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아름다운 풍경 위 진짜 절경(4)
강무련은 결국 진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사패천주에까지 전해졌다.
사패천주는 이전과 같이 진화와 적호단주를 사랑탑으로 불러들였다.
“사고 쳤냐?”
사랑탑에 들기 전, 적호단주가 진화에게 물었다.
“아니오.”
“그래. 사패천주가 공격하면 나는 두말 않고 튈 거다.”
진화는 아니라고 했지만 적호단주는 믿지 않았다.
그걸 거면 대체 왜 물어본 건지.
그러면서도 막상 사패천주의 앞에 서게 되자 적호단주는 진화를 제 곁에 세웠다.
“…….”
사패천주가 권좌에 구부정하게 앉은 채 말없이 진화를 보았다.
살기를 담아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의적인 눈빛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쳐다보기만 하는 것뿐인데 진화는 등이 땀으로 젖어 드는 듯했다.
적호단주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진화의 앞을 가리려는 듯 나섰다.
그때, 사패천주가 몸을 바로 세우며 진화를 내려다보았다.
“물싸움, 아니, 뱃놀이를 하자고 했다지?”
잔잔하게 가라앉은 사패천주의 눈 안에는 새파란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불길이 순식간에 커져 진화를 집어삼킬 듯했다.
진화가 침을 삼키고 사패천주의 눈을 마주 보았다.
옆쪽에서 이 이야기가 금시초문이었을 적호단주의 시선도 느껴졌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요.”
“급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태금호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안 해도 될 불편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적호단이었다.
기약도 없이 마냥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한수림의 생일을 이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내 보물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감히 내 아들을 미끼로 쓰겠다는 것인가?”
사패천주가 확인하듯 물었다.
마치 늑대가 먹이를 덮치기 전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은 울음을 우는 듯. 사패천주의 눈빛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며 경고를 보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적호단주가 진화의 앞을 가렸다.
하지만 진화는 팔로 적호단주의 호의를 제지하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자신 없으십니까?”
진화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뭐라?”
눈썹을 까닥거리는 사패천주를 향해 진화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진화가 순순히 몸을 굽히는 건 오로지 남궁세가뿐이었다.
진화는 본래 힘으로 누르면 더 높이 튀어 오르고 당기면 줄을 끊어 버리는 사람이다.
제물 양육실에서부터 그러했다.
힘이 열세라면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태금호가 난다 긴다 해도 어차피 사패천 안입니다. 어린아이 하나 지킬 자신이 없으십니까?”
“남궁 공자!”
소천주 강무련이 놀라서 진화를 부르고, 탑주와 적호단주가 경악하며 진화를 보았다.
그러나 진화는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기운을 일으켰다.
“범은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지요. 권마제를 사냥할 기회가 눈앞에 있습니다.”
진화의 눈 안에서 푸른 번개가 번뜩였다.
혹시나 운이 안 따라서, 상황이 달라져서 혹은 힘이 부족해서 실패할 수는 있다.
사람이니 실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화는 기회를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삼부인 때문인지 남궁금영 때문인지, 어쨌든 태금호가 이곳을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누굴 노리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함정을 꾸미기에 이렇게 완벽한 기회도 없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남궁금영 또한 배에 태울 것입니다.”
진화의 말에 화가 난 듯 진화를 노려보고 있던 사패천주의 표정이 달라졌다.
사패천주는 진화를 만난 첫날, 자신을 남궁진화라 소개하는 진화의 모습에서 황실이 아닌 남궁을 택한 진화의 진심을 알아보았다.
그러니 남궁금영마저 배에 태우겠다는 진화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그러고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첩을 찢어 죽이든 태워 죽이든 나타날 때까지 건드려 봐야지요.”
“허!”
진화의 말에 어디선가 바람 새는 소리가 난 듯도 했다.
확실히 정파 명문 후기지수가 할 말은 아니었고, 황자가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어떤 시선으로 보든 진화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진화는 그저 권마제, 나아가 귀천성을 잡고 싶은 것뿐이었다.
“사냥감이 잡혀 주기만 기다리는 사냥꾼은 없습니다.”
“……그렇지. 짐승은 내 손으로 잡아 죽여야지.”
사패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태금호, 그 녀석은 제자로 들이기 전부터 수상한 놈이었다. 이름을 날리고 수십, 수백 명을 죽이고도 남았을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거든.”
