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재앙 화(禍) : 애물단지(3)
황궁에 돌아온 진화는 곧장 황후의 처소에 들렀다.
꽃이 만개한 정원 한가운데, 진화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웃으며 진화를 반겼다.
“오, 아들!”
이제는 앞에 앉은 황제와 황후가 편해진 것인지.
남궁경은 그들의 앞에서도 서슴없는 호칭으로 진화를 불렀다.
“아버…… 부황을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남궁경에게 손을 흔들려던 진화는, 뒤에 있는 환관의 기침 소리에 얼른 손을 내리고 허리를 숙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어찌나 기력이 좋은지.
고작 며칠 만에 진화의 머릿속에 황실 예법을 쑤셔 넣은 환관은 이제 기침 소리만으로 진화를 움직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황제를 비롯한 어른들이 그 모습은 즐겁게 보았다.
“오냐, 아들아.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히 부르라 하고 싶지만, 동시의 잔소리는 아비도 어쩔 수 없구나.”
“끄으으음. 황공하옵니다, 폐하.”
환관 동시(東視)가 불편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는 동안, 황후와 팽연화가 진화를 그들의 사이에 앉혔다.
“갔던 일은 잘되었니?”
“예. 남은 잔당은 일망타진했고, 남아 있는 흔적을 조사했지만 별로 나온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 다치지 않아 다행이구나.”
황후는 질문에 진화가 성심성의껏 답했다.
황후는 조곤조곤 답을 하는 진화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화의 손을 쓰다듬으며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팽연화가 말한 대로 수줍음이 많았다.
손길 한 번에 금세 붉게 달아오른 귀 끝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이 모습을 모르고 살다가 다른 사람에게 듣게 된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황후는 ‘이제라도 찾게 된 것이 다행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진혜는 괜……찮고?”
“누님은 늘 대단하십니다.”
팽연화의 물음에 진화가 눈을 반짝였다.
이번에도 남궁진혜가 좋은 활약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팽연화가 묻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으래?”
팽연화가 말을 늘어뜨리자, 진화가 그 의미를 눈치채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작게, 팽연화가 원하는 답을 내어 주었다.
“이번엔 청구서가 날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호호호, 그래, 다행이구나. 네 큰아버지께서 좋아하시겠어.”
팽연화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황후가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진화가 황후를 대할 때와 팽연화를 대할 때의 차이였다.
진화는 황후가 묻는 말에 있는 사실대로 성실하게 대답했지만, 팽연화에게는 저가 좋았던 것만 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앉은 황후였건만, 팽연화에게 저가 기쁘고 좋았던 것만 전달하고 싶은 진화의 마음이 사무치도록 부러웠다.
그때, 분위기를 깨듯 남궁경이 툴툴대듯 말했다.
“어차피 귀천성 놈들 소굴인데, 그놈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할 일이 있겠어? 신나게 때려 부쉈겠지. 안 봐도 뻔-하다!”
남궁경은 또 들소같이 날뛰었을 남궁진혜를 타박하듯 말했지만, 표정에는 질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번 정의맹 임무에 끼어들 명분이 없어서 빠졌던 것이 아직도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런 남궁경의 모습에 팽연화는 물론 황제와 황후가 고소를 참지 못했다.
진화가 의아한 듯 쳐다보자, 황후가 진화의 귓가에 속삭였다.
“영애가 양주대부와 꼭 닮았다지? 남궁가주께서 속을 끓이신다고. 후후후.”
“아…….”
진화가 놀란 눈으로 황후를 보았다가, 팽연화를 보았다.
팽연화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마도 그간 남궁세가나 가족들, 진화 그리고 무림의 일에 대해 팽연화가 많은 것을 알려 준 모양이었다.
“크흠! 황후마마, 무림인은 귀가 밝다니까요.”
한쪽에서 남궁경이 볼멘소리를 이어 갔다.
“어머, 그런가요?”
“하하하! 황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영애의 기상이 호방한 것이, 딱 자네를 닮았으이. 남궁가주가 서운해할 만도 하겠어.”
“아이고, 형님까지 이러시깁니까?”
“호호호!”
남궁경을 놀리는 황제나 발끈할 듯 수그러드는 남궁경.
그리고 그 모습을 유쾌하게 바라보는 황후와 팽연화.
진화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남궁세가 본가에서 가주 내외와 부모님이 함께할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황제와 남궁경은 서로 호형호제(呼兄呼弟)를 하고 있었다.
지존의 위치에 있는 황제, 황후와 말보다 행동이 빠른 남궁경 사이에서 팽연화가 애를 많이 쓴 덕분이었다.
어른들의 심기를 헤아리느라 진화가 불편하지 않도록.
