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재앙 화(禍) : 애물단지(1)
황궁은 크게 북궁과 남궁으로 나뉘었다.
남궁에는 전전과 명당이 있어서 나랏일을 보는 곳이었고, 북궁은 내궁이라 불리며 황족들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
내궁에서도 따로 궁이라 칭해지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장추궁과 창신궁, 동궁이었다.
세 궁은 각기 황제와 황후, 태자의 처소였다.
후궁인 원귀빈과 허미인은 각각 염녕전과 영수전을 받아서, 다른 황자, 공주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머무는 처소 하나도 일일이 격과 위상에 맞추어 서로 미묘한 균형점을 이루고 있던 곳에, 동해왕 한진화가 떨어졌다.
진화의 처소가 황후궁 안에 마련된 것까지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따로 받은 처소가 ‘건희전’이라는 것이었다.
벌써 ‘전’이라니.
태자의 동궁보다는 낮으나, 아직 후궁전에 있는 다른 황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대우였다.
게다가 건희전은 대대로 원자가 동궁으로 가기 전에 머무는 처소로, 동궁과 건희전이 한 번에 채워진 적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황태자 한유강을 향하는 눈이 많아졌다.
동궁.
평범한 체격에 날카로운 이목구비, 조금 창백한 얼굴.
사내는 심각한 얼굴로 문서를 읽고 넘기고 있었다.
황궁의 많은 젊은 관리들이 하는 일이었다.
태자 한유강은 황금색 용포만 아니었다면, 황궁을 드나드는 젊은 관리와 전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사내였다.
황궁 곳곳이 건희전의 이야기로 시끄러운 때에, 태자는 궁에 틀어박혀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란에서 잠시 멀어진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닥칠 땐, 잠시 몸을 낮추고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
태자는 그리 배웠다.
하지만 이번 바람은 그의 생각대로 동궁 밖을 겉돌다가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전하, 초왕 드셨사옵니다.”
밖에서 들리는 환관의 목소리에 태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얼굴을 펴고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라 하라.”
태자의 허락이 떨어지고, 곧 헌헌한 소년 장부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에 비해 큰 키와 체격, 허미인을 닮은 듯 하얀 피부에 유순한 눈매.
이전까지 황제의 총애를 받던 삼황자, 아니 사황자 한유영이었다.
“사황자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그저 안부차 들렀습니다.”
“초왕이 안부차 동궁에 들렀다라…….”
태자가 의아하다는 듯 말을 끌었지만, 초왕 한유영은 그저 순하게 웃어 보였다.
‘고약한 뱀 새끼! 어린놈이 벌써 사갈처럼 움직이는구나!’
태자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환관에게 차를 찾았다.
“동생이 우형의 안부차 왔다는데 차 한잔은 내주어야지. 마시고 갈 거지?”
태자의 물음에 사황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일전에 ‘동궁에서 차를 마신 삼황자가 배탈이 나서 축신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다.
그 일로 태자가 일부러 삼황자에게 독차를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사황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태자를 보자, 태자가 느긋하게 웃으면서 차를 권했다.
“좋은 용정차다. 머리를 맑게 해 주지.”
일부러다.
그 소문이 후궁전에서 퍼져 나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차를 내온 것이 확실했다.
사황자가 비틀어지려는 입을 찻잔으로 가렸다.
“참, 용정차는 양주에서 유명한 특산품이 아닙니까. 건희전에서 보낸 것입니까?”
“그렇다네.”
“이런. 아니, 네? 정말 건희전에서…… 아하하, 그랬군요. 조, 좋은 차입니다.”
설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태자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황자를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사실 사황자의 기대대로, 용정차는 건희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차는커녕, 이황자는 봉작을 받고서 단 한 번도 동궁에 인사를 오지 않았다.
‘건방진 놈! 처소를 받고서도 인사를 안 와?’
설마설마해서 기다렸는데, 건희전을 받고서도 인사를 오지 않을 줄이야.