사패천주는 옛날 태금호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구정물이 칠갑 된 까만 얼굴에 두 눈만은 붉은빛을 잃지 않던 그 얼굴.
“그렇게 자신을 숨기는 놈들은 대개 속으로 뭔가 다른 것을 노리고 있는 놈들이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것만 빼면 썩 괜찮은 놈이었거든. 내 밑에서 몇 년 있다 보면 바뀔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아니었어. ……놈은 그저 때를 기다린 게야.”
사패천주가 회한 어린 눈으로 탁자 위에 있는 나무 봉을 보았다.
진화는 사패천주가 권마제에게 아직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어쩌면 그래서 삼부인 또한 여태껏 살려 둔 것은 아닐까.
진화보다 훨씬 오래 사패천주의 곁을 지킨 강무련과 탑주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태금호를 아꼈던 사패천주의 마음에 공감하는 듯했다.
“짐승도 패면 말을 듣던데, 그놈은 왜 그 모양이지?”
“…….”
아, 나무 봉에 담긴 추억이 ‘그런’ 추억이었던가.
자세히 보니 강무련과 탑주의 촉촉한 시선이 나무 봉에 닿아 있었다.
“역시, 내가 마음이 약해서 매가 부족했나?”
미련이 남은 듯한 사패천주의 물음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정파인의 시선으로 사패천주를 동정했던 적호단주가 고개를 저었다.
진화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공자의 생일을 겸한 뱃놀이라면 경계를 느슨하게 풀어도 태금호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겁니다. 아니, 의심을 한다고 한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이번 기회를 절대 흘려보내지 못할 겁니다. 이참에 태금호와 관련된 것은 모두 처리하시지요.”
“호오. 모두 정리하라?”
“기회가 좋지 않습니까.”
진화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사패천주가 태금호의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진화는 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자그마치 혼자서 사파를 사냥한 사냥꾼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사패천주가 진화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흐흐흐, 이 잔망스러운 놈. 내 가려운 곳을 긁어서 원하는 걸 얻으려고? 좋다! 이번엔 네놈의 잔망에 넘어가 주지.”
“옳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사패천주의 확답에 진화가 사르르 웃어 보였다.
사패천주는 진화가 이번 일에 남궁금영의 목숨까지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진화는 그런 적이 없었다.
진화는 태금호가 한수림을 노릴 거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패천주의 결정이 있고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대번에 달라졌다.
강무련과 탑주, 적호단주가 동시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탑주.”
“예!”
“수림이의 생일 연회를 크게 열어야겠다. 일곱 문파에도 초대장을 날려라. 오든 말든 사람을 보내든 알아서 하겠지.”
“그리하겠습니다.”
“무련아.”
“예, 사부님.”
“배에는 네가 직접 오르고 연회 준비도 직접 챙겨라.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사패천주가 강무련의 마음을 확인하듯 묻자, 강무련이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연회를 준비하고 한수림과 함께 배에 타서 그를 지킨다는 것.
강무련은 제가 직접 한수림을 지킬 것을 사패천주에게 약속한 것이었다.
“수림이 그 녀석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뱃놀이가 아니라 수전을 하는 것이다. 아이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되, 배에 오르는 건 흑살대와 교룡대 말고 제일 먼저 원하는 무단이 있다면 그놈들을 쓰도록.”
“그리하겠습니다.”
흑살대와 교룡대는 공공연하게 강무련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강무련은 그들을 제외하라는 명령을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마침 사패천의 후계자로 다른 무단의 지지를 얻을 기회이기도 했기에, 강무련은 망설임 없이 명령을 받들었다.
“참, 그러고 보니, 전날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수림이 녀석이 내게 와서 돈 좀 쓰라고 안달이더군. 사나이다운 이유가 있다나? 갑자기 사나이다운 이유라니, 그게 뭔지 아나?”
일사천리로 명을 내리던 사패천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시원시원하게 답을 내놓던 강무련이 이번만큼은 아무 말 없이 진화를 보았다.
* * *
사패천 소공자의 성대한 생일 연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생일 연회는 삼부인의 불륜과는 별개로 한수림에 대한 사팬천주의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 줄 기회가 되었다.
