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벼슬할 진(進) 응할 화(和) : 횡보행호거경(3)
천하의 주인은 황제이나, 그 아래로 무수히 많은 이무기들이 승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의 사촌과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아들과 딸.
용의 피를 품고 황도에 웅크려 조용히 야망을 키우는 이들.
살아남아서 천하를 갖거나 영원히 땅속에 움츠려야 하는 가슴 뛰는 기로 앞에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황제였다.
황제의 총애 혹은 황제의 죽음.
황제의 손짓 하나 받으려고 벌벌 떨면서도, 황제가 약해질 기미만 보이면 언제라도 준비해 둔 독니를 박아 넣을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
그들에게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특히 황제가 간밤에 유력한 경쟁자를 불러들인 것과 같은 정보는.
“허! 황자라고? 이제 와서 황자?”
높디높은 고성이 코웃음을 쳤다.
“황후전 궁녀의 움직임을 보면, 황후께서도 간밤에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더군요.”
찻잔을 드는 손에도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무시하고 비웃을 일이었다면 두 사람이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적통 황자라니! 황실에서는 어떤 증거도 보지 못했고, 그건 조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것부터 문제 삼을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높디높은 고성이 카랑카랑하게 방에 울려 퍼졌다.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듯,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는 듯,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인의 자신감이 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인이야말로 황후를 제외하고 제국에서 가장 귀한 여인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호양공주(湖陽公主) 한외련이 매섭게 눈을 빛내며 눈앞에 차를 마시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태자는 아무 걱정 마세요. 이 고모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
호양공주의 말에, 사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을 아꼈다.
제국의 황태자 한유강.
그는 간밤에 전전에서 일어난 일을 가장 먼저 알아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수족들이 호양공주에게 말을 전하고, 호양공주는 황태자를 대신해서 분노했다.
“황제 폐하께서 허투루 검증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허! 피만 같으면 뭘 한답니까. 폐하도 그렇지요. 황실에 먼저 알려서 적통 황자에 걸맞은 자질부터 갖추게 해야지요. 제국의 적통 황자다운 품위도 없이 대소 신료들 앞에 선다면, 그만한 망신이 또 어디 있다고! 쯧쯧쯧!”
호양공주가 황실의 지긋한 어른들처럼 혀를 찼다.
그래 봐야 그녀의 나이 겨우 불혹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만 현 황실에 어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황실을 대표하여 호양공주가 나선다고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태자는 조용히 기다려 보세요. 이 고모가, 새로운 조카가 밖으로 나올 만한 자질이 있는지 먼저 시험을 해 볼 터이니.”
만약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입조는커녕 평생 황후의 치마폭에서나 놀아야 할 것이다.
“티끌만 한 허점으로도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곳이 이곳 황실이 아닙니까. 황실 어른으로서, 그 지엄함을 미리 알려 줘야겠군요.”
호양공주가 붉디붉은 입꼬리를 여우 꼬리처럼 말아 올렸다.
* * *
황궁에서는 현학장원에 환관 하나와 상궁 하나를 보내 진화의 교육을 시작했다.
이미 황도에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숨길 것도 없다는 듯 하루가 멀다 하고 황후궁의 사람들이 현학장원을 오가니, 이젠 모르던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어머머, 이렇게 귀한 비단을…….”
“동쪽에서 물 건너온 것이옵니다. 색이 곱고, 윤기가 은은하게 흐르는 것이 특징이지요. 황후 마마께서 특별히 마님께 어울릴 만한 색으로 고르신 겁니다.”
“이렇게 황송할 수가 있을까요. 이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할지!”
“입조식이 있는 날에 입으실 것도 황궁 침방에서 특별히 짓고 있으니, 기대하시어요!”
“고맙습니다, 정 나인.”
“어, 어휴, 제가 짓는 것도 아닌데요! 헤헤.”
팽연화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자, 어린 궁녀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일찍이 사가를 떠나온 궁녀는, 황도에서 본 무서운 귀부인들과 달리 따뜻한 눈빛으로 손길을 내밀어 주는 팽연화가 무척 좋았다.
‘이런 분이 우리 황자님을 키우셨으니, 황자님이 그렇게 곱게 자라신 것도 이해가 가지. 암!’
궁녀는 팽연화의 머리에 장식을 대었다가 뗐다가 하면서, 그녀에게 어울리는 장식을 찾았다.
“황금이 화려하긴 한데, 자칫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의 빛에 가릴 수 있어요. 게다가 마님은 은과 청강석, 청옥이 잘 어울리시니 한(寒)색 위주로 꾸미는 것이 좋겠어요. 마침 남궁을 상징하는 색이 푸른색이라면서요?”
