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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21)화 (221/425)

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재앙 화(禍) : 애물단지(4)

중원을 지배하는 제국의 주인이라 해도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순 없다.

결국 진화가 정의맹으로 귀환해야 하는 때가 된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부모님을 떠올리라고 하면 당장은 팽연화와 남궁경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팽연화와 남궁경을 떠올린 후에 황금색 옷을 입은 황제와 황후가 떠올랐다.

짧지만 함께 지내보니, 자신이 그들과 상당히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적으로 마음속에 그어 놓은 선이 분명하다는 점이 그러했다.

선 안의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진화는, 황제와 황후가 그 선을 넘어 자신을 배려하는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이상하군.’

그동안 무림의 일로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떠나며 인사를 나눌 때,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황제와 황후를 보자니 미안하고 아쉬워졌다.

이상한 마음이었다.

“전에 말씀 올린 대로, 놈들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놈들이 있는 한,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를 끌어내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놈들을 없애야 합니다.”

진화가 아쉬움에 눈물을 보이는 황후와 팽연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황후는 자신을 보는 진화의 눈빛에서 이제 제법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아쉬웠다.

조금만 더 같이 있을 수 있었다면…… 황후는 그 말을 눈물로 대신했다.

“다치지 말렴. 무엇보다 네가 우선이다.”

황후와 팽연화가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리고.

퍼-억!

가슴이 부딪힐 정도로 세게 황제가 안아 왔다.

“내 아들, 아주 어린 너를 안고 나서 너를 잃어버렸는데, 이제는 다 큰 너를 내 손으로 보내 줘야 하는구나.”

“…….”

“너를 믿는다. 네 손으로 복수를 이루고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비록 양주대부처럼 검을 휘둘러 너를 도울 수는 없다만, 기억하거라. 너의 아비는 제국의 황제다. 너를 위해서라면 천하라도 움직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진화가 살짝 놀란 얼굴로 황제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남궁경이 씨익 웃어 보였다.

“또 보자, 아들!”

“예, 아버지.”

남궁경의 짧은 인사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진화가 부모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진득하게 따라붙는 환관 동시와 건희전 궁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궁을 나섰다.

“잠깐! 게섰거라!”

내궁을 나가는 건교문 앞.

누군가 진화의 걸음을 막아섰다.

“어떻게 갈 때까지 황실 어른들에게 인사를 오지 않을 수 있지? 게다가 하직 인사도 않고 궁을 나가려 하다니! 이래서 천박한 무인들 틈에 자란 출신은 속일 수 없다고 하는 거지. 내 넓은 아량으로 참고 기다렸으나, 더는 안 되겠구나. 지금 당장……!”

“꺼져.”

툭.

진화는 제 앞을 막아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녀가 누구인지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저, 저, 야아---!”

여자가 뒤에서 꽤액 소리를 질렀지만, 진화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녀오십시오, 저하.”

건희전 궁인들이 진화의 뒷모습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화의 모습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건희전 궁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환관 동시의 눈길이 여자를 향했다.

“열양공주마마께서야말로 황실 예법을 새로 배우셔야겠습니다. 큰일 하러 떠나시는 동해왕 저하의 길을 막으시다니. 오늘의 일은 황후궁에 고할 것입니다.”

“흥, 네놈이 감히 본 공주를 협박하는 것이냐? 황후마마께 고하면 뭐! 내 어머니 또한 황자를 셋이나 낳은 귀빈이시다! 그 뒤에 상수 원씨 가문이 있고! 저 불손한 놈이 당연히 하직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할 분이라고!”

열양공주가 기세등등하게 환관 동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늙은 환관의 눈에는 참새가 가슴 털을 부풀린 것처럼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허어! 마마, 황궁에선 웃전을 들먹인 만큼 대가가 크게 돌아오지요.”

환관 동시가 조용히 충고했다.

하지만 상대는 환관 동시의 조언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 늙은 환관 따위가 그래도!”

열양공주의 팔이 환관 동시의 뺨을 칠 듯 올라갔다.

하지만 끝내 뺨을 내리치지는 못했다.

늙은 환관이 두 명의 황제를 모시고, 궁궐의 수천 궁인들의 수장인 일곱 태감 중 하나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여유롭게 저를 내려다보는 주름진 눈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그래, 어디 황후전에 고해 봐! 나는 이 무례를 폐하께 고할 것이니!”