사패천은 이번 연회를 위해 급히 초대장을 돌려 사파 고수들을 초대하고, 인근에 이름난 무희와 악사 들도 섭외했다.
또 손님들을 위해 소, 돼지 등 가축 수십 마리를 잡고, 숙수들은 지금부터 손님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에 들어갔다.
이 모든 준비에 소천주 강무련이 직접 나섰다.
물론 그중에서도 특히 강무련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한수림을 위한 모의 수전이었다.
세간에는 강무련이 모의 수전을 통해 한수림에 대한 애정과 정파 후기지수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려 한다고 알려졌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대의명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강무련이 모의 수전 준비를 적호단과 함께하는 것 또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배가 가장 문제로군요.”
“수림이와 남궁 소저의 안전을 위해서는 각각 오십 명은 태워야 하는데…….”
한수림과 남궁금영의 안전을 위해 각각 무인 오십 명을 태우기로 했는데, 그만큼 큰 배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 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청해상단에서 폐선하려던 큰 상선 두 척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배에 태울 무사들의 배치였다.
“배에는 금수대가 타기로 했습니다.”
사패천주와 강무련의 눈에 들 천금 같은 기회에 금수대주가 가장 먼저 나섰다.
모두들 이전까지 일제자를 밀던 금수대가 이제라도 강무련에게 줄을 서는 것이라 생각했다.
“남궁금영의 호위를 위해 반대쪽 배에는 적호단이 타겠습니다.”
“그럼 배치는…….”
“소공자와 남궁 소저의 호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원진을 짜고 소공자와 남궁 소저의 곁에 소천주와 제가 직접 나서는 것으로 하죠.”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무련과 적호단주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며 무사들의 배치도 순조롭게 마치는 듯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남궁진혜가 손을 들었다.
“근데 누가 이기는 걸로 하는 겁니까?”
“…….”
강무련과 적호단주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져 주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큼, 아이의 생일이니 배려 부탁드립니다.”
“음…….”
강무련의 부탁에 적호단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문제는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산 너머는 산이라고.
“싫---어! 난 무조건 예쁜 형아랑 같은 편 할 거야!”
갑자기 당사자인 한수림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수림아!”
“아버지가 그랬어. 돈을 썼으면 본전은 뽑으라고! 그러니까 나는 무조건 예쁜 형이랑 같은 편 할 거야!”
한수림이 사패천이 떠나가라 떼를 쓰는 통에 모든 이들이 한수림의 요구를 알게 되었다.
아이의 생일 선물로 진행되는 모의 수전에서 아이의 요구를 안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공자와 우리가 한편이 되면, 소공자를 위해 우리가 이겨야 하나?”
남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남궁진혜가 능글맞게 물었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한수림과 적호단이 한편이 되는 일은 없었다.
한수림이 원한 것은 예쁜 형아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 * *
한수림의 생일 연회가 고작 이틀 앞으로 다가온 시점.
당초 연회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사패천 문밖까지 퍼져 나갔다.
“청해상단에서 배 두 척을 보내왔다고?”
“소공자의 뱃놀이 선물이라더군.”
“허, 쫌생이 같은 정파 놈들이 웬일이래?”
“거, 뭐라더라? 정사 연합 어쩌고 하면서 생색내는 거지. 소공자의 뱃놀이에 적호단 놈들도 참여한다더군.”
“하여튼 정파 놈들 생색내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사패천 무인들이 저자를 나서며 시시덕거렸다.
일견 정파나 적호단의 참여를 비꼬는 듯했지만 심저에는 사패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정파의 참여로 모의 수전이 화제가 되면서, 그에 관한 소문이 사패천 인근까지 모두 퍼져 나가고 하나둘 도착한 손님들도 그것에 대해 다 알게 되었을 때.
진화의 예상대로 태금호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갔다.
삼부인이 불안한 눈으로 태금호의 손을 잡았다.
‘가가, 함정일 거예요!’
칠 년을 갇혀 사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도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금호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은 놓칠 수 없는 기회요. 수림이의 처소가 사랑탑으로 옮겨지고 좀처럼 기회를 보지 못했소. 생일 연회로 낯선 손님들이 많고, 더욱이 사방이 트인 강에서 벌이는 모의 수전이라면…… 몰래 잠입했다가 강을 통해 수림이를 데려갈 절호의 기회요!
