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 화(火) : 아정분타불륜(1)
“소공자님!”
누군가 진화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적호단 무사들 속에서도 눈에 띄는 큰 키에 단단한 체격의 사내였다.
높게 하나로 묶은 머리에 시원한 웃음, 등 뒤에 맨 긴 창.
이전 생에 진화가 그토록 동경하던 귀룡창 관서겸의 모습 그대로였다.
“실로 오랜만입니다! 그간 활약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함께하게 되어서 어찌나 기쁘던지, 어젯밤에 엄청나게 일찍 잠들었습니다!”
“아, 예. 저도…….”
진화는 다짜고짜 달려와 두 손을 잡는 관서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제가 잊고 있는 동안 친분이 깊었던가.
관서겸과의 인연은 남궁세가 선발대회와 정의무학관에 있을 때 잠깐 마주친 것이 다였지만, 진화는 혹시 뭐가 더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진정해. 공자님이 당황하시잖아. 그리고 보통 설레면 잠을 못 자는 거 아니야?”
“밤이 빨리 지나가고 오늘이 왔으면 했다는 거지!”
관서겸의 옆으로 제갈상이 끼어들었다.
백의생 시절부터 앙숙처럼 보이던 이들은 어느새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진화가 친근하게 인사를 해 오는 제갈상을 의외라는 듯 보았다.
대놓고 다투는 일은 없지만 진화와 제갈세가는 여러모로 악연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소현부터 최근 왕자비에서 서인으로 유배당한 제갈지현까지.
제갈상 또한 그걸 의식한 듯 진화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 어색함은 남궁구와 다른 일행이 오면서 사라졌다.
“어이, 제갈상판떼기, 오랜만이야?”
“남궁개, 너도 오랜만이군.”
진화가 놀란 눈으로 제갈상과 남궁구를 번갈아 보았다.
서로를 악의적인 별명으로 부르는 것치고는 꽤나 친근해 보였기 때문이다.
“서로 챙겨야 할 사람이 있다 보니 그런가?”
“넌 챙긴다기보다는 부추기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조금만 겪어 보라고. 이 몸이 대단해 보일 테니까.”
“흥.”
“나도 헹-이다.”
남궁구와 제갈상이 서로를 향해 씨익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이후 다른 일행이 자연스럽게 관서겸, 제갈상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 중 어색한 사람은 진화 혼자뿐이었다.
진화가 유독 주변에 관심이 없었을 뿐, 사 년이 넘도록 서로 부딪히다 보면 이 정도의 친분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마침, 적호단주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호단! 이제 출발한다!”
신양까지는 뱃길로 가는 것이 훨씬 빨랐다.
신양의 달소항이라면 진화 일행에게 여러모로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 * *
뱃길로 간다고 육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인원이 이동하다 보니 자연히 속도는 느렸고, 크고 작은 변수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도 있었다.
“어허! 그쪽이 아니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거기 낭떠러지다!”
관서겸은 지독한 방향치, 길치였다.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앞사람마저 놓칠 정도였다.
게다가 성격은 소탈한 것을 넘어서 무탈하면 다행한 것이.
“하아, 옷 좀 바로 입게. 뒤집어 입었네.”
“아, 그런가?”
“이제 그 피풍의는 좀 벗게. 진흙이 엉겨 붙어서…… 아니, 대체 왜 하고 많은 곳을 두고 진흙 위에서 자는 건가?”
“하하하, 뭐 어떤가. 배에 오르기 전에 강에서 씻지, 뭐.”
관서겸은 노숙을 대비해 도포나 피풍의를 입으면 입은 그대로 진창을 구르고도 터는 법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서겸, 제발 땅에 떨어진 건 먹지 말게!”
“흙만 좀 털어 내면 되네.”
“자네는 털지도 않고 먹지 않나!”
“하아, 워낙 소문파에서 못 먹고 크다 보니 아까워서 말이야.”
“거짓말 말게! 자네 강소마을 유지의 아들이잖나!”
“하하하, 별걸 다 아는군. 에잉, 어차피 배 속에 들어가면 다 같지 않나.”
관서겸은 흙 위를 몇 바퀴 구른 주먹밥도 개의치 않았다.
모래 씹히는 소리가 으그적으그적 나는 데에도 웃으면서 먹었다.
“서겸! 서겸!”
제갈상이 목소리를 높이자 진화 일행이 그곳을 보았다.
진화 일행은 이제 제갈상이 관서겸을 찾는 소리가 익숙해졌다.
“아니, 대체 앞사람을 따라가라는 것이 그렇게 힘든가?”
