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해가 바뀌는 시간(4)
천하제일세가(天下第一世家).
콕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한 곳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때는 제갈세가가 그곳과 견주었으며, 하북팽가와 모용세가 또한 꾸준히 그들의 아성을 넘보았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로라하는 세가들의 전성기에 자연스럽게 비교 대상으로 떠올리는 곳.
구태여 전성기를 떠올리지 않아도 무림 세가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첫 번째 이름.
그렇다.
누군가 단언하거나 공표할 필요 없이, 남궁세가는 무림인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적호단과 관도생들은 양주로 들어서면서 남궁세가가 왜 천하제일이라 여겨지는지 사람들을 보며 깨달았다.
가문의 세를 아무리 불린들, 양주 사람 전체가 남궁세가 사람이라 말하는 곳을 넘어설 수 있을까.
중원의 황금을 모두 끌어모아도, 산, 바다, 강, 기름진 땅속에 완전한 자립 경제를 가진 남궁세가를 위협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무림 세가로서, 제왕검 남궁강과 그 아들, 손자까지 이어지는 강맹함을 비견할 곳이 없었다.
‘아아, 저분이……!’
적호단이 천명관으로 가자, 그 앞에는 제왕검 남궁강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선과 같은 풍모에 강인한 자태.
제왕검 남궁강은 남궁세가 특유의 선 굵은 호방한 외모에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태산 같은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적호단 소속이기 전에 정파의 무인으로서, 단원들과 관도생들은 경외심을 가득 담아 제왕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남궁강이 진화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내 손자-!”
“하, 할아버님!”
방긋 웃으며 부르는 소리에 진화가 부끄러운 듯 남궁강에게 다가갔다.
“소손 남궁진화가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허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음에도 여전히 활짝 열린 두 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진화가 귀를 붉히고 남궁강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내 손자, 내 황자 손자! 평소에도 그렇게 나를 따르더니, 기어이 이 할아비 따라 계속 ‘남궁’ 하기로 했다며? 아이고, 예쁜 놈! 하하하하하!”
퍽. 퍽. 퍽.
제왕검 남궁강이 기분 좋은 듯 진화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천명관 현판보다 높은 곳에 은인지황(恩人之皇)이라는 황금색 현판이 눈에 띄었다.
황제가 남궁세가에 내려 준 것이었다.
“어쩐지 아버지가 아까부터 현판 아래에서 벗어나질 않더니. 이 생색을 내시려고 기다렸구먼?”
“흐흐흐, 애초에 모두가 반대하는 데에 아버님께서 진화를 받아들이셨지 않으냐. 가신들 보란 듯이 기분 좀 내시게 두자꾸나.”
남궁가주와 남궁경이 웃음을 참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제왕검의 의도대로, 사람들은 제왕검과 진화의 위에 있는 황제의 현판을 보고 있었다.
대충 내일 세가회의쯤에서 가신들이 ‘역시 태상가주님의 선견지명이십니다!’라고 호들갑을 떨어 주면 제왕검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잠시 제왕검이 기분 낼 시간을 준 뒤 남궁가주가 움직였다.
“아버님, 이쪽이 적호단주입니다.”
“적호단주 팽치입니다. 이렇게 제왕검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가주가 손님들의 대표인 적호단주를 남궁강에게 소개했다.
팽가의 망나니라 불리는 팽치지만 이번만큼은 깍듯하게 예를 다해 인사했다.
남궁강도 반색하며 팽치를 보았다.
“오-! 이치가 그치더냐?”
“하하하! 예, 이치가 그치입니다.”
“호오, 잘됐구나.”
대체 뭐가 잘됐다는 걸까.
이 ‘치’와 그 ‘치’는 어떤 치를 말하는 걸까.
불안감을 느낀 팽치가 뭐라 입을 떼려는 순간, 남궁강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정의맹에서 귀한 손님들이 왔으니 남궁세가의 손님 대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거라!”
“와아아아아---!”
남궁강의 말이 있는 순간, 남궁세가 하인들이 순식간에 연회장을 꾸미고 가솔들이 탁자 가득 음식을 내어왔다.
산해진미가 가득한 만찬장을 보며 적호단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 * *
오랜만에 집으로 온 진화를 차지하기 위해 남궁세계 직계들은 다른 방에 따로 상이 차려졌다.
식구나 다름없는 남궁구, 남궁교명은 물론 적호단주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나는 왜…….’
아까부터 느껴지는 찜찜함과 불안감.
귀천성과 관련한 것 같진 않은데, 적호단주 팽치는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방이 남궁이군. 안 되겠어. 여기라도 벗어나야…….’
적호단주 팽치가 어렵게 말을 꺼내려 남궁가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니,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남궁진혜가 씩씩거리면서 만찬장에 들어섰다.
“어머, 이게 누구야-아?”
가모 하후민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끝을 묘하게 늘어뜨렸다.
만찬장의 온도가 순식간에 내려간 듯한 느낌에, 남궁강마저 슬그머니 젓가락을 놓았다.
