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 화(火) : 아정분타불륜(5)
적호단과 신살대의 공조 이후 쏟아지던 목격담도 점차 잦아들고.
결국 별다른 소득이 없던 적호단과 신살대는 달소항 일대의 구역을 나눠 대대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권마제는 모습을 감춘 것인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대대적인 수색의 성과라면 남아 있던 광룡귀면대원들을 발본색원하게 되었다는 거랄까.
콰-앙!
거침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간 신살대는 귀면을 쓴 흑의인들을 향해 망설임도 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단주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살수를 펴지 않는 적호단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적호단에도 예외는 있었다.
퍼—억!
“젠장! 있으라는 권마는 없고! 광룡귀면대는 대체 왜 여기에 있냐고!”
남궁진혜가 푸른 기사를 피워 올리며 광룡귀면대원들의 몸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그 모습을 적호단 일 조장 서장원이 불안한 듯 보았다.
“저래도 돼요?”
“검은 안 들었잖아. 그리고 귀천성 놈들은 이유 불문 사살이 방침이니 문제 될 것도 없어.”
적호단주의 반응이 심드렁했다.
오랜만에 권마제의 목격 제보를 받고 움직였는데 허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맹에서는 광룡귀면대가 왜 여기 있는지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하긴 저래선 잡아 봐야 심문도 못 할 것 같네요.”
일 조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반쯤 죽은 건 죽은 걸로 쳐야 할까, 산 걸로 쳐야 할까.
살아 봤자 턱이 으스러져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할 듯했다.
적호단주는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았다.
“……슬쩍 신살대 놈들 있는 데에 밀어 넣어.”
“오, 추웅!”
자연스럽게 적호단의 일거리가 없어지면서 신살대의 악명을 높여 주는 신묘한 수에 일 조장이 크게 감탄했다.
적호단원들이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보며 진화 일행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진정한 공조로군.”
남궁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느긋한 일행 사이에서 진화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역시 처음에 남궁금영을 노린 건 광룡귀면대가 확실하다. 귀면은 없었지만 복면을 썼고, 이렇게 많은 흑의인이 갑자기 나타났을 리도 없으니까.’
진화는 효서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녀와 광마제가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남궁금영을 택한 것이라 확신했다.
‘권마제가 모습을 드러낸 건 순전히 보복 때문인가?’
광룡귀면대가 거의 죽임을 당하면서 권마제도 모습을 감추었다는 그 증거였다.
만약 권마제가 남궁금영을 노렸다면, 권마제가 사라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화의 시선이 신살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패천 소천주 강무련에게 향했다.
진화는 사패천과 권마제 사이의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 * *
그날 저녁.
사패천 소천주인 강무련이 정화루를 빌려 적호단을 초대했다.
적호단의 임무는 엄연히 남궁금영을 남궁세가 본가까지 무사히 호위하는 것이고, 이제 곧 출발 날짜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적호단과 신살대의 공조는 결국 광룡귀면대의 잔당을 잡아내는 것으로 큰 소득 없이 끝이 나는 듯 보였다.
권마제를 잡지 못했으니, 당연히 약속한 역천비록도 얻지 못할 것이었다.
“자, 모두! 이것도 인연이고, 또 정사 연합의 시작이 아니겠소. 권마제를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마련한 자리이니. 부디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드시오!”
“마음껏 먹으라니, 그 말, 책임지시는 겁니까?”
“하하하! 내 주머니를 터는 한이 있어도 괜찮으니, 작정하고 먹고 마셔 봅시다!”
사패천 소천주 강무련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호탕한 사내였다.
매번 소득 없이 끝나는 수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과정에 신살대원이나 적호단원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기도 했다.
귀한 신분으로 허드렛일까지 다 하기로는 진화도 마찬가지였지만, 사패천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치가 워낙 낮았던 덕에 강무련은 적호단원들에게도 긍정적인 평을 얻었다.
적호단주는 강무련의 말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을 정도로 그를 좋게 보았고, 강무련도 적호단주의 농담을 호쾌하게 받아넘길 정도로 친근함을 보였다.
일 층 식당에서 적호단과 신살대가 자리를 잡고, 이 층에는 양측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진화 일행은 정파 후기지수들과 친분을 나누고 싶다는 소천주 강무련의 요청으로 따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적호단원들과 신살대원들의 입장에선 불편한 인물들이 알아서 피해 준 상황이라 연회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 층 제일 끝방.
