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구휼할 진(賑) 죄 화(禍) : 이전과 다른 출발(2)
신양현.
서주에서 연주를 넘어가는 이들이 산맥을 넘을 때 지나는 첫 관문이었다.
장애물 같은 어려운 고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군의 검문이 현이라는 의미였다.
특히 관문 근처에 있는 고진마을은 여행자들의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보다 검문을 기다리면서 산맥을 넘기 전 몸을 추스르는 상인 일행이 더 많을 정도였다.
꾸에에엑---!
마을 중앙 공터에서 돼지의 멱을 따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각 객잔과 식당에서 양동이를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넓적다리! 일곱 냥!”
“머리! 머리, 두 냥-!”
“내장! 내장 닷 냥!”
사람들이 양동이까지 들고 목청껏 소리를 쳤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지만 규칙은 있었다.
양동이를 든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원하는 부위와 가격을 말하면, 돼지의 주인이 마음에 드는 가격을 말한 사람에게 부위를 표시해 둔 나무 조각을 주고 돈을 받아 왔다.
돼지를 손질하고 나면 그 표식을 받고 부위별로 나눠 주는 방식이었다.
손님이 많은 마을이라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그들 나름대로 만들어 낸 질서였다.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에게도 그것은 좋은 볼거리였다.
이 층 객잔에서 광장의 소란을 보고 있던 사내의 곁으로, 한 여인이 다가왔다.
몸 선이 드러나는 흑색 무복에 흑백의 구분이 뚜렷한 이목구비 외에 특징이 별로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사내를 부르는 목소리가 노인의 그것처럼 거칠었다.
“흑표(黑彪).”
흑표라 불린 사내가 무심한 눈길로 자신을 부른 여인을 보았다.
검고 긴 머리칼에,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얼굴 한쪽을 가린 것조차 우수에 찬 듯 보일 정도로 깊은 눈이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몸에 딱 맞게 입은 검은 무복 아래로 탄탄하고 날렵한 몸에서, 식당 이 층에서 누구도 사내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름처럼 나무 위에 웅크린 흑표범 같은 사내였다.
“너냐?”
잠에 취한 듯 나른한 목소리가 여인을 반겼다.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꽤나 유혹적이었지만,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한 눈빛으로 흑표의 앞에 뭔가를 꺼내 놓았다.
탁.
그것은 사나운 원숭이가 새겨진 가면이었다.
가면은 검게 그을려 한쪽이 쪼개져 있었다.
움찔.
흑표가 오른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동요하는 흑표에게 여인이 무심한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했다.
“원승이 죽었다. 천뢰제왕검법에 당한 흔적이 있었다. 앞에서 목을 베었더군.”
“……청룡단주의 무위가 그 정도였던가?”
“청룡단은 독에 당했지만, 청룡단주는 멀쩡했고 늦지 않게 적호단의 지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승을 죽인 건 청룡단주가 아니야.”
여인의 말에 흑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놈인가?”
“천뢰제왕검을 쓰는 두 사람 중 남궁조는 정의맹을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허!”
흑표가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진짜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흐, 그놈, 그놈이라고? 흐흐흐, 간이 큰 건 여전하군.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제 발로 기어 나와? 크흐흐흐, 큭큭큭. ……미친놈.”
고개를 숙이고 웃던 흑표가 짧은 욕지거리를 뱉는 순간 얼굴을 돌변했다.
흑표가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여인을 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게 옳았다.
“난 반드시 그 배신자 놈을 죽여 버릴 거다.”
흑표가 살기를 번들거리며 말했다.
여인은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놈은 건드릴 수 없다, 주군의 제물이니까.”
“알 게 뭐야!”
타—앙!
지극히 원론적인 여인의 말에, 흑표가 분노를 터뜨리며 팔을 휘둘렀다.
탁자에 있던 원숭이 가면이 한쪽 벽에 처박혔다.
그것을 보는 여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
흑표가 여인을 노려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 보니 그 제물 양육실에 있을 때부터 네가 그놈이랑 정이 깊었던가? 자식처럼 품에 안아 보살폈지. 그놈 때문에 죽게 생겼을 때에도 그놈 걱정을 했던가. 왜, 이제라도 보게 되어서 좋아?”
흑표는 여인을 조롱하려는 듯 이죽거렸다.
여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그래 봐야 제물 새끼야. 아, 그러고 보니 환마제가 죽고 혼현마제가 환마제를 대신해서 그 제물을 키우고 있다지? 그놈도 그렇게 될까 봐, 엉? 그걸 기대해?”
“흑표, 불충한 말은 삼가라.”
“불충! 불충! 불충은, 씨-발!”
쾅!
흑표가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흑표의 눈 안에서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혼현마제가 제물 따위 빨리 죽여서 갈아치우면 그만이라고 했다지? 주군의 제물도 훨씬 쓸모 있는 걸로 고르면 그만이야! 우린 그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온몸이 녹아 뒈질 뻔했는데, 놈을 그냥 둬? 그렇게는 못 하지! 손가락까지 잘근잘근 찢어 버릴 거다! 그러니까 효서(曉鼠), 네년은 방해하지 마라.”
