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움직일 진(進) 죄 화(禍) : 운명의 중첩(4)
“독기를 태운다고? 남궁 공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말하는 겐가?”
의선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의선의 표정과 불신의 시선.
그것을 마주하며 진화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의선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허어!”
의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듯했다.
무림인들의 의원으로 무공에 대해서 빠삭한 의선이었기에, 그는 진화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다만 쉽게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상식을 너무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라…….
아주 어릴 적에 경지의 벽을 넘고, 불과 얼마 전 제왕검과의 대련으로 또 다른 경지에 올라섰단다.
육십 평생, 아니 그보다 오랫동안 읽은 고서와 의서를 모두 합쳐도, 약관도 되기 전에 화경을 넘어 현경을 넘본 고수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중단전과 상단전을 열고 삼화취정을 피운다는 것을 읽고 그 정도면 우화등선이 더 빠르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이런 미…… 아니, 제왕검, 아니 남궁에서는 소공자를 세가 밖으로 다니게 둬도 괜찮은 것이오? 어디 조용히 처박아 놓고 제왕검이랑 수련이나, 아니, 내 말은, 아니 효율성으로만 따지면 딱 일 년만 가둬 놔도 귀천성 놈들은 다 때려잡는 것 아니오?”
본인이 얼마나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의선이 잘 알았다.
그저 논리가 막힐 정도로 놀란 상태였다.
진화의 입으로 정확하게 밝힌 것은 아니나, 진화와 의선 모두 의미를 주고받은 상태.
“허어! 참! ……허어! 하늘이 중원을 버리진 않으신…… 허어! 그럼 제왕검 같은 분들은, 아니 역천마제는 얼마나…… 허어! 허어!”
의선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진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본래부터 조용히 있던 진화와 이제 숨을 고르고 생각에 빠진 의선 때문에 방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그리고 반경 정도 지났을까.
의선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능성이 영 없는 것은 아니네. 다른 기운에 이질적이지 않게 섞여 들어가서 독기만 없앤다니. 독기를 태운다면 상한 장기와 기혈은 의선문에 있는 해약제와 자양제, 좌활백설옥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것이네. 단, 실패할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말일세. 독기가 조금이라도 장기에 침범한다면 그것으로 소공자는 죽을 것이네.”
의선이 진중한 눈으로 진화와 눈을 맞추었다.
의원으로서 자신의 판단에 대한 자신감과는 별개로 아직 어린 환자.
의선 혼자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패천 소천주와 홍랑대부, 두 사람과 이 일을 의논해도 되겠는가? 아니, 그 전에, 자네의 경지가 밝혀지게 되는 일이네. 자네 또한 남궁세가와 의논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의선의 말투가 변했다.
소공자, 남궁 공자라 진화를 부르던 호칭이나 존대와 하대를 자연스럽게 섞어 쓰던 말투는, 의선이 진화를 그의 어린 환자로 기억하고 보살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돌연 ‘자네’라 변한 호칭과 격식 있는 하대.
의선이 이제는 한 사람의 어엿한 무인으로 진화를 인정하고, 그를 의선문주로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약관도 되지 않아 절대 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무인을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궁의 소가주님을 잘 설득하는 것이 문제겠군. 허허허.”
의선이 살짝 굳은 진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형님을 설득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나도 그동안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겠네. 다음에 자네가 올 때는 사패천 소천주와 홍랑대부와 함께 자리를 마련하지.”
의선은 진화가 마음을 굳힌 것을 알고 흐뭇하게 웃었다.
진화가 한수림을 살리기 위해 한 선택은 한수림뿐 아니라 진화에게도 큰 의미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 * *
신제국, 선건궁.
역천마제의 앞에 모든 마제들이 모였다.
모든 마제들이라고 해 봤자, 혼현마제와 광마제, 검마제가 다였지만.
“빈자리가 많군.”
역천마제의 말에 모두의 눈이 한 곳을 향했다.
권마제 태금호를 찾는 것은 아니었다.
어리석게 죽어 버린 옛 동료를 아직까지 추억할 만큼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면 악마라 불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환마제는 신주에 있습니다. 한창 마무리 작업 중이라 내내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허, 어린 녀석이 열심히 하는군.”
