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해가 바뀌는 시간(1)
해가 바뀌는 시간.
태금호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해가 뜬다는 의미로 일출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중원은 넓고 계절마다 일출 시간이 다른 곳이 있으니, 일반적으로 인시, 묘시, 진시를 일컫는 것일 수 있다.
반대로, 오늘의 해가 진다는 의미로 일몰 시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시나 술시.
하지만 일몰 시간에는 인시가 없었다.
‘결국 제일 가능성이 있는 건 일출 시간이라는 건가?’
확실한 제물인 진화와 현오가 묘시 출생이었고 한수림이 인시 출생이니,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단, 환마제의 장부에 적힌 것이 해시가 아니었다면.’
장안에서 환마제의 제물 장부를 얻었던 진화였다.
그때 적혀 있던 날짜가 경오(庚午)년 갑자(甲子)월 임신(壬申)일 해시(亥時).
일몰, 일출과 아무 관련이 없는 시간이었다.
“크아아아---!”
콰과쾅---!
갑자기 힘을 낸 권마제가 진화의 검을 밀고 들어오면서, 진화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진화가 피한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갑판을 만든 단단하고 굵은 나무들이 찢기듯 뚫려 나간 것이다.
‘무슨 힘이……!’
내공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진화가 놀란 눈으로 권마제를 보았다.
그런 진화의 생각을 읽은 듯, 권마제가 진화를 향해 씨익 웃었다.
세 걸음.
진화가 권마제를 몰아붙이면서 얻었던 거리만큼 이번에는 진화가 밀려났다.
“애송이, 살아 돌아갈 생각 마라.”
권마제가 진화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권마제 태금호의 눈이 마치 불이 붙은 듯했다.
붉은 혈기가 태금호의 눈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내공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 비슷했어. 그렇다면 저 혈기의 차이라는 건데…….’
진화는 권마제를 둘러싸고 있는 혈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불처럼 활활 타는 듯 이전보다 맹렬해진 그것은 권마제의 살기와 함께 짙어졌다.
쉐에에에엑----!
진화가 먼저 움직였다.
진화의 검이 푸른 검강을 뿜어내며 권마제의 팔을 자를 듯 깊게 들어갔다.
한 자 정도, 공간을 잡아먹은 듯 들어온 검을 보며 권마제가 순간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곤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도약하는 건 진화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본능적인 공격이었다.
퍼어어억---!
권마제의 양 주먹에 있던 기운이 아가리를 벌린 용이 되어 진화의 검강을 집어삼킬 듯 부딪혔다.
파지지짓---!
권마제의 주먹에 번개가 머물렀다.
그러나 권마제는 붉은 기운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고통 따윈 못 느끼는 사람처럼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크아아아아---!”
짙은 살기와 함께 더 짙어진 붉은 기운.
권마제의 눈동자와 주먹에 있던 패룡기가 활활 타올랐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등과 어깨, 팔 근육이 한꺼번에 폭발하며 거센 기운과 함께 진화에게 쏘아졌다.
후우---웅.
옷자락이 펄럭이는 광경에 진화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패천아룡권이 이름 그대로 하늘을 깨뜨릴 듯한 기세로 진화의 검강을 때렸다.
쩌------엉!
진화가 기운의 여파를 견디며 뒤로 밀려났다.
‘……!’
찰나지만 진화의 검강이 흔들렸다.
진화의 검에 아주 작은 실금이 가 있었다.
‘패천아룡권.’
진화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싸우고 부딪히고, 기운이 맞붙을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강무련이 말한, 죽인 수만큼 더 강해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었을까.
패룡기(覇龍氣).
패천아룡권의 기운을 굳이 따로 패룡기라 칭한 것은 바로 저 혈기와 내공이 이뤄 내는 폭발적인 힘 때문인 듯했다.
‘혈기가 끌어 올린 폭발력과 내공의 조화라…….’
무의 길에 끝이 없다 했지만 두 번의 생을 살아온 진화에게도 생소한 말이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가 가는 동시에 가슴이 동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혈기와 내공의 조화가 왜 자신의 가슴을 동하게 만들었을까.
조금만 더 생각하면 떠오를 듯도 한데.
진화는 제게 찾아온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영감(靈感).
경지를 넘은 이후로 처음 맞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제게 쏘아지는 권마제를 보며 진화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진화는 불현듯 찾아온 행운을 그렇게 흘려보내야 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착각하면 곤란한데…….”
진화의 눈빛처럼 시리게 빛나는 검강이 진화의 앞에 있는 공간을 잘라 냈다.
쉐에에에엑---!
진화를 향해 밀고 들어오던 패룡기가 흩어지며 앞이 열렸다.
그 순간.
