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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30)화 (230/425)

남궁마제

구휼할 진(賑) 죄 화(禍) : 이전과 다른 출발(5)

진화가 숨이 끊어진 흑표의 얼굴을 보았다.

매끄럽게 잘생긴 얼굴.

못 먹고 큰 것치고 타고난 신체가 크고 곧았다.

명문 정파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젊고 잘생긴 인재로 명성을 날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이렇게 아까운 목숨이 제물 양육실에만 수두룩했다.

하다못해 구덩이의 독수에 녹아든 목숨만도 수천 명이 넘었다.

그 구덩이에서 살아남은 것만도 흑표에겐 기적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진화는 마지막까지도 뭔가를 찾아 헤매던 흑표의 눈을 떠올렸다.

‘효서, 그 여자에게 구원을 바랐나?’

흑표에게 남은 구원 같은 건 없었다.

아니, 애초에 흑표에게 구원이 있긴 했었던가.

구덩이에서 살아남았지만, 그걸 구원이라 할 순 없었다.

광마제가 이렇게 써 버릴 심산으로 그의 죽음을 유예한 것뿐이었으니까.

‘운명은 가혹할 정도로 불공평하지.’

그런 의미에서 진화에게 닿은 남궁세가의 구원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것이었는지.

진화는 창백하게 식어 가는 흑표의 주검을 보며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 갔다.

‘네게 일어난 기적이 불공평했을지언정, 그걸 잡지 못하고 광마제의 꼭두각시로 산 건 네 선택이었다.’

진화의 이전 생도 그러했다.

구원의 기적을 잡지 못하고, 비참하게 허비하다 죽어 버렸다.

‘다음 생에라도 네게 두 번째 구원이 오거든, 놓치지 마라.’

소유욕이 전부였던 효서와 달리 어린 진화에게 진짜 정을 주었기에, 진화는 흑표의 주검에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흑표의 심장에서 검을 뽑은 진화가 단호하게 돌아섰다.

상황은 모두 끝나가고 있었다.

광룡귀형진이 무너지면서, 진에 갇힌 쪽은 사슬을 잡고 있던 광룡귀면대가 되었다.

사슬과 함께 무너진 그들은 남은 청룡단과 적호단의 먹잇감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

과거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광룡귀형진이었다.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의 무덤.

수많은 정파 무단을 몰살시킨 거미 지옥.

그 광룡귀형진의 파훼법이 저렇게 단순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설마 인외의 거력을 내는 인간들이 저렇게 모여 있을 줄은 몰랐겠지.’

진화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만으로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그게 실제 일어난 상황이었다.

“아오, 씨-! 살살 빼!”

“엄살은! 가만히 있어 봐요! 그러게, 누가 사슬을 그렇게 무식하게 끌어안으래요?”

남궁진혜가 적호단주의 몸에 박힌 사슬을 빼 주며 고소를 숨기느라 애쓰고 있었다.

다른 쪽에선 당혜군과 남궁구, 남궁교명이 투덜거리며 나하연과 팽가 형제의 몸에 박힌 사슬을 떼어 내고 있었다.

“아! 윽! 아윽! 헙!”

“구, 자네의 신음은 듣고 싶지 않은데…….”

“끔찍하지.”

“소름 끼치는군.”

“닥쳐, 이 웬수들아.”

사슬이 박힌 사람들보다 빼 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진화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진화의 곁으로 현오가 다가왔다.

“저게 사람인가? 지옥신장이 따로 없는 인간들일세.”

현오도 적호단주와 남궁진혜, 나하연, 팽가 형제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제법 진지한 눈으로 진화를 돌아보았다.

“자네가 그 여자를 놓치라고 해서 놓아주긴 했다만, 정말 그걸로 되었나?”

싸우기 전, 진화는 현오에게 효서를 놓치라 전음으로 알렸다.

현오는 그런 진화의 전음대로 효서를 놓치고 온 참이었다.

“자네가 보내 준다고 결코 고마워할 여자가 아니네.”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는 만큼, 광마제와 관련한 일엔 한없이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현오였다.

현오의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진화는 그런 현오의 걱정을 마주하는 대신, 효서가 있었던 장소를 보았다.

“…….”

주변으로 산사태가 난 듯 온갖 나무들이 죄다 쓰러져 있는 광경에, 진화의 눈이 현오를 향해 돌아갔다.

“허허허, 생색내자는 것은 아니고. 내 그 시주 대가리 대신 나무를 깨느라 꽤 힘들었다네.”

이놈이나 저놈이나.