흑표가 여인, 효서에게 경고를 남기고 매몰차게 돌아섰다.
잔뜩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내려가는 흑표의 뒷모습을 보며 효서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멍청한 놈. 알아서 명을 재촉하는구나.”
효서의 얼굴 위로, 검은 쥐의 형상을 한 가면이 내려왔다.
검은 쥐의 눈이 그림자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 * *
산에는 하나의 길이 있었다.
하지만 걸어가는 방향에 따라 누군가에겐 내리막이 되었고, 다른 누군가에겐 오르막이 되었다.
그곳은 올라갈 때엔 힘들고 고된 길이지만, 내려올 땐 위험한 길이었다.
하나의 길이었지만, 결국 내가 ‘어느 방향에서 길을 바라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청룡단주 남궁현의 시선이 진화를 향했다.
천진한 얼굴로 뭔가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뚱뚱땡중, 너는 또 만두냐? 그때처럼 또 산에서 굴러떨어질라고!”
남궁구가 이곳에 와서도 만두 봉지를 들고 있는 현오를 타박했다.
물론 현오는 남궁구의 타박쯤은 아침 타종 소리처럼 흘려버렸다.
“내 살의 태반은 만두의 공로임을 인정하지만, 지금 먹는 이 만두는 아직 죄가 없네.”
“대신 나흘쯤 뒤에 새로운 살이 되겠지.”
남궁교명이 현오의 변명을 비웃자, 현오가 그제야 조금 침울한 기색을 했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현오가 제 뱃살을 쓰다듬으며 염불을 외자, 남궁구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만두의 명복이 아니라 네놈의 명복이나 빌라고! 저번엔 운이 좋아 진혜 누님한테 잡혔지만, 이번에 진짜 적진 한가운데로 굴러떨어지면 어쩔 거야?”
“뱃살이 명복을 빌어준다고 없어지는 거라면, 당혜군이 새벽에 그렇게 뛰지도 않겠지.”
“뭐야!”
뜬금없는 불똥을 맞은 당혜군까지 가세하며, 네 사람은 현오의 뱃살에 대해 다시 토론을 이어갔다.
“올해 초에 맞춘 관도복이 벌써 이렇게 터질 듯이 살이 찐 거야?”
“아니, 관도복이 터질 듯하지는…….”
“아니긴. 옷 여밈 끈이 간신히 달려 있구먼. 너는 이 끈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아, 왜 내게만 이리 가혹한 겐가? 저기 남궁 시주도 같이 먹고 있는데!”
현오가 곧 삐져나올 듯한 퉁퉁한 뱃살을 숨기며 억울하다는 듯 진화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만두를 먹고 있기는 진화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둘이서 꼭두새벽에 오성반점 앞에 줄을 선 덕분이었다.
“저건…… 됐어!”
당혜군이 진화와 눈이 마주칠세라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 도련님은…… 하아, 먹어도 살이 안 찌잖아.”
“무엇보다 넌 스님이다.”
남궁구와 남궁교명도 진화를 외면했다.
진화가 줄 서서 가져온 만두를 그들도 한 봉지씩 받았던 터였다.
소란스러운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어울리고 있는 모습.
진화를 보고 있던 청룡단주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천진하고 유순한 아이 같군.’
이전까지 진화에 대해 들려오던 소문 그대로였다.
청룡단주는 지난번 제가 보았던 그 위험하게 눈을 빛내던 모습은 꿈인가 싶었다.
남궁진휘와의 약속대로 제대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청룡단주와 눈이 마주친 진화가 조심스럽게 청룡단주의 곁에 다가왔다.
“이거…….”
“뭐지?”
“만두입니다.”
“…….”
청룡단주는 수줍은 듯 귓불을 붉힌 진화와 만두를 번갈아 보며,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주는 만두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자, 입안 가득 고기의 육향과 육즙이 퍼졌다.
“……맛이 괜찮군.”
“오성반점의 아침 특제 만두입니다. 인시부터 줄을 섰습니다.”
“…….”
대남궁세가 직계, 아니 황자 주제에 고작 만두 때문에 새벽에 줄을 서다니.
청룡단주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식구들과 나눠 먹으려고 사 왔는데…… 누님은 적호단주님과 나눠 드시네요.”
진화의 말에, 청룡단주가 진화의 시선을 따라 남궁진혜를 찾았다.
남궁진혜는 늘 그렇듯 적호단주 팽치와 투덕거리고 있었다.
“이거 먹고 화 좀 풀어요!”
“헹! 하나로 될 것 같아? 두 개 내놔.”
“아 씨, 이게 어떤 건데…….”
남궁진혜가 투덜거리며 적호단주에게 만두 하나를 더 내주었다.
