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 화(火) : 아정분타불륜(2)
신양.
달소항을 포함한 신양은 사패천이 존재하기 전부터 신양초가라는 걸출한 사파 명문 세가의 영역이었다.
다만 달소항은 신양의 끄트머리에서 오랜 시간 남궁세가의 상단들이 진출해 있는 곳이었다.
현재 남궁세가의 위세가 날로 번창함에 따라, 청해상단은 달소항 저자 한복판에 본부를 둘 만큼 위상이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청해상단이 상단(商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양초가는 정사 연합을 의식해서 인내하고 있었고, 남궁세가 또한 청해상단에 별도의 무단을 두지 않았다.
양측이 전면전을 피하면서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의맹 적호단이 신양 땅에 들어왔다.
정의맹이 자랑하는 정예 무단이 신양초가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다.
잔잔한 연못에 돌이 던져진 듯, 수면 위에 일어난 파장이 연못 전체로 퍼져 나갔다.
청해상단 본부 주변으로 사파 무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하나둘 늘었다.
청해상단 주변으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정작 청해상단 단주인 남궁범은 근래에 가장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와하하하! 음식은 많이 있으니 얼마든지 드십시오! 오늘 청해상단의 창고를 몽땅 털어도 좋습니다!”
“와아, 음식이 때깔부터 다른데요. 이럴 때 죽엽청이나 오야홍주가 있으면 진짜 더 바랄 것도 없겠는데…….”
“…….”
“아, 하하하. 당연히 마시면 안 되겠지만요.”
술이라는 말에 남궁범이 정색하고 쳐다보자, 말을 꺼냈던 적호단원이 급히 말을 바꿨다.
씨익.
남궁범이 눈은 웃지 않는 채로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모쪼록 많이 드시고 힘내셔야지요.”
“아,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궁범이 적호단원의 앞에 손수 오색동파육 한 점을 덜어 주며 잔뜩 얼어 있는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하나밖에 없는 여식의 목숨 앞에, 술을 사랑하는 호인 남궁범은 죽고 농담을 모르는 정색 남궁범만 남아 있었다.
‘망했네.’
적호단원은 남궁범의 뒤에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적호단주의 시선에 더 이상 식사를 이어 가지 못했다.
불편한 분위기의 중앙과 달리, 진화와 관도생들은 남궁금영과 즐거운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일전에 친분을 쌓은 터라 두 번째 만남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였다.
“금영 소저, 그 일은 어찌 된 것입니까?”
남궁구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안 그래도 모두 궁금해하던 참이라 관도생들의 시선이 남궁금영에게 모였다.
식탁에 있던 모든 시선이 제게로 모이자 남궁금영이 민망한 듯 볼을 긁었다.
“아. 산에 수련을 갔다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산에서 수련하는데 습격을 받아요?”
“음, 평소 소저의 수련 일정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하하, 제가 거기서 수련하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터라 비밀일 것도 없습니다.”
“대체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글쎄요. 검은 복면을 하고 있어서 정체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사실 뒤도 안 보고 내달리느라 자세히 보지도 못했습니다. 부끄럽네요. 하하하하!”
남궁금영이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남궁금영의 눈빛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녀는 적을 두고 도망친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다 못해 자책하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있던 진화가 남궁금영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
진화의 눈이 남궁금영을 오롯이 응시했다.
흑요석같이 깊고 정직한 검은빛이 그녀의 속을 꿰뚫듯 파고들었다.
“압도적인 수의 적을 향해 혼자서 검을 드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남궁’이라면 응당 적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어야지요. 잘하신 일입니다.”
“공자님…….”
남궁금영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 남궁진혜가 손으로 남궁금영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 동생의 말이 맞아. 그때 지킬 건 네 목숨밖에 없었으니, 너는 그놈들에게서 이긴 것이다. 그러니까 못난 표정은 얼른 치워 버려.”
“……예.”
남궁진혜의 거친 쓰다듬과 함께 고개를 숙인 남궁금영이 먹먹하게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평소 우상처럼 여기는 남궁진혜의 말이라 남궁금영에게 큰 위로가 된 듯했다.
일행도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남궁금영을 향해 또렷하게 빛나던 진화의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검은 복면인, 그만한 숫자가 몰려와서 남궁금영을 그냥 놓쳤다고?’
어설펐다.
수상할 정도로 어설펐다.
마치 일부러 놓아준 것처럼.
‘권마제가 나섰다기엔 일 처리가 너무 어설퍼. 무엇보다 권마제가 따로 무단을…… 가만! 이전 권마제가 죽고 태금호가 권마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런데 굳이 남궁금영을 노릴 이유가 있나? 조건만 맞으면 다른 제물을 구할 수도 있는데, 굳이 여자에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는 남궁금영을?’
진화의 눈이 남궁금영을 향했다.
진화보다 겨우 한 살 많은 나이.