열양공주가 이를 갈며 돌아섰다.

땅을 내리치는 듯 품위 없이 걷는 발걸음을 보며, 환관 동시가 혀를 찼다.

“쯧쯧쯧, 웃전을 들먹이면 대가가 커진다 충고했거늘…….”

그동안 자식 없이도 내명부를 장악하고 황후궁의 권위를 잃지 않았던 황후였다.

하남 조씨의 가주 조위례는 여전히 황제의 스승이었고, 오라비인 조정호는 사례교위로서 황도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남 조씨 일문은 그들의 금력만으로도 능히 전쟁을 이끌고 남을 정도였으니.

가문의 힘이라면 가주가 현직 전농으로 있는 상수 원씨 가문도 뒤질 것은 아니나, 하남 조씨의 힘은 황제의 총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큰 차이가 있었다.

조용히 황궁 궁인들을 장악한 황후와 하남 조씨의 힘.

상수 원씨 출신에 아들을 셋씩이나 낳은 원귀빈이 황후에 오르지 못한 이유인 동시에, 원귀빈 소생의 동평왕 한유창을 두고 폐서인을 모후로 둔 한유강이 태자가 된 이유였다.

언제든 끌어내릴 수 있으니까.

‘저 물정 모르는 년이 어딜 감히 우리 저하를…… 쯧쯧.’

제일 결정적인 조언을 빼먹은 환관 동시가 콧김을 뿜으며 황후궁으로 갔다.

* * *

“어휴. 저 애물단지들.”

팽치가 화려한 꽃마차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마차 안에는, 남궁진혜가 진화를 앉혀 놓고 기뻐하고 있었다.

“저 마차가 남궁세가 거라고?”

“소공자님 전용 마차입니다.”

“허!”

남궁교명은 저 화려한 마차가 처음에는 남궁진혜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어쩌다 진화가 사용하게 된 경위를 몰랐다.

팽치는 그저 저런 마차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기가 막혔다.

“그래, 뭐가 어찌 됐든 누가 봐도 귀중품이 들어 있게 생겼네.”

팽치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 화려한 마차는 결국 적의 공격을 집중시키기 위한 대책 중 하나일 뿐이었다.

빨간 꽃무늬와 오색 빛깔 장식이 달린 마차를 낚싯대에 끼운 지렁이 같은 존재라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 왔다.

“출발한다!”

적호단이 정의맹으로 출발했다.

양청현까지 육로로 반나절.

길고 긴 반나절이 될 것이다.

마차 하나와 함께 산을 넘던 적호단이 중간에 멈추었다.

해가 중천에 올라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단원들이 능숙하게 사방을 경계했다.

육로는 산을 끼면서 여러모로 불편하고 긴 일정이었고, 숙련된 무인들도 체력이 무한정은 아니라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적호단이 수상에서 적과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마차 문이 열리고, 남궁진혜와 진화가 마차에서 내렸다.

‘이곳입니까?’

‘아아.’

진화와 눈이 마주친 팽치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점심을 먹기 좋게 널찍한 공터.

사방에 숨은 나무가 적고, 양쪽의 길이 넓게 뚫려 있었다.

적을 기다리기 좋은 장소였다.

진화는 보란 듯이 마차의 문을 꼼꼼하게 닫고, 하남 조씨에서 정성껏 마련해 준 점심 보자기를 열었다.

상하지 않고 간단히 먹기 좋게 대나무 안에 넣은 찰밥.

둥근 찰밥 안에는 짭짤하게 간이 된 고기 조림이 가득했다.

절이지 않은 고기가 귀한 때라, 적호단 단원들이 한 통씩 들고 희희낙락했다.

그렇게 소소한 점심시간이 지나는 즈음.

스스스스슷---!

“……!”

‘음.’

남궁진혜와 진화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하고, 이내 팽치와 눈을 마주쳤다.

팽치의 신호를 받은 적호단원들도 아무렇지 않게 찰밥을 입에 넣으며 옆에 놓아둔 검을 확인했다.

스스스슷-.

덜컹! 쿵! 쿵!

순식간에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나무 상자가 밖으로 끌려 나갔다.

