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해가 바뀌는 시간(2)
“이 빌어먹을 놈들, 감히 내 동생을 빼돌려?”
남궁진혜가 악귀 같은 얼굴로 배를 뛰어넘었다.
태금호와 금수대의 목적은 진화가 아니었지만, 남궁진혜에게 그런 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전부 죽여라-!”
“충!”
적호단주의 명에 적호단도 험악한 얼굴로 배를 넘었다.
언제나 외지를 떠도는 적호단원들에게 집에 있는 마누라가 애먼 놈과 바람이 나는 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불행이었다.
그런데 그 애먼 놈이 제 자식까지 노린다니!
동병상련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이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금수대를 공격해 들어갔다.
진화는 이제야 비로소 패룡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
공기조차 공포에 떨고 있는 듯 기묘한 소리를 내었다.
쿠어어엉---!
사패천주가 태금호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붉은 기운이 사나운 이리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듯 태금호의 가슴팍에 꽂혔다.
“크억!”
양팔을 교차해서 겨우 기세를 막아 낸 태금호가 신음을 내었다.
붉은 기운은 여전히 태금호의 팔뚝에 이를 박아 넣고 있었다.
씨익-.
태금호와 얼굴을 마주한 사패천주가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새끼야, 내 거 털어먹고 마누라까지 털어먹은 주제에 곱게 죽을 생각을 했어?”
“크으.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오기 전에 그년은 끌어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새끼까지 팔아먹은 어미년을 더 이상 살려 둘 순 없지. 돌아가면 네놈과 함께 사지를 찢어 죽일 거다.”
사패천주의 말에 태금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칠 년이 넘게 두고만 보고 있기에 쉽게 죽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에게 진짜 애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크읏! 알 게 뭐야!”
태금호가 온몸의 기운을 모아 사패천주를 밀어냈다.
파---팟!
사패천주가 밀려나며 그의 기운도 태금호의 팔뚝에서 뽑혀 나왔다.
무형의 기운이 유형의 상처를 만들어 낸 광경.
진화는 실체를 만들어 낸 혈기의 폭발력을 보며 눈에 이채를 발했다.
퍼---억!
퍽퍽!
붉은 기운들이 뒤엉켜 거대한 바람을 만들었다.
퍼---엉!
바람은 마치 파도처럼 주변의 기운을 밀어냈다.
진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했다.
갑자기 구경꾼이 되어 사패천주에게 태금호를 빼앗겼지만, 진화는 사패천주의 움직임에 영영 놓칠 줄 알았던 영감의 실마리를 잡았다.
퍼어어억---!
비호처럼 날아서 태금호의 목덜미를 뜯어 놓는 사패천주.
“크억!”
승냥이처럼 유연하게 굴러 사패천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태금호.
퍽! 퍽!
놀란 소처럼 무자비한 발길질을 하는 사패천주와 그 와중에 사어(鯊魚)처럼 사패천주의 급소를 노리는 태금호.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상선을 지탱하던 나무가 지푸라기처럼 뜯겨 나갔다.
태금호는 사패천주가 만든 최강의 무공이라는 패천아룡권을 썼고, 사패천주는 패천아룡권을 두고 우각살호권을 펼치고 있었다.
“많이 늘었구나.”
우각살호권은 주먹을 오므려 쥐지 않는 무공이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살려 치명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마침 사패천주가 새끼손가락으로 태금호의 눈가를 긁었다.
조금만 더 옆으로 움직였다면 사패천주의 새끼손가락이 태금호의 눈알을 긁어 왔을 것이었다.
“당신은 늙었군.”
태금호도 몸을 틀어 나오면서 사패천주의 팔꿈치를 때렸다.
아무리 내공이 충만해도 육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었으니.
“새끼, 입 놀리기는. 흐흐흐.”
사패천주는 뼈에 멍이 든 듯 구부려지지 않는 팔을 늘어뜨리고 태금호를 향해 웃었다.
태금호 또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사패천주를 노려보았다.
저쯤 되는 강자들에게 무공이나 초식을 논하는 건 무의미했다.
무공이란 결국 상대를 이기거나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수많은 경험과 머릿속 상상이 쌓이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치명적으로 정제된 움직임이 바로 초식이다.