진화가 권마제를 향해 뛰어들었다.
쉐에에엑!
챙! 챙! 챙! 챙!
혈기와 내공의 조화.
진화가 그것에 대해 시간을 가지고 관찰한 것을 두고 물러선 것이라 생각하면 곤란했다.
아직 진화가 닿지 못한 영역이었지만, 이기지 못할 영역은 아니었다.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진화가 미끄러지듯 권마제의 발밑을 베었다.
쉐에에엑--!
“헛!”
놀란 권마제가 높이 뛰어올랐다.
그러나 비호처럼 날아 위에서 진화를 노렸다.
진화가 그런 권마제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섬전십삼검뢰의 연속기가 권마제에게 힘을 폭발시킬 틈을 주지 않는 데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았다.
그러니 이제는 권마제를 이길 차례였다.
파파파파팟---!
천뢰제왕검법 천뢰우전--!
퍼퍼펑---!
진화가 권마제의 발밑을 베는 척 내리꽂았던 뇌전이 땅을 뚫고 권마제의 뒤를 노렸다.
“크어어엇!”
놀란 권마제가 공중에서 몸을 틀어 땅으로 떨어졌다.
파지지지직---!
번뜩이는 뇌전이 진화의 검을 따라 바닥에 떨어진 권마제를 노렸다.
“시야가 어둡군.”
진화가 권마제를 향해 짧게 혀를 찼다.
이제 겨우 마흔하나라 했던가.
“젊은 나이에 개안을 하고 새로운 경지를 보았으니, 사패천을 뛰쳐나갈 만큼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겠지. 어리석게도.”
젊은 시절 경지를 넘어서고 나면 흔히 할 수 있는 실수였다.
무의 끝에 도달한 듯한 착각을 하게 되니까.
진화도 겪어 보았던 실수였다.
하지만 진화는 그때 오만했던 실수로 인해 남궁세가를 잃었으니. 지금 권마제가 목숨을 잃는 것쯤이야 정당한 대가가 아니겠는가.
만물은 공평하게 목숨이 하나고, 세상은 만인에게 똑같이 잔인하다.
진화의 눈동자 속에서 검은 번개가 내리쳤다.
수천수만.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에 내리치는 번개처럼 끝도 없이 번쩍였다.
쉐에에에엑-!
파파파파팟--!
섬전십삼검뢰 여여일식은 한 호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든 공격을 쏟아붓는 연속기로, 진화는 자비 없이 권마제를 향해 끝도 없는 번개를 쏟아 냈다.
“크아아아아아----!”
덫에 걸린 짐승처럼 권마제 태금호가 크게 포효했다.
진화의 번개에 쫓긴 것인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제 모습에 분노한 것인가.
답은 곧 나왔다.
파파파파파파팟---!
진화의 번개가 태금호의 온몸에서 번뜩였다.
태금호가 진화의 번개를 오롯이 맞고 견디면서 꿋꿋하게 몸을 세웠다.
“크으. 가만두지 않겠다!”
상처받은 짐승이 진화를 향해 독을 품었다.
* * *
한수림이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수림을 안고 긴장된 눈으로 밖을 보던 강무련은 진화와 권마제의 대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의 또래 중에 저렇게 이 사형을, 아니 태금호를 몰아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다른 정의맹 사람들, 남궁교명과 나하연도 단둘이서 금수대에 밀리지 않고 있었다.
강무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형아…….”
애처로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강무련이 한수림을 보았다.
“형아도 가야 돼?”
한수림이 눈물 맺힌 얼굴로 강무련의 옷을 꼭 쥐고 있었다.
한수림의 속마음을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사패천의 소천주로서, 배신자들 사이에 정의맹 사람들만 두고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이건 우리 사패천의 일이다. 천주님을 배신한 자들을 정파인들의 손에 맡겨 둘 수는 없다.”
강무련의 단호한 말에 한수림이 눈물을 쏟아 냈다.
“흑, 형아, 죽을 거야?”
한수림의 말에 강무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 아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강 한가운데, 배 위에서 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한수림은 겁이 나서 강무련을 붙자고 있던 것이 아니라, 강무련이 죽을까 봐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강무련은 저를 잡은 한수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죽이고 올 거다.”
“흐엉, 형아…… 아부지가 객기 부리다 죽으면 답도 없다고 했어.”
한수림이 철딱서니 없는 큰형을 보는 듯한 얼굴로 강무련의 옷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결국 강무련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 기다리고 있거라.”
잔망스러운 놈.
‘그러니 반드시 지킨다.’
한수림를 떼어 놓고 선창에 있는 이불로 꼭꼭 감싼 강무련이 입가에 웃음을 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나운 얼굴로 금수대주를 향해 달려갔다.