오로지 진화를 위해 제국의 지존이라는 황제와 황후, 남궁제일검 남궁경 내외가 한 줌씩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진화가 황후와 팽연화의 손을 동시에 꼭 잡았다.
사방에서 놀라고 흐뭇한 시선이 느껴져서, 귀가 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황제 내외와 남궁경, 팽연화와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자마자 진화는 다시 궁을 나갈 준비를 했다.
“크흠!”
환관 동시가 무시무시한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환관 동시는 환관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일곱 태감들 중 하나인 만큼 궁궐 안에 신망이 높고 눈과 귀가 많은 인물이었다.
황제는 그런 인물을 기꺼이 진화에게 내려 주었고, 환관 동시 또한 유일한 적통 황자를 모신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진화를 대했다.
하지만 이건 뭐.
기본적인 황실 예법을 익힌 후로는 계속해서 밖으로만 나도니!
환관 동시는 그가 이황자의 환관이 된 것인지, 건희궁의 지박령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다른 궁인들도 마찬가지인 듯, 건희궁을 나서는 내내 진화의 등에 진득한 미련의 눈빛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단한 일이니 일찍 들어오지.”
“황송하옵니다, 저하.”
진화가 궁인들의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말하자, 환관 동시와 궁인들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그때, 황후궁을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또 나가는 모양이군.”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연회 내내 저를 힐끔거리던 많은 황족들 중 하나였다.
다만 그가 입은 용포를 본 진화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궁에 들어온 지 아직 익숙지 않을 터인데, 외유가 이리 잦아서야…… 이래서야 황궁에 적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염려가 되는군.”
태자 한유강은 진화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궁을 나가며 무복을 입은 진화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염려가 된다는 표정과 말투와 달리, 눈빛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진화는 이전 생부터 제게 다짜고짜 초면에 적의를 보내는 인물들을 많이 겪어 보았다.
눈빛이 건방져서, 양자라서, 양자 주제에 남궁세가라서, 무공이 뛰어나서, 제가 세울 수 없는 전공을 세워서…….
모두 같잖은 이유들이었다.
진화가 입꼬리를 사르륵 말아 올렸다.
“제가 외유가 잦은 편이 좋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뭐라?”
태자의 눈썹이 움찔했다.
하지만 진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태자의 뒤에 있던 환관이 뭐라 소리를 치려 했지만, 진화와 눈을 마주치자 입만 벙긋거리고 말았다.
단련된 무인의 기세를 감히 환관 따위가 받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읏!”
진화의 기세와 맞붙은 태자가 걸음을 주춤거렸다.
진화의 화려한 얼굴만 보고 있다가, 진화가 가까이 서니.
태자는 그제야 진화가 자신을 내려다볼 정도로 키가 크고 체격이 단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궁전 궁인들이 건희전 주변을 알짱거리더군요.”
“그, 그런 적 없다!”
그래도 제국의 황태자라는 것인가.
무공을 익힌 적 없는 범인의 몸으로도 태자는 진화에게 굽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건 진화가 배려할 때의 이야기였다.
“소제, 무림인이라 귀가 무척 밝답니다. 불안한 쥐 새끼처럼 부산거리니,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어야 말이죠. 소제의 황궁 적응이 염려되신다니, 배려 부탁드리지요.”
“그런 적……!”
파지직-.
푸른 번개가 번쩍이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태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진화가 궁에 있는 것은 오로지 남궁세가와 부모님, 그리고 황제와 황후를 위해서였으니. 거기에 다른 황족들이 끼어들 여지는 단 하나도 없었다.
* * *
궁을 나온 진화는 남궁구와 함께 다시 하오문을 찾았다.
적호단주와 남궁진혜를 대신해서 하오문과의 거래를 마치기 위해서였다.
적의 습격이 예견된 터라, 적호단주와 남궁진혜는 곧 정의맹으로 암림혈귀갑을 운반할 작전을 짜느라 바빴다.
마침 황자이자 관도생으로 이뤄진 한 개의 조를 이끌며 조장과 같은 위치에 있는 진화가 존재했으니.
적호단주는 이때다 싶어서 진화에게 귀찮은 대외업무를 떠맡겨 버렸다.
남궁진혜는 전서 작업은 이제 질렸다며 남궁교명도 눌러앉혔다.
어차피 진화도 떠나기 전 하오문에 한 번 더 들를 생각이긴 했다.
“함정이 십이 할. 문제는 그 정보를 누가 흘렸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건데…….”
하오문에서 준 정보였다.
확실한 정보였고, 함정인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용정석굴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였다.
“정보 출처 조사를 하오문에 의뢰해도 되는지 모르겠군. 처음 정보를 가져왔을 때부터 추적했을 텐데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면, 끈이 끊긴 거 아닌가?”