명문의 무공들은 후대로 이어지면서 점점 효과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만큼 법과 식, 규칙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무공에 담긴 의지와 목적에 따라 공통적인 움직임이 생긴 것이다.
정제(精製)과 정제(整齊).
상상(想像)과 심상(心想).
사패천주와 태금호의 움직임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눈에 보이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몸이 반응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자연스러움. 아니, 자유로움!’
진화의 눈에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진화가 사패천주와 태금호의 가운데에 끼어들었다.
쉐에에에엑----!
태금호가 사색이 되어 옆으로 몸을 던졌다.
진화가 곧장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팟-!
땅이 갈라지며 새파란 기운이 바닥을 구르던 태금호의 다리를 치며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아아----!”
무릎이 꺾여 나가며 태금호가 비명을 질렀다.
“허! 저 애송이가 그새 미쳤나?”
사패천주가 달라진 진화의 움직임을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정제(精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쓸데없이 정제(整齊)된 움직임이 사라졌다.
억지로 순수해지려 애쓰느라 부자연스러워진 움직임이 사라진 것이다.
천뢰제왕신공은 하늘의 번개처럼 빠르고 강력하면 그만이었다.
변덕스러운 의외성조차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파파파파팟---!
일어나 날뛰는 태금호의 머리 위에 번개가 떨어졌다.
천뢰제왕검법 낙수는 땅을 때리는 폭포처럼 태금호의 몸을 꿰뚫고 지났다.
“커헉! 너……!”
패룡기의 흐름이 끓어지며 태금호가 울컥 피를 쏟았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단지 정신없이 몰아쳤을 뿐이었던 때와 달라졌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것도. 그보다 당신, 패천아룡권을 제대로 쓰면서 귀천성으로 간 이유는 뭐지?”
“……뭐?”
뜬금없는 진화의 질문에 태금호가 놀라며 되물었다.
뒤늦은 반응이 무언가 들킨 사람 같았다.
“속박과 절제를 끊은 짐승이 왜 스스로 귀천성에 복속된 것이냐 묻는 거다.”
진화의 눈이 태금호를 향했다.
무저갱보다 깊고 검은 눈동자가 지옥같이 헝클어진 태금호의 속을 그대로 비추는 듯했다.
“……하아! 나는 처음부터 귀천성의 사람이었다.”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대답.
태금호의 붉은 눈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렇군.”
진화는 태금호의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사실 다른 이유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타는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
중원에서 태금호가 가진 색을 받아들여 준 곳은 귀천성밖에 없었을 터였다.
귀천성이 성도들에게 바라는 건 오직 강한 힘뿐이니까.
파지지지지직---!
진화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태금호의 혈기를 잘라냈다.
진화는 태금호의 패룡기가 어째서 사패천주의 그것과 다른지 알았다.
퍽-! 퍽퍽!
검은 간격을 필요로 하는 무기지만 동시에 거리에 상관없이 위험한 무기였다.
검면을 때리는 태금호의 주먹을 보며 진화가 돌연 검을 돌려 날을 세웠다.
파지직-!
“크윽!”
뇌전과 함께 진화의 검이 태금호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갔다.
태금호가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서고, 진화가 그것을 쫓아 곧바로 팔을 곧게 뻗었다.
푸욱-!
빛처럼 빠르게.
패룡기를 두른 몸을 뚫을 정도로 강력하게.
정해진 대로 쥐지 않고, 정해진 대로 움직이지 않는 진화의 검은 섬전십삼검뢰를 퍼부을 때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동시에 자유로움을 깨달은 진화는 태금호의 부자연스러움을 꿰뚫어 보았다.
“당신은 그저 사패천주의 자유를 흉내 내고 있었군.”
“커억!”
태금호가 제 가슴을 꿰뚫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파팟--!
인정사정없이 검이 뽑히고 붉은 피가 튀었다.
“큭!”
피가 흐르는 가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태금호의 눈이 사패천주를 향했다.
‘진짜 당신처럼 자유롭길 바랐는데…….’
여자와 아이 때문이 아니었다.
한수림이 가진 검은 머리칼, 검은 눈을 원했다.
하필 당신의 아들이었지만, 그마저도 당신의 일부라서 좋았다.
당신처럼 되길 바랐다.
태금호의 미련 가득한 눈이 사패천주를 올려다보았다.
“음…….”
