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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48)화 (248/425)

남궁마제

엿볼 진(診) 불행 화(禍) : 운명의 시작(3)

한수림이 쓰러졌다.

하녀의 비명이 울리자마자 활짝 열려 있던 사패천의 문이 닫혔다.

뿌우우우우----.

뿔나팔 소리에 사패천 무인들이 사랑탑에 들었다.

권마제 태금호의 일이 있고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다.

사패천은 태금호의 일을 내부 배신으로 처리했고, 지금의 축제 분위기는 배신자들로부터 완전히 승리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게다가 사패천은 한수림을 자유롭게 두면서 알게 모르게 남아 있는 태금호 세력을 축출하는 데에 써먹고 있었다.

소천주 강무련 입장에선 한수림의 편에 서서 미래의 경쟁자가 되도록 만드는 이들을 사전에 처리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 누구도, 누군가 한수림이 목숨을 직접 노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사패천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타-앙!

“독에 대해선 알아보았더냐?”

“그것이…….”

사패천주의 물음에 의원이 우물쭈물했다.

척 보면 알지 않는가.

알지만 말을 못 하는 것과 아예 알지도 못하는 것.

의원의 모습은 명백하게 후자였다.

그것이 사패천주의 부아를 돋웠다.

“태어나자마자 소혈환을 먹였다. 만독불침은 몰라도 천독불침 정도는 되는 몸을 가졌단 말이다! 게다가 고 잔망스러운 녀석이 아무나 주는 것을 먹었을 리도 없고, 몸에 상처도 없다 하지 않았더냐! 그럼 독은 어찌 침투했다는 거냐!”

노성을 터뜨리는 사패천주의 앞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이 많은 사파 무인들이 소공자 하나 지켜 내지 못했다는 데에서부터, 누구 하나 입을 열 면목이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소천주 강무련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검은 실타래처럼 누군가의 머리채가 잡혀 있었다.

강무련은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왔던 사람을 사패천주의 앞에 던졌다.

“아-악! 제, 제발……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저, 저년은!”

모두가 사패천주를 향해 손바닥을 비비는 여인을 알아보았다.

바로 한수림의 전담 하녀였다.

“인근 화공이란 화공은 모두 불러서, 그곳에 있었던 무인들의 기억에 낯선 자가 있다면 모두 그리라 했습니다. 남은 건 이년뿐입니다.”

강무련이 조용히 말했다.

사실 일이 터졌을 때 하녀에 대해 떠올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한수림에게 엄마나 다름이 없는 여인이라 선뜻 건드리려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강무련이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하녀를 끌고 오자 몇몇 이들은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처, 천주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무공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저 싸움을 구경하던 공자님이 제 품에 안기기에, 어린 공자가 보기에 무서우셨나 보다 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공자님이 대답이 없어서……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아니, 공자님이 깨어나는 것만 보고 죽여 주십시오!”

절절한 목소리.

눈물을 흘리며 빌고 비는 하녀는 오직 한수림에 대한 걱정만으로 가득 찬 사람 같았다.

“하긴 무공도 모르는 사람이 몰래 접근하는 암살자를 어떻게 알았겠어.”

“애초에 소천주가 소공자를 지나치게 경계해서 무공도 모르는 여자를 붙여 준 것이 문제였던 거야.”

“소공자가 죽으면 소천주 세상이겠군.”

조심성 없이 들리는 목소리들이 모두의 귀에 들렸다.

여기 있는 누구나 기존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반골들이었으니, 소천주 강무련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이 그를 탓하거나 의심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강무련도 그들이 하는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년을 데려가 조사해 보아야겠습니다.”

“귓구멍이 열렸으니 너도 들었겠지. 네가 붙여 준 년인데 의심하는 것이냐?” 

사패천주의 물음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불화인가.

사패천주도 강무련을 의심하는 걸까.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조용해진 이들도 있었고, 다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패천주를 보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긴장하고 지켜보는 속에, 강무련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전 무공은 못해도 특별히 눈썰미 좋은 년을 알아보고 붙였습니다. 지나치는 사람을 스무 명도 넘게 기억하던 년이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니.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사패천주가 조용히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하녀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사패천주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탑주, 데려가서 죽이든 살리든 머릿속에 있는 걸 모두 꺼내 와라. 이년의 사돈에 팔촌까지 데려와서 외부와 접촉한 자가 있는지 알아보고.”

