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엿볼 진(診) 불행 화(禍) : 운명의 시작(1)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허허벌판.
풀이 무성한 평탄한 땅 군데군데에 거대한 바위가 박혀 있지 않았다면 남궁세가에서 천주산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비밀 연무장인 줄 알았을 것이었다.
그만큼 기암절벽을 벽으로 두고 입구를 알지 못하면 찾기 힘든 비지였다.
심지어 달빛이 유난히 밝게 비췄다.
주변의 깜깜한 어둠과 달리 깊은 밤에도 어렴풋이 앞이 보일 정도였다.
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을까.
이전 생에선 존재조차 알지 못했으니, 어쩌면 정말로 제왕검이나 직계들만 알고 있던 비지였을지도 몰랐다.
진화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구경했다.
그때 앞서 남궁강이 마침내 자리에 섰다.
“이쯤이면 되었구나.”
공터의 한가운데.
남궁강이 달을 등지고 진화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진화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남궁강의 형체가 달빛을 모두 가릴 만큼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허허허, 녀석아, 벌써 그리 놀라면 어쩌느냐.”
남궁강이 귀엽다는 듯 웃고 있었다.
달빛에 그 표정이 보이는 것을 보면 분명 평소의 남궁강이었지만, 진화는 여전히 한 걸음도 떼지 못할 만큼 남궁강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검을 들거라.”
천 근처럼 떨어지는 무거운 목소리.
현 무림의 천하제일 고수라 불리는 이와 검을 섞을 기회였다.
진화의 속에서 존재했었는지도 몰랐던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진화는 최근에 얻은 깨달음이 제왕검에게 어떻게 비칠지 궁금했다.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진화의 눈에 푸른 번개가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진화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쉐에에엑---!
새파란 검강이 안개를 갈랐다.
하지만 남궁강의 도포 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하나, 나와 다르지 않다.”
남궁강의 목소리가 진화의 머릿속을 때렸다.
휘이이익!
강이 굽이쳐 돌아 나오듯 진화가 몸을 회전하며 곧바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쉐에엑-!
검이 허공을 찌르는 순간, 진화의 왼손이 반대쪽 바람을 쳤다.
퍼-엉!
남궁강의 옷자락이 크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호오, 이번에는 제법이구나.”
마치 어린아이와 놀아 주는 듯 칭찬이 돌아왔다.
‘왜……!’
진화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안계가 넓어졌다.
어둠이며 안개며 아무 장애가 되지 않았다.
진화의 눈에는 남궁강의 숨소리조차 보이는 듯했으니까.
인지력도 달라졌다.
시간이 느려진 듯, 바람보다 빨리 움직이는 남궁강의 움직임도 아무렇지 않게 잡아챌 수 있었다.
분명 오래전 경지를 넘어서고 육체의 한계를 잊은 뒤. 감각의 차원이 달라진 곳에서 새롭게 알게 된 세상이었다.
저는 분명 그 속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최근에 깨달은 자유(自由)를 떠올리며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남궁강의 옷자락 하나 건들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천뢰제왕신공이 울렁이며 진화의 물음에 답했다.
쉐에엑--!
진화의 검이 더 빨라졌다.
‘어떻게?’
진화의 고개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진화의 전신에서 일렁이는 푸른 기운이 그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휘이이이익---!
천뢰제왕검법 낙엽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남궁강의 모든 기운을 쫓았다.
태산같이 굳건한 남궁강의 기운을 향해 성난 검기가 날아들었다.
순한 얼굴 속 어디에 이런 오기가 남아 있었을까.
“허어!”
남궁강이 감탄했다.
하지만 날카롭게 내리꽂히는 진화의 검기가 사방을 때리고 나서 보니, 남궁강의 기운은 여전히 중앙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분노가 솟아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파지지지직--!
진화의 분노에 그의 안에 있던 혼돈기가 응답하며, 진화를 둘러싼 푸른 기운이 사납게 성을 내기 시작했다.
쉐에에엑--!
진화가 뿌리는 검강이 번개로 휩싸였다.
남궁강이 비로소 검을 빼 들었다.
퍼-----엉!
한쪽 절벽이 부서져 내렸다.
그런데 아직도 남궁강의 태산같이 굳건한 기운은 한 자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더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절벽보다 더 높고, 더 단단한 벽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 태산 앞에 진화는 점점 더 분노했다.
‘깨져라! 깨져라!’
진화의 눈이 오직 한 곳을 향했다.
그때 진화의 머릿속에 남궁강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의 의지와 정신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 주변과 하나가 되고, 내공을 통해 네 의지가 퍼져 나간다. 그런데 말이다, 아가. 너의 육신 또한 너의 것이다.
‘알아!’
그래서 더 자유롭게.
사패천주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몸이 움직이는 대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움직였다.
카---앙!
진화의 검이 남궁강의 검을 때렸다.
