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움직일 진(進) 죄 화(禍) : 운명의 중첩(5)
강무련의 고민은 사흘 동안 이어졌다.
매응을 통해 사패천주의 답이 왔지만, 그게 오히려 강무련의 고민을 깊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망할 영감탱이. 그냥 평소대로 ‘하라’, ‘마라’만 말해 줄 것이지.”
“후후후후.”
“대부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독제를 기다리는 건, 영 가능성이 없어 보이십니까?”
“……우리 소공자 옆 방에 누가 있는지 보았소?”
“옆 방이라면……?”
“천수현인 제갈길현. 그자 또한 전대 혼현마제의 육신이 터지면서 나온 독기에 당했지. 그게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오. 초기에 스스로 겨우 독기를 제어했음에도 결국 혼수상태에 들고 말았다지.”
홍랑대부 초산하의 말에 강무련이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천수현인 제갈길현의 명성이야 사패천에서도 귀 아프게 들었다.
그런 사람조차 이겨 내지 못한 독이라니.
“평범한 독과는 다르다는군. 육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과 부딪혀서 육신을 무너뜨리는, 독이라 말하기 힘든 독. 독마제, 독부 은요의 독이네. 본래 기운이 강할수록 독기와 부딪힘이 커지고 본래 기운이 약하면 독기에 무너지기에, 달리 해독할 방법이 없지. 의선이 매달려 해독한 지도 꽤 되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좌활백설옥에서 장기가 썩어 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뿐이었다는군.”
“…….”
“소천주, 우리 소공자는 천수현인처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아…….”
홍랑대부 초산하의 말에 강무련이 탄식을 뱉었다.
그냥 천수현인처럼 잠들어 있다가 해독제를 찾으면 안 될까, 막연하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래 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니었군요.”
강무련이 스스로를 자책하듯 말했다.
홍랑대부 초산하는 그런 강무련을 안타까운 눈을 보았다.
“소천주께서 고민하셔야 할 것은 남궁 공자와 의선을 믿을 수 있는가.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남궁 공자를 원망하는 것을 떠나 정사 연합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오.”
홍랑대부 초산하의 충고에 강무련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홍랑대부를 보았다.
“대부께선 이미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고 계셨군요!”
“……안타깝지만 우리 소공자에게는 시간이 천금과 같지.”
강무련의 말에 홍랑대부 초산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지만, 초산하조차 강무련에게 충고하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 * *
강무련의 고민은 거기에서 끝났다.
강무련은 사패천의 이름으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남궁세가나 정의맹에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바로, 한수림을 앞에 두고 진화와 의선, 강무련과 초산하가 섰다.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강무련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남궁 공자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수림이의 일에 나서 준 것이오?”
“……소공자가 무사히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걱정하기에 이겨 내야 하는 부담감과 치료에 필요한 용기, 후폭풍에 대한 각오. 정사 무림의 관계. 수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하지만, 모두 부차원적인 것들이었다.
결국 환자를 바라보면서 바랄 수 있는 것은 환자의 쾌유,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진화의 말에 강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선과 초산하도 흐뭇한 얼굴로 진화를 보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진기가 원활하게 돌 수 있도록 보조하겠네.”
진화가 한수림의 곁에 가서 앉고, 의선과 초산하가 양쪽에서 각자 보조를 준비했다.
파지지직.
진화가 한수림의 손을 잡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뇌전이 튀었다.
강무련이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관조(觀照).
눈을 감은 진화의 머릿속엔 제 몸을 흐르는 천뢰기가 느껴졌다.
혼돈지체의 혼돈기가 만들어 낸 천뢰가 천뢰제왕신공을 따라 자연스럽게 온몸을 순환하고 있었다.
진화는 이제 천뢰기와 천뢰제왕신공을 통해 얻은 내기를 구분하지 않았다.
온통 불꽃이 번뜩이는 파괴적인 평화, 그것이 진화의 몸이 가진 조화였다.
그리고 진화의 감각이 한수림을 향했다.
작고 여린 기혈을 통해 흘러야 할 기운이 멈춰 있었다.