사패천주가 쓰러진 태금호를 내려다보았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미련 가득한 눈으로 저를 보는 태금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느새 조용해진 사위가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헉. 헉. 큭, 사부……!”
“이런 씨부럴! 새파란 애송이 새끼한테 뺏길 줄은 몰랐는데. 너 이 새끼, 고생 좀 하다가 뒈져라.”
태금호의 마지막 부름.
하지만 사패천주는 욕지거리와 악담을 남기고 태금호를 지나쳤다.
황당한 사람들의 시선이 사패천주를 향했지만, 그렇다고 사패천주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가 태금호의 마지막을 받아 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들-! 림아!”
“아부지-!”
한수림이 뛰어나와 사패천주의 품에 안겼다.
태금호가 흐려지는 눈으로 사패천주와 한수림을 보았다.
“흐흐, 사부답네…….”
피와 함께 뱉어 내는 태금호의 미련을 강무련과 남궁구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보았다.
그때, 진화가 다가와 태금호의 손을 붙잡았다.
“죽는 마당에 말해 주겠나? 해가 바뀐다는 게 무슨 뜻이지?”
“…….”
진화가 진기를 흘려보내며 태금호의 마지막 숨을 붙잡고 묻는 말에, 남궁구가 민망한 듯 강무련의 시선을 피했다.
태금호의 시선은 계속 사패천주와 한수림을 향해 있었다.
“아, 어둠이 오는군. 곧 해가 바뀌겠어…….”
태금호의 붉은 눈이 비로소 까맣게 죽었다.
* * *
사랑탑 정문에 태금호와 삼부인의 시체가 나란히 걸렸다.
한수림이 있었지만 사패천주는 삼부인의 죄 중 어떤 것도 숨기지 않았다.
잔인한 일이었지만 사패천주다운 결정이었다.
적호단의 입장에선 이번 임무는 생각보다 많은 성과를 남겼다.
정사연합이라는 거창한 의미는 두고서도, 결과적으로 권마제 태금호를 죽였다.
게다가 권마제에게 ‘해가 바뀌는 시간’에 대한 의미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가장 밝은 것이 해라면, 확실히 밤에는 달이나 별이 해가 되어야지.”
“그런 의미라면 역천비록에 있는 제물의 태어난 날짜와 해가 없는 시간을 봐야 하는 건가.”
남궁교명의 말을 끝으로 이어지는 답이 없었다.
천문을 읽어 내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
관서겸의 말에 다시 조용해졌다.
‘태금호가 역천비록에 적힌 생시를 무시하고 다른 제물을 찾았다.’는 것은, 역천비록이 가짜일 가능성까지 생긴 것이라 문제만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걸 왜 순순히 가르쳐 줬지?”
“아니, 그쪽이야말로 귀천성 마제의 말을 순순히 믿어요?”
현오의 말에 당혜군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귀천성도에 대한 신뢰라니.
그처럼 말이 안 되는 것이 또 있겠는가.
그때, 진화가 강무련이 놓고 간 역천비록을 덮으며 말했다.
“안 믿어. 하지만 상관없지 않나.”
“뭐?”
“눈앞에 드러난 사실만 보자고. 어쨌든 권마제는 남궁금영이 아닌 한수림을 노렸어. 배를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권마제의 제물은 한수림이었다. 시간과 관련한 권마제의 말은 차차 확인해 보면 되겠지. 만약 권마제의 말이 사실인데 역천비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가짜 역천비록을 알아낼 수도 있는 거고.”
진화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맹 또한 진화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권마제가 노린 사람은 한수림이 확실했지만, 모든 것은 확실히 확인해 볼 문제였다. 그 전까지는 남궁금영 또한 안전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진실이 확인될 때까지 남궁금영은 남궁세가의 본가에 있기로 했다. 우리의 임무도 본래대로 남궁금영을 남궁세가에 데려다주고, 사패천에서 얻은 역천비록을 안전하게 정의맹으로 가져가는 것이 추가되었다.”
적호단주의 말에 진화 일행과 적호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 남궁진혜만 제외하고 말이다.
“집이라니! 안 돼--!”
남궁진혜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절망스러워했다.
가모인 하후민이 기둥뿌리를 몇 개나 해 먹은 남궁진혜를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 아는 진화는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남궁진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