“적이다!”

채-앵!

적호단원들이 본격적으로 검을 들고 사방을 경계하고, 제일 먼저 나선 남궁진혜가 나무 상자가 끌려 들어간 방향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타아아앗!”

쉐에엑-!

퍼---엉!

새파란 검기가 날아가자마자,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나무 파편이 흩어졌다.

나무 상자의 안이 빈 것을 알고 남궁진혜의 검기를 향해 던진 듯했다.

그리고 사방에서 검은 사슬이 마차를 향해 날아갔다.

쉐에에에---!

“어딜 감히-!”

카-앙! 촤자자자작-!

남궁진혜가 검을 휘둘러 검은 사슬을 감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사슬을 움켜잡았다.

꽈-득.

온몸의 근육이 잔뜩 부풀어 오르며, 남궁진혜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튀어나와라, 이 쥐새끼 같은 놈아-!”

촤아아아악----!

남궁진혜에게 잡힌 검은 사슬이 크게 출렁거렸다.

동시에 남궁진혜를 향해 날아드는 다른 사슬들은, 진화의 검에 모두 잘려 나갔다.

새파란 번개가 순식간에 사슬들을 끊었다.

파지직.

촤아아앗-!

남궁진혜와 팽팽하게 대치하던 사슬이 위태위태하더니, 결국 뜯어졌다. 남궁진혜 또한 그대로 튕겨 나갔다.

“큿!”

“누님!”

진화가 놀라 남궁진혜를 불렀다.

남궁진혜가 얼굴을 구기고, 찝찝하게 끈적이는 손을 폈다.

“피?”

“부단주-!”

“아, 제 피 아닙니다! 내 피가 아니야.”

남궁진혜가 팽치에게 큰 소리로 대답하고 놀란 진화에게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에 묻은 것을 확인했다.

“씨……펄. 이거 뭐야? 킁킁, 피 맞는데?”

남궁진혜가 미간을 구겼다.

붉은 갈색을 띠면서 찐득하고 끈적이는 촉감.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고약한 썩은 내가 풍겼다.

진화가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양손 가득 번뜩이는 뇌전을, 검은 사슬이 날아온 곳을 향해 던졌다.

파지지지직---!

퍼---엉!

천뢰장의 여파로 나무가 쓰러지고, 검은 인영들이 튕겨 나왔다.

그와 함께.

촤아아아아아--!

어두운 숲 안에서 검은 사슬들이 한 번에 쏟아졌다.

검은 사슬과 함께 숨어 있던 검은 무복의 암살자들도 함께 튀어나왔다.

* * *

챙챙--!

“앞에 조심!”

챙--!

적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포위되어 있었던 것인가.

어둠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암살자들의 검은 복면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수가 쏟아졌다.

두 배가 넘을 정도로 많은 수.

“뭉쳐! 튀어 나가지 말고!”

다행히 적호단은 다수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개인의 무력 우위를 지키며, 조별로 뭉쳐 암살자들의 공격을 잘 막아 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적이 없다 판단되자마자, 적호단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가자-!”

“예!”

적호단주의 목소리에, 적호단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애초에 적호단은 정의맹 본부에 머물며 적을 대비하기 위해 결정된 무단이었다.

전쟁 때엔 정의맹에 침입하는 다수의 적을 몰살시키기 위한 훈련을 하고, 유사시엔 요인의 호위를 경호를 맡았다.

즉, 사람이든 땅이든 무언가를 지키며 싸우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적호단주 팽치가 암살자들 사이를 오가며 적호단을 움직이자, 조별로 묶인 그들이 하나의 진이 되어 상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거기로 튀면 반칙이지!”

쉐에에에엑----!

하얀 검기가 안으로 파고드는 암살자의 등을 때렸다.

적호단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들과 같은 호흡을 자랑할 수는 없었기에, 남궁구를 비롯한 관도생들은 따로 움직였다.

남궁구와 일행은 그간의 전투 경험들을 살려 적호단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그 자신들은 알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호흡이 척척 맞았다.

쉐에에엑--! 푹! 푹!

복잡한 혼전의 상황을 남궁구가 질풍처럼 헤집고 나면, 남궁교명이 뒤를 이어 확실하게 정리했다.