기운을 억지로 읽어 들어가자 그제야 심장의 연약한 박동이 느껴졌다.
아슬아슬하게 순환하고 있는 단전은 마치 곧 꺼질 듯한 불꽃 같았다.
간과 비장이 짙게 드린 검은 독기가 정기를 간직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몸속에 강(江)을 이룬 위와 삼초, 방광은 독기 때문에 정체되어 흐르지 못했다.
가장 먼저 건드려야 하는 부분.
“간부터 가겠습니다.”
진화의 말과 함께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파지지지직!
진화에게만 느껴지는 충돌의 소리.
한수림의 정기 속으로 흘러들어 간 진화의 천뢰기가 간에 짙게 머물고 있는 독기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존재하지도 않을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 진화의 기운과 부딪히며 독기들이 타들어 가듯 흩어지기 시작했다.
의선이 금구천약지침으로 한수림의 간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
약의 기운을 빌어 간의 정기를 보호한 것이다.
그렇게 다음은 비장, 위, 방광, 삼초 순으로.
진화의 천뢰기가 독기와 부딪히고, 의선이 약침으로 한수림을 보호했다. 홍랑대부 초산하는 좌활백설옥의 기운을 증폭시켜 한수림의 생기를 북돋웠다.
달이 뜨고 숲의 정기가 만연할 때 시작한 일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또한 의선이 한수림의 회복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한 시간이었다.
동이 트며 방 안 가득 충만한 양기가 들어오며 한수림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한수림이 내뱉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수림의 숨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 네 사람도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후, 무사히 끝났군요.”
“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수림의 상태를 확인한 의선의 말이 있고, 강무련은 크게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허허, 남궁 공자가 제일 수고했지요.”
의선의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진화를 향했다.
진화는 제가 해 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금 가쁘게 숨을 쉬고 있는 한수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약해진 곳들을 회복하기 위한 열기가 남아 있을 뿐, 안색은 한결 좋아졌다.
‘……살렸구나.’
평생,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 생각하고 살아왔던 진화는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적을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타인을 구한 것은 처음이었다.
“감사하오, 남궁 공자! 이 강무련, 아니 사패천 전체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강무련이 감격한 얼굴로 진화에게 포권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진화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사 인사는…… 소공자가 깨어나고 나서 듣고 싶습니다.”
“아! 그러겠소! 하하, 수림이가 깨어나면 그때 함께 감사 인사를 하겠소.”
진화이 말에 강무련이 더 감동한 듯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 * *
진화가 한수림의 치료에 나섰다는 건 정의맹에서도 맹주와 군사인 제갈가주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강무련의 약속이 있었지만, 정의맹에서는 사패천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게다가…… 같은 건물에 수십 년째 누워 있는 아버지, 천수현인 제갈길현을 생각하며 제갈가주는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새하얗게 밤을 보내고 동이 뜬 아침.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제갈가주가 놀란 눈으로 이른 아침부터 집무실 문을 연 사람을 보았다.
“자네가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어쩐 일인가?”
“궁금하실 듯해서요.”
부군사인 남궁진휘가 제갈가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제갈가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성공……했나?”
“예. 무사히 끝나서 소공자가 깨어나길 기다리면 된다고 합니다.”
“아……!”
남궁진휘의 말에 제갈가주의 입에서 깊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기다리던 소식을 들은 반가움 혹은 안도, 아니면 그 반대인지 정작 제갈가주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수림의 치료가 가능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랬다.
괜한 희망은 아닌지, 가능성을 믿고 도전해야만 하는 것인지.
불안과 의심, 그럼에도 자꾸 들썩이는 기대와 자신을 짓누르는 부담감.
그래서 잠자코 지켜보기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치료가 무사히 끝났고, 제갈가주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제갈가주가 조용히 보고 있던 죽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귀천성의 정복 전쟁을 멈춰 세운 불세출의 기인.
천수현인이 깨어난다면 정의맹 무인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은 뻔한 일이었다.
또 천수현인의 능력 자체도 앞으로 전쟁에 크게 쓰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 두려움이 컸다.