“헉! 처, 천주님!”

사패천주의 명이 있고 사랑탑주가 나서기도 전에, 놀란 하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저는 아닙니다! 정말로 기억나는 이들은 다 말을 했습니다! 공자님, 공자님께는 제가 있어야 해요! 제발, 제발 부탁합니다!”

하녀가 실성한 사람처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강무련은 덤덤하게 사패천주를 보았다.

“제 실수인 듯합니다, 감히 이년이 수림이를 방패 삼아 목숨을 연명하려는 것을 보면. ”

강무련의 말이 있자마자 하녀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강무련이 그런 하녀를 죽일 듯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수림이가 싸움 구경을 하다가 겁을 먹어? 돼먹지 못한 변명이 네년의 명을 재촉했구나.”

“아…….”

차라리 실성한 사람처럼 빌고 빌었다면, 무공도 모르는 여자가 겁에 질렸구나 했을 텐데.

제 실수를 깨닫고 당황한 듯 눈알을 굴리는 하녀의 모습에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때, 한쪽에 있던 사랑탑주가 나섰다.

“허허, 소공자를 위해 한발 나설 수 있어 다행이군요.”

“아아!”

입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으나 눈은 사납게 하녀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과 마주한 하녀의 얼굴이 이제서야 독에 당한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사랑탑의 질서를 관리하는 사랑탑주의 악명을 모르는 사파인이 있을까.

그는 단지 사패천주를 보필하며 사랑탑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아니었다.

전각사(典刻士) 마모섬.

사패천주 한구혈이 사파를 통일하기 이전 사파에 질서를 만들 뻔했던 사람인 동시에 현 사패천의 질서를 만들어 낸 사람.

질서를 거부하는 사파인들에게 질서를 새겼다는 말은 단지 그들을 힘으로 굴복시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마모섬은 천둥벌거숭이같이 날뛰는 적들의 살을 도려내고 하얀 뼈에 글자를 새긴 광인(狂人)이었다.

“가지.”

사랑탑주가 하녀의 머리채를 쥐고 끌고 나갔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강무련은 한쪽에 몸을 웅크린 의원을 보았다.

그리고 굳은 결심을 한 듯 사패천주를 보았다.

“사패천 의원들이 수림이의 독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천하제일 의원에게 수림이를 맡겨야지요.”

“……의선을 말하는 것이냐?”

“그자라면 최소한 수림이를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사이에 누구 짓인지 밝히든, 해약을 찾든, 뭐든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패천주가 강무련을 보았다.

“죽든 살든, 이제 끝을 봐야지 않겠습니까.”

제 사형제들에게 결사 대전을 청하기 전에도 저렇게 다부진 눈을 했었다.

사파인답지 않게 곧고, 반드시 제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고집스러운 눈빛.

사패천주는 이번에도 강무련을 믿어 보기로 했다.

“낯이 익은 독이다. 내 생각이 맞다면, 네 말대로 의선은 최소한 수림이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네가 직접 수림이를 데려가라. 그리고 대가는…….”

툭.

사패천주가 탁자 아래에 넣어둔 책자를 강무련에게 던져 주었다.

“또 다른 역천비록이다. 혼현마제의 것이지.”

사패천주의 말에 강무련이 눈을 크게 떴다.

“혼현마제, 그놈이 쓴 독에 천수현인이 아직 누워 있다. 의선이 지금까지 그자의 명을 붙여 놓았지.”

“……!”

설마 한수림이 당한 독이 천수현인 제갈길현을 쓰러뜨린 독이란 말인가!

사패천 무인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사패천주를 보았다.

독도 독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사패천주가 한수림이 당한 독을 알아보고 이 모든 것을 추측하고도 이제까지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패천 무인들의 머릿속에 그 옛날 사파를 통일하던 낭아왕의 공포가 떠올랐다.

“초산하.”

“예, 천주님.”

사패천주의 부름에 어두운 곳에 서 있던 이가 앞으로 나섰다.

여인처럼 분을 칠한 하얀 얼굴에 인주를 바른 붉은 입술. 붉디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노인.

