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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17)화 (217/425)

남궁마제

벼슬한 진(進) 응할 화(和) : 횡보행호거경(6)

황실의 연회는 별것이 없었다.

밤이 늦도록 배가 터질 정도로 많은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고, 악사와 무희, 재주꾼의 공연을 즐긴다.

그리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다시 연회에 참석한다.

사흘간의 허무한 반복.

하지만 황실에선 연회도 전쟁이었다.

“황제폐하와 황후폐하께서 동해왕을 찾으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 관도공주께서 공연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호오. 관도공주가? 보여 보라!”

붉은 옷을 입은 관도공주 한유홍이 쌍검을 쥐고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무인 기질이 강한 황제는 검무를 좋아했다.

그래서 관도공주의 어미인 허미인은 딸에게 혹독하게 검무를 가르쳤고, 그 덕에 관도공주는 황제가 가장 아끼는 딸이 되었다.

허미인과 그녀의 아들 초왕 한유영이 황제가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 저게 뭐야? 엿장수도 아니고.”

“쉿!”

남궁경의 말에 팽연화가 급히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남궁경의 말을 황후가 이미 들은 후였다.

“호호, 괜찮아요. 확실히 무림인들이 보기엔 저 검무가 별로 아슬아슬해 보이지 않겠군요.”

“뭐, 우린 죽이지 않을 거라면 휘두르지 않으니까요.”

남궁경은 검에 관해서는 한없이 진지한 사내라.

술이 올라 호탕하게 웃던 사내는 어딜 가고, 어느새 날카롭게 예기가 서린 무림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황후가 놀란 눈을 뜬 것은 물론, 황제도 관심을 돌렸다.

“좋지! 무인에게 검이란 짊어진 인생의 무게와 같은 것이지. 결코 저렇게 가벼울 수가 없지.”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던 황제 또한 남궁경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평생 검을 들었던 사내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황제와 눈빛을 교류하던 남궁경이, 이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폐하, 저렇게 간지러운 거 말고, 진짜를 한번 보고 싶지 않습니까?”

“진짜?”

“검을 보면 사람이 보이는 법이지요. 진화가 살아온 남궁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허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군!”

남궁경의 말에 황제가 눈빛을 반짝였다.

황후 또한 ‘진화가 살아온 남궁’에 대해서는 알고 싶은 얼굴이었다.

남궁경이 심드렁하게 술을 마시고 있던 남궁진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심심하지? 한바탕 놀고 올래?”

남궁경이 관도공주가 한창 검무를 추고 있는 무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남궁경의 말을 알아차린 남궁진혜가 눈빛을 반짝였다.

“어머니…….”

“괜찮아. 설마 네 아버지가 황궁까지 와서 쫓겨날 짓을 하시겠니? 호호호.”

진화가 불안한 눈빛으로 팽연화를 찾자, 팽연화가 진화를 안심시키며 슬쩍 남궁경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남궁경이 움찔하며 다급하게 남궁진혜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계단을 훌쩍 뛰어 내려가고 없었다.

“하하하하! 황실에서 공주님의 멋진 검무를 보여 주셨으니, 답례로 이 남궁진혜가 남궁의 검무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남궁진혜가 우렁찬 목소리로 나서며 단상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씩씩하게 걸리적거리던 양 소매를 찢어 버렸다.

찌이이익--!

“저, 저!”

정숙해야 할 여인이 팔을 훤히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황족과 대소 신료 들이 놀라 눈을 치켜떴다.

남궁진혜는 그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인 후, 본격적으로 새파란 기사를 피워 올렸다.

쉐에에에에엑----!

남궁세가에서 가장 강력한 검법은 제왕무적검이었으나, 가장 화려한 검법은 뭐니 뭐니 해도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었다.

검 끝으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구름의 변화를 그리고, 검로로 바람의 움직임을 표현하며, 온몸으로 창공의 청명, 광활함을 대변하니.

푸른 기사를 따라 남궁세가가 꿈꾸는 창공이 꿈처럼 펼쳐졌다.

“누님……!”

진화가 놀란 눈으로 남궁진혜를 보다, 남궁경을 보았다.

남궁경이 다 안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내 새끼가 주인공인 자리인데 끼어들기는 용납 못 하지. 암.”

아니, 그게 아닌데.

진화가 안절부절못하며 남궁진혜와 남궁경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결국, 우쭐거리듯 웃고 있는 남궁경의 모습에 마주 웃고 말았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미녀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유연하게 허리를 꺾은들, 하늘보다 맑게 피어오른 기사와 그 안에서 진짜 검사가 그리는 검로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남궁진혜의 창궁무애검법 시연이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사흘간의 연회에서 가장 큰 박수 소리였다.