“눈이 어디에 붙었는지 모르겠군요.”
“허허허, 이래서 부처님의 안배가 공평하다는 것이네.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무재를 주셨지만, 방향감각을 앗아 가시지 않았나.”
현오가 별일 아니라는 듯 느긋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갈상과 관서겸의 대화를 듣고는 더 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뭘 싸는 건가! 자네는 도대체 수치심도 없나!”
“하하하! 고기에게 밥도 주고 좋지 않나!”
관서겸이 껄껄 웃는 모습과 함께, 현오의 시선이 방금 건져 올린 물고기로 향했다.
“어쩐지 미끼도 없이 잡히더라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처님, 다음엔 그런 하찮은 것 말고 좀 더 치명적인 것을 앗아 가소서.”
현오가 찝찝한 얼굴로 물고기를 강물에 던졌다.
며칠간 물고기로 잔뜩 배를 채운 현오의 표정은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낚싯대를 치우는 남궁교명과 당혜군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관서겸을 쏘아보았다.
관서겸은 일행의 시선이 저에게 향하자 영문도 모르고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하네. 창왕 관서겸이 저런 자일 줄은 전혀 몰랐군.’
진화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이전 생에 동경하는 사내의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고 해야 할지, 실망했다고 해야 할지.
다만 확실한 것은, 관서겸과 처음으로 함께하는 임무에 살짝 설레던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 사람.
적호단주 팽치가 관도생들의 모습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젠장, 어쩐지 제갈상 놈을 꼭 같이 데려가야 한다더니.”
적호단주는 백호단주에게 단단히 속은 기분이었다.
“망할 십수 애송이들.”
사실 진화 일행은 어떤 의미로 정의맹 내부에선 골치 아픈 존재들이었다.
다른 관도생들처럼 하나씩 찢어서 무단의 막내로 집어넣기에는 개개인의 무위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특히 진화는 약관도 되지 않아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을 듣는 동시에 제국의 적통 황자였다.
무단을 이끄는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강하고 어린 관도생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화 일행이 적호단에 몰린 이유였다.
적호단주 팽치가 정의맹 정치에 무심한 사이, 정의맹 수뇌부에서 옳다구나 진화 일행을 떠맡긴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적호단주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남궁진화!”
“예.”
“너희 일행도 이제 딱 열 명이니까, 너희끼리 한 조다. 네가 조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하고, 저놈들 챙겨라.”
“예.”
“다시 말하지만, 사고 치면 죽여 버릴 거다, 애송이들아!”
적호단주가 으르렁거리듯 진화를 협박했다.
적호단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화의 모습에 어쩐지 더 화가 나는 느낌이었다.
“단주가 이번에는 왜 저렇게 까칠하지?”
“뭐 일단 신양은 사패천의 영역이니까요.”
남궁진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말에, 적호단원 하나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부단주 주제에 지금 적진(敵陣)으로 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니.
적호단원들은 단주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유를 십분 이해했다.
* * *
배가 뭍에 닿았다.
달소항.
곳곳에 특이한 복색이나 검고 붉은 무복을 입은 이들이 꽤 눈에 띄었다.
양청현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사파 무인들이었다.
달소항은 항구를 독점하던 흑사문이 없어지고 훨씬 자유롭고 활기차진 듯했다.
그런 달소항에 붉은 적호단 표식을 새긴 무인들이 줄줄이 내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한 번에 쏠렸다.
진화 일행이 따로 찾아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방에서 경계심과 적의 어린 눈빛이 따끔따끔 느껴지는 것이 사패천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느낌이 화-악 풍겨 왔다.
적호단주가 말하지 않아도 적호단의 기세가 날카롭게 별러졌다.
척. 척. 척. 척.
정의맹 육 대 무단의 등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시끄럽던 달소항에 침묵이 감돌고, 적호단의 발소리만 크게 울렸다.
“저 사람이 적호단주 경격권 팽치?”
“소문대로 엄청난 덩치군.”
“숨이 막힐 듯한 기세야. 과연 정의맹의 사냥개들이로군.”
“쉿, 들리겠어.”
수군거리는 소리를 모른 척하며 진화 일행도 적호단의 마지막 조로서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어이! 초절정 미인-!”
우렁찬 목소리 하나가 달소항의 무거운 침묵을 뚫고 적호단에 향했다.
휙!
날카롭게 경계심이 별러져 있던 적호단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달소항 사람들의 시선도 한순간에 모여들었다.
우렁찬 소리의 끝에서 푸른 무복을 입은 커다란 여인과 그 일행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방금 ‘초절정 미인’ 했을 때 돌아보셨지요, 공자님? 흐흐흐, 본인도 미인인 거 알고 계셨구나?”