누워 있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천수현인과 죽은 천수현인은 무림에 끼칠 충격의 크기가 다를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잃게 되는 것은 천수현인만이 아닐 것이다.
정의맹 군사로서, 어차피 쓰러져 있는 천수현인을 살리기 위해 약관도 되기 전에 절대 고수의 반열에 오른 남궁진화를 잃을 수는 없었다.
제갈가주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였다.
* * *
한편.
맡은 임무를 해내고도 혼란만 얻었던 수오는 평소처럼 혼현마제를 따라 움직였다.
혼현마제가 사사롭게 내리는 명을 수행하는 외에, 수오의 모든 시간은 잠잘 때를 제외하고 혼현마제와 함께였다.
그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그림자처럼 사는 삶.
수오는 슬슬 그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풍-덩.
누군가 비명과 함께 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곧 ‘우아아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성녀님! 성녀님-!”
수십, 수백 명의 사람 바닥에 엎드려 누군가를 바라고 있었다.
주문을 외는 듯 광기 어린 목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울리는 속에.
스르르릉-.
석벽이 열리며 속이 훤히 비치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성녀님--!”
“아아아아, 성녀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사람들은 미친 듯 여인을 향해 손을 뻗고 소리쳤다.
붉은 옷의 여인은 사람들 사이를 헤쳐 오며 그들의 머리에 구원을 내리듯 손길을 뻗었다.
“아아아……!”
붉은 연기가 여인의 손길을 따라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히, 힘이 솟는다. 내가, 내 몸이…… 섰다! 내가 섰어!”
호족의 집에서 죽도록 매타작을 당하고 평생 앉은뱅이로 살던 사내였다.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서 있는 자신을 보았다.
“섰다! 내가 섰다! 아아아, 성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성녀를 향해 절을 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 사람이 붕대를 풀고 소리를 질렀다.
하나같이 아픈 곳이 나았다며 성녀를 향해 절을 하고 열성적으로 이름을 부르짖었다.
“아아아아아----!”
“성녀님, 만세! 만세--!”
비정상적인 기적 그리고 광기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성녀라 불린 여인은 자애로운 얼굴로 사람들 앞에서 섰다.
“대가 없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신이 내려 주는 이치도 그러합니다. 믿음과 헌신. 그대들이 바칠 수 있는 것을 드리고 원하는 것을 얻으세요. 신은 기쁘게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내려 줄 것입니다. 아무 대가 없이 얻은 자들은 전부 부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얻은 것뿐! 일어나세요! 부정한 자들에게 지지 마세요! 그대들의 곁엔 나와 신이 있을 것입니다!”
“우아아아아----!”
성녀의 외침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방금 전처럼 몇몇 사람들을 끌고 나와 구덩이 속으로 집어 던졌다.
“아아악! 살려 줘!”
“아아악--!”
“우와아아아----!”
“성녀님 만세!”
구덩이로 던져지는 이들의 비명과 여인을 향한 광기 어린 고함이 섞여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의 혼돈과 광기.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혼현마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수오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허허, 환마제에게 던져 주려고 거지굴에서 주워 왔던 제물이 제법 환마제처럼 하는군.”
“……그러게요.”
거지굴에서 잡아 온 더럽고 삐쩍 마른 여자.
그 여자가 힘을 가지고, 손끝으로 사람들을 부리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이 혼현마제와 수오에게 닿자, 수오는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감히 네까짓 것이 날 내려다봐!’
수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부정하게 취한 자들에게 지지 말아요. 굴복하지 말아요! 모두 들고일어나 맞서 싸워요!”
“와아아아---!”
여인에게 호응하는 사람들.
혼현마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물을 늘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느냐?”
“네? 아…… 저렇게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던 수오가 여자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혼현마제의 시선은 여인과 스스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수오를 보지 못했다.
“저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고작 몇천 명이나 죽겠느냐.”
“그럼요?”
“전쟁이다. 저들을 이용해서 수만, 수십만 명이 죽도록 전쟁을 벌일 것이다.”
혼현마제가 동굴 안보다 짙은 광기를 뿜으며 눈을 빛냈다.
혼현마제의 광기를 마주하며 수오의 눈빛도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