신양 초가의 가주이자 사패천주의 밀사라 불리는, 홍랑대부 초산하였다.

그의 또 다른 별호는 살인술사(殺人術士).

진법, 진식, 천문과 역술 등 술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패천 제일의 술법사였다.

“귀천성 놈들이 감히 내 새끼를 노렸어! 찾아라! 의선과 손을 잡든 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들의 혼까지 씹어 먹을 방법을 찾아!”

“존명.”

사패천주가 마침내 누르고 있던 분노를 터뜨렸다.

“그 하녀 년이 언제부터 귀천성 놈들과 연통하고 있었는지 찾아내. 사패천 안에 있을지 모를 첩자들도 모조리 찾아라!”

“존명!”

“혼현마제 놈이 괜히 움직였을 리 없고, 기어이 역천마제 늙은이가 힘을 찾은 모양이군. 쓰불, 전쟁이다--! 이번에야말로 귀천성 쓰레기들을 모조리 씹어 먹을 것이다-!”

사패천주의 분노가 사랑탑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잠들어 있던 늑대가 피 냄새를 쫓기 시작했으니, 평화롭던 사파 무림에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무림 한편에서 피 냄새를 쫓는 늑대들이 준동할 때.

그 아래에 있는 남궁세가는 마치 다른 세상인 듯 조용했다.

“진화야! 아이고, 내 새끼!”

제왕무적단주 남궁경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진화를 끌어안았다.

“몸은, 몸은 괜찮아? 아이고, 밥도 못 먹고 수척한 것 좀 봐라.”

“미친, 수척하긴 무슨! 온 천주산 정기란 정기는 죄다 빨아먹고 얼굴 반지르르하구먼.”

남궁경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남궁호명이 입을 삐죽거렸다.

나흘 동안 진화의 호법을 선 것도 모자라서 진화가 죽인 수십 명의 교성흑오대의 시체를 수습하기까지 했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궁호명은 남궁경에게 투덜거릴 자격이 있었다.

그때, 천화정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망나니 놈아!”

다짜고짜 천화정을 뛰어 들어온 사람은 대뜸 남궁경의 멱살부터 쥐었다.

“가, 가주?”

남궁호명이 놀란 나머지 가주 남궁성의 얼굴을 확인했다.

제왕검의 망나니 피가 남궁경에게 몰빵 되며, 그나마 근엄한 가주 소리를 듣는 남궁성이 아니던가. 게다가 똘똘 뭉쳐 제왕검이 없는 남궁세가를 지켜 낸 남궁성과 남궁경은 우애롭기로 유명한 형제였다.

그런데 남궁성이 체면 불고하고 천화정을 질주해 들어와 동생의 멱살을 쥐다니.

덕진 할매마저도 호통을 치려다 놀란 얼굴로 보고만 있었다.

“아, 혀, 형님, 보는 눈도 있는데, 왜 그러시오?”

“보는 눈? 보는 눈이라고 했냐, 이 망할 놈아?”

남궁경의 말에 남궁가주가 더 흥분했다.

“이런 망할 소 새끼! 곰 새끼! 어느 숙부 새끼가 연약한 조카의 척추를 꺾어 놓더냐! 의원이 조금만 잘못했으면 저세상 갈 뻔했다잖아!”

“처, 척추를 뭐?”

남궁가주의 호통에 남궁호명마저 경악한 얼굴로 남궁경을 보았다.

남궁경이 억울하다는 듯 버럭 했다.

“아, 의원이 괜히 설레발친 거지. 그리고 그 들소 같은 것이 연약하긴 뭐가 연약해! 연약한 것이 제 숙부 모가지를 비틀 뻔하나? 말만 한 기집애가 힘은 싸움소 저리 가라니.”

“뭐야? 네가 그러고도 잘했다는 거냐?”

“나도 다칠까 봐 들이받은 거지. 팔다리 부러뜨리는 걸로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으니 별수 있소? 대체 어떻게 키우면 숙부랑 대련하면서 사생결단을 내려 달려드는 것이오?”

“뭐야? 내가 키웠냐? 다 네놈이 키웠잖아!”

진화가 나흘 동안 심상에 든 동안, 남궁경과 남궁진혜도 사흘 동안 대련을 이어 갔다.

