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엿볼 진(診) 불행 화(禍) : 운명의 시작(5)
적호단이 남궁세가를 떠났다.
귀천성의 습격이 예견된 여정.
적호단원들의 표정이 전투에 나서는 것처럼 불안하고 비장했다.
남궁세가는 대대적인 환송식을 준비했다.
최대한 밝은 분위기로 적호단을 배웅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에 올 때는 셋이 와도 괜찮단다.”
“응? 무슨 말이야?”
가모 하후민의 은밀한 당부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
남궁진혜는 가모 하후민의 의도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자리로 가 버렸다.
“눈치라곤 자빠져서 코 닿을 데 있어도 못 찾을 년.”
“형님.”
답답한 마음, 서운한 마음, 걱정스러운 마음이 농담 섞인 거친 말로 대신해 나왔다.
옆에서 팽연화가 가모 하후민을 위로했다.
하지만 자식을 떠나보내기는 팽연화도 마찬가지였다.
팽연화가 애틋한 시선으로 제왕검 앞에 선 진화를 보았다.
제왕검이 다정하게 진화를 불렀다.
“아가.”
한 줌도 안 될 듯 작고 마른 몸을 끌어안고 구해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 아이는 약관을 바라보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제왕검의 눈에 진화는 여전히 그때 그 위태로운 아이 같았다.
한제국의 적통 황자가 되었어도, 무림에 내로라하는 고수가 되었어도, 아이의 어둠이 깊은 눈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겨야 한다. 이 제왕검의 손자가 어디서 맞고 다니는 건 아니지. 귀천성, 그 양아치 좀도둑들에게는, 특히! 아무것도 빼앗겨선 안 된다.”
“하하, 예.”
제왕검의 그다운 기운찬 당부에 진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맑게 웃는 그 모습을 보며 제왕검이 진화를 끌어안았다.
‘지금은 그리 웃을 줄 아는 것으로 되었다.’
“이 할아비는 네가 자랑스럽다.”
“…….”
제왕검의 말에 진화는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겨우 참아 냈다.
꾸-욱.
제왕검이 진화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힘주어 버티거라. 강한 힘에 따르는 책임. 네가 지켜야 할 것에는 네 목숨도 있는 것이다. 그걸 명심하거라.”
“예, 할아버님.”
“그래. 부탁하마.”
제왕검이 진화의 어깨를 토닥이고 물러났다.
벌써 몇 번 있었던 이별이건만 이번이 특별히 다른 것은 적호단을 노리는 적들이 있을 거라는 정보 때문일까.
어쨌든 진화는 이전 생을 거쳐 지금까지 남궁을 지키면서도 ‘부탁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기에, 집을 떠나는 내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서일까.
“공자님, 빨리 돌아오세요!”
“아가씨-, 힘내세요!”
소천로를 지나는 동안 들려오는 사람들의 응원이 다른 때보다 특별하게 느껴졌다.
“남궁세가는 좋은 곳이더군.”
“제대로 지켜진 곳은 어떠한지 덕분에 실감하게 되었다.”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관도생들도 남궁세가에서 잘 지냈는지 한마디씩 건넸다.
아름다운 산천, 밝게 웃는 사람들, 때가 되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 냄새.
그들이 중원을 지켜야 할 이유였다.
잠시지만 평화를 맛본 이들은 이제 곧 다가올 전쟁에 앞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결국 어머님, 아버님은 뵙지 못했군. 열일곱 번째 혼인의향서를 직접 전해 드릴 작정이었건만, 눈 마주칠 새 없이 바쁜 분들이었다.”
“너 때문에 바빠지신 거겠지, 도망 다니시느라!”
나하연의 아쉬운 소리에 당혜군이 그녀를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적호단과 함께 관도생들도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소리였다.
떠나는 적호단의 뒷모습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가모 하후민과 팽연화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자리를 지켰다.
다만 제왕검과 남궁가주, 남궁경은 일찌감치 천명관으로 들어왔다.
그들까지 남아 있게 된다면 자칫 환송식이 특별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왕검의 행동이 평소와 달라지면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손자, 손녀를 배웅하는 것 하나도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후우, 역시 무단을 보내는 것이 좋게 않겠습니까?”
“사패천에서 홍랑대와 교룡대가 함께 움직였다는데, 우리 쪽에서 적호단 외에 따로 무단을 움직인다면 주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하지만 귀천성 놈들이…….”
“따로 무단을 뺄 여력도 없지 않으냐.”
제왕검의 날카로운 반문에 남궁가주와 남궁경도 입을 다물었다.
“남해검문 쪽 일은 어떻게 되었더냐?”
“창궁무애단이 움직이긴 했지만, 내일 제가 합류할 생각입니다.”
제왕검의 물음에 남궁경이 답했다.
귀천성 세력의 대대적인 공격.
차츰 정리될 줄 알았던 귀천성 세력들이 다시 거세게 반격해 오기 시작했다.