천뢰제왕검법 필거심뢰가 진화의 걸음과 반대로 움직인 것이 남궁강의 허를 찌른 것이다.
-아직 멀었다. 육신은 뛰어넘을 한계가 아니라 너의 일부다. 너의 뇌전은 그것을 아는데, 너의 검은 어째서 네 손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냐.
‘뇌전……?’
우우웅…….
몸이 떨렸다.
마치 진화의 안에 있던 혼돈기가 응답하듯.
천뢰제왕신공의 내공과 혼돈기가 진화의 단전에서 뭉치고, 깨지고, 퍼져 나가기를 반복했다.
진화의 몸이 푸른 정광과 번뜩이는 번개로 휩싸이고, 진화는 더 이상 남궁강보다 느리지 않았다.
그러자 남궁강의 눈빛이 달라졌다.
-남궁의 모든 검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니. 천뢰제왕검법 또한 다르지 않다.
진화의 움직임을 자신에게 맞춰 끌어 올린 남궁강이 마침내 검을 들었다.
-보아라! 이것이 남궁의 하늘이다-!
쉐에에에엑---!
제왕무적검법 제왕검형 불위(不爲).
남궁의 하늘에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그것이 남궁의 창궁이 그린 자유다.
쉐에에엑---!
달빛을 가르며 날아간 섬광이 절벽을 때렸다.
진화의 눈에 남궁강의 검강과 절벽이 부딪히는 순간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언제…….’
언제 이렇게 안계가 넓어졌을까.
단단한 바위와 흙을 가르고 들어가는 푸른 섬광이 어떤 식으로 절벽을 자르는지.
콰광광------쾅!
무너지는 절벽을 보며 진화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진화의 눈이 절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너의 뇌전은 너의 것이고, 너의 내공, 너의 의지도 너의 것이다. 네 육신 또한 네 것들과 다르지 않다. 너의 우주는 만물과 다르지 않단다. 이것이 남궁이 전하는 천하(天下)다.
콰과광----쾅!!!
하늘로 떠오른 남궁강이 다시 제왕검형을 휘둘렀다.
태산 같은 거대한 기운이 높디높은 절벽과 함께 아래로 내려앉았다.
인간의 우주와 만물의 우주가 결코 다르지 않으니.
그것이 남궁세가가 전하는 평등이고 정의였다.
“…….”
뿌연 안개가 걷히고.
절벽의 한가운데 남궁강이 새긴 청룡이 진화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멈춰 우뚝 선 진화의 몸에서 밤하늘보다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혼돈지체(混沌之體).
진화의 숨겨 둔 힘인 동시에 가혹한 운명의 시발점.
하지만 결국 진화가 극복해야 할 한계(限界)도, 우주 만물과 다른 이상(異常)도 아니었다.
달을 향해 번뜩이며 뿜어지던 검은 기운이 점차 달빛보다 시린 푸른색으로 변해 갔다.
청명하고 푸르른, 남궁세가가 그리던 창공이 어둠 속에서 퍼져 나갔다.
“……이런!”
심상에 들어간 진화를 보며 남궁강이 낭패한 듯 탄성을 뱉었다.
그때, 누군가 급하게 남궁강의 곁으로 뛰어내렸다.
“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내, 내가 하긴 무슨 짓을 해? 진짜 무슨 짓은 지금 저 녀석이 하고 있지!”
남궁호명의 말에 남궁강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본래 저랬는가?”
“그러게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했지요? 남의 제자를 왜 굳이 건드려서…… 쯧. 호법 서실 것 아니면 비켜요!”
남궁호명이 귀찮다는 듯 남궁강을 밀쳤다.
남궁강은 억울한 듯 남궁호명을 노려보았으나, 밤새 어린 손자의 호법을 설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스스스스스스----슷.
천주산 자락의 바람이 세차게 움직였다.
* * *
서거전.
혼현마제의 거처에 의외의 인물이 들었다.
호리호리한 체격, 검은 가면을 쓰고 사슬이 달린 송곳 같은 단창을 손에 쥔, 광룡귀면대 임시 대주로 있는 효서였다.
혼현마제와 광마제는 심심치 않게 부딪히는 터라 황궁의 궁인들조차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광마제의 대표적인 수족이라 할 수 있는 효서가 혼현마제의 거처를 찾자, 아닌 척 사람들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스윽.
혼현마제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효서의 앞을 팔 하나가 가로막았다.
효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야?”
자갈을 긁는 듯 거친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나왔다.
하지만 효서의 앞을 가로막은 교성흑오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기는 두고 가야 한다.
“하! 별 같잖은 소리를 들어 보는군.”
-두고 가라.
“한번 뺏어 보지그래?”
효서가 마룡아를 교성흑오대원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교성흑오대원의 검도 어느새 효서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가면을 쓴 효서의 눈과 복면 속 교성흑오대원의 눈이 날카롭게 엉켰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그만 빌미라도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먼저 급소를 노릴 기세였다.
그때, 안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그들을 멈췄다.