“네. 그래서 천풍무의에 쓰는 은잠사를 침방에 드렸답니다.”
“잘하셨어요. 지금쯤이면 귀부인들도 황후궁 침방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만, 혹시 모르는 이들이 뭐라 말을 할 때에는 그저 생긋 웃어 주시면 되어요. 얼굴 붉히지 마시고, 무시하세요. 그런 정보도 얻지 못한 한미한 자들까지 일일이 상대하실 필요 없으세요.”
“명심할게요.”
황후는 남궁경과 팽연화, 특히 팽연화에게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본인의 상궁과 궁녀를 보내어 치장을 돕는 것은 물론 황궁의 예법이나 귀부인들을 상대하는 요령까지, 혹여 팽연화가 곤란해할 일이 없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진화의 입조식에 초대받은 사람은 남궁경, 팽연화만이 아니었다.
“어휴, 아침부터 웬 덕순 할멈 같은 사람이 들이닥쳐선!”
“누님,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 진화가 덕순 할멈 같은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게 죄는 아니지. 그 할망구들도 눈이 제대로 붙어 있다는 거니까.”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자 진화의 사촌 남매인 남궁진혜도 입조식에 초대받았다.
남궁진혜는 진화의 일이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가, 황후궁에서 보내온 상궁을 피해 도망 나온 참이었다.
황실 예법을 익히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진화도 오랜만에 현학장원을 나왔다.
“휴우, 단주님이 제때 불러 주셨기에 망정이지.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대나 하고 있었다니까.”
“그러셨습니까? 혹 황궁의 사람들이 과하다 싶으면, 제가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에이, 아니야! 덕순 할멈 같다니까! 잔소리는 마귀 같은데, 할망구가 애정이 있어. 그래서 괜찮아.”
남궁진혜의 말에 진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본가에서도 덕순 할멈에게 제일 많이 등짝을 맞는 사람도 남궁진혜였지만, 덕순 할멈을 제일 잘 따르는 사람도 남궁진혜였다.
이렇게 투덜거리는 남궁진혜의 모습에서, 진화는 오랜만에 정겨운 기억을 떠올렸다.
“적호단 전체가 사천당문 암호대와 훈련을 하는 건 오랜만이네.”
“백마사의 승려들도 올 것이라 했습니다.”
“살인시문 놈들은 황궁에서 털 만큼 털어 갔던데, 우리끼리 모여서 할 게 남았나?”
황도에 와서도 ‘맛있는 건 금군이 다 먹었다!’며 불만을 쏟았던 남궁진혜였다.
그녀는 갑자기 소집된 전체 훈련에 의아함을 표했다.
그때.
“꺄아아악! 살려 주세요, 나리! 살려 주세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명이 남궁진혜와 진화의 귀에 분명히 들렸다.
길 앞쪽에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과 함께, 모르는 척 지나는 사람들의 불쾌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남궁진혜가 사람들을 뚫고 지나갔다.
진화는 무심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남궁진혜가 손으로 툭툭 치며 앞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우수수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어엇!”
“헉!”
“억! 뭐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고통에 놀라, 방금 지나간 여인의 손과 제 옆구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누님?”
남궁진혜의 뒤를 따라 들어온 진화는, 앞에 있어야 할 남궁진혜가 없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길 한가운데, 한 사내가 남궁진혜에게 손을 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님!”
놀란 진화가 남궁진혜에게 다가갔다.
“아아아악! 이거 못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게야?”
정확하게는, 한 사내가 남궁진혜에게 팔이 잡혀서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안심한 진화가 남궁진혜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새끼가 아이를 죽였어.”
남궁진혜가 굳은 얼굴로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귀한 분의 물건을 훔친 놈이다! 죽어 마땅하단 말이다!”
남궁진혜의 설명에 사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진화가 고개를 돌리니, 한 여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채 울고 있었다.
한쪽 바닥에는 경단 몇 개와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채찍이 있었다.
아마도 사내가 어린아이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이 잘못된 듯싶었다.
“이거 놔라!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당장 이 손을 놓고 무릎을 꿇지 않으면, 네년의 목을…… 꾸어어억-!”
사내는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남궁진혜가 남아 있는 오른손 주먹을 사내의 얼굴에 꽂아 버렸기 때문이다.
퍼어어억---!
사내의 몸이 한쪽 구석에 있는 평상 아래에 처박혔다.
“크흑!”
“나, 나리!”
정신을 잃은 듯한 사내가 울컥 피를 쏟자, 근처에 있던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이 달려 나와 사내를 부축했다.
“에이, 퉤엣! 저걸 죽였어야 했는데…….”
남궁진혜가 일행의 등에 업혀 떠나는 사내를 아쉬운 눈으로 보았다.