남궁진혜는 제 분에 못 이겨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집에 기둥을 빼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네가 해 먹은 기둥이란다.”
남궁진혜가 씩씩대며 따지는 말에 가모 하후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에 남궁진혜도 한 걸음 물러섰다.
“휴우, 알겠어요. 제가 사고치고 어음만 보낸 건 잘못한 거 알아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잘못한 거 보이겠다고 멀쩡한 전각의 기둥을 뽑으시면 어떡해…… 응?”
남궁진혜가 말을 끝내기 전에, 한쪽에서 남궁가주가 열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옆에서 남궁경까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닌데요?”
남궁진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전혀 감도 잡지 못하는 남궁진혜를 보며, 가모 하후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아니지. 제정신 가진 사람이면 일부러 멀쩡한 전각 기둥을 뽑았을 리 있겠니?”
“어머……니?”
“네가 보낸 어음 전부! 네 집 기둥을 뽑아서 판 돈으로 계산했단다.”
“어머니!”
“글쎄. 내가 네 어미는 맞는지.”
순간, 하후민이 서릿발처럼 차디찬 눈빛으로 남궁진혜를 쏘아보았다.
“기껏 남궁세가 귀한 영애로 낳아 줬더니, 제 어미 생일에도 어음을 선물로 날려? 가족으로서, 직계 영애로서 해야 할 일 하나 하지 않고 집안의 돈만 빼먹는 기생충 같은 짓거리는 대체 누가 가르친 건지. 쯧.”
매몰찬 말이 송곳처럼 남궁진혜에게 쿡쿡 박혀 들어가는 듯했다.
게다가 화룡점정을 찍는 듯한 혀 차는 소리.
가모 하후민의 혀 차는 소리에 남궁진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남궁진혜는 이제야 차분한 말투와 달리 들불처럼 활활 타고 있는 하후민의 눈을 본 것이다.
“딸아, 네가 네 성질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망나니처럼 살면 들짐승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누누이 말했잖니?”
“그, 그랬습죠……?”
“들소처럼 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그러려면 그간 내가 귀한 영애에게 준 건 다 뱉어 내고 가야지? 그게 아니라면 귀한 영애답게 네 일에 책임을 져야 하고.”
“책임지겠습니다!”
포기와 항복은 빠를수록 좋았다.
털썩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남궁진혜를 보며, 가모 하후민이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한쪽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창천정 하녀를 불렀다.
“데려가 사람 꼴로 만들어서 내 방에 가져다 놓거라.”
“예, 가모님.”
창천정 하녀들이 옷소매가 없는 남궁진혜의 양팔을 단단히 잡고 일으켰다.
힘이라면 정의맹 전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남궁진혜였지만, 이번만큼은 하녀들의 손에 물 먹은 김처럼 질질 끌려 나갔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 분위기 속에 가모 하후민이 온화하게 웃었다.
“호호호, 신경 쓰지 말고 들어요.”
누구 하나 함께 웃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팽연화만이 온화하게 웃으며 진화의 그릇에 고기를 올려 주었다.
“아가, 이것부터 들렴.”
“…….”
진화는 어머니 팽연화가 제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날 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듯 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유난히 큰 밤이었다.
실제로 청림이 바쁘게 움직이며 천주산의 기척을 막았다.
그리고 남궁경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궁진혜를 찾았다.
“어디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검을 들고 사납게 웃고 있는 남궁경의 모습에, 남궁진혜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포권했다.
무공을 처음 배울 때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남궁진혜가 검을 들고 나갔다.
잔뜩 긴장한 채 기세를 끌어 올리는 남궁진혜.
그런 남궁진혜의 눈앞으로 푸른…… 바윗돌이 날아왔다.
콰----광!
창천원이 떠들썩하게 울리는 굉음.
그 소리에 남궁강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아비가 잔뜩 벼르고 있더니 요란스럽게도 하는구나.”
남궁강의 옆에는 진화가 함께 있었다.
스스스슷--.
마치 길을 비키는 듯 울창한 나뭇가지가 위로 들렸다.
그러자 천주산 깊은 곳으로 쭉 이어진 길이 나타났다.
“준비되었느냐?”
남궁강이 진화에게 물었다.
눈에서 반짝이는 푸른 정광.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르른 청룡이 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설 정로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뻔했지만, 진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내디뎠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자.”
남궁세가가 깊이 숨기고 있는 비지.
두 조손이 길에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울창한 숲이 길을 가렸다.
* * *
신제국 황궁, 신건궁.
귀천성의 마제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검은 용이 새겨진 황포를 걸치고 역천마제가 황금좌에 앉았다.
마치 황제처럼 위엄 넘치다 못해 위풍당당한 자태였다.
역천마제의 곁으로 검마제는 거대한 그늘에 숨어 호위무사처럼 역천마제를 지키고, 정순한 학사 같은 혼현마제가 그 앞에 허리를 조아렸다.
반대편에는 광마제가 심드렁한 얼굴로 자리했다.
