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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44)화 (244/425)

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해가 바뀌는 시간(3)

적호단이 떠나기 전.

사패천주가 조용히 진화를 찾았다.

“…….”

사람을 불러다 놓고 말이 없는 건 뭘까.

곁에서 사랑탑주가 안절부절못하며 사패천주와 진화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사패천주가 뜬금없이 사랑탑주에게 버럭 했다.

“거참, 오줌 마려운 원숭이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나가 봐!”

“안 됩니다! 저래 봬도 제국의 적통 황자란 말입니다! 황자님 불러다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요. 제발 체통을 지키라고 해 봤자 안 지키실 테고, 이렇게 감시라도 하고 있어야죠!”

사랑탑주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저래 봬도?’

진화가 조금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사패천주도 여기에 뿌리를 박을 거라 외치는 사랑탑주를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진화에게 눈을 돌렸다.

“네놈은 여기서 이득만 보고 가는군. 태금호의 모가지에, 역천비록에, 감히 이 몸의 비전까지. 안 그래?”

“악! 놈이라니요! 님이지요! 최소한 너님이라고 하시라고요!”

중간에 사랑탑주의 잔소리가 끼어들었지만, 사패천주나 진화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글쎄요. 확실히 권마제의 모가지는 제가 땄으니, 역천비록은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 아니겠습니까?”

“흥! 뻔뻔한 놈.”

사패천주의 말투를 따라 하는 진화의 모습에, 사패천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악! 뻔뻔한 님이라니까요!”

사랑탑주가 왁왁거리긴 했지만, 이제 그의 목소리는 추임새 혹은 사랑탑의 메아리처럼 무시되었다.

“에잉! 있는 놈들이 더하다고. 제왕검 놈은 귀천성에서 주워 와도 어떻게 너 같은 놈을 주워 왔을까. 지지리 운도 좋은 놈!”

“주, 주워 왔다고 하지 마시라고요…….”

“하하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진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패천주의 칭찬이 이번 생에 들었던 어떤 감탄보다 진심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진화 그 자체만 보고 이토록 솔직담백하게 칭찬을 해 온 사람은 지금 생과 이전 생을 통틀어 사패천주가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 사랑탑주가 지적하는 소리도 재밌었다.

진화가 웃음을 터뜨리자 어두운 사패천주의 집무실 분위기가 일순 환해지는 듯했다.

세 사람 사이의 공기도 한결 편안해졌다.

진화도 처음보다 편하게 말을 꺼냈다.

“역천비록의 비밀을 파헤치는 건 사패천에도 필요한 일일 겁니다. 귀천성이 어떤 방식으로 힘과 영생(永生)을 탐하는지 알아낸다면, 귀천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테니까요.”

한수림이 여전히 위험하다는 말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아버지인 사패천주가 그것을 잊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놈들이 신제국에 있다는데, 귀찮은 것 전부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싹 다 잡아 죽이는 건?”

“그게 가능했다면 대반격 때 실패하지 않았겠죠.”

“……고얀 놈.”

사패천주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진화를 노려보았다.

사패천주의 앞에서 대반격을 실패라 말하는 사람은 진화가 처음이었다.

정과 사, 한제국을 망라한 대협력을 이끌어 내었던 반격.

무서운 기세로 중원을 정복하던 귀천성을 최초로 패퇴시킨 전쟁이라, 중원 모두가 위대한 승리라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 사, 군부의 연합조차 귀천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마제 둘을 죽이고 역천마제를 부상 입힘으로써 귀천성을 잠시 멈추었을 뿐.

자신이 노려봄에도 진화가 꿈쩍도 하지 않자, 사패천주가 이내 김샜다는 듯 눈에 힘을 풀었다.

“십이좌회라 부르지만 그보다 많았다. 영웅이라 불리기 전에 모두 죽어 버렸을 뿐이지.”

“…….”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나만한 놈이 몇 명만 더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가 후회했었다. 그런데 어제 보니 네 녀석 말고 나머지 녀석들도 꽤 괜찮더군. 우리 무련이 녀석도 그렇고, 앞으로를 위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면 그리 나쁘진 않겠어.”

제자가 귀천성 마제가 되었다.

거기에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약한 정신머리를 가졌다면, 놈이 자신의 마누라랑 뒹굴었을 때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다만 좀 답답하긴 했었다.

그마나 쓸 만한 놈이 귀천성에 붙어 버렸으니.

하지만 남궁진화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다른 놈들이 전부 태금호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놈은 되다 만 반푼이였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사패천주는 젊은 무인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오만과 방심을 경고했다.

진화의 손에 죽은 마제만 벌써 셋이었기 때문이다.

잘난 외모에, 무서울 것 없는 배경. 어린 나이에 다른 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위를 가졌고, 벌써 중원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명성을 쌓았다.

사패천주가 보기엔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애송이가 되기 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화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알고 있다고?”