또한, 당혜군이 암살자들의 움직임을 통제하면 나하연과 팽가 형제가 뛰어들어 벌레를 눌러 밟듯 암살자들의 온몸을 부서뜨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은 현오의 몫이었다.

“하하하하! 죽어라! 죽어라, 관세음보살이 기다리신다---!”

퍽! 퍽! 퍽!

현오가 들고 있는 것은 분명 염주였는데, 손아귀에 감아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암살자들의 머리가 확실하게 터져 나갔다.

진화는 눈이 붉어지지 않았는데도 잔뜩 흥분한 현오를 보며, 백마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이 새끼가 숨어 있으면 못 찾을까 봐--!”

쉐에에엑---!

퍼어억! 퍽! 퍽!

남궁진혜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검은 사슬의 주인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숨어 있을 만한 곳은 모두 부수겠다는 듯, 눈앞을 막고 있던 나무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때.

스스스스슷---!

“누님!”

불길한 움직임을 읽은 진화가 남궁진혜의 허리를 잡고 뛰어올랐다.

파---팟!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 검은 사슬이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

사슬 끝에 달린 서슬 퍼런 송곳이 허공을 찔렀다.

동시에 빈틈을 노리듯 공중으로 뛰어오른 진화와 남궁진혜를 노리고 다른 사슬이 쏘아졌다.

촤아아아----!

파팟-!

진화는 마치 독니처럼 저를 향해 날아드는 두 개의 사슬을 끊어 내며 남궁진혜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새로운 암림혈귀갑이 이전의 것에 뒤지지 않는군요.”

“……그래?”

진화의 말에 대답한 것은 남궁진혜가 아니었다.

휙!

놀란 진화와 남궁진혜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남궁세가의 꽃마차 위에서 한 사내가 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이전의 암림혈귀갑을 본 적이 있구나.”

사내가 진화를 향해 탐욕스러운 눈빛을 번들거렸다.

사내의 등에는 수백 마리의 뱀이 똬리를 튼 듯 검은 사슬이 사방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전에도 보았던 광경.

그리고 이전에도 보았던 붉은 기운.

기다렸던 적의 등장에 진화의 입꼬리가 저절로 스르륵 올라갔다.

“과연 보기만 했을까?”

진화가 도포를 벗고 사내에게 등을 보였다.

“……!”

진화의 등에 검게 웅크린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는데, 사내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소리마제의 것이 여기 있다. 와서 가져가 보아라.”

진화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사내를 도발하자마자, 사내의 등 뒤에 있던 검은 사슬이 일제히 진화를 향해 쏘아져 나왔다.

동시에 진화가 마차를 향해 뛰어올랐다.

광대가 불거질 정도로 마른 몸에 기괴한 짐승처럼 붙어 있는 검은 암림혈귀갑.

짙은 혈향과 함께 불길할 정도로 지독한 사기.

하지만 사내는 소리마제가 아니었다.

아니, 사내가 또 다른 마제라도 상관없었다.

‘착각하지 마라. 네놈들은 역천마제가 아니야!’

진화의 눈에서 새파란 번개가 번쩍였다.

눈부신 푸른빛은 진화의 검을 타고 사내를 향해 뻗어 나갔다.

쉐에에에엑-----!

퍼---엉!

진화의 도발에 놀란 사람은 사내만이 아니었다.

“저 진짜 미친놈들!”

남궁진혜에게 암림혈귀갑을 마차에 몰래 실어 놓겠다는 것만 들었지, 설마 진화가 그것을 직접 몸에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던 팽치였다.

파지지지직----!

펑! 펑! 퍼---엉!

허공에서 푸른 번개가 번쩍이더니, 남궁세가가 자랑하던 꽃마차에 불이 붙었다.

팽치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았다.

* * *

조용한 협곡.

하늘에서 대붕이 내려왔다.

아니, 대붕이 아닌 사람이었다.

하얀 피풍의를 머리부터 둘러쓴 인영이 깊은 협곡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을 천천히 걸어 들어간 인영은, 마침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스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단상을 발견했다.

인영이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서두르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걸음.

신비로운 옥빛 단상에는 한 노인이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광마제 구훤, 이제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인영은 광마제 구훤을 친근하게 부르며, 그의 머리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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