진화 역시도 아쉬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마 남궁진혜가 그를 때리지 않았더라면, 진화가 그의 입과 머리를 갈라 버렸을 것이었다.
“운 좋은 새끼. 에이! 오늘도 협행 하나 했다 치지, 뭐.”
돌아선 남궁진혜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아이를 안은 여인을 보았다.
“거기! 더 억울한 일이 있으면 관아로 가 보고. 혹시 저놈이 찾아오면, 내가 현학장원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주시오.”
“감사합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남궁진혜의 말에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하지만 이미 아이가 죽어 버려, 남궁진혜는 영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죽은 아이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흩어지고, 여인 역시 체념 가득한 표정으로 익숙하게 죽은 아이를 챙기는 모습이라니.
남궁진혜는 입이 쓴 듯 고개를 저었다.
“황도라더니, 전쟁터보다 나은 것이 없네.”
남궁진혜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가득했다.
진화는 여인과, 아까 그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더 보았다.
그 사건이 있고, 그날 오후.
오랜만에 관도생들과 있던 진화에게 환관 하나가 다급하게 찾아왔다.
“호, 황자님, 큰일입니다! 대서전에서 진혜 아가씨를 잡으러 갔다고 합니다!”
“대서전?”
“호양공주마마의 처소입니다. 무슨 일인지 병사들까지 움직였습니다!”
환관의 말에 진화는 물론 같이 있던 관도생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진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이유로?”
“대서전 가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는 죄목인데, 어, 어찌할까요? 대부님이나 사례교위께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환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그에 진화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사사롭게 누님을 잡아갈 권한이 있나?”
“예?”
놀란 환관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혹시 몰라 되물었는데, 진화의 눈빛이 몹시 진지했다.
“직책이 따로 존재하냐고 물었다.”
“아, 아니, 그런 것은 없지만…… 호양공주님은 황제 폐하의 유일한 누이십니다! 대서전으로 끌려가면 관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가 인정하는 유일한 동복누이.
그 막대한 배경에 어느 누가 그녀에게 자격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격이었다.
황도에서 그녀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모두 황제가 눈을 감아 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관아의 허가를 받지 않고 사사롭게 병사를 움직여도,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환관은 그 말을 진화에게 할 수 없었다.
자칫 황제의 과실로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쪽에 있던 남궁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대서전에 안 끌려가면 어찌 되는 겁니까?”
“예?”
이건 또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이란 말인가.
환관은 답답해서 속이 탈 지경이었다.
황자님이 그의 생각보다 훨씬 황도의 사정에 어두우신 듯하니, 차라리 태사나 사례교위에게 직접 가는 것이 나았겠다는 후회가 이제야 들기 시작했다.
“고 내관.”
진화가 이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환관을 불렀다.
“대서전의 병사를 죽이면 어찌 되는가?”
“황자님!”
환관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진화를 불렀다.
하지만 진화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 * *
“공주님!”
“그래, 그년은 잡아 왔느냐?”
수를 놓고 있던 호양공주가 느긋하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목소리가 주저주저했다.
“저 그것이…….”
선뜻 대답이 없자, 호양공주의 입꼬리가 슬쩍 말렸다가 내려갔다.
“왜? 하남 조씨들이 길을 막았더냐? 감히 대서전의 행사를 막아?”
목소리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듯했지만, 물음 자체는 미리 준비한 듯 기대감이 가득했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진 호양공주의 물음에 무사는 자포자기 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추포에 나섰던 병사들이 모두 당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뒤늦게 무사의 말을 이해한 호양공주가 날카롭게 무사를 쏘아보았다.
이제야 정말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똑바로 고하거라. 뭐가 어찌 되었다고?”
“계집이 무림 고수였습니다! 병사들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허!”
“저, 그리고…….”
“또 무엇이냐!”
“가, 감히 자격도 없이 대낮에 정의맹 적호단 부단주를 공격하였으니, 이 일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를 할 것이라 전하랍니다!”
“뭐라! 이이!”
파-앗!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호양공주가 분을 참지 못하고 들고 있는 자수를 집어 던졌다.
귀하디귀한 비주가 바닥에 흩어지는 것을 보며, 호양공주가 이를 갈듯 신발로 그것들을 깔아뭉갰다.
“허! 이런 건방진 년이 있나!”
호양공주의 눈에 시퍼런 불길이 타올랐다.
“차비하거라! 황궁으로 갈 것이다!”
일이 생각과 틀어졌다.
하지만 이 기회에 황자의 앞에서 친누이처럼 각별하게 지냈다는 그년의 목을 날린다면, 황자의 기를 죽이기에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황실의 위엄과 공포를 뼛속 깊이 새겨 주마!’
호양공주가 붉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리며, 화려한 마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