현오가 머리칼도 없는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진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길 봐.”

진화가 대답 대신 죽은 흑표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흑표의 비어 있는 왼손이었다.

마룡아는 흑표의 오른손에 있었지만, 마룡삭은 어디에도 없었다.

효서가 도망을 가며 마룡삭을 들고 간 것이었다.

“가당치도 않지.”

진화의 입꼬리가 사르륵 올라갔다.

“광마제는 내가 일부러 효서를 살려 보낸 걸 알아챌 거야.”

그렇게 착각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과거를 이용할 수 있는 건 광마제만이 아니었다.

진화에겐 이용할 만한 과거가 훨씬 길었다.

* * *

“헉. 헉…….”

마룡삭을 들고 도망친 효서는 안전하다고 생각된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추격의 기미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숨을 좀 골라도 될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다음이 걱정이었다.

실패(失敗).

‘도망을 가야 하나?’

효서의 머릿속에 도망칠 경우를 대비해서 짜 놓은 경로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삐이이---!

어느새 효서의 머리 위에 검은 새가 날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광마제가 그렇게 자유롭게 그들에게 임무를 맡겨 두었을 리 없었다.

광룡귀면대 중에서도 세뇌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들에겐 언제나 감시꾼들이 따라붙었다.

그건 효서의 손에 ‘쥐’ 가면이 들린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쳇.”

제 아기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런데 제 손에 들린 것은 겨우 이딴 쥐 가면이라니.

꽈-득.

짜증이 복받친 효서가 가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문득, 제 다른 쪽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룡삭(魔龍削).

‘그래, 이게 있었지!’

효서의 눈에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광룡귀면대 대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이것이 제 손에 있었다.

‘광룡귀면대!’

그래, 이제 와서 제가 어딜 갈 수 있단 말인가.

세뇌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뿐이지, 광룡귀형권 자체가 광마제의 기운에 복종하게끔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주기적으로 광마제의 기운을 얻지 않는다면 그녀의 몸에 가해진 금제가 발동할 것이었다.

도망쳐 봐야 죽지도 살지도 못할 인생이라면, 차라리 제 발로 복귀하는 것이 맞았다.

광룡귀면대의 대주 자리라면, 제 인생도 반짝반짝 빛나지 않겠는가.

효서가 결연한 눈빛으로 마룡삭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 * *

신제국의 선건궁.

신제국 궁궐에서 귀천성 마제들이 머물고 있는 별궁이었다.

광마제는 선건궁에서 가장 외진, 서거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 실패라…….”

“…….”

송구하다, 잘못했다, 다시 기회를 달라.

광마제의 수하들은 그 어떤 말도 허락받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광마제가 내리는 처단을 받아들이는 것뿐.

반으로 부러진 마룡삭을 보며 광마제가 혀를 찼다.

“쯧, 쓸모없는 것들.”

무맥을 잃은 빈자리가 크게 남았다.

아마도 광마제는 지금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효서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때, 광마제의 시선이 효서를 향했다.

“용케 살아 돌아왔구나. 아니, 그놈이 살려 보낸 건가?”

움찔.

광마제의 말에 효서가 몸을 떨었다.

“저를 놓친 자는 현오라는 소림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소림 선승이 거두고 각우가 제자로 받은 놈이다. 역천마제의 제물로 선택받은 천살지체라고! 크크크, 그런 놈이 너 따위를 놓쳐? 천만에!”

움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광마제의 목소리에 효서의 몸이 떨렸다.

광마제는 두려운 자였지만 그렇다고 효서가 겁쟁이처럼 벌벌 떨 정도는 아니었다.

전부, 광마제의 목소리에 들어 있는 그의 기운에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광마제의 눈이 효서를 향해 붉게 빛났다.

“크흐흐, 잘되었구나. 어찌 보면 청룡단에 있는 남궁 놈들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나아! 그놈이 널 살려 보낸 것을 보면 네게 정이 남은 것 아니겠느냐.”

효서는 광마제의 기운에 몸의 기운이 동요하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놈은 흑표를 단번에 죽였습니다.”

효서의 모습을 지켜보던 광마제가 씨익- 입꼬리를 말았다.

자신의 기운을 받고도 광기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이 제법 강단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쓸 만하겠구나.’

효서를 향해 붉게 물들었던 광마제의 눈빛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오로지 너만 살렸으니 네가 그만큼 그놈에게 특별하다는 뜻이겠지.”

광마제의 말에 효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만 살렸다? ……정말 그런 건가?’

