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움직일 진(進) 죄 화(禍) : 운명의 중첩(3)
적호단과 사패천 무인들이 정의맹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시선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정사 연합은 무림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이처럼 정파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곳에 사패천 소천주와 사패천의 무단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정사 연합은 결국 귀천성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사패천의 뒤로 귀천성의 그림자가 비쳤다.
사패천의 방문을 환영하면서도 기묘한 침묵이 맴도는 이유였다.
아주 잠깐.
복귀 보고와 함께 사패천 무인들도 정의맹주를 비롯한 주요 인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다만 긴 여정을 오는 동안 귀천성의 공격으로 사패천 무인들의 회복이 덜 되었기에, 거처를 내주고 중요한 일정은 다음 날로 미루었다.
그리고 부군사 남궁진휘가 강무련과 사패천 일행을 의선문으로 안내했다.
“의선문 안가에 환자를 위해 마련된 비처가 있습니다. 치료를 위해서는 좌활백설옥이 필요하여 따로 다른 곳에 모시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정의맹의 호의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남궁진휘의 설명에 강무련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두 사람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했다.
의선문에서도 한수림에 대한 치료에 대해 마땅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의선문 밖에는 의선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강무련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정의맹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의선은 천하제일의 신의로서 모든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의선이 단 한 번도 정, 사에 따라 환자를 가려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자가 의원을 찾는 것이 어찌 폐가 되겠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실로 의선다운 말과 함께, 의선이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실 한수림은 이미 홍랑대부 초산하와 함께 먼저 의선문에 들어 있던 차였다.
강무련의 방문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서의 확인 절차였다.
“아으으…….”
“어휴, 해신단을 먹고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싸웁니까! 독기를 눌러 놓는 약 기운 때문에 내공을 움직일 때마다 기혈의 압박이 상당했을 텐데, 적호단 사람들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신음하며 앓는 사패천 무인을 향해 백소하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귀천성이 쓰는 독에 대해서는 어지간한 건 모두 해독제를 준비해 두었던 터라, 사패천 무인들에게 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해신단의 약성을 믿고 과격하게 싸우느라 기혈이 상한 이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긴 적호단원들도 본인들이 알았어야 알려 주지! 아니, 몰라도 아프면 멈춰야지요! 다들 멍청이입니까?”
화가 난 백소하의 잔소리가 의선과 남궁진휘, 강무련의 귀에서 쏙쏙 박혀 들었다.
“허허허허, 사내 녀석이 잔소리만 늘어선…….”
“……송구합니다.”
백소하의 잔소리도, 의선문이 갑자기 바빠진 것도 모두 사패천 무인들 때문이었기에, 강무련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강무련 그 자신도 잠시 후면 백소하의 앞으로 줄을 서야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렇게 도착한 의선문의 제일 안쪽.
울창한 정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별채에, 한수림은 따로 마련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창백하다 못해 검게 물들어 가는 얼굴을 애타게 보았던 것이 며칠 전인데, 침상에 누운 한수림은 약간이나마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해독제도 없이 이만큼 독기를 막아 내 데려오시다니 홍랑대부의 명성이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늦지 않아서.”
일견 깊은 잠에 빠진 듯 편안해 보이는 얼굴.
강무련이 한수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얌전한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 아이인데 말입니다. 깨어나면 예쁜 형아와 다시 만났다며 좋아할 겁니다.”
“하하하, 진화와의 일화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소공자가 어서 일어나서 우리 진화가 오랜만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군요.”
남궁진휘가 강무련의 농담을 받아 주며 그를 위로했다.
“허허, 그럼 이제 환자는 편히 쉬게 두고, 다음 환자를 치료하러 가 볼까요?”
“예? 알고 계셨습니까?”
“허허허, 제 손주 녀석 앞에 줄을 서시긴 체면 상하실 테니 제게 치료받고 가시지요.”
“감사합니다.”
강무련은 쑥스러운 듯 의선의 배려를 넙죽 받았다.
다음 날, 정의맹 연맹회의.
분위기가 묘했다.
제 사형제들을 모조리 죽인 잔인한 자다, 어쨌다 소문이 무성하던 사패천 소천주는 생각보다 호의적이고 상식적인 인사였고, 귀천성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적호단은 기지를 발휘하여 역천비록을 무사히 정의맹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남궁세가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지만, 어쨌든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좋은 결과를 내었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귀천성과의 전쟁에 기회는 한 번뿐이다…… 제왕검께서 그런 말을 전해 왔소이다. 아마 본 승을 제외하고도 이 자리에 그 말을 실감할 사람은 많을 것이외다.”