태금호와 차이가 많이 나 봤자 이십여 년이랄까.
경지에 오른 무인에게 일이십 년 정도의 젊음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권마제가 아니라면? 역시 처음의 추측대로 광마제가 나를 유인하기 위해 남궁금영을 노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가.’
그때였다.
만찬장 안으로 창궁무애단원 하나가 급히 뛰어들었다.
“태금호랍니다! 장화루에 권마제 태금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탕-!
남궁진혜가 튀어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적호단원들이 모두 달려 나갔다.
진화와 일행도 그 뒤를 쫓았다.
척.
적호단주 팽치가 진화 일행과 함께 자리를 뜨려는 남궁금영의 앞을 막았다.
적호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남궁금영을 지키는 것이었다.
“소저는 안 된다.”
“아!”
남궁금영이 뒤늦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고, 적호단주와 남은 적호단원들이 남궁금영 주변을 에워쌌다.
텅 빈 만찬장에 어색하게 남은 아가씨 하나와 아저씨 여럿.
갈피를 잡지 못한 시선들이 만찬장을 이리저리 헤맸다.
그러다 적호단원 하나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린 그냥 먹고 있을까요?”
적호단원이 앞에 있는 음식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더 진해진 음식 냄새.
맛깔스러운 성찬이 아직 그들 앞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인원들끼리 딱히 할 것도 없었다.
“……들지.”
적호단주가 제일 먼저 식기를 움직였다.
* * *
창궁무애단원들과 적호단이 달리기 시작하자, 적호단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자들도 급히 움직였다.
청해상단에 있던 창궁무애단원들이 앞장서고 적호단이 그 뒤를 따르는 형국이었지만, 장화루 건물을 발견하자 경험 많은 무사들은 우회로를 찾아 돌아갔다.
황하 길목에 있는 달소항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
“비켜-!”
사람들로 가득 찬 건물 안으로 남궁진혜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일 층에서 술을 즐기던 손님들은 갑자기 들어온 무사들에 화들짝 놀랐다.
“권마제가 목격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소. 위험할 수 있으니 손님들 내보내시오. 오늘 술값은 정의맹에서 내지.”
남궁진혜가 남아 있는 손님들을 보며 장화루 책임자를 향해 말했다.
보통은 이런 보상도 없는 일이 일쑤였기에, 장화루 책임자는 울면 겨자 먹기로 손님들을 내보냈다.
그사이 적호단원들은 오 층까지 이어진 건물을 수색하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어엇, 도련님, 기다려!”
“공자님!”
“진화 시주, 같이 가세!”
진화가 빠르게 계단을 오르자, 남궁구와 일행이 당황하며 그 뒤를 따랐다.
‘삼 층부터.’
날카롭게 별러진 진화의 기감이 강한 기운을 뿜고 있는 존재들을 찾았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챙--!
“적이다!”
숙박 손님들이 머물고 있는 삼 층부터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도련님, 어디로 가는 건데?”
남궁구가 급히 쫓아오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화는 전투가 벌어진 삼 층은 신경도 쓰지 않고 위를 향하고 있었다.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무인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운을 숨긴 존재.
“이 난장판 속에 혼자 느긋하다면, 기운을 갈무리한 고수일 가능성이 크지.”
“그쪽이 진짜구나!”
진화의 말에 남궁구와 일행이 반색했다.
“몇 층인가?”
“오 층 제일 끝 방.”
“가자!”
혹시 권마제와 마주칠 수도 있었지만, 진화의 등을 따르는 관도생들의 얼굴엔 두려운 기색이나 망설이니 기색 따윈 없었다.
* * *
쉐에에엑-!
새하얀 호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단검을 보며 진화가 검을 세웠다.
채-앵!
짧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가린 사이, 방 안쪽에서 다른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진화는 지체 없이 복도 쪽 나무 벽을 뇌기를 실어 내리쳤다.
파파파파팟----!
푸른 뇌전이 번뜩이며 안에 있는 나무 벽을 터뜨리듯 앞으로 나아갔다.
쪼개진 벽 안으로 안이 훤하게 연결된 방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검은 인영들이 드러났다.
“팽수, 팽신, 현오가 왼쪽! 나하연, 당혜군, 제갈상, 관서겸이 오른쪽! 구, 교명 위쪽이다!”
“예!”
진화의 명에 따라 일행이 재빨리 흩어졌다.
퍼—억!
팽수와 팽신이 벽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검은 복면인들이 그들을 덮쳤다.
그때.
퍽! 퍽! 퍽! 퍽!
팽수와 팽신의 뒤에서 날아든 무언가가 검은 복면인들의 이마에 박혀 들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현오가 목에 걸린 염주를 뜯어 탄지공을 쏘아 보내니, 염주 알이 검은 복면인들의 머리를 뚫고 나아갔다.