“누님이 제가 드린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눠 먹는 건 처음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진화의 말투가 어쩐지 섭섭한 듯 들렸다.
제가 준 것이라면 남궁진휘와도 나누지 않으려고 무리를 해서라도 한입에 털어 넣던 남궁진혜였다.
그런 남궁진혜가 적호단주와 사이좋게 만두를 나눠 먹고 있다니.
진화는 남궁진혜를 보내 줘야 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느낌에, 기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눠 먹고 있다고?”
청룡단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눈에는 아무리 좋게 봐도 적호단주 팽치는 남궁진혜에게 직책을 남용하여 만두를 강탈하고 있었고, 남궁진혜는 상사의 명에 불복종 중이었다.
“시집은 조금 더 천천히 가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진화의 말에 청룡단주가 뜨악-한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청룡단주의 눈동자가 급히 흔들리며 남궁진혜와 적호단주에게 향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청룡단주가 무겁게 입을 뗐다.
“……아예 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예? 하하하, 당숙께서도 형님과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청룡단주의 말에 진화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남은 만두를 모두 청룡단주에게 넘기고, 친우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청룡단주는 제 손에 남은 만두 봉지와 진화를 번갈아 보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와서 뭔가 충격적인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청룡단주의 손에는 만두가 남아 있었다.
“식구들끼리 나눠 먹으려 샀다고? ……맛은 괜찮군.”
청룡단주는 진화의 말을 곱씹으며, 기분 좋은 얼굴로 만두를 먹었다.
어째 남궁진휘의 말처럼 휘말리는 느낌이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분명 나쁜 기분은 아니었는데.
“적이다! 남은 청룡단원들을 보호하라!”
청룡단주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수하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가 쓰러져 있는 사내를 끌어안았다.
“부단주!”
“크읏, 단주님!”
“해신단부터 씹어라! 전부, 해신단을 먹여라!”
청룡단주는 입술이 새파랗게 변한 부단주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또한 부단주의 목구멍 안으로 해신단을 밀어 넣었다.
쉐에에엑----!
퍼---엉!
펑! 펑! 펑---!
“죽여라--!”
“적호단은 들어라! 무적진이다---!”
“푸하-! 단주, 그게 무슨 진이에요!”
적호단주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들리는 듯하더니, 적호단 전체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무적진은 진화의 아버지 남궁경이 만든 제왕무적단의 공격진으로,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닥치는 대로 적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아마도 남궁진혜를 통해 전해진 듯했다.
독이 퍼지지 않도록 수하들에게 점혈을 해 준 청룡단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도작하기 전에 이미 공격을 받아 죽은 수하들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수하들을 공격했던 흑의인들은 적호단이 상대하는 중이었다.
“젠장!”
청룡단주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쉐에엑-!
채-앵!
청룡단주가 순식간에 오른손으로 검을 빼어, 자신을 노린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상대와 검을 맞댄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퍼---억!
절대적인 힘의 차이에 순식간에 뒤로 날아간 흑의인이 바위에 부딪혀 쓰러졌다.
검은 가면 밖으로 피를 뱉어 내는 모습을 보며, 청룡단주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광룡귀면대!’
쉐에에엑---!
검푸른 기운이 날아가 흑의인의 검은 가면과 함께 그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감히 청룡단을 먹이로 삼은 걸, 죽어서도 후회하게 해 주마!”
청룡단주의 분노가 다음 적을 찾았다.
그때, 청룡단주의 눈에 새파란 불꽃이 눈에 띄었다.
퍼-엉!
검은 기운이 번개를 집어삼켰다.
“죽어라! 이 배신자---!”
쉐에에엑---!
챙! 챙!
검은 기운이 매섭게 진화를 몰아붙이고, 진화는 그의 공격을 막아 내며 점점 뒤로 물러났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 희고 고운 모가지를 꺾어 버릴 날을!”
표범의 가면을 쓴 사내가 붉게 증오를 불태웠다.
그 증오를 마주하며 진화는 조금 당황스러운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허! 날 기억 못 하나?”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보는 진화의 모습에, 사내의 가면 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한다면?”
사내가 천천히 가면을 들어 올렸다.
비틀린 입 위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고, 그것을 본 진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넌…… 제물 양육실의 그…… 죽지 않았나?”
진화가 자신을 알아보자, 사내가 기쁜 듯 사납게 웃었다.
설마 광마제가 저를 위해 보낸 자가 저 사내일 줄이야.
그때, 사내가 시커먼 살기를 일렁이며 물었다.
“효서도 살아 있는데. 아, 효서라면 너는 잘 모르려나?”
약을 올리는 듯한 사내의 말에 진화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내는 악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광대처럼 쥐 가면을 쓴 여인 하나를 소개했다.
“오랜만이야.”
“……!”
여인이 가면을 벗자, 진화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광마제가 보낸 이들은, 진화의 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