“그만하고 들여보내거라.”
혼현마제의 목소리에 교성흑오대원이 검을 거두었다.
“흥.”
망설임 없이 검을 거두는 교성흑오대원을 향해 효서가 코웃음을 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가면 안에서 교성흑오대원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교성흑오대원은 안으로 들어가는 효서를 덤덤하게 보고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효서가 담담하게 고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솨아아아아--.
“흣!”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효서는 서늘한 기운이 제 목을 감싸는가 싶더니 곧바로 목이 졸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진짜 목이 졸리고 있었다.
“으읏.”
효서가 놀란 눈으로 앞을 보자 혼현마제가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효서의 눈엔 거대한 붉은 뱀이 보였다.
똬리를 튼 뱀이 저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데, 저는 얼어붙은 생쥐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제 고분고분하구나.”
혼현마제는 효서의 굴복을 금방 알아보고 목을 감고 있던 기운을 풀어 주었다.
풀려난 효서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쓸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혼현마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광마제의 수하치고는 성질머리가 남았구나.”
“……!”
칭찬일 리 없었다.
아직 세뇌가 끝나지 않았다.
혹시 제 충성심을 의심받은 것일까.
효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혼현마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효서의 눈동자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툭.
혼현마제가 효서의 앞으로 뭔가를 던져 주었다.
“정의맹 적호단이 움직일 경로다. 남궁금영을 죽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광마제와 이야기가 된 일이니, 교성흑오대와 함께 사패천에서 보낸 역천비록을 가져오거라.”
“…….”
혼현마제의 명을 들으며 효서가 앞에 높인 목책을 들었다.
“안내는 교성흑오대가 맡을 것이다. 광마제가 자랑하는 광룡귀면대의 실력을 기대하지.”
“…….”
협박같이 들린다면 착각일까.
‘광룡귀면대의 실력을 기대한다고?’
효서가 가면 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효서가 광마제에게 받은 명령은 혼현마제의 것과 달랐다.
어느 쪽을 따를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실컷 기대해 보라지. 돌아와서 소식을 전해 줄 교성흑오대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효서가 독기를 감추며 혼현마제를 향해 인사한 뒤 조용히 그의 집무실을 나갔다.
효서가 집무실을 나가고, 집무실 한쪽에서 수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준비는 마쳤느냐?”
“예. 그런데 광룡귀면대를 이용할 생각이십니까?”
수오가 효서가 나간 문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혼현마제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저 남궁이라 하니 좋다고 나서더군. 미친 늙은이!”
싸늘한 비웃음이 누구를 향하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둘의 관계가 어떠한지 말해 뭐하겠는가.
수오는 오히려 스승인 혼현마제가 광마제의 부활을 돕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애증인가? 아니면 누누이 말씀하시던 대업에 광마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건가?’
팔현성의 자리를 채울 거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었지만 거기에 수오의 자리는 없었다.
일전에 보았던 짐승 같은 그것조차 환마제가 될 거라는데 말이다.
수오의 눈이 혼현마제를 향했다.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하는 눈빛.
그때, 혼현마제가 수오의 앞에 작은 병을 내놓았다.
“응? 이게 무엇입니까?”
순식간에 눈빛을 달리한 수오가 궁금한 듯 물었다.
혼현마제는 쉽게 답을 알려 주었다.
“독이다.”
“독요?”
“한 방울만으로도 무림 고수를 산송장으로 만들 수 있는 극독이다. 먹이든, 뿌리든, 묻히든 방법은 상관없다. 다만 너 또한 이걸 만지거나 냄새를 맡아선 안 되겠지.”
“와, 조심해야겠네요.”
수오가 질린다는 듯 독이 담긴 병을 보았다.
말과는 달리, 수오는 처음 본 장난감을 살피는 아이처럼 독이 든 병을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누구에게 쓰면 되나요?”
“아이를 죽이거라.”
“……네?”
“남궁금영과 사패천주의 아이를 데려와 권마제로 삼을 수는 없으니, 그들을 전부 죽여 새 제물을 찾을 것이다.”
“그렇군요. 아, 그런데 스승님. 사패천주의 아이는 생시가 다른데요? 그 아이는 인시(寅時)인데……?”
수오가 말끝을 흐렸다.
혼현마제가 온기 하나 없는 차디찬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만에 하나,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없애려는 것이다. 차질 없이 처리하고 돌아오거라.”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강요하는 눈빛에 수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혼현마제의 덤덤한 말투는 차디찬 눈빛과 함께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라, 조용히 서거전을 나오면서도 수오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인시인데…… 만에 하나라고?”
수오의 손에는 한 방울이면 어떤 무림 고수마저 산송장으로 만든다는 극독이 쥐여 있었다.
한참 독병을 보고 있던 수오가 서거전을 돌아보았다.
‘고작 만에 하나를 없애려고 이런 극독을 쥐여 준다고?’
돌아서는 수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