허연 뇌수와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갔다.
그것들이 뒤에 있던 검은 복면인들의 시야를 가리고, 팽수와 팽신, 현오가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검은 옷이 눈에 익어.”
팽신이 검은 복면인들을 향해 눈을 좁혔다.
어쩐지 익숙한 기도.
그때 팽수가 끼어들어 주먹을 날렸다.
“상관하지 마라.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하면 된다.”
팽수의 말에 팽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는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신 한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울 수는 있었다.
“가자!”
퍽. 퍽.
수십 가지의 투로를 따라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다리가 곧게 뻗어 갔다.
퍼—억!
부딪히는 순간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몸을 통해 들려왔다.
하지만 팽수의 철혈사십팔퇴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복면인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방벽이었다.
진짜 공격은 팽신의 주먹에서 나왔다.
뻐—억!
호선을 그리는 주먹이 복면인의 가슴을 내리치자, 그곳이 가슴뼈와 함께 움푹 함몰되었다.
퍽! 퍽!
파갑추는 팔이 움직이는 가동 범위를 최대한 줄이면서도 짧게 움직이는 투로를 가졌다.
하지만 팽가 특유의 강철같이 단단한 근육과 두부처럼 유연한 움직임이 단순한 투로에 힘과 속도를 실었으니.
“크아아앗--!”
파갑추에 내공을 더한 혼원권이 연결되자, 십여 명의 복면인이 그대로 튕겨나듯 밀려났다.
그들 사이로, 밤하늘의 낙성처럼 어둠을 뚫고 염주 알이 날아들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게!”
현오가 남은 염주 알을 새며 살아 있는 복면인들을 향해 합장했다.
우수수수---.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졌다.
뒤이어 하나둘 시체와 함께 핏방울도 떨어져 현오의 관도복에 묻었다.
“이런, 요즘 피는 곤란한데.”
현오가 천장을 보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어지럽게 나무 기둥이 얽혀 있는 천장을 바람처럼 헤집고 있었다.
남궁구가 갑자기 불어닥치는 돌풍이라면, 남궁교명은 살을 에는 듯 매섭게 부는 고추바람이었다.
남궁교명의 대연십구식이 사납게 휘몰아친 자리에, 반드시 남궁구의 천풍검법이 급소를 베고 지났다.
콰광광-----쾅!
반대쪽과 제일 끝 방이 있는 쪽에서도 굉음이 들려왔다.
벌어진 벽 틈으로 번쩍이는 불빛이 들어오는 것이, 진화의 번개가 내리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오는 그쪽을 향해서도 조용히 합장을 했다.
조용히 숨을 죽인 인기척.
진화의 검이 그쪽을 향해 번개를 뿜었다.
파파파팟---!
천뢰제왕검법 낙수(落壽)가 커다란 나무 기둥 뒤쪽에 내리꽂혔다.
파팟--!
나무가 부서지며 파편이 튀었다.
검은 그림자들도 같이 튀어나왔다.
“원귀면. 역시 네놈들이었나.”
역시 저를 유인하기 위한 광마제의 수작이었던가.
진화가 쥐, 원숭이, 개, 황소까지 골고루 섞인 원귀면들을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진화의 눈이 서귀면을 쓴 날렵한 체구의 인영을 향했다.
파지지직-!
진화의 눈에 푸른 불꽃이 튀는가 싶은 순간.
진화의 신형이 순식간에 몇 개로 나뉜 듯 원귀면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챙! 챙챙--!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를 아득히 초월한 움직임은 마치 진화가 여럿의 분신으로 나누어진 듯 원귀면들을 상대했다.
쉐에에엑-!
파파팟-!
진화의 검이 우귀면을 쓴 사내의 가슴을 베고, 구귀면과 원귀면의 목을 꿰뚫었다.
동시에 그의 왼쪽 팔꿈치가 서귀면의 얼굴을 부쉈다.
퍼—억!
“너…… 효서가 아니구나!”
진화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과 동시에, 푸른빛이 서귀면을 쓰고 있던 여인의 얼굴을 갈랐다.
붉은 선이 그려지며 서귀면과 함께 여인의 윗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망친 건가.’
진화의 눈이 매섭게 훤히 열린 창밖을 향했다.
푸욱-!
진화가 바닥에서 숨을 색색 몰아쉬던 우귀면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시끄럽던 숨소리가 없어지자 창문 밖에 숨어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스스슷-.
움직임이 느껴지자마자 진화도 함께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지금 해 보자는 거야--!”
분노한 남궁진혜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창밖으로 향하려던 진화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남궁진혜를 향했다.
계단 바로 아래.
남궁진혜와 적호단이 검붉은 무복의 사람들과 대치 중이었다.
“뭐야, 사패천 아냐?”
남궁구의 목소리와 함께, 진화의 시선이 남궁진혜의 앞에선 중년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