알아보니 오늘도 궐 밖에 무림의 일로 나갔다고 했다.
일부러 무시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니, 태자는 그게 더 울화가 치밀었다.
‘제 놈은 뒤가 든든하다 이거지. 대소 신료들 누구 하나 무례를 논하는 놈이 없으니! 이런 때에 고모님이라도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에잇!’
잔소리가 귀찮은 혹이지만 쓸 만했는데…….
태자는 호양공주의 부재에 아쉬움을 삼켰다.
“조정에서 이황자에게 건희전은 조금 과하다는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습니다. 형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건국 이래, 건희전과 동궁에 한꺼번에 주인이 있은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만큼 아우를 찾은 부황과 황후마마의 기쁨이 크신 거겠지.”
영악하고 가소로운 새끼 뱀.
이제 지학을 겨우 넘긴 주제에 태연히 도발을 시도하는 사황자를 보며, 태자가 조용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나저나 후궁마마들께서 기뻐하셨겠군. 여전히 염희전과 온실전이 비어 있지 않은가. 이제 누가 거기에 신경이나 쓸까마는.”
“그……!”
내궁에 비어 있는 두 개의 전.
원귀빈 소생의 황자들과 허미인 소생의 황자들, 특히 삼황자와 사황자가 그것들을 노리고 있음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염희전과 온실전의 화려함도 화려함이지만, 황제의 총애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건희전에 비하면 모든 곳이 한낮의 달빛처럼 초라했다.
태자는 진화의 등장으로 초라해진 삼황자와 사황자의 처지를 꼬집은 것이었다.
영악한 사황자 또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저는 동궁에 틀어박혀 웅크리고 숨은 주제에!’
사황자가 사나운 눈빛으로 태자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희야 늘 처지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다만 태자 전하께선 걱정이 좀 되시겠더군요. 황궁 안팎으로 폐하께서 동궁 담장을 내려 앉힌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태자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 소문이 있었나? 이런이런, 자네도 그러하이. 사황자나 되면서 그런 불측한 소문에 휘둘려서야 되겠는가.”
“하하, 그렇지요?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그저 태자 전하가 걱정이 되어서요.”
“마음은 고맙군.”
“뭘요.”
태자와 사황자가 웃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조금 더 여유 있는 쪽은 사황자였다.
사황자야 처음부터 허미인의 치마폭에서 보호를 받아 왔지 않은가.
동궁의 담장을 내려 앉힌다는 것은, 궁을 전으로 격하시킨다는 말이었다. 그는 곧 태자를 다시 황자로 격하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
이제까지 정당한 경쟁자가 없어서 장자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이제 적통 황자가 나타났으니 제대로 된 시험이 필요하다는 말이 조정 밖에서 슬슬 나오고 있다 하였다.
‘그 어떤 선례에도 태자를 다시 격하하는 일은 없었어!’
태자는 굳건하게 버틸 자신이 있었다.
다만 동궁의 담장이 흔들리면, 밖에서 부는 세찬 바람은 태자 혼자 견뎌야 할 것이었다.
“그럼 소제는 이만 물러가지요.”
“멀리 나가지 않겠네.”
형제를 노리는 새끼 뱀이 태자의 속을 진탕시킨 채 물러났다.
받은 만큼 돌려주긴 했으나, 영 속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잔뜩 구름 낀 동궁에 한 줄기 빛처럼,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전하, 좌장군 표서량 들었사옵니다!”
환관의 목소리에, 태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서 드시라 하라!”
높아진 목소리.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달음에 좌장군을 맞았다.
“외숙!”
“태자 저하, 제가 없는 사이 황궁이 소란스럽더군요.”
장군이 아니라 산적이 더 어울릴 법한 사내가 검고 풍성한 수염 사이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태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움켜잡듯 좌장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찌하여 이제 오셨습니까!”