달소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남궁금영이 아무렇지 않은 듯 진화에게 다가왔다.
눈을 찡긋하며 능글맞게 웃는 모습이, 납치 미수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훨씬 씩씩해진 듯했다.
“하하하! 환영합니다, 적호단! 지금부터 청해상단에서 여러분들을 모시겠습니다!”
적호단이 청해상단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대체 남궁에는 뭐가 문제인 거냐?”
다른 누구도 아닌 권마제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대상이 대낮부터 항구를 활보하고 있다니.
적호단주 팽치가 오만상을 하고 남궁진혜를 쏘아보았다.
“아이고, 진혜 아가씨, 소공자님!”
청해상단의 주인 남궁범이 한걸음에 나와 남궁진혜와 진화를 맞았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귀천성에 노려지고 있는 터라, 그의 안색은 이전보다 좋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 웃을 수 있는 것은 남궁금영을 보호하기 위해 적호단이 왔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남궁범이 적호단주와 적호단을 처소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저자의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눈빛을 달리 하는 이들도 있었다.
* * *
청해상단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이름난 객잔의 고급스러운 방에서 효서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람을 온 듯 한가로운 모습.
그녀에게 성의 소식을 전하러 온 서귀면을 쓴 사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주군께서 단주로서 첫 임무를 실패한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 하셨습니다.”
사내의 눈이 탁자에 있는 마룡삭과 쥐 모양의 가면을 향했다.
아직은 저와 같은 서귀면.
‘정식 단주도 아니면서 대낮부터 술이나 처먹으면서 주군의 전갈을 받아?’
사내의 눈빛에선 효서가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대답 없이 밖을 보고 있던 효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다리던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렸기 때문이다.
“봐. 남궁진화가 왔다는군.”
효서가 사내를 비웃는 듯 창밖을 가리켰다.
저자에는 온통 적호단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네가 다시 가서 전해. 이 효서의 첫 임무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고.”
“…….”
효서의 명령에 서귀면을 쓴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효서가 그런 사내를 향해 눈을 놀렸다.
“뭐 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사내의 목소리에서 불만이 느껴질수록 효서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짙어졌다.
“내가 아직도 제 놈과 같은 줄 아나? 주제 파악이 느리니 평생 제자리지.”
효서가 뒤돌아 나가는 사내를 비웃었다.
문을 나가던 사내가 잠시 멈칫했으나, 다시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 원숭이 귀면을 쓴 작은 체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단주님, 남궁진화가 이번에도 남궁금영의 처소에서 묵는다고 합니다!”
“그래?”
“남궁범이 오늘 밤 적호단을 위해 만찬을 준비할 거라고 합니다.”
효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고요하던 검은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후후후, 원징, 넌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렴.”
효서가 자리를 뜨며 원숭이 귀면의 사내를 칭찬했다.
휘이익--!
“빌어먹을 년. 두고 보자…… 헉!”
효서의 명에 따라 지붕을 타 넘던 사내가 뭔가에 이끌리듯 누군가의 손에 당겨졌다.
쉐엑!
서귀면 쓴 사내가 급하게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하지만 단검은 애꿎은 바람만 가르고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커억!”
목을 잡은 커다란 손에 고개가 들리면서, 서귀면을 쓴 사내는 자신을 잡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늘진 어둠 속에서도 타는 듯 붉은 적발과 적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말해 봐, 광마제의 짐승들이 왜 내 제물을 찝쩍였는지!”
“……!”
권마제 태금호의 물음에 서귀면을 쓴 사내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서귀면을 쓴 사내의 눈이 재빨리 태금호와 효서가 있던 곳을 번갈아 왔다 갔다 했다.
계산이 끝나자, 사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단주가…… 주군의 제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크읏!”
“허, 팔현성끼리도 서로의 제물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철칙인데, 광마제의 짐승 따위가 그런 시건방진 짓을 해?”
권마제의 눈에 불길을 화르륵 솟아올랐다.
그리고 서귀면을 쓴 사내의 목을 던지듯 놓았다.
“커헉! 컥!”
권마제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은 사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억지로 숨을 토하듯 기침을 하는 사내의 위로, 권마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꽂혔다.
“광마제에게 전해. 목줄 간수 똑바로 하지 않으면 곤란한 꼴을 당할 거라고.”
경고를 남긴 권마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혼자 남아 숨을 고르고 있던 서귀면을 쓴 사내의 입꼬리가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크흐흐, 효서, 이 건방진 년아. 누가 주제 파악을 해야 하는지 이제 곧 알게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