어린 손자를 칭찬하는 듯한 역천마제의 말투에 혼현마제가 작게 입꼬리를 말았다.
역천마제가 환마제를 손자처럼 생각할 리도 없었지만, 약하디약한 그를 칭찬할 리도 없었다.
혼현마제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으니 웃은 것이었다.
“가야 할 길이 멀다 보니 조급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환마제의 이형주인공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으니, 곧 힘을 모을 수 있을 듯합니다.”
혼현마제의 말에 역천마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마제와 권마제의 자리는 어찌하겠나?”
“혈수문주와 접촉 중이나, 암림혈귀갑이 우리 손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몸을 사리는 모습입니다.”
“허허허…….”
웃음소리 끝에 느껴지는 살기.
“사흘 후에 혈수문 자체를 없애 버릴 생각입니다.”
혼현마제의 말이 있고서야 역천마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겉모습은 세상 해탈한 신선 같았지만, 속에는 자신을 거역한다는 사실조차 용납하지 않는 폭군이 들어 있었으니.
혼현마제는 역천마제의 속을 미리 읽은 듯 모든 조치를 준비해 놓았다.
사실 이번엔 역천마제의 분노가 아니더라도, 감히 귀천성의 부름을 거절한 자의 최후를 세상에 보일 필요가 있었다.
소리마제와 권마제의 죽음 이후 귀천성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혼현마제의 머리가 부지런히 굴러갔다.
그때.
역천마제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권마제의 자리는 어찌 말을 하지 않지?”
역천마제의 눈길이 혼현마제와 광마제, 두 사람에게 닿았다. 두 사람 때문에 일부러 꺼낸 말인 것이 뻔했다.
“두 사람 모두 대차게 실패했더군. 허허허, 실로 오랜만의 일이야. 그렇지 않나?”
농담과 질책. 그리고 조롱.
세 가지가 모두 담겨 있는 말이었다.
혼현마제와 광마제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교성흑오대는 섣불리 움직이면서 처음부터 적을 경계하도록 만들었고, 광룡귀면대는 교성흑오대를 돕지 않고 홀로 작전을 펴다 전멸했으니. 혼현마제와 광마제는 서로가 서로의 실책을 탓하고 있었다.
“아주 완전한 실패는 아닙니다.”
광마제를 노려보던 혼현마제가 앞으로 나섰다.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니.
교활한 혼현마제가 앞으로는 광마제와 함께 움직이는 척, 뒤로는 온갖 수작을 벌여 놓은 것이 분명했다.
광마제가 혼현마제의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실패는 아니다? 말해 보라.”
역천마제가 자연스럽게 관심을 보였다.
아니, 보이는 척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결과만 듣고 싶어 하는 편이었으니까.
사실 결과 그 자체도 그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아주 사소한 일일 뿐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역천마제가 싫어하는 일이, 그토록 하찮은 일로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남궁금영을 죽이는 일은 실패했지만 이곳으로 오는 독부에게 역천비록을 부탁해 놓았습니다. 독부가 그것을 들고 오고 있다더군요. 게다가 독부의 독으로 제 수하가 사패천주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산송장으로 만들었으니, 이번 일로 우리 쪽이 얻어야 할 것은 전부 얻은 셈입니다.”
혼현마제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역천마제가 화통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혼현마제, 자네가 일을 허술하게 처리할 리 없지.”
신뢰감 가득한 목소리와 자애로운 웃음소리.
광마제는 독마제가 끼어들었다는 말에 썩은 감을 먹은 듯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역천마제는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남은 일정도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부득이 소리마제와 권마제의 빈자리는 채우기 힘들지 모르나…….”
“아, 괜찮다.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일전에 말했듯 팔현성의 자리를 채우는 건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역천마제의 말이라면 사소하게 스쳐 가는 말조차 천금같이 받들어야 했다.
귀천성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고 진리였으니까.
‘그래. 오히려 이쪽으로 신경을 꺼 준다면 나쁠 것도 없지.’
혼현마제는 아직 정리되지 않는 문제들을 떠올리며 공손한 태도로 역천마제의 명을 받들었다.
선건궁을 나온 뒤.