“묘족 놈들이 어찌나 끈질긴지, 좀 늦었습니다. 한데 옥안이 어찌 그러십니까? 제가 없는 사이, 누가 감히 우리 태자 저하를 서운케 하였습니까?”
태자의 응석에 좌장군이 그를 달랬다.
어려서부터 태자에겐 잡고 매달릴 수 있는 어른이 그밖에 없었으니. 이제까지 불안을 혼자서 버티던 태자가 기다렸다는 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아. 이황자 놈이 건희전을 받았습니다. 신료들이 그것을 두고 저들 마음대로 입방아를 찧고 있고요!”
“저런. 그런 불측한 놈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늘 그렇듯, 바람처럼 사라질 놈들입니다.”
“이황자는 뭐가 바쁜지 이제까지 인사도 없이 또 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궁 안의 일에는 신경을 꺼 줬으면 좋겠더군요!”
“특이하게도 무림인이라지요? 흐흐흐, 조금 무례한들 어떻습니까? 아무 걱정 마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태자 저하의 바람대로 될 것입니다.”
태자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좌장군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받았다.
태자는 그 모습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본래 군문에 두루두루 발이 넓어 모르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숙, 뭔가 아는 것이 있습니까?”
“이제 돌아온 제가 뭘 알겠습니다. 다만, 무림은 위험한 곳입니다.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전혀 알 수가 없지요.”
“아…… 그야, 뭐…….”
뭔가를 기대했던 태자는 약간 김이 샌 얼굴이었다.
“허허허, 우리 태자 전하는 그저 이 담장 안에 안전하게 계시면 됩니다. 천자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니, 모든 것은 하늘이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 외숙이 계시니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별것 없는 원론적인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좌장군이라서일까.
태자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그 시각 진화는 호위도 물린 채 남궁구, 남궁교명과 함께 폐가가 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한낮의 저잣거리 한복판이라, 지나다니는 인적이 꽤 많았다.
“여기가 살인시문이 있던 자리라고?”
“금군이 박살을 내기 전까지는 멀쩡한 이층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진화와 남궁교명은 소리마제의 살인시문이 저잣거리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은 살인시문만이 아니었다.
“백주의,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장사를 하는 암살문들이라…… 황도는 여러모로 놀랍군.”
남궁구가 주변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그때, 남궁구의 뒤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이래 봬도 꽤 성황리에 영업 중이지요.”
날렵한 체격에 발소리 없는 걸음걸이.
큰 키가 걸리기는 하지만 암살자가 분명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자연스럽게 진화의 앞을 막았다.
“황도의 암살자는 복면도 안 쓰나 봐?”
남궁구가 청년을 경계하듯 말했다.
개구쟁이 소년처럼 주근깨가 인상적인 청년이 코끝을 찡그렸다.
“전 고객 접객 담당이라서요.”
청년의 말에 남궁구가 깜짝 놀랐다.
“하오문에 그런 것도 있어?”
“하하하, 워낙 진상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청년의 시선이 남궁구를 향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딱 진상 고객을 보는 듯 달갑지 않았다.
“이황자님, 아니, 창천화룡 남궁진화 님과 청수신검 남궁교명 님을 뵙습니다. 정도 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신진고수를 이렇게 보는군요.”
청년은 보란 듯이 남궁구를 쏙 빼놓고 진화와 남궁교명에게 웃어 보였다.
“저는 하오문 군조라 합니다.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군조가 살인시문 바로 맞은편에 있는 하오문으로 진화 일행을 안내했다.
버젓이 간판까지 달린 그곳을 보며, 진화 일행은 다른 세상을 만난 듯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다.
다만 남궁구는 제 앞을 가린 군조 때문에 간판도 뒤늦게 볼 수 있었다.
남궁구가 군조의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날 싫어하는 것 같지?”
남궁구가 남궁교명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자 남궁교명이 이상하다는 듯 남궁구를 보았다.
“널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야!”
