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 화(火) : 아정분타불륜(4)
“……자, 잠깐만!”
순간 말문이 막혔던 적호단주가 평정을 잃고 진화를 보았다.
“인석아! 그걸 네 마음대로 결정하면 어떡해!”
적호단주는 당황한 나머지 평소의 말투가 그대로 튀어나왔다.
진화가 황자라는 것을 아는 신살대주와 사내가 놀란 눈으로 적호단주를 보았다.
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놀라고 있는 사람은 적호단주와 남궁범이었다.
진화는 ‘뭐가 문제냐.’는 듯 그들을 보았다.
“권마제 태금호의 목을 가져서 뭐 하게요?”
“뭐? 아니, 딱히 뭘 하려는 건 아닌데…… 그래도 왠지…….”
진화의 되물음에 적호단주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의맹에서도 저와 같은 결론일 겁니다. 마두들 머리로 장식을 할 것도 아니고, 역천비록을 얻는 것이 훨씬 이득이지요.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남궁금영의 안전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도 그렇긴 한데…….”
적호단주는 어째 진화에게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말갛게 쳐다보는 검은 눈을 마주하자니 이상하게 설득이 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때 남궁범은 계산을 마쳤다.
“우리 공자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남궁범은 권마제가 어찌 되든 자신의 딸만 안전하다면 다 상관없었다.
적호단과 신살대의 협력이라니.
남궁금영에게는 잘된 일이 분명했다.
남궁진혜는 뭐든 진화의 편이었고 남궁범까지 나서서 진화의 편을 들자, 적호단주도 더는 딴지 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정의맹에 다시 전갈을 보내고 답을 얻고 나서 하자고.”
적호단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성적인 결론이었다.
“정의맹의 결론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남궁세가의 전서응을 보내겠습니다. 하루면 다녀올 것입니다.”
진화는 제갈가주나 남궁진휘라면 역천비록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건 적호단주나 다른 사람의 생각도 같았다.
귀천성이 새롭게 발호한 시점에서 정사 연합을 공고히 한다는 측면에서도 적호단과 신살대의 협력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그대에게 정말로 역천비록을 약속할 자격이 있냐는 것인데…….”
진화가 맞은편에 앉은 사내와 신살대주를 번갈아 보았다.
눈으로 ‘이 사내가 신양초가의 역천비록을 약속할 자격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
도발적인 눈빛에 사내가 신살대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소개를 따로 하겠소. 사패천 소천주 강무련이라 하오.”
사내, 강무련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강무련의 인사에 남궁범은 물론 적호단주와 남궁진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는 자신만만할 자격이 있었다.
사패천 소천주, 사천패룡(似天覇龍) 강무련.
사패천주의 네 번째 제자로 사파 하늘의 후계자가 된 남자였다.
이제자인 태금호가 사패천을 배신하고 뛰쳐나간 후, 첫 번째와 세 번째, 다섯 번째 제자를 모두 죽이고 소천주 자리를 차지했다.
놀랍게도 모두 결사 대전을 신청하여 벌인 정면 대결이었다.
사패천주는 강무련에 대해 자신의 젊었을 때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며 그 자리에서 후계자로 삼았다.
이후로도 강무련은 사패천을 장악하는 데에 패도적인 행보를 보이며 흑살대와 신양초가, 하오문의 지지를 얻어 내었다.
현재는 ‘정파에 창천신룡 남궁진휘가 있다면 사파에는 사천패룡 강무련이 있다.’는 말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사파 무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히 무공만큼은 사파 내부에선 창천신룡을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돌고 있을 정도였다.
사패천주 한구혈의 아들이 있긴 하지만, 다음 대 사파의 하늘이 될 것이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사내였다.
* * *
정의맹에 보낸 매응이 돌아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사패천 소천주의 등장으로 적호단주와 진화는 사패천이 권마제를 잡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급전을 받은 정의맹도 마찬가지였다.
사패천과 권마제의 원한이 심상치 않다는 중요 정보와 함께, 느슨해진 정사 연합을 확인하고 역천비록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정의맹은 남궁세가의 매응을 돌려보내며 신살대와의 공조를 허락했다.
여기까지는 진화의 예상대로였다.
다만 제갈가주와 남궁진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살려 보기로 작정을 한 듯했다.
“맹주님과 사패천주가 전서를 주고받았다는군.”
“맹주님과 사패천주가요?”
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역천마제가 나타났으니까. 핑계가 좋지. 일단은 이전보다 연합 전선을 강화하자는 데에 서로의 뜻을 확인하는 수순이지만, 이후에 실무자들이 나서서 구체적으로 뭔가를 합의할 거다.”
“음, 역천비록 때문이군요.”
뭔가 생각하던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화의 모습에 놀란 것은 적호단주였다.