“더 정진하겠습니다.”

진화는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아니 비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자신이 공을 세웠으나, 환마제는 육체가 붕괴되어 이미 죽어 가고 있었고, 소리마제는 남궁세가 전체의 힘이었다. 권마제 태금호는 사패천주의 말처럼 완성되지 않은 자였다.

이전 생에서 남궁세가 결사대를 어린아이처럼 제압하던 광마제의 무위를 기억하기에, 진화는 결코 방심 같은 걸 할 수 없었다.

“말은…….”

진화의 대답에 사패천주가 입을 삐죽거렸다.

진화의 단단한 눈을 보자니 괜히 늙은이처럼 노파심을 부렸다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런 놈을 주워 간 남궁세가의 행운에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젠장, 그때 내가 광마제에게 갔다가 저걸 주워 왔어야 했는데!”

“천주님!”

사패천추의 노골적인 말에 사랑탑주가 다시 왁왁거렸다.

“흥, 천문이나 역술을 사특하게 이용하는 건 사파 놈들이 나을 거다. 정의맹엔 알아서 사패천 술법사들을 보내 놓으마. 이만 꺼져 봐라.”

“그간 감사했습니다.”

사패천주의 말에 진화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술법사들을 보내 준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사패천주에게서 얻는 심득에 관한 감사 인사였다.

‘자유로움.’

사패천주에게서 얻은 심득은 진화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큰 변화를 주었다.

이전 생 동안 남궁세가에 목줄이 메인 개처럼 살았던 인생이 알게 모르게 정신적 속박처럼 남아 있던 터였다.

지금까지 진화는 그것을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남궁세가에 소속되어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이제는 소속(所屬)되어 있는 안정감과 속박(束縛)당한 구속감을 구분해야만 하는 때였던 것이다.

제가 온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진화는 또 다른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신제국 황궁.

요즘 신제국의 황성은 무겁고 스산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이전에도 나날이 번성하는 한제국의 기세에 불안한 낌새가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신하들이며 궁인들이 주눅 들고 공포에 질려 있던 적은 없었다.

모두 신건궁에 주인이 들어서고부터였다.

귀천성 마제들이 다짜고짜 황궁에 쳐들어와, 어느새 신제국 황제의 신뢰를 얻어 조정을 장악했다.

그들의 인간 같지 않은 무위에 황제는 자신감이 충천하여 당장이라도 한제국과 전쟁을 벌일 듯 군사를 모았고, 조정 대소 신료들은 입을 닫았다.

서로 정반대의 분위기.

경험 많은 궁인들은 망조가 든 폭군을 둔 황성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폭군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을 뿐.

궁인들이 신건궁에 들어서 극도로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신건궁 서거전.

검은 복면을 쓴 흑의인이 급히 서거전 안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하던 궁인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궁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얼굴로 순식간에 서거전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냐?”

갑작스러운 교성흑오대원의 등장에 혼현마제가 손을 내밀었다.

입을 닫은 이가 내놓은 건 작은 전서였다.

그것을 본 혼현마제의 눈매가 미미하게 떨렸다.

[권마제 사망. 역천비록 변동. 정의맹과 협력.]

권마제 태금호가 죽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한 인물도 없었으니 시간을 조금 두었더라면 훌륭한 전력이 되었을 터.

귀천성의 입장에서는 아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있는 내용이었다.

‘역천비록을 정의맹에 옮긴다고? 사패천 술법사들을 내줘서 연구해 봤자 역천대법을 완전히 알아낼 리 없다. 문제는…….’

혼현마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사패천주 아들의 생일연회에 일이 벌어졌다지?”

혼현마제가 한 번 더 확인했다.

예상대로 교성흑오대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혼현마제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사패천주의 아들이 남궁금영과 같은 생일을 가졌다니…… 그놈, 혹시 뭔가 눈치를 챈 건가?’

불현듯 든 의심.

하지만 혼현마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태금호가 알아챘을 리 없었다.

그는 역천대법의 비밀도 모르고, 제물에 관해서도 혼현마제가 알려 준 것을 들었을 뿐이었다.

‘놈이 알아챘을 리는 없다. ……그런데 왜 하필 남궁금영을 두고 여자와 아들을 노렸느냔 말이야!’

태금호가 일으킨 희대의 불륜 사건은 익히 알고 있었다.

당시 혼현마제는 매사 심드렁한 그 사내에게 그런 열정이 있었다는 데에 놀라워했었다.

하지만 제물 문제와 얽히고 나니, 이제 와서 그 심드렁한 붉은 눈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혼현마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지.’

처음 자신이 계획한 것이 자꾸 어그러지고 있었다.

환마제 그리고 소리마제.

아니, 처음 제갈세가에서 예상보다 일찍 정체가 드러났을 때부터.

욱-씬.

망가진 팔과 눈이 아파 왔다.