정의맹주 운현대사의 말에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늘 제갈가주에게 회의의 진행과 토론을 이끌도록 하고, 본인은 뒤로 빠져서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중재하는 역할만 하던 운현대사였다.
정의맹을 유지하고 이끌어 가는 데에 소림의 희생이 가장 많았기에 그 누구도 운현대사의 역할에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정의맹주로서 다소 존재감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운현대사의 인품과 신망만큼은 어떤 반론도 없었다.
그렇게 늘 뒤로 빠져 있던 운현대사가 강한 어조와 비수같이 날카로운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 기회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할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소이다.”
운현대사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냉정하게 좌중을 아울렀다.
“대반격에서 우린 승리했고 귀천성을 멈추었지만, 어쨌든 역천마제와 팔마제를 멈추기 위해 우리는 천수현인 제갈길현과 매화성검, 곤학진인, 검왕 진청 어른 그리고 독제를 잃었소. 솔직히 십이좌회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 중에도 희생이 없었다 할 수 없소이다.”
운현대사의 입에서 거론된 천하제일을 다투던 고수들.
한때 곤륜은 곤학진인으로 인해 도문 최고가 될 수 있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한순간에 문파를 잃고 도망해야 했다.
화산파와 종남파는 한때 매화성검 구산용과 검왕 진청이라는 남궁세가의 제왕검과 비견되는 천하제일 고수를 가졌었다. 절대 고수를 가졌던 문파의 위상과 비교하자면 지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당문은, 독제의 유언에 따라 그가 죽자마자 모든 가문의 세를 낙양으로 옮겨 피해가 적었다 할 수 있으나 무가로서의 자존심은 크게 훼손당해 회복할 길이 멀었다.
굳이 문파가 멸문되다시피 하여 도망쳐 온 공동파나 아미파, 청성파는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귀천성에 의해 무너진 곳은 하나같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의 싸움으로 모든 역사와 영화를 잃은 것이다.
“내가 왜 이 말을 꺼내는지 다들 알 것이외다. 역천마제가 부활했고, 그들의 마수가 서서히 영향을 넓히기 시작했소. 귀천성이 이전과 같은 전철을 밟기 시작한 것이오!”
운현대사가 힘 있게 말했다.
마치 정신을 차리라는 듯 운현대사의 목소리와 시선이 회의장에 있는 장문인들 하나하나를 향했다.
노승의 용감한 훈계에 흔들리던 장문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이전에도 그러했소. 혼원마제와 독마제가 중원을 혼란에 빠뜨리고, 광마제와 검마제, 혈마제를 앞세운 혈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아직도 시간이 있다 말하는 분이 계신다면 정의맹주로서 단언하겠소. 그들은 이미 전쟁을 시작했소이다! 하여 정의맹주로서 본인은, 지금부터 모든 정파 연맹들에게 정의맹 중심의 전시체제에 들기를 요구하는 바이오!”
정의맹 중심의 전시체제란, 정의맹 소속 문파들이 모두 정의맹의 명에 따라 각중 재화와 인력을 움직이는 것을 말했다.
단지 정의맹과 협조하는 것과 문파에 대한 지배권을 정의맹에 이양하는 것은 크게 다르기에, 이제까지 수많은 장문인과 문파의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전쟁이 목전에 다가온 이상, 정의맹주는 그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어수선해진 분위기.
장문인들조차 뭐가 옳은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럴 수밖에.
전쟁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권력부터 내려놓는 것은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제갈가주가 나섰다.
“정의맹은 지금까지처럼 연맹회의를 통해 일을 진행할 것입니다. 다만 연맹회의를 통해 각 문파의 무단에 직접 명령을 내리는 것뿐입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이라 여겨 주십시오.”
제갈가주의 말에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장문인들도 한결 누그러진 시선으로 그를 주목했다.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역천마제를 비롯해서 광마제와 혈마제, 검마제가 아직 완전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혼현마제와 독마제가 무림을 혼란에 빠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몰라서 당했지만, 지금은 다르지요.”
“음,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놈들이 신제국을 움직인다면 우린 한제국과의 공조를 강화할 것이고, 지금부터 사패천과 정의맹 모든 문파들은 귀천성 소속 문파들의 연계를 잘라내는 것에 집중할 것입니다. 또한, 역천비록의 해석이 막바지에 들고 있습니다. 사패천 술법사들에 홍랑대부 초산하가 역천대법을 풀어내며 의선문과 함께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홍랑대부 초산하의 명성은 정파 무림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실 의선이 천하제일 의원으로 유명하다면, 홍랑대부 초산하야말로 천하제일 술법사로 불리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나오자, 제갈가주의 말에 신뢰가 더해졌다.