“허허허! 우리 황자가 유년을 함께한 남궁세가의 검이 저토록 아름답다니! 하늘의 청명함과 남궁의 기상, 곧은 신념이 느껴지는구나.”

황제와 황후 또한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듯 크게 기뻐했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낯빛이 흙빛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밤새도록 연습해서 검무를 추고도 잊힌 관도공주는 궁녀들에 가려 울음을 터뜨렸다.

귀빈 원씨는 분한 표정을 가리느라 어색하게 웃고 있는 미인 허씨를 비웃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바마마, 남궁세가는 무림 제일 세가로, 영애의 검무가 공주에 비할 바가 아닌 듯합니다. 실로 남궁의 의기의천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절기에, 새로 개안을 한 듯합니다.”

동평왕 한유창이 때를 맞춰 황제의 심기를 헤아렸다.

“오, 삼황자가 보기에도 그러하더냐?”

황제의 물음에 동평왕 한유창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잘 숨겼다.

그는 며칠 전까지는 이황자라 불렸으나, 지금 이 순간 자연스럽게 삼황자가 된 처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하옵니다, 아바마마. 소자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그러하였사옵니다. 남궁세가 영애에게 따로 상을 내리심이 어떠하신지요?”

다른 황자들도 뒤늦게 나섰다.

황제의 기분에 아첨하려 너 나 할 것 없이 남궁세가와 남궁진혜를 칭찬하기 바빴으니.

“허허허, 그렇지! 보아라, 연회를 빛내 준 남궁세가 영애에게 따로 비단 백 필을 내리겠다.”

“황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태자 한유강과 허미인 소생의 황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황제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태자를 제외하고 모두 한 단계씩 내려간 자연스러운 호칭까지 ‘모두’ 말이다.

진화의 눈이 기쁘게 웃고 있는 황제와 황후를 향했다.

황후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진화의 손을 잡으며 아름답게 웃어 보였다.

* * *

그날 밤.

연회 마지막 날을 앞두고, 황후가 다시 한번 옥사 앞을 찾았다.

황후는 자신을 보고 놀란 금군들의 입을 단속하고, 잠시 주변을 물렸다.

곽경란은 내일 있을 처형을 준비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무 기둥에 묶여 있었다.

사박. 사박.

비단이 땅을 스치고 지나는 소리에, 곽경란이 감고 있던 눈을 움찔거렸다.

“자식을 잃고도 잠을 자고 있었구나.”

황후의 목소리에 곽경란이 눈을 번쩍 떴다.

핏발이 다 터져 나간 붉은 눈이 횃불처럼 이글거리며 황후를 노려보았다.

“크윽! 너! 너—어!”

“자식을 잃고 어떠한지 확인을 하러 왔다.”

황후가 덤덤하게 곽경란을 살폈다.

인두로 지진 자국에서 진물이 흘렀다.

망치에 뭉개진 발가락.

부러진 손가락뼈.

벗겨진 피부에 잡아 뜯긴 손톱.

고작 며칠 만에, 눈 밑이 움푹 팰 정도로 초췌한 얼굴에 온몸에 남아 있는 고문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죽어서 원귀가 되어 널 저주할 거라고!”

곽경란이 비명을 지르듯 악을 썼다.

하지만 황후는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거참 비참하네. 죽어서 될 것이 원귀밖에 없다니.”

“야아아아아---!”

분에 찬 곽경란의 고함에,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을 살피던 황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붉은 횃불 속에서도 혼자 서늘한 얼굴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살아서도 하찮았던 천것이, 죽어서 원귀가 된다 한들 달라질까.”

“하! 네년은 늘 그랬어! 동무가 어쩌고 하면서, 날 보는 눈은 늘 똑같았어. 천한 마부의 딸! 마구간지기의 핏줄! 그래서야! 네년을 죽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어서 네 아들을 죽이려 한 거라고! 다 너 때문이야--!”

곽경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분노와 원망, 오랜 세월 쌓인 열등감이 광기 어린 형태로 황후에게 향했다.

그러나 황후는 그조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 냈다.

개미가 원망한들, 범이 걸음을 멈출쏘냐.

달빛을 받으며 오연하게 고개를 든 황후가 곽경란의 광기를 내려다보았다.