그러나 그 피 터지는 대련 속에서 남궁진혜가 얻은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허리가 접히는 부상이었으니.

무인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본래 지척에 닿은 듯싶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얻고 싶다 다 얻을 수 있다면 누가 고수라 불리겠는가.

‘저게 정상인데…… 아니, 저게 정상인가?’

남궁호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보다 못한 진화가 남궁가주를 말렸다.

“백부님, 누님은 괜찮으십니까?”

진화는 남궁경의 손에 쓰러진 남궁진혜의 소식이 궁금한 눈치였다.

잔뜩 걱정을 담은 진화의 얼굴을 발견하고, 남궁가주가 반색하며 진화를 끌어안고 얼굴을 쓸었다.

“오오! 진화야, 여기 있었구나! 아니고, 예쁜 내 새끼!”

“내 새끼야!”

“장한 새끼! 예쁜 새끼!”

제왕검과 남궁호명에게 진화가 또다시 심상에 들었음을 들었던 남궁가주는 진화에게 어떤 진척이 있었냐 묻기도 전에 그를 칭찬하기 바빴다.

“저, 저기 백부님, 누님은……?”

“암암, 들소 같은 몸뚱어리가 허리 좀 접혔다고 끄떡할까. 네 큰엄마는 고 녀석이 당분간 힘도 못 쓴다고 좋아하더라.”

다행히 남궁진혜는 크게 다치지 않은 듯했다.

아니, 허리가 꺾였는데 크게 안 다칠 수가 있던가.

진화는 눈이 번쩍 뜨였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남궁가주의 말이라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으흡! 누굴 닮아 이렇게 착하기까지! 아이고, 내 새끼!”

“내 새끼라니까!”

다 큰 사내 녀석을 끌어안고 유별을 떠는 남궁가주와 남궁경을 보며 남궁호명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약관도 넘지 않아 두 번의 깨달음이라니.

남궁호명조차 보는 눈이 없다면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고, 우리 진화, 아빠 등에 업힐래?”

“이 큰아빠의 등이 더 편하지 않겠느냐? 큰아빠랑 진혜 누님 보러 갈까?”

“…….”

진화의 앞에 다투듯이 등을 내미는 형제를 보며, 남궁호명은 남궁세가에 저라도 체면과 명예를 차릴 줄 알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

고요하고 평화로운 남궁세가의 한편에 횃불이 밝혀졌다.

밖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는 깊은 동굴.

불이 밝혀진 곳은 남궁세가의 죄인을 가둬 두는 갱옥(坑獄)이었다.

남궁가주와 남궁경이 갱옥을 걸어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어떤 곳에 들어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장로님.”

남궁가주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쉬고 있던 인영이 몸을 일으키며 인기척을 냈다.

“허허, 벌써 오셨소?”

팟-!

순식간에 어두운 공간이 환하게 밝혀졌다.

딱 남궁경의 허리에 올 정도의 키에 꼽추처럼 굽은 등을 제외하면 특이할 것 없는 연약한 노인. 이전 갱옥의 주인이자, 남궁문 이후 다시 갱옥을 맡게 된 천금수 명현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현보는 친절하게 웃으며 횃불을 들고 한쪽을 가리켰다.

“이번 놈들은 제법 급한 일인가 봅니다.”

화르르르-.

바람을 따라 횃불이 움직이고, 그 빛을 따라 땅에 솟아 있는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덩이 속에 목만 내놓은 수십 구의 시체들.

그중 몇몇은 하얀 백골이 되어 있었고, 몇몇은 썩어 가며 살점이 떨어졌다.

그리고 명현보가 가리킨 곳엔 다른 것에 비해 제법 멀쩡한 이들의 목이 십여 개 있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이 너무 생생하게 남아서, 창백하게 식은 낯빛이 아니었다면 살아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알아내셨습니까?”

“허허허허, 우리 예쁜 공자가 몇 놈은 싱싱하게 살려 주셔서 제법 알아낸 것이 많습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시체들의 표정을 보며 명현보가 껄껄 웃어 보였다.

“우리 예쁜 소공자 가시는 길에 파리 떼가 꼬였더군요.”

명현보의 말에 남궁가주와 남궁경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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