“가장 확실한 전략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이기는 것이라지요. 역천대법의 해석이 끝나는 대로 각 마제들을 사전에 제거할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부디 각 문파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흠, 뭐, 그런 것이 나온다면야…….”
“정의맹 식구가 아니오. 당연한 말이외다!”
제갈가주가 고고한 머리를 숙이고 나오자,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들조차 민망한 듯 목소리를 키웠다.
맹주인 운현대사의 강성 발언이나 제갈가주의 겸손한 자세는 평소 그들의 모습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나, 그래서 더 잘 먹혀들어 갔다 할 수 있었다.
결국 연맹회의는 정의맹 휘하의 전시체제로 들어가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면서 끝이 났다.
모두가 자리를 뜨고.
운현대사와 제갈가주가 따로 자리를 가졌다.
연맹회의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잘 이끌어 낸 사람들치고, 그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역천비록을 연구한들, 현존하는 마제들을 제거할 방법이 있겠는가?”
“남궁세가가 소리마제를 죽이고, 사패천이 권마제를 죽였습니다. 월하성녀와 ……남궁진화가 환마제를 죽였고요. 확실한 것은 그놈들도 전쟁에서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무림 전력이라면 놈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역천비록은?”
“의선의 말로는 영생을 얻는 것이라더군요.”
“영생이라…….”
“정확하게 홍랑대부의 말로는 고대의 실혼인이나 강시를 만드는 술법이 섞여 있다 합니다. 허황되긴 하지만 혼을 이동시키거나 육신을 바꿀 수 있는 술법이라면, 영생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허어! 그래서 그 많은 생명을 필요로 한 것인가.”
“수천 명의 생명을 뽑아낸 독수와 운명을 공유하는 최종 제물.”
“운명을 공유한다라…….”
“홍랑대부의 말로는 운명의 중첩이라 말하더군요. 하여튼 그런 최종 제물이라면 포기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때를 노려 놈들을 하나씩 죽일 것입니다. 우리의 준비도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 다만…….”
“다만?”
“십이좌회의 빈자리가 문제겠지요. 결국 팔마제를 모두 죽이고 역천마제까지 죽여야 끝나는 전쟁입니다. 역천마제 그자를 죽일 십이좌회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시급합니다.”
“십이좌회의 빈자리라…… 허허허, 결국 부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는 겐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노력한다고 해서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고수를 만들 수 있다면 벌써 수많은 이들이 나왔을 것이었다.
결국 남은 과제는 인력을 넘어서는 일이라, 불경을 외는 운현대사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 * *
그날 밤.
진화가 의선문 안처를 찾았다.
역천비록 연구가 시작된 후로 의선문 안처는 외부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지만, 진화의 또 다른 신분으로 인해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사패천 소문주가 친분을 인정하며 한수림의 병문안을 허락했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
잠을 자는 듯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는 아이.
금방이라도 눈빛을 반짝이며 조잘거리던 아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정이라도 든 것일까.
사실 이전 생의 진화는 같은 정의맹 사람들조차도 같은 편이라 여겨 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진화는 남궁을 이용하거나 등을 보이는 정파인들을 제 손으로 죽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진화에게 정파 무인들은 필요에 의해 함께하는 이들일 뿐이었다.
그들의 죽음도 진화에겐 그리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 진화의 삶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주작단이나 소림 무승들의 희생을 무덤덤하게 넘겼으나, 이제는 적호단원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장안 사람들 절반이 죽는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현오가 걱정되어 사흘 밤낮을 매달리기도 했다.
사패천 무인들이 얼마가 죽어 나간들 상관없었지만, 이 작은 아이의 아픔이 자꾸 눈에 밟혔다.
무엇이 변한 것일까.
아이를 보는 진화의 눈에 검은빛이 번뜩였다.
아이의 몸속.
청명하게 흐르는 진기 곳곳에 검게 침범한 독기가 눈에 보이는 듯 느껴졌다.
그때, 의선이 진화의 곁으로 다가왔다.
“짧아서 아쉬운 인연이 있지. 소공자의 세상이 이곳까지 넓어졌구려.”
의선이 아이의 곁에 선 진화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의선의 말에 진화는 한참 한수림에게 눈을 고정한 채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의선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독기를 태운다면, 아이에게 지장이 없겠습니까?”
진화의 말에 의선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