태금호가 삼부인의 손을 꽉 잡으며 그녀에게 의지를 전했다.
하지만 삼부인의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가가, 너무 위험해요! 강무련이 직접 나서고 금수대까지. 정파의 적호단도 탄다고 했어요!’
워낙 소문이 크게 난 터라 삼부인의 귀에도 일의 진행 상황이 들어간 터였다.
무림 사정에 어두운 그녀도 사패천의 금수대와 정의맹의 적호단이 양측이 자랑하는 정예 무단이라는 것은 알았다. 게다가 강무련까지 직접 나선다 했으니.
그녀의 짧은 소견으로도 태금호 혼자 어찌해 볼 전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금호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얼굴이었다.
-하하하, 너무 걱정 마시오. 수림이가 떼를 쓴 탓에 정파 후기지수들 몇이 더 타는 것뿐이오. 적호단은 다른 배를 탈 것이오.
한수림이 끼어들면서 결국 한수림의 배에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과 나하연이 타기로 했다.
그들의 수만큼 금수대원들이 적어지겠으나 모의 수전인 만큼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태금호가 그 모든 세세한 사정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가께서 그걸 어떻게 다……?’
삼부인이 미심쩍은 얼굴로 태금호를 보았다.
-그대는 아무 걱정 마시오. 강무련이 소천주라곤 하나, 그건 내가 없었기 때문이오. 내가 고작 강무련과 정파 애송이들에게 당할 것 같소? 나 태금호요, 권마제 태금호. 날 믿으시오.
‘하오나 금수대가 마흔 명 가까이 탈 것입니다. 그들은 어찌…… 아! 혹시?’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삼부인이 놀란 눈으로 태금호를 보았다.
그러자 태금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태금호가 사패천에 있었던 세월이 이십 년이 넘소. 그동안 내 사람들 하나 없었겠소?
‘아아!’
-놈들은 이것을 함정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큰 오산이오.
태금호가 서늘하게 사패천주를 비웃었다.
함정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냐고?
의심했다. 아니, 함정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태금호는 이런 얄팍한 함정 따위 그대로 부수고 나갈 것이라 확신했다.
칠 년 전 태금호가 밀회의 목격자를 비롯해서 후원 무사들을 모두 죽이고 유유히 빠져나갔을 때와 같이, 사패천에는 여전히 그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맹에 기대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사패천주와 달리 진짜 부귀영화를 쥐여 줄 주군을 따르는 자들이.
-그대는 나만 믿으면 되오.
태금호가 진지한 눈으로 삼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한 손에 감싸지는 연약한 손과 여전히 불안한 듯 떨리는 눈동자.
한때는 열렬하게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오. 강무련과 정파 애송이들 따위론 나와 금수대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오. 나는 강을 통해서 수림이를 먼저 안전하게 데리고 나갈 것이오. 그리고 혼란을 틈타 그대를 빼낼 것이니, 아주 조금만 더 날 기다려 주시오. 이제 다 되었소.
‘네, 가가. 믿고 기다릴게요. 당신과 수림이만 안전할 수 있다면……. 네, 전 괜찮아요.’
삼부인이 눈빛을 굳히며 태금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정말로 괜찮았다.
칠 년을 넘게 견딘 오욕의 세월.
고작 며칠 더 추가한다고 달라질 것이 무어 있겠는가.
다만 그녀가 주장하듯 한수림이 정말 사패천주의 아들이 맞다면, 사패천주의 아들이 사패천 밖에서 정말 안전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생각해 봄 직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삼부인의 눈은 태금호를 향해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을 확인하며 태금호가 그녀의 손을 놓고 모습을 감췄다.
이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한수림의 생일날이 되었다.
순식간에 사패천을 밀고 들어온 수십, 수백 명의 손님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사패천의 뒤에 흐르고 있는 강이었다.
그곳엔 이미 검은 깃발과 붉은 깃발로 치장된 큰 배가 두 척 띄워져 있었다.
“적호단이다!”
“금수대야!”
“소천주님이시다--!”
누군가의 외침에 태금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금수대원들 사이로, 강무련과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고 배에 오르는 한수림이 보였다.
밝은 얼굴로 강무련의 반대편에 있는 사내를 향해 재잘재잘 떠드는 한수림의 모습을 보며 태금호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