남해검문으로는 현재 주작단과 창궁무애단이 나가 있었는데, 곧바로 남궁경이 제왕무적단을 끌고 갈 생각이었다.
남해검문이 뚫린다면 곧바로 귀천성 세력과 양주가 맞닿게 되기 때문이다.
전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거보아라, 세가도 여력이 없지 않으냐.”
“경이가 움직인다고 해도 남은 제왕무적단이나 천풍대연단이…….”
“그럼 양주는 누가 지키고? 흐흐흐, 싸워 이기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힘들다는 말이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일컫는 것이지.”
제왕검이 곤란한 얼굴의 형제를 향해 얄밉게 웃었다.
하지만 곧 결연하게 말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양주 땅을 지켜야 한다. 그게 나와 남궁결사대가 밖으로 나가 싸운 이유였다.”
남궁가주와 남궁경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당시 가문을 이끌기엔 어렸던 남궁가주와 남궁경 형제가 죽자 살자 양주를 지켜 냈다.
하지만 그조차도 가문을 지킬 세력을 남기고 제왕검과 남궁결사대가 밖으로 나가 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의맹에 도착하고 나면 아이들도 알게 되겠지. 적호단도 곧 어디론가 갈 수도 있고. 전쟁에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너희가 그러했듯, 저 아이들의 몫은 저들이 해내야 한다. 알지 않느냐? 전쟁에서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
귀천성에 한번 패배하는 순간 다시 일어설 기회 따윈 없었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지만, 제왕검의 말처럼 누구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스스로 이겨 내는 수밖에 없었다.
남궁가주와 남궁경은 그저 역천비록을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진화와 진혜, 정도 무림의 젊은 무인들이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랐다.
* * *
달소항에서 배를 타고 남양에 들었다.
이후엔 협곡 사이로 놓인 인적 없는 길을 따라 남양관까지 가야 했다.
“주변 경계를 늦추지 마라!”
“충!”
적호단주의 명에 적호단원들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장한 모습으로 흩어졌다.
진화를 비롯한 관도생들도 날카로운 기세로 주변을 경계했다.
짐을 실은 수레 하나.
남궁세가에서 말과 마차를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적호단주는 앞으로 있을 전투를 위해 단호하게 거절했다.
말과 마차는 편리한 수단일 뿐, 언제 적들의 기습이 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말 울음이나 발굽 소리, 마차의 육중한 크기는 방해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협곡에 들어서부터는 바깥 경계를 서는 대원들 모두 검을 빼 들고 있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속에 협곡 사이를 통과하고 얼마 후.
검은 기와가 덮인 남양관문이 보였다.
“저기!”
“……잠깐.”
누군가 소리를 치기 전 적호단주가 그를 말렸다.
뒤에 서서 일행을 따라오던 진화가 앞으로 나섰다.
적호단주는 진화의 전음을 받고 대원을 멈춘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피 냄새가 짙습니다. 관문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요. 제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맡기지.”
적호단주는 정확한 무위는 알 수 없지만 진화가 경지를 넘었다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었기에, 진화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화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관문을 넘어 도망쳐 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럼.”
탓.
땅을 딛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진화의 신형이 사라졌다.
바람 속을 헤치듯, 아니 바람을 딛고 넘는 것처럼 공중을 뛰어오르며 진화가 순식간에 관문을 넘었다.
성벽을 오르자마자 순식간에 짙어진 혈향이 진화의 코를 찔렀다.
성벽이 혈향마저 막고 있었던 듯했다.
챙--! 챙-!
“막아라-!”
누군가의 외침.
진화는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탓.
천뢰제왕신공이 아닌 바람을 타고 넘는 천풍보법(天風步法).
진화는 이제 남궁세가의 다른 무공을 익히고 쓰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기(氣)에 다름이 없듯, 기를 다루는 무공에도 구별이 없는 경지에 든 것이다.
‘음?’
곧 죽을 듯 비틀거리는 무인들을 공격하는 흑의 무인들.
그들의 어깨에 거꾸로 그려진 천(天) 자가 새겨져 있었다.
‘귀천성!’
쉐에에에엑----!
진화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뿌려졌다.
“으아악!”
“아악!”
진화의 검기에 앞에 있는 무인들을 공격하던 귀천성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살아남은 이들이 갑작스러운 공격의 출처를 찾아 진화를 보았지만, 진화는 이미 그들의 코앞에 있었다.
쉐에에엑-! 쉐엑!
구름 사이로 천둥 번개가 번쩍이듯.
진화가 줄지어 서 있는 귀천성 무사들 사이를 번개처럼 지나며 그들의 목과 가슴, 치명적인 급소를 베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진화의 검이 마지막에 선 귀천성 무인의 목을 꿰뚫으려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독이오!”
목소리와 함께 급해진 귀천성 무인의 눈빛.
귀천성 무인이 다급하게 진화의 검을 향해 뛰어들었다.
툭.
첫 번째 피부를 꿰뚫는 느낌과 함께 뼈가 걸리는 느낌.