적호단주는 알려 주기도 전에 일의 내막을 알아차리는 진화의 모습에 놀란 눈을 떴다.
“모르는 게 없군. 아무래도 정파 무림에서 찾지 못한 역천비록이 사패천에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역천비록을 연구하는 데에 협조를 구할 것 같더군.”
적호단주의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역천비록이 많을수록 그것들이 어떤 원리로 이뤄진 건지 알아내기 수월할 것이고, 이 과정에 사패천 술법사들의 힘을 빌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실 역천비록같이 순리를 거스르는 사악한 비법 같은 건, 아무래도 우리보다 그쪽이 더 아는 게 많을 테니까요.”
“허어, 그래, 맞다. 네 말이 다 맞다.”
사패천주에게 매응을 날리도록 한 것이 남궁진휘라는 사실을 아는 적호단주는, 진화에 이르러서는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 일의 발단을 만들어 낸 것이 진화였으니.
제멋대로 역천비록이란 미끼를 덥석 문 남궁진화나, 부군사 주제에 새벽에 제갈가주와 정의맹주를 깨워 전서를 쓰게 한 남궁진휘나.
생각해 보면 저 집구석 딸내미도 그리 정상은 아니었다.
말리지 않았다면 기어이 신살대주 매석검 초전후와 한판 붙었을 것이었다.
“남궁은 애들을 대체 어떻게 키우는 건지…….”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 남궁세가 자식 셋 중에 둘이 제 밑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 절에 가서 불공이라도 드려야 하나.
적호단주가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진화가 싱긋이 웃으며 보았다.
‘아직 시집은 멀었구나.’
섭섭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신살대와 적호단의 공조가 결정되고, 사패천 소천주 강무련이 진화 일행을 찾았다.
이왕 양측이 공조를 하는데, 강무련이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과도 안면을 나누고 싶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무련의 위치는 일개 사파 후기지수와는 차원이 달랐으니.
“만나서 반갑소. 사패천 소천주 강무련이라 하오.”
관도생들은 갑작스러운 강무련과의 대면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은 반겼다.
어쨌든 그 소문 무성한 사천패룡 강무련이라 하니, 강무련을 보는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저는 남궁세가의 남궁구, 이쪽은 남궁교명이라 합니다.”
사교성이 좋은 남궁구가 제일 먼저 나섰다.
“오, 남궁세가에는 직계들 외에도 인물이 참 많군.”
강무련이 남궁구와 남궁교명에 대해 호의적인 칭찬을 곁들였다.
남궁교명은 그의 자연스러운 하대가 거슬리는지 고개만 까닥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본 승은 소림의 현오라 합니다.”
“하북 팽가의 팽수, 팽신이라 하오.”
“형제요.”
“당혜군이에요.”
“제갈세가의 제갈상이라 합니다.”
“하하, 저는 양주 절창문 출신의 관서겸이라 합니다.”
관서겸을 제외하면 모두 명성만큼은 사패천에 모자라지 않은 정파 명문 출신들이었다.
특히 현오나 팽가 형제, 당혜군은 사파에도 명성이 알려진 정파 후기지수들이었다.
강무련도 그들의 소문은 익히 들어 보았다.
하지만 실제 직접 만나 보니 소문과는 또 달랐다.
하나같이 풍기는 기도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름을 듣도 보도 못한 문파 출신의 관서겸이라는 자조차 맑은 정광이 감도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다고 느껴질 정도군. 후기지수라기엔 그저 젊은 정파 고수라 해야 맞겠어. 이런 자들이 모두 남궁진화의 아래에 모여 있다?’
강무련은 자연스럽게 진화의 주변으로 모인 이들을 보며,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창천화룡 남궁진화. 황자의 신분을 찾았지만 남궁에 있기를 바랐다고. 앞으로 무림인으로 살기를 택한 것인가? ……바로 지척에서도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눈빛과 기도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순식간에 남궁진휘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은 것은 비단 그 외모와 배경의 효과만은 아니었군. 지켜볼 가치가 있는 자야.’
진화를 보는 강무련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모처럼 그의 안에 있는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때, 당연한 듯 강무련과 함께 나타난 초서비가 도도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신양초가의 초서비예요.”
“반갑습니다.”
남궁구가 대표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초서비는 그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정파 후기지수들의 모습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하긴 저 얼굴을 매일 보고 사는데…….’
초서비가 슬쩍 진화를 향해 눈을 흘겼다.
슬쩍 보아도 얼굴에서 빛이 나긴 했다.
‘칫! 그래 봐야 사내야!’
어차피 초서비에게는 인사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다.
초서비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일행 중 단둘뿐인 여자들을 찾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제법 귀엽고 예쁘장하지만, 어린아이같이 작은 당혜군은 소천주의 취향이 아니었다.
‘좋아!’