몸이 안 좋아서 감정이 날카로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평소라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불안감이었지만, 결국 혼현마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 계획이 어그러지게 둘 순 없으니, 거슬리는 건 모두 챙겨 보는 수밖에.

“수오를 불러와라.”

혼현마제의 명에 교성흑오대원이 금세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 영락없는 귀공자의 모습을 한 수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스승님.”

여유롭게 들어왔던 수오는 날카로운 혼현마제의 표정을 보고 급히 몸을 사렸다.

“네가 직접 움직여야 할 일이 있다. 권마제가 노린 그 사패천주의 아들. 그 아이에 대해 알아 와라.”

“사패천주의 아들요?”

“그래. 전부.”

혼현마제의 명에 수오가 의아한 듯 되물었지만, 곧 고개를 숙이고 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혼자 남은 혼현마제는 여전히 불안한 듯 입술을 씹었다.

“안되겠어. 놈들이 뭔가 알아내기 전에 남은 역천비록을 전부 회수해야겠어.”

혼현마제가 교성흑오대원을 불렀다.

“역천비록들의 행방을 모두 확인하거라.”

* * *

적호단이 사패천을 떠나 남궁세가로 향했다.

남궁금영을 남궁세가 본가까지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불과 며칠 전 전투를 치른 터라 적호단의 기세가 흉흉했다.

하지만 양주로 들어서자 적호단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양주에 도착했을 때, 적호단원들이 느낀 것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꽃마차다-!”

“뭐? 꽃마차? 우리 공자님이 오신 거야?”

“어디? 어디?”

아이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몰려드는 사람들.

흉흉한 기세를 뿜어 대는 적호단을 보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에, 적호단원들은 물론 적호단주마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봐, 위험하니까 비켜!”

대체 누가 위험하다는 건지.

적호단원의 위협적인 고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사람들의 기세에 적호단원들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저기 우리 공자님 타고 있는 거 맞아요?”

“아가씨 마차 아니야?”

“에이, 우리 아가씨는 저거 안 타잖아요. 거기 아저씨, 좀 비켜 봐요! 우리 공자님 마차 맞는지 좀 확인하게!”

누군가의 고함에 미친 마차, 아니 남궁세가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적호단원들이 저도 모르게 슬쩍 길을 열었다.

“참, 저 사람들 적호단원이면 우리 아가씨도 있지 않나?”

“맞네! 그럼 저기에 공자님이랑 아가씨가 다 타고 있나?”

“어머-! 아가씨, 큰일 났어요! 가모님이 벼르고 계신다고요-!”

“호호호호! 이를 어째? 당신 가서 얼른 본가에 알려 드려요!”

사람들이 웃음을 머금고 마차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때, 마차의 창문이 열리면서 남궁진혜가 소리를 질렀다.

“알리지 마-! 알리면 두고 봐!”

협박 같은 남궁진혜의 말에 사람들은 더 크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하하! 아가씨, 집에 잘 돌아왔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요!”

“공자님-! 얼굴 좀 보여 주세요-!”

사람들의 환호와 환영 인사에 진화도 슬쩍 얼굴을 비추고 고개를 까닥였다.

남궁진혜와 진화를 향해 친근하게 인사하는 사람들.

하나같이 웃고 있는 얼굴에서 진심으로 그들을 반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잠삼현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몰려들었다.

무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몰려드는 사람들.

적호단은 처음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이곳 사람들의 신뢰야말로 남궁세가가 귀천성으로부터 이곳을 지켜 내고 얻은 것인가.’

적호단은 물론 진화 일행 모두, 남궁세가로 가는 내내 양주 사람들의 남궁세가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와아!”

서평원과 동평원 가운데 소천로를 지나는 동안.

적호단은 미친 마차, 아니 꽃마차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남궁세가 사람들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대한 의천문 앞에는 남궁세가 가주와 남궁경을 비롯한 남궁세가 사람들이 적호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금영이를 호위해 준 것에 대해 남궁세가를 대표해서 감사를 표하오.”

“적호단주 팽치입니다. 적호단을 대표해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사윗감이라고?”

“……예?”

“하하하!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남궁가주가 놀란 적호단주를 구렁이 담 넘듯 의천문 안으로 이끌었다.

그 사이.

“진화야-! 아이고! 내 새끼!”

“아버지!”

양주대부, 남궁제일검 남궁경이 마차 문을 뜯듯이 열고 진화를 맞았다.

“진화야!”

“어머니! 큰어머니!”

팽연화와 가모 하후민도 반가운 얼굴로 진화를 맞았다.

단, 진화와 해후를 마친 가모 하후민은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들 하나하나를 뜯어보다,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빈 마차 안을 보았다.

“……이년, 튀었구나.”

하후민의 조용히 하는 말에 진화가 그녀를 바로 보지 못하고 멀리, 담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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