“모두 너 때문이다. 네 일족과 네 아들들이 비참하게 죽고, 지아비가 폐서인당해 내쫓긴 것 모두, 네년의 그 분수를 모르는 방자함이 만들어 낸 결과다.”

“너어-!”

곽경란이 피를 토하듯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다.

“내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네년 아비가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꼴을 지켜보아라. 속물적이고 순박했던 태복령이 어미도 없이 아끼며 키운 딸 때문에 그리 가는구나.”

“아니야! 아니야--!”

“걱정 마라. 네 죽음도 수월하진 않을 터이니. 내가 말했지 않으냐, 너와 달리 나는 진짜 힘이 있다고.”

“아아악! 아아아악! 흑흑흑흑--!”

바닥에서 기어올라, 그래도 왕부를 다스리는 왕비까지 되었다.

하지만 모래 위에 쌓아 올린 성은 바다의 노여움 한 번에 쉽게 흩어져 버렸다.

“네 죽음은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네 모든 것이 하잘것없어서 동하지 않는구나. 그럼 잘 가거라.”

황후는 소리 내어 오열하는 곽경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어떤 복수를 한들, 아들을 잃어버린 세월은 되돌아오지 않을 테니.

황후는 이제 다시는 곽경란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되겠소?”

황제가 옥사를 돌아 나오는 황후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았다.

황후는 황제의 품에 안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가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그렇지. 황자가 우리에게 돌아왔소. 내,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 주리라!”

황제의 마음이 심장 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 * *

곽구윤과 곽경란의 형이 집행되었다.

황실의 처형인은 곽구윤의 가슴과 넓적다리를 오백 번 벗겨 내며 그를 죽였다.

곽경란은 곽구윤보다 오랫동안 형이 집행되었다.

한때는 왕비였던 여자의 능지처참이라, 이번 연회에서 가장 큰 볼거리가 되었다.

특히 처형인은 곽경란의 팔다리부터 시작해서 가슴과 배에 이르기까지, 무려 천 번이 넘게 살점을 떼어 내었다.

사람들은 훤히 드러난 곽경란의 젖가슴과 넓적다리를 조롱하며 잔인한 광경을 오랫동안 즐겼다.

그 자리에 황제와 황후, 이황자인 한진화는 나오지 않았다.

모든 형벌이 끝이 나고, 남은 징벌이 집행되었다.

바로 오왕부에 있던 사람들의 귀향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한평에서 십 년이라니!”

“망할 왕비 때문에 우리가 왜 이 꼴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린 왕비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요!”

“닥쳐라-! 어서 움직이지 못할까!”

오왕이 폐서인되었으니, 오왕부에 남아 있던 후궁들과 다른 자식들부터 가깝게 그들을 모시던 궁인들까지 모두가 금군에 의해 끌려 나왔다.

평소 앙숙처럼 지내던 양주목사는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그들에게 하얀 서인의 옷을 입혀 한평으로 압송했다.

“아가씨, 아가씨! 흑흑흑!”

“…….”

양 상궁, 아니 다시 양선이 된 제갈지현의 시비가 울음을 터뜨리며 제갈지현의 처지를 슬퍼했다.

하얀 옷을 입고 봇짐을 손에 든 제갈지현은, 제 처지가 너무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이봐, 이쪽이다.”

“……놔.”

제 팔을 잡아끄는 병사의 거친 손길에, 제갈지현이 살기를 번뜩이며 병사를 노려보았다.

여기 이 병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까.

그러면 이 끔찍한 악몽이 끝이 날까.

‘내가 왜 여길 택했는데! 내가 제갈세가를 버리고 왜 오왕부로 왔는데-!’

제갈지현은 어느새 굳게 문이 걸어 잠긴 오왕부를 돌아보았다.

분노와 원망이 가슴에 들불처럼 끓어올랐다.

하지만 결국 그 불길에 상처 입는 것도 제 자신이었다.

“결국, 그리 선택하는 것이냐?”

“앞으로 제 인생은 제가 선택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저를 보던 제갈가주에게 당당하게 말했었다.

내가 갈 때가 되니 아쉬워하는구나, 우쭐한 기분에 취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퍼-억!

“네년은 뒤에서 따라와!”

소빈이 제갈지현의 어깨를 밀치며 앞서 나갔다.

지나가는 궁녀들마저 표독스럽게 제갈지현을 노려보는 것이, 오왕부 내에서 완전히 입지를 잃어버린 것과 동시에 죽은 왕비를 대신해서 화풀이 대상이 되어 버린 제갈지현의 처지를 말해 주는 듯했다.

제갈지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궁녀들의 등으로 손을 휘둘렀다.