특별히 마련된 방에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술과 음식이 가득했다.
“우와!”
현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양 달소항은 강과 바다가 모두 가까워서 수산물이 풍부하니, 바다가 없는 곳에서만 있었던 현오의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
“흘리지 말고 먹어라!”
“내 어릴 적부터 백 명이 넘는 사형제들을 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큰 탓에…….”
“이제 안 속는다, 땡중아! 소림에 고기 먹는 중이 너밖에 더 있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중도 너밖에 없을 거다!”
“어째 자네들은 이럴 때만 쿵짝이 잘 맞는가?”
현오와 남궁구, 남궁교명이 시작부터 티격태격했다.
“상, 이것 좀 들게! 이것도! 팽 형들도 들게!”
“아, 고맙다.”
“좋은 사람이다.”
“너도 좀 먹어!”
관서겸은 그동안 친해진 팽가 형제와 제갈상의 앞에 맛이 좋은 해산물을 놔 주었다.
팽가 형제와 제갈상 또한 해산물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관서겸이 눈치껏 비리지 않은 것부터 챙겨 준 것이다.
관서겸이 덤벙대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사람이 떠나지 않는 데에는 이런 배려심이 있었다.
그때.
탕-!
나하연이 술병을 앞에 놓았다.
“술은 몸을 망치고, 무인의 정신을 흐리지. 과음은 어리석은 짓이라오.”
나하연이 슬쩍 앞에 있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며 초서비를 도발했다.
“흥! 본녀는 태어나 지금까지 과음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요!”
“호오? 힘 하나 못 쓰게 생겨서 술은 제법 하는가 보오?”
“내가 잘 관리해서 그렇지 통뼈는 타고났죠. 그러는 당 소저야말로, 괜찮겠어요?”
초서비는 나하연이 따라 준 술을 단숨에 삼켰다.
그리고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당혜군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익! 독 하면 당가! 독주라면 당혜군이 빠질 수 없지요! 금영, 자신 있지?”
“오! 물론이다!”
나하연은 초서비를 오해하고, 초서비는 당혜군에게 시비를 걸고, 또 당혜군은 남궁금영을 선동하는, 연쇄적인 도발의 악순환이 과음의 고리를 완성시켰다.
일행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동안.
진화도 강무련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하하, 이심전심이군요.”
강무련이 진화의 술잔을 반기며 말했다.
“이심전심이라……. 소천주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도 한결 묻기가 편하겠습니다.”
“응? 묻다니 뭘 말이오?”
“사패천이 유독 권마제만을 쫓는 이유.”
진화의 말에 강무련의 눈이 커졌다.
“……나와 교분을 나누고자 온 것이 아니군. 실망이오.”
강무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그러나 진화에게는 처음부터 강무련의 기분 따위 관심사가 아니었다.
“권마제의 목적이 남궁금영이었다면 지금도 남궁금영의 곁을 맴돌고 있었어야 합니다. 또한 권마제가 남궁금영의 곁을 맴돌고 있다면, 이런 대대적인 수색에 흔적 하나 발견되지 않을 리 없지요.”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소? 보호 인원이 너무 많으니 몸을 사리는 것일 수도 있소.”
“이렇게 빈틈이 많은 술자리까지 말입니까?”
진화의 물음에 강무련은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쪽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여자들 속에 남궁금영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때를 찾는다면 지금일 것이다.
“제 추측에는 처음 남궁금영을 노린 쪽은 광룡귀면대고, 권마제는 그 보복을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광룡귀면대가 남궁금영을 노릴 이유가 있소?”
“제가 광마제의 제물이니 절 유인하려 했겠지요.”
“……!”
뜻하지 않게 엄청난 말을 들은 듯, 강무련이 눈을 크게 뜨고 진화를 보았다.
진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강무련과 눈을 마주쳤다.
“남궁금영이 목적이 아니라면 권마제가 달소항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 그것이 사패천의 이유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건…… 흐음.”
당황한 틈을 파고든 진화의 질문에, 강무련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얼굴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뒤.
강무련은 곧바로 평정을 찾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사이 고민을 마쳤는지, 진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광마제의 제물이라……. 그걸 내게 알려 준 건, 그만큼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요?”
“권마제를 잡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이롭지 않겠습니까.”