“크아아아아---!”
강무련의 두 손이 금수대주의 등을 할퀴었다.
“크읏!”
금수대주가 신음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금수대주가 강무련을 찾기도 전에, 강무련의 주먹이 금수대주의 팔을 때렸다.
퍼어어억-!
퍼억! 퍽!
목숨을 건 싸움에 정정당당함을 찾는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
이제까지 금수대주를 상대하고 있던 남궁교명이 놀란 눈으로 강무련을 보았다.
강무련은 앞뒤 잴 것 없이 붉게 물든 두 주먹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마구 휘두르는 듯한 주먹 공세에 금수대주가 하염없이 물러섰다.
권마제 태금호의 권과 달랐다.
‘미친……!’
미친 사람처럼 달려드는 강무련의 모습을 보던 남궁교명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우각살호권(牛角殺虎拳).
사패천주 한구혈과 함께 그를 대표하는 무공은 패천아룡권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낭인이었던 한구혈을 대표하는 무공은 그것이 아니었다.
낭인 한구혈을 지금의 사패천주로 있게 한 바탕이 된 무공은 우각살호권과 만살개천도.
거창한 이름이나 제대로 된 법(法)과 식(式)도 없이. 형태마저 갖추지 못하고 오로지 적을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소가 미쳐 날뛰면 범도 때려잡는다는 게 저것이었나.’
남궁교명은 미친 소처럼 흥분해서 마구 공격을 휘두르는 강무련을 보며 소문으로 전해지는 말이 가히 과장된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죽여 주마, 배신자!”
“배신이 아니오. 내 주인은 처음부터 태금호 공자였으니!”
“상관없다, 이 배신자야--! 카아아아---!”
퍼—억! 퍼버버버퍽!
말도 통하지 않고 통할 생각도 없는 막무가내의 공격.
하지만 그 하나, 하나가 금수대주의 온몸에 핏자국을 남기며 상처를 만들었다.
피하지 못했다면 살점이 뜯겼을 것이었다.
“사패천주는 이용 가치가 없는 수하들을 버리오. 그는 우리의 위에 설 우두머리 감이 아니오!”
“죽어---!”
강무련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금수대주의 입을 터뜨릴 듯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금수대주가 어떤 말을 하든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금수대주와 강무련의 대화에 남궁교명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궁교명은 나하연을 에워싼 금수대원들을 공격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들은, 사파인에 대한 편견을 깰 정도로 강무련이 예의 바르고 단정하다 어쩐다 떠들었는데, 지금의 강무련은 그들이 머릿속에 편견을 가졌던 사파인, 아니 사패천주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정신 차리시오! 제자들에게 서로가 서로를 죽이도록 하는 것이 스승이 할 짓이란 말이오!”
퍼어어억---!
“크-억!”
대답 대신 강무련의 주먹이 금수대주의 어깨를 때렸다.
금수대주가 들고 있던 도끼를 놓치면서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푸—욱.
이질적이고 생경한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있어서는 안 될, 그래서는 안 될. 누군가의 손이 제 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자의 손에 쥐여진 것은 제 심장일까.
“쿨-럭!”
금수대주가 피를 토하며 힘겹게 눈을 돌리려 애썼다.
그때.
“난 그놈들의 스승이 아니야. 이 몸은 모든 사파 짐승들의 왕이다.”
지엄한 지존의 목소리와 함께 금수대주의 목이 꺾였다.
그 광경을 보며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태금호였다.
쉐에에엑--!
진화의 검이 태금호의 팔을 베었다.
검은 번개가 태금호의 기혈을 태우면서, 패룡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다.
“분노하면 뭐.”
퍼---억!
조금씩 느려진 반응.
“소리를 지르면 뭐.”
진화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천뢰장을 때렸다.
“약한 자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다. 너희 귀천성이 주장하는 말이지 않나.”
쉐에에에엑---!
위험하다!
순식간에 머리를 지배한 공포가 태금호를 움직였다.
퍼—엉!
휘이이익-!
진화의 검기와 함께 매서운 바람이 태금호가 있던 자리를 스쳤다.
“왜 이제 올라왔지?”
“아, 나도 숨 좀 돌립시다!”
진화의 책망에 남궁구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남궁구는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 온몸이 붉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궁구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화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쯧, 그럼 좀 천천히 죽이든가. 너 때문에 천주가 벌써 왔잖아.”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진화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여어, 너 이 배은망덕한 새끼, 오늘 잘 걸렸다!”
사패천주가 금수대주의 심장을 터뜨리며 태금호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남궁구가 배를 멈춘 사이, 어느새 사패천주와 적호단이 탄 배가 지척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