효서는 냉정한 눈으로 저와 흑표를 보던 진화를 떠올렸다.

그는 제가 그를 보살핀 이유가 욕망 때문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그의 실력이라면 저와 흑표 둘 다 죽이고도 남았다.

거기에 현오까지 합류했으니.

광마제의 말처럼 일부러 저를 살린 것이 분명했다.

‘나만 특별했던 거야!’

효서의 눈에 광기가 일렁였다.

광마제가 그런 효서를 만족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네가 올해로 십오 년이던가?”

효서가 광룡귀형권을 익힌 세월이었다.

“그렇습니다.”

“그 마룡삭을 네게 주마.”

“……!”

“새로 대주를 뽑을 때까지다. 물론, 새로운 대주를 뽑기 전에 네 쓸모를 보인다면 그 자리는 네 것이 될 것이고.”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효서가 진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부복했다.

“나가 봐라.”

“충!”

잔뜩 들뜬 마음을 누르느라 정신이 팔린 효서는 끝내 알지 못했다.

검은 창 따위.

귀한 백련현철로 만들어졌다는 것 외엔 광마제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효서가 나가고, 광마제의 눈이 다시 붉게 변했다.

“무맥.”

“충.”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아무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죽은 무맥의 이름과 함께 그 자리를 이어받은 자였다.

“그 녀석과 저년을 계속 얽히게 해야겠구나. 남궁의 핏줄 중에 권마제의 제물이 있다지? 저년을 그곳으로 보내라. 그 녀석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야. 계속, 계속 밖으로 나와야 다시 데려올 틈이 보이지 않겠느냐. 크흐흐흐흐!”

“충!”

광마제에게 검은 가면을 쓰고 충성을 바치는 허수아비는 언제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 * *

동의생이 된 이후, 진화는 남궁세가 정의맹 지부 장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곳엔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있었고, 소림에 복귀하기 싫었던 현오가 자연스럽게 여기에 빌붙었다.

“살아 돌아온 여자를 보며 광마제는 내가 인정(人情)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어서 뭘 하려고?”

“임무를 주겠지,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

“……그게 좋은 건가?”

현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도 진화의 생각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에게 욕망(欲望)은 생존본능 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충성심 따위로 움직일 여자가 아니야.”

진화는 효서가 구덩이 속에서 소리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제가 가졌던 소유물에게서 버림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그 여자를 회유하거나 첩자로 써 먹을 생각인가?”

“광마제가 시켜서든, 그 여자 스스로 원해서든, 그 여자가 먼저 내게 접근하겠지.”

제게 다시 모습을 드러낼 효서를 생각하며 진화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계속 실패할 거다. 그 여자의 수라면 뻔하니까. 하지만 그 여자를 계속 살려 보내면, 광마제도 포기하지 못하겠지.”

진화의 말에 현오와 남궁구, 남궁교명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이번에 청룡단이 가져온 역천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광마제의 것이었어.”

“정말?”

“잘됐네! 그게 광마제의 것이라면 너도……!”

진화의 말에 현오와 남궁구, 남궁교명이 놀라면서도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다만 남궁구가 말을 끝마치지 못한 것은, 의선문이 역천비록의 파훼법을 알아낸다고는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성공할지 실패할지조차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다. 그 여자가 내게 접근하는 한, 광마제도 내게서 숨지 못할 테니까!”

숨바꼭질을 할 때, 숨어 있는 친구를 발견한 술래의 얼굴이 이러할까.

진화가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현오와 남궁구, 남궁교명의 얼굴도 딱 술래에게 잡힌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진화가 남궁진휘의 부름에 밖으로 나가고.

현오와 남궁구, 남궁교명이 더욱 말이 없어졌다.

“……자네들은 왜 아무 말이 없나? 저 시주의 말이 이해가 되나? 역천비록 파훼법이 나올 때까지 광마제의 신변을 잡고 있겠다니! 저치가 제정신인가? 광마제에게 죽을 뻔한 사람 맞아?”

현오는 연신 염주를 돌렸다.

속으로 진화에 대한 욕지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애초에 너희가 제물 양육실에서 저를 키워 준 애들을 어떻게 했다 어쨌다 할 때부터 이해하길 포기했어. 흐흐흐흐, 어쨌든 생각은 재밌잖아? 귀천성 마제의 목줄을 잡고 있겠다니, 아슬아슬해서 완전 아찔해. 흐흐흐!”

남궁구의 입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현오는 이제 와서 남궁구가 진화에게 꼭 붙어 있는 이유를 떠올렸다.

“…….”

남궁교명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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