“흐음.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내놓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사패천이 권마제 아니, 태금호를 잡으려는 것은…… 놈이 감히 천주님의 부인을 탐했기 때문이오.”
“……뭐?”
진화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놈이 감히 천주님의 세 번째 부인과 밀회를 저지르다 들켰소.”
“허!”
사패천의 주요 비급이나 영약을 훔친 것도 아니고.
사패천주를 기습한 것도 아니고.
사패천주의 부인과 불륜이라니!
진화는 전혀 상상도 못 한 대답에 기가 막혔다.
* * *
강무련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몇 년 전.
사패천주가 자식을 얻기 위해 첩을 새로 맞았다.
그런데 그 첩이 알고 보니 이전에 태금호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사패천에서 재회한 둘은 사패천주의 눈을 피해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우연한 일로 밀회를 들키면서 태금호가 사패천에서 도망쳤다.
문제는 그 첩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은 것인데.
첩은 아이가 천주의 자식이라 우기고 있으나, 사패천 무인들이 그 말을 믿을 리 없었다.
“결국 천주께서는 태금호를 잡아 확인을 하고자 한 것이오.”
강무련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이야기를 마쳤다.
강무련의 말에 진화는 사패천이 왜 그렇게 권마제에 집착했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리 제자 중 가장 강했다지만, 강무련이 아무 견제도 없이 소천주에 올랐던 데에는 천주의 자식이 혈통에 중대한 의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컸겠군.’
진화는 강무련이 사패천주의 자식을 제칠 수 있었던 이유도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 친자라는 게 태금호를 잡는다고 확인이 가능합니까?”
“여자의 말과 태금호의 말을 대조해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소.”
진화의 물음에 강무련이 조금 힘이 빠진 말투로 답했다.
그렇게 열심히 권마제를 쫓던 것치고는 결과에는 큰 기대가 없는 모습이었다.
순간, 진화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만약 천주의 자식이 사실 태금호의 자식이라면? 아니, 천주의 자식에게서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대로 태금호가 죽는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은 단연 강무련이었다.
“이대로 공조를 멈추기엔 아쉽지 않습니까?”
진화가 강무련을 떠보는 듯 은근히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무련이 진화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이오?”
“정의맹의 입장에선 남궁금영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역천비록을 연구하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 말은…… 계속해서 함께 권마제를 잡아서 처음의 약속을 달성하자, 그런 말이오?”
강무련의 눈이 이채를 띠며 빛났다.
“남궁금영은 앞으로 남궁세가로 옮겨질 것이고, 본가에서는 세가의 힘만으로 권마제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실 겁니다. 만약 권마제가 남궁금영을 노리는 것이라면, 앞으로 사패천에서는 그를 잡을 기회가 없어지겠지요.”
“그리되면 정의맹은 사패천이 가진 역천비록을 얻지 못할 테고.”
진화와 강무련이 눈을 마주했다.
진화는 강무련의 눈빛에서 그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강무련이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공자의 말은 어째 남궁세가의 뜻과 다른 것 같소?”
진화는 이 말이 단지 자신의 의중을 떠보는 것이라 확신했다.
“말씀드렸다시피, 광마제의 제물로 노려지는 몸이라서 말입니다. 역천비록의 비밀이 빨리 밝혀질수록 좋지요. 남궁세가의 어른들 또한 제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주실 테고요.”
“남궁세가에서도 고려를 해 줄 것이다? 하긴, 남궁진혜 부단주도 그렇고 남궁세가 사람들이 공자를 많이 아끼더군요.”
강무련이 슬쩍 웃으며 남궁구와 남궁교명을 보았다.
그들은 다른 일행과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진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공자의 말이 옳소. 태금호가 남궁금영을 쫓아 이곳을 뜬다면 우린 영영 기회가 없어지겠지요.”
“그렇다면 놈을 사로잡는 데에는…….”
“아, 더는 돌려 말하지 않겠소.”
강무련이 더는 따질 것 없다는 듯 진화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놈을 죽여도 좋소. 약속한 것을 드리리다. 공조를 이어 가 보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진화도 사르륵 웃으며 강무련이 내민 손을 잡았다.
진화는 새로운 역천비록을 얻을 기회를 아직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첩 말입니다, 혹시 아직 살아 있습니까?”
달소항은 인근 교통의 요지였다.
진화는 태금호가 달소항을 떴다면, 남궁금영이 아닌 그 첩에게 갔을 거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