그리고 투욱-, 반대쪽 피부를 꿰뚫는 느낌.
그런데 그 사이에서 팟-! 하고 뭔가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죽어 가는 귀천성 무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파지지지짓----!
“크어……!”
제대로 비명도 내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귀천성 무인이 온몸을 떨었다.
하얗게 나오려던 독연은 회색빛 재가 되어 피에 젖어 들어갔다.
진화의 눈동자에 검은빛이 번뜩였다.
쉐에에에엑----!
천뢰제왕검법 무수전뢰가 공기를 뚫고 나가며 보이지 않게 퍼져 있던 독연을 모조리 태웠다.
파파파파파팟-!
귀천성 무인들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진화와 그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과 극도의 경계심이 흘렀다.
그 틈에 온몸을 검은 피로 물들인 강무련이 진화에게 다가왔다.
“후. ……오랜만인데, 꼴이 말이 아니군.”
검은 피는 강무련의 옷 외에 입가에도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진화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강무련에게 던졌다.
“잠시 동안 독기를 막아 줄 것입니다.”
진화의 말에 강무련이 두말하지 않고 환약을 씹어 삼켰다.
“우릴 기다리지도 않았군요.”
진화가 귀천성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진화가 죽인 이들의 자리는 어느새 다른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역천비록은 그쪽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단 한 번, 사랑탑에서 단 한 번 혼현마제의 비록이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되었더군.”
강무련이 피로 물든 이를 빠드득 갈았다.
눈빛은 진득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만일 배신자들이 눈앞에 있었다면 산 채로 씹어 먹고도 남았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애석하게도 사패천 무인들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진화가 오기 전에 독에 당한 모양이었다.
그때.
“어-이! 괜찮나!”
멀리서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을 보고 적호단이 성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강무련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군.”
강무련의 농담 속엔 안도감과 함께 복수심이 끓고 있었다.
“이 약, 정말 독기가 멈추나?”
“예. ……아마도.”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강무련이 귀천성 무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진화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해신단이라면 분명 효과가 확실했다.
이번 생에 청룡단을 통해서도 효과를 확인했지만, 진화도 이전 생에 먹어 본 적이 있었다.
독이 몸에 침투하는 것은 막아 줄 것이다.
차분하게 대주천을 한다면 독기를 밀어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차분하게 대주천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진화는 한참 분풀이를 하듯 우각살호권을 휘두르는 강무련을 보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좀 아픈 거야 생명엔 지장이 없으니까.’
사패천의 남은 인물들도 적호단이 내놓은 해신단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남은 것은 잔뜩 벼르고 있던 적호단의 활약뿐이었다.
멀리서 번쩍번쩍 번개가 내리치는 빛을 본 것은 적호단만이 아니었다.
“흐응? 정파에도 꽤 재밌는 걸 하는 사람이 있나 보네.”
가마의 창문이 열리고, 주렴 사이로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길고 뾰족한 손가락 장신구가 주렴을 치웠다.
“적호단이로구나. 저들도 역천비록을 들고 있다지?”
여인의 물음에 가마를 지키던 귀천성 무인이 다가갔다.
“예. 어찌할까요? 다시 움직일까요?”
“흠……. 아니, 내버려 둬. 가가에게 필요한 건 아니니까. 가가가 원한 건 가가의 역천비록과 내 독.”
여인의 품에는 이미 낡은 죽간이 든 상자가 있었다.
한수림을 죽이진 못했지만 사패천이 운반하던 역천비록은 이미 손에 넣은 것이다.
“내 독을 썼다면 저 작은 아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잘난 의선도 수십 년 동안 내 독은 해독하지 못했으니까. 가엽기도 하지. 호호호호.”
여인의 말과 웃음소리.
과장되게 ‘가엽다’ 말하는 말투와 가볍기 그지없는 웃음소리는, 어린아이의 악의 없는 놀림처럼 무의미하게 들렸다.
“정파 애들이 뭔가 재밌는 걸 가진 모양이지만…… 으음, 가가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그보다 늦었으니 슬슬 출발하자꾸나.”
“존명.”
마찬가지로, 흥미가 식은 여인은 금세 창문을 닫고 가마를 출발시켰다.
* * *
상황에 여유가 생기자 진화는 한수림부터 찾았다.
한수림은 사패천 무인들이 지키는 건물의 안쪽, 관문 병사들의 숙소였던 곳에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누운 아이의 곁에는 홍랑대부 초산하가 있었다.
“한수림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진화가 걱정스레 묻자 초산하가 빙그레 웃었다.
“독이 이곳까지 오진 못했습니다.”
초산하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보자, 그들의 주변으로 부적과 향이 타고 있었다.
지금까진 그것들이 독연을 막고 있었던 듯했다.
“역천비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타깝지만 혼현마제의 비록은 빼앗겼습니다.”
초산하가 과장되게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그게 가짜란 걸 알 때까진 시간을 벌었군요.”
진화의 말에 초산하가 말없이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