황궁에 돌고 있는 소문처럼 역천마제와 다른 마제들은 황궁의 주인이 된 듯 자연스러웠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이를 데려오려다 사패천주에게 덜미를 잡힌 듯합니다.”
혼현마제가 권마제의 죽음을 알리자, 역천마제가 의아한 듯 호기심을 비췄다.
“그 아이는 사패천주의 아들이 아닌가?”
“사패천주가 여자와 권마제를 모두 죽이고 아이만은 곁에 둔 것을 보면, 사패천주의 친자가 확실한 듯합니다.”
“허어, 그런데도 여자와 아이를 데려오려 했다? 허허허, 태금호가 뒤늦은 망애(亡愛)에 판단력을 잃었구나.”
안타까운 듯한 말투.
하지만 태금호의 사랑을 죽은 사랑, 망애라 칭하는 것을 보면, 역천마제의 말은 조롱처럼 들리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팔현성의 자리가 많이 비었습니다. 대세에 지장은 없을 것이나 필요하여 만든 자리입니다. 계속해서 비워 둘 수 없으니,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혼현마제가 역천마제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반응은 역천마제가 아닌 맞은편에서 먼저 나왔다.
“흥, 웃기는군.”
광마제의 이죽거림에 혼현마제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늘하게 저를 노려보는 혼현마제의 눈길을 마주하며 광마제가 다시금 비웃음을 흘렸다.
“전부 네 계획이 아니었나? 환마제 여시의 역천대법을 미룬 것, 소리마제 문악에게 의뢰를 한 것. 그리고 애송이에 불과한 태금호를 권마제로 삼은 것까지 전부. 네 계획 중에 잘된 것이 없군.”
“내 계획은 귀천성의 완벽한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을 텐데.”
“그러니까. 팔현성이 없는 귀천맹이 완벽할 수 있나?”
“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자리를 채워야 한다 말을 올리고 있지 않나.”
“왜, 처음부터 잘하지 않고?”
광마제가 다른 마제들의 죽음을 혼현마제의 실패로 몰아갔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역천마제의 앞에서 제 잘못이 아니라 변호하는 것이 더 초라해 보일 수 있었기에, 혼현마제는 그저 입을 다물고 광마제를 노려보았다.
그때, 역천마제가 나섰다.
“허어, 이 사람 구훤. 자네를 위해 자활백설옥을 구한 것도 혼현마제일세. 나와 자네를 살린 것이 누구의 공이라 생각하는가. 그쯤 해 두게.”
“그조차 일이 틀어지면서 계획보다 앞서 일어났지. 그러니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지 않겠나.”
역천마제의 중재에 광마제도 한 걸음 물러섰다.
역천마제의 말처럼 광마제를 살린 것도 모두 혼현마제의 안배 덕분이라, 광마제는 이쯤에서 봐준다는 듯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혼현마제는 배은망덕하게 저를 비꼬고 있는 광마제의 행태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역천마제가 사실상 제 편을 들고 있으니, 이쯤에서 얌전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겠다 판단했다.
“팔현성은 천성의 수호성입니다. 각기 어떤 역할을 하는 것보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서 필요한 대로 먼저 자리를 채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슬슬 준비를 마쳐 가니, 팔현성의 자리에도 알맞은 주인을 찾으려 합니다.”
“음, 정의맹의 손에 있는 역천비록은?”
“필요한 것들은 다시 찾아와야지요.”
“……좋다.”
혼현마제를 지긋이 보던 역천마제가 마지막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제 혼현마제는 제 말을 이뤄 내야 할 것이었다.
다만 이제껏 그래 왔던 대로 방법과 수단은 혼현마제가 정할 일이었다.
모처럼의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 길.
광마제가 혼현마제의 뒤에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참 이상하지? 천하의 혼현이 쫓기는 듯 서두르는 것 같으니. 이번 실패에 자네가 서두를 만큼 치명적인 뭔가가 있는 건가?”
움찔.
광마제의 말에 혼현마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혼현마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곧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광룡의 운명은 파도와 같지 않나. 들어온 다음엔 밀려나기 마련이니. 슬슬 중요하신 분의 때가 된 듯하여, 대비를 하려는 것뿐일세.”
권마제 때문이 아니라 네가 위험할 차례인 듯해서 대비를 하는 것이다.
혼현마제는 광마제의 의심을 악담으로 돌려주었다.
그에 광마제의 얼굴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내 차례라……. 그거 기대되는군.”
광마제가 혼현마제의 악담을 비웃음으로 흘리며 지나갔다.
혼현마제는 그런 광마제의 뒷모습을 꽤 오래 노려보고 있었다.
‘인시, 사패천주의 아들이 진짜였다고? 권마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보다, 저 미친 늙은이가 뭔가 냄새를 맡기 전에 서둘러 처리를 해야겠구나.’
돌아가는 즉시.
서거전으로 교성흑오대와 수오가 번갈아 불려 갔다가 바쁘게 황성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