혼현마제는 광마제를 향해 비소를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나갔다.
“허!”
광마제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속에서 부글부글 열이 끓어오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자신이 아직 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임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이기기 위해 수하들까지 희생시키는 혼현마제의 수작이…….
‘아니지! 혼현마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유치한 인물은 아니지. 대체 뭘까, 저 능구렁이를 저렇게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
광마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은밀하지만 매섭게.
수풀에 숨은 맹수처럼 조용히 혼현마제의 뒷모습을 살폈다.
“이상하지, 벌써 독부 은요까지 달려오다니.”
혼현마제가 다급하게 선건궁을 떠나고, 수오가 뒤늦게 달려왔다.
그는 혼현마제가 떠난 것을 알지 못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수오를 보며, 광마제가 천천히 다가갔다.
수풀에 숨어 있던 맹수가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평소보다 품위 있게 걸어갔다.
“아, 저, 광마제를 뵙습니다.”
수오가 당황한 얼굴로 광마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광마제가 그런 수오를 향해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네가 사패천까지 다녀왔다지, 홀로 임무를 성공시키고?”
“송구합니다. 저는 그저 시키시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수오의 목소리가 긴장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수오도 일이 어찌 진행되었는지는 들었다.
혼현마제가 광룡귀면대를 속이기 위해 교성흑오대를 희생시키고, 뒤로는 자신과 독마제를 이용해 일을 꾸민 것.
광마제의 화가 어쩌면 자신에게까지 미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수오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니야, 아니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지.”
광마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씨익 웃어 보였다.
“하여튼 대단해. 운명의 중첩을 이렇게 이용할 줄이야.”
광마제의 감탄에 수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순진하게 호기심을 표하는 수오를 보며 광마제의 눈빛에 이채가 번뜩였다.
“자네는 최종 제물은 아니지만 혼현마제와 같은 운명을 타고났지. 혼현성의 현명함을 그대로 가졌을 테니, 참 써먹기 편한 수하가 아닌가. 하하하! 아, 아니지, 자네 입장에선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군.”
광마제의 말에 수오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광마제의 입꼬리가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자네로선 조금 아깝겠어. 귀한 빛이 먼저 태어난 빛에 뻗어 나갈 길이 막혔으니.”
광마제가 수오의 등을 두드리고 만족스러운 듯 자리를 떴다.
격려나 칭찬 같지만, 결국 혼현마제 때문에 수오를 흔들려고 한 말이었다.
수오도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며 괜한 악담을 남기고 가는 광마제의 태도,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가 수오의 마음을 흔들었다.
‘진짜 중요한 말이었다면 이렇게 지나치듯 할 리 없겠지. 하지만 진짜 중요한 말도 아닌데, 거짓을 말할 리도 없잖아!’
혼현마제는 아직 젊은 몸이었다.
그래서 수오가 최종 제물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혼현성을 타고났다고? 운명의 중첩, 그게 뭐지?’
홀로 남은 수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맹렬하게 움직였다.
* * *
의선의 말처럼 남궁진휘는 진화의 성취에 크게 놀라면서 동시에 크게 축하했다.
남궁세가 본가에서는 비밀만 지켜 준다면 진화가 한수림을 치료하는 데 나서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진 진화나 의선도 예상한 일이었다.
의선은 당장 사패천 소천주와 홍랑대부를 불러 진화의 생각을 전했다.
그들은 처음 몹시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면서 진화와 의선을 말을 불신했지만, 곧 진화와 의선의 진지한 모습에 더욱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 진심이란 말이오?”
“예, 다만 걸리는 것은 소천주께서 상황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의선의 말에 강무련의 눈이 진화와 홍랑대부를 번갈아 지났다.
하지만 결국 그의 눈은 누워 있는 한수림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강무련과 사패천은 진화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사패천주는 강무련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보다 한수림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자체가 강무련에게 큰 부담이었다.
“조금 더 고민해 보십시오.”
“해, 해독제를 찾아낼 가능성은 없습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수십 년째 그것을 찾고 있답니다.”
찾지 못했다는 말보다 더 막막한 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데도 실패했다는 말이었으니까.
의선의 말에 강무련의 고민이 깊어졌다.
게다가 진화의 결정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까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