쉐에에엑-!

퍽! 퍽! 퍽!

“까아아악-!”

“아악!”

궁녀들은 물론 소빈마저 제갈지현의 손에 맞아 바닥을 굴렀다.

하얀 소복이 금세 흙으로 더럽혀졌다.

“네년,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소빈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제갈지현을 노려보았다.

제갈지현은 다시 소빈의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왕자비 이전에 제갈지현이다. 제갈세가의 직계라고.”

서슬 퍼런 제갈지현의 눈빛에 소빈은 얼어붙은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오왕부의 대부분은 왕부에서 세력을 이루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을 모두 빼앗겼으니, 당장 춥고 배고픈 한평에서 살아남을 일이 걱정이었다.

그나마 친정 집안이 남아 있는 제갈지현만이 한평에서 버틸 곡식과 옷을 얻을 수 있는 형편이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그냥 두시진 않을 거야. 제갈세가로 돌아간다! 반드시!’

제갈지현은 양선을 데리고 오왕부 사람들의 맨 앞에 서서 걸었다.

역시나 폐서인이 되어 흰옷을 입은 채 걷고 있던 한문혜가 그 광경을 씁쓸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천하의 제갈세가라 한들, 한겨울 북풍보다 거센 황제의 분노를 이겨 낼 순 없을 것이다.

십 년.

자존심만으로 견디기엔 무척 고된 세월이 될 것이다.

* * *

진화와 남궁경, 팽연화는 연회 후에 황궁에 머물게 되었다.

남궁경과 팽연화는 ‘은인지황(恩人之皇)’ 양주대부와 양주대부부인이라는 호칭을 하사받았다.

명예직에 불과한 명칭이었으나, 황제의 은인이라는 것만으로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대부라는 호칭은 대사농을 지낸 조위례나 구국의 영웅인 하후대장군에게나 주어지던 존칭이라. 

일개 무림인들에게 떨어지기엔 너무 과한 칭호에 대해 대소 신료들의 반대가 있을 법도 했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진화가 황후궁에 있는 건희전을 처소로 받았기 때문이다.

건희전은 황제의 처소와 가장 가까울 뿐 아니라 동궁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이라. 애초에 원자가 태어나면 원자의 처소로 정해지는 곳이었다. 

태자가 있긴 하지만 배경이 위태롭고, 새롭게 원자의 궁을 받은 적통 황자가 등장했으니.

사람들은 새로운 동해왕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어디까지 갈지 계산하느라 분주했다.

부담스럽다는 시선이 진화를 향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적통 황자가 왜 궁에 있지 않고 적호단의 처소에 와 있는지.

“너, 아니 황자, 아우! 황자, 너는 할 일도 없냐?”

호칭 문제로 고심하던 팽치가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진화는 그런 팽치를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이게 제 일입니다. 무림에서는 남궁진화. 동의장으로서 관도생들과 함께 당분간 적호단에 합류하기로 배정받았으니, 잘 부탁합니다.”

진화의 인사에, 부담스럽다는 듯 진화를 보고 있던 적호단 조장들이 맞절을 하듯 고개를 숙였다.

“개판이네.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장가오시렵니까?”

“닥쳐!”

팽치의 단호한 거절에 진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헛소리하지 말고 잘 들어! 임무다!”

팽치의 말에 적호단에 금방 긴장감이 맴돌았다.

진화 또한 눈을 빛내며 팽치의 말에 집중했다.

“앞으로 우리 적호단이 남궁세가에서 가져온 소리마제의 암림혈귀갑을 운반해야 한다.”

팽치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남궁세가가 소리마제를 죽이고 귀천성의 귀물을 손에 넣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이곳에 있다는 건, 적호단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황도에 오기 전 그들이 받은 임무는 분명 소리마제의 장부를 회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부는 이미 부단주가 전서를 통해서 정의맹에 전하고 있을 거다.”

진혜가 재미도 없는 황궁 연회에서 사흘이나 자리를 지킨 이유였다.

남궁진혜는 황궁에 있는 장부를 필사하여 정의맹에 전서로 보내며, 지금 그 마지막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우리가 운반하는 건, 암림혈귀갑이다.”

팽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천마제가 깨어났다는 말이 돌자마자, 역천비록을 운반하던 무단들이 죄 습격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없겠지?” 

팽치가 숨죽인 맹수처럼 눈을 빛내며 물었다.

“놈들이 올 거다.”

“…….”

팽치의 단언에,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때, 진화가 물었다.

“사냥 준비를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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