남궁구가 남궁교명에게 눈을 흘겼다.
“농담 아니라 진짜로. 아무리 봐도 초면이 확실한데, 왜 시비 거는 것 같지?”
남궁구가 억울한 눈빛을 담아 물었다.
그러자 남궁교명도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초면부터 네가 별로인가 보지. 농담 아니라 진짜로.”
“……이러기냐?”
남궁구가 섭섭하다고 칭얼거리든 말든, 남궁교명은 신경도 쓰지 않고 진화의 뒤를 따랐다.
“정신 차려. 여기 하오문이다. 경계 늦추지 말라고.”
남궁교명의 경고 섞인 말에, 남궁구도 구시렁거리기를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전에야 사파의 온갖 시정잡배들이 모인 곳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하오문은 사패천의 일곱 사문 중 하나였다.
하오문이 하는 일은 정보 수집과 첩보, 암살 등으로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사패천의 비호 아래 세를 확장하면서 이제는 무림에 내로라하는 암살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하오문주 서하(西鰕) 채명지도 그중 하나였다.
“이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동해왕이라 해야 옳습니다. 다만 무림에선 남궁진화로 살고 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호칭을 수정하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호호호, 그럼 남궁진화로 편히 대하겠습니다. 제가 하오문주 채명지입니다.”
하얀 얼굴에 초승달 같은 눈썹, 가늘고 긴 눈, 앵두 같은 입술.
진화의 인사가 마음에 든 듯, 고전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가녀린 중년 미부인이 진화와 일행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눈앞에서 경쾌하게 웃는 중년 미부인이 사파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살수였으니 말이다.
“살인시문의 잔당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 공자였군요. 바로 준비한 것을 보여 드리지요. 군조야.”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는 진화에, 하오문주가 옆에 서 있는 군조를 불렀다.
그러자 군조가 장식장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왔다.
그 모습에 남궁구가 두루마리를 받으러 손을 뻗었다.
그런데…….
툭.
“……!”
군조가 남궁구의 코앞에 두루마리를 떨어뜨린 것이 아닌가.
“군조야!”
하오문주가 놀라서 타박하듯 불렀지만, 군조는 황당한 눈으로 저를 보는 남궁구에게 태연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송구합니다. 실수입니다.”
전혀 실수처럼 들리지 않는 말투였다.
“허!”
남궁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바람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두루마리를 보았다.
그때.
스으으으윽……!
두루마리가 저절로 움직이듯 진화의 앞으로 딸려 갔다.
“……!”
남궁구는 물론 하오문주와 군조도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특히 군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진화는 태연하게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펼치며 말했다.
“두 번째 실수는 참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듯 하는 말에, 군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확실한 실력 행사와 함께 조용하게 울린 경고.
“송구합니다. 아이가 아직 정파인들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답니다.”
하오문주 역시 모골이 송연했지만, 티 내지 않고 적당히 웃어넘겼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잠깐 남궁구에게 닿았다.
남궁구는 진화가 제 마음을 살펴 준 것으로, 남궁교명에게 으스대고 있었다.
“살인시문의 잔당이 용정 석굴에 있다고요? 함정이나 유인일 가능성은요?”
“현재로선 십이 할. 함정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의 함정이 확실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오문주는 진화의 반응을 살폈다.
실력은 명약관화(明若觀火). 하지만 그릇은 어떠한가?
하오문주의 눈길에도 진화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당가암혼대와 적호단이 움직일 것입니다. 길 안내를 부탁하지요.”
과연.
하오문주가 진화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길 안내는 오늘 실수의 벌로, 군조가 직접 맡을 것입니다.”
“문주님!”
군조가 놀라 큰 소리를 내었다.
“이래 봬도 소문주로 있는 아이이니,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하지요.”
진화는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을 풀풀 풍기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실력과 그릇은 나무랄 데 없으나, 뒤끝도 그에 못지않았으니. 하오문주가 군조에게 내리는 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