시 각별하다는 말이 유독 그러했다.

세 사람.

황제와 황후가 황자를 품에 끼고 그렇게 되길 바라고 또 바라 왔다.

그래서 십수 년 동안, 단 한 번도 황자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찾아 왔다.

꿈에도 바라 마지않았던 내 새끼.

그런 내 자식이 다른 사람과 벌써 부자지애, 모자지애가 각별하다니, 아무리 황제라도 질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섭섭함은 섭섭함이고, 꿈에 그리던 자식을 보는 일이었다.

“부모에게 각별할수록 황자의 경계심이 누그러진다라……. 고놈, 부모를 보러 오는 데에 무얼 그리 경계한 것이냐?”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때, 부드럽고 포근한 손길이 황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폐하를 닮은 것입니다. 효심이 깊은 것마저도요.”

황후가 다정하게 황제의 서운함을 달랬다.

“……고 녀석 어릴 적 기억하오? 인주를 찍은 날이었지. 아픔이 잦아들었어도, 제 성질머리를 다 부리고서야 잠이 들었던…….”

“그럼요. 그때도 폐하께서 ‘나를 빼닮았구나.’ 하시며 웃으셨지요.”

황자가 납치된 그날이었다.

가슴 깊이 상처로 남아 꺼내지 않았던 추억이었다.

처음으로 아들과 함께했던 추억을 꺼낸 황제와 황후는, 기쁨과 설렘을 숨기지 못했다.

“태사의 보는 눈은 누구보다 정확하니, 은인들에게 더욱 조심해야겠소.”

“당황스러운 상황일진대, 진화만 본다 하지 않습니까. 필시 조심할 필요도 없이 마음이 통할 것입니다.”

황제가 황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 태사 또한 서신의 말미에 ‘황자를 위한다면 어떤 것도 기꺼워할 것이다.’라고 적었지 않은가.

황제와 황후는 마침내 걱정을 물리고, 환관을 불러 현학장원으로 사람을 보냈다.

“조용히, 황자와 은인들을 모셔 오라.”

“명을 받드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늙은 환관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대전을 나갔다.

잠시 후.

진화 가족이 남궁 건천문을 넘었다는 소리에, 황제와 황후가 대전을 뛰어나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궁 곳곳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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