아래위로 쓰윽 훑어 내리는 시선과 자신만만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눈치 빠른 당혜군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초서비의 눈이 당혜군을 지나쳤다.
당혜군의 옆에 있는 여자는 날카로운 눈매와 안 어울리게 어딘지 맹해 보였지만, 제법 아름다운 외모에 육감적인 몸매가 눈에 띄었다.
초서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쪽은 자기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누구죠?”
초서비가 거만한 말투로 나하연에게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하연이 초서비에게 다가갔다.
“초 소저, 혹시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나?”
“뭐, 뭐예요, 갑자기? 아름다운 걸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
갑자기 다가와 밀주를 찾듯 은근히 묻는 나하연에 초서비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초서비의 대답은 나하연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유감이군.”
나하연이 진지한 얼굴로 초서비에게서 떨어졌다.
나하연은 마치 이것이 너와 나의 거리라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투지로 가득 찬 눈빛으로 초서비를 보았다.
“나는 패황권문의 나하연이다!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내 꽃에 눈독을 들였다간 나의 용수권 맛을 보게 될 것이다!”
“뭐, 뭐라고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나하연의 결투 신청 같은 자기소개에 초서비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갈 곳 잃은 눈동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모두 초서비의 시선을 피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살짝 미친년이니까.”
당혜군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칭찬하듯 나하연의 등을 두드렸다.
귀가 붉어진 진화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나하연을 외면했다.
* * *
공조가 결정되고 나서, 우연의 일치인지 무슨 이유인지 권마제에 대한 목격담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거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듯했다.
“저곳이다! 찾아라-!”
“귀천성의 졸개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숨어 있어!”
쉐에에엑--!
퍼억!
신살대는 달소항을 자신의 집 앞마당처럼 헤집고 다니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신속한 움직임과 자비 없는 손 속은 적호단이 감탄할 정도였다.
신살대 또한 적호단이 왜 정의맹의 최정예로 불리는지 실감했다.
“이 조, 삼 조는 안으로. 일 조, 오 조는 퇴로 차단.”
적호단주의 명에 움직이는 적호단의 일사불란함은 단 한 명의 도망자도 용납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장소임에도 순식간에 주변 지형과 구조를 파악하고 건물 안을 수색해 적을 찾아내는 능력은, 신살대주와 강무련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진화와 관도생 일행 또한 남궁진혜와 함께 적을 죽이는 데에 일조했다.
하지만 결과는 당연히 모두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 감탄하고자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권마제의 흔적이 너무 잘 남아 있는 것이? 마치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증명하려고 남긴 듯이 말입니다.”
“네 생각에도 그렇지? 느낌이 쎄-해.”
진화의 말에 적호단주도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게 권마제가 광룡귀면대 잔당 놈들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것 같단 말이야.”
꽈직.
적호단주의 손아귀에서 검은 귀면 하나가 부서져 나갔다.
진화 또한 적호단주의 생각에 동의했다.
‘우리야 나쁠 것 없지만, 권마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마치 일부러 광룡귀면대의 위치를 알려 주듯이……. 광룡귀면대가 남궁금영을 건드린 것에 대한 보복인가? 그럼…… 권마제는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진화의 시선이 신살대를 움직이는 강무련에게 향했다.
탁탁탁탁탁.
깊은 산속, 그조차 불안해서 땅을 밟지 못하고 나무 위로 뛰어올라 이동했다.
그러고도 한참 달소항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헉. 헉. 헉. ……젠장, 망할 새끼!”
간신히 나무에 몸을 기대 숨을 고르던 효서가 얼굴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대체 왜 이렇게 일이 엉켰는지.
갑자기 천라지망 뺨치는 수색 작업에 데려왔던 거의 모든 수하를 잃고 말았으니, 이 일을 광마제에게 보고한다면 분명 크게 질책을 당할 것이었다.
질책만 당한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이 일로 제 손에 있는 마룡삭을 빼앗는다면…….
“빌어먹을! 미친 권마제 새끼! 대체 어떻게 우리가 있는 곳마다 출몰하는 거야!”
효서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설마 우리가 남궁금영을 건드린 걸 알아 버린 건가?”
순간, 효서가 눈을 번뜩였다.
“우리가 남궁금영을 건드린 걸 알아 버린 거면…… 설마 정화루에 있던 공격부터 일부러 우릴 유인한 건가? 하지만 그땐…… 서개, 그 망할 쥐 새끼가 불었구나!”
효서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떠나던 서귀면의 사내, 서개를 떠올리며 살기를 번뜩였다.
생각해 보면 딱 서개가 떠난 그날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망할 쥐 새끼. 네가 그렇게 나온 거라면 나도 너를 핑계 삼아 주지. 어쨌든 난 남궁진화를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누가 살아남을지 두고 보자고!’
효서가 광마제에게 꺼낼 변명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