남궁구가 뭔가 마땅치 않다는 듯 말했다.
그때, 계단을 내려온 군조가 끼어들었다.
“단서를 가지고 출처 추적을 하기도 전에 급하게 덤빈 쪽은 정의맹이지요.”
남궁구를 향해 변함없는 적의 가득한 눈빛에, 남궁구도 덩달아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아, 그렇게 겁이 많아서 전투 후에 도망치듯 사라진 거였나?”
“저는 본래 행동이 재빠른 편입니다.”
남궁구의 말을 군조가 여유 있게 받아쳤다.
하지만 남궁구는 그날 전투를 보고 넋을 잃었던 군조의 모습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도망이 빠른 거겠지.”
“이쪽은 빠른 정보가 생명이라서요.”
“그런 것치고는 아직도 정보 출처를 못 찾았던데. 혹시 그 정보도 그냥 엿들은 거였나? 방금처럼.”
“들으라고 떠든 것 아니었습니까?”
“손님의 대화는 들어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접객의 기본이지.”
“주인의 집에서 객이 주인을 험담하는 것도 예에 어긋나지요.”
남궁구와 군조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싸움을 이어 갔다.
그러면서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눈을 깜빡이지 않는 싸움도 함께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둘을 보며 한숨을 쉰 진화가 하오문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남궁구와 군조는 눈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흐, 흥! 정파는 역시 말로만 예를 중시하는 곳이군요. 허락도 없이 상대 문주의 집무실을 들어가다니. 막무가내인 것이 주군이나 수하나. 하긴, 의외로 정파가 더 피도 눈물도 없더군요. 핏줄의 정도……!”
“그만.”
군조의 말을 남궁구가 끊어 버렸다.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기세.
순간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간 듯, 군조는 제 목을 만질 뻔했다.
“입 다물어. 남궁이 아무리 자비로워도 첩자를 살려 둔 적은 없어. 모르는 척하고 있을 때 자극하지 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
남궁구의 눈빛은 그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오문이 남궁세가에 대해 입을 벙긋하는 순간, 우리 아버지 손에 죽어. 아니면…… 뒤에 도련님 손에 죽거나.”
“……!”
남궁구의 말이 칼날처럼 군조의 심장을 꿰뚫자마자,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군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군조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하오문주의 집무실 안에서 진화의 살기가 여전히 군조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오문주의 집무실 안에는 하오문주가 난처한 듯 진화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정이 깊은 아이인데, 아직 철이 안 들어서 탈이죠.”
하오문주는 농담을 섞어서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다.
하지만 한겨울 북풍처럼 차디찬 진화의 눈빛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의 말대로다. 오늘은 거래를 마무리할 겸 경고를 하러 들렀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남궁세가의 정보가 사패천에 흘러가는 순간, 당신은 구에게 다시 상처를 입히게 될 거다.”
차라리 죽인다고 협박하는 것이 나았을까.
진화의 경고가 하오문주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진화는 하오문주의 상처받은 눈빛을 외면했다.
고압적인 말투도 바꾸지 않았다.
지난번엔 친우의 어머니에게 예의를 차린 것이라면, 이번엔 친우의 약점이 되는 하오문주를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에 위협이 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치워 버릴 거다. 하지만 구 또한 남궁이다. 나는 구가 다치지 않길 바라. 그러니 처신을 잘하길 바라지.”
서하(西鰕) 채명지.
서쪽의 암고래라는 그녀의 별호에서 진득한 미련이 느껴지는 순간, 진화는 그것을 날카롭게 잘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진화의 결심을 알아차린 채명지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하지만 곧 천천히, 아들의 어머니로서 고개를 숙였다.
“……구를 잘 부탁드립니다.”
채명지는 진화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아들과의 작별 인사를 목 안으로 삼켰다.
* * *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밤의 산속.
용정석굴은 얼마 전 큰 전투가 있고 시체조차 치워지지 않아서 죽음의 냄새가 주변에 가득했다.
코를 찌르는 죽음의 냄새.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
적막이 흘렀다.
시체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시체를 뜨는 벌레 하나, 짐승 하나 보이지 않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한낱 미물조차 자리를 피하게 만드는 사특함이 용정석굴 내부에 가득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시체 사이로, 검은 사슬이 부지런히 꿈틀거렸다.
꿀렁꿀렁.
시체의 피와 영혼을 삼키는 듯, 검은 사슬이 탐욕스럽게 움직였다.
“크흐흐흐! 이것으로 혈정을 찾으러 갈 만큼의 힘을 모을 수 있겠어!”
차르르르르.
시체들 사이로 불길한 웃음소리가 퍼지고, 검은 사슬이 함께 기뻐하는 듯 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