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부릅뜰 진(瞋) 불 화(火) : 움직이는 제국(1)
깊은 밤.
진화는 또다시 의선문 안가에 있는 별채를 찾았다.
탁. 탁. 탁.
숨기지 않은 발소리가 한수림의 방을 향하기 전, 진화는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옆을 돌아보았다.
세상만사에 관심이 적은 진화답게 평소엔 쳐다보지 않고 지나던 문인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진화의 시선을 끌었던가.
특별한 의식 없이 지나 한수림의 방문을 열기 전에 한번, 진화가 옆방의 문을 보았다.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있다 했지.’
한수림과 같은 독.
이전 생에 제왕검과 남궁가주가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던 그 독에 제일 먼저 누워 있는 사람.
이전 생에 진화는 천수현인의 치료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식구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터라 제왕검과 남궁가주의 중독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제가 나서는 건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왕검께서는 그 독에 당하고도 쓰러지지 않고 해약을 찾기 위해 나서셨는데…… 나름 독기를 없애는 법을 이미 알고 계셨던가? 결국 가주님도 일어나긴 하셨었고.’
단지 그 정도.
천수현인의 방문을 보고 든 생각은 단지 그 정도였다.
진화에게 그 독이 중요했던 건 독의 출처나 해독 방법이 아니라 ‘누가 중독시켰는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화는 죽은 듯 고요함이 전해지는 방을 무시하고 한수림의 방문을 열었다.
“…….”
“아아아아……!”
진화가 의아한 눈으로 강무련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강무련이 문 옆에 서 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아니, 기척은 아까부터 느껴졌는데 안 들어오고 서 있으니까…… 그, 그거인 줄 알고. 후우.”
“그거라니…… 설마, 귀신?”
한숨까지 쉬던 강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화는 조금 황당한 얼굴을 했다.
독에 당하고도 해신단 하나 믿고 날뛸 때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용맹한 무인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귀신을 무서워할 줄이야.
“……비밀로 해 드리죠.”
“……그러는 게 더 수치스럽소만.”
진화는 강무련의 체면을 생각해서 배려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강무련이 그걸 거절했다.
그런데 그때.
“헤헤. ……얼레리……꼴레리…….”
가늘게 들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
진화와 강무련이 눈을 번쩍 떴다.
“하하하, 예쁜 형아 보면서 깨는 걸 보니, 역시 똥 꿈이 좋은 꿈인가 보네.”
한수림이 깨어나 진화와 강무련을 향해 웃고 있었다.
“소공자!”
“수림아-!”
진화가 한수림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진화의 뒤에 있던 강무련이 한수림에게 튀어 나갔다.
앞에 있던 저 작자가 왜 내 뒤에서 나왔을까.
눈물을 그렁거리며 기뻐하는 강무련을 보며 진화가 한숨을 쉬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한수림을 부둥켜안은 것을 보니, 강무련은 의선을 불러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결국 진화가 강무련을 대신해서 밖으로 나갔다.
‘정말 다 나은 것 같았지……?’
진화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맺혔다.
* * *
희작등당(喜鵲登堂), 까치가 집 안에서 울 때 기쁜 소식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까마귀는 어떠한가?
고작 흰무늬 조금 없다고 불길한 새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까치와 까마귀는 따지고 보면 같은 족속이었다.
머리 좋고 영악하며 말귀를 알아듣는 새.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든 사람 주변에 모인 쥐를 노리든, 사람을 이용해서 먹이를 탐할 줄 아는 새.
독부 은요는 까마귀를 좋아했다.
같은 족속, 같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버림받은 모습이 딱 제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까-악. 까-악.
까치인가 반갑게 보았던 궁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울음소리를 듣고 한두 마리 예상했던 것과 달리 수백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까마귀 떼가 궁궐 지붕을 따라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에구머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어서 쫓아!”
붉게 옻칠 된 궁궐 지붕에 행여나 똥이라도 쌀까, 내관들과 궁녀들이 뛰쳐나와 긴 장대를 휘둘렀다.
“훠이- 훠이-!”
푸드드드득.
까마귀들은 그런 내관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장대를 피해 날아올랐다가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 뭐야, 저 요물들은?”
“이 일을 어쩌지?”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내관들과 궁녀들은 까맣게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마저 불길하게 느껴졌다.
숫자가 워낙 많으니 오히려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고개를 까닥이는 까마귀들의 모습이 그런 그들을 비웃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
궁인들이 까마귀 떼를 두고 고민하는 사이, 까마귀들은 주인을 기다리는 정예병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주인이 도착했다.
까-악. 까-악.
시끄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근육질의 무사들이 가마를 짊어지고 궁 앞으로 들어왔다.
황제를 제외하고 궁 안에서 가마를 타는 것은 금기시된 일이었지만, 가마가 멈춘 궁이 어디인지 확인한 이들은 모두 모르는 척 고개를 숙였다.
신제국 궁궐 안 선건궁.
그곳은 일반 사람의 상식에 벗어난 괴물들의 거처가 된 지 오래라, 황제마저도 그들에게 법도에 대해 논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 따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마 안에서 길고 검은 손톱이 나왔다.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바짝 말라 비틀리고 갈라진 손톱은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을지언정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곧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나오고 가마 안에 있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부스스한 검은 긴 머리와 생기 없이 창백한 피부와는 반대로, 큰 눈과 붉디붉은 입술, 마른 듯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멀리서 보기엔 처녀 귀신 같았지만, 가까이에서 보자면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달까.
독마제, 독부(獨婦) 은요.
온전하게 살아 있는 팔현성 마제들 중 마지막 한 자리의 주인.
나이 열두 살에 팔려 가듯 시집간 집에서 남편을 비롯해 그 일가를 모두 독살하고 스스로 독부가 된 악녀였다.
까마귀처럼 매섭고 무감한 눈동자가 선건궁 서거전을 살피자, 궁인들이 행여나 눈을 마주칠까 허리를 숙였다.
그때.
서거전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독부 은요가 안에서 나오는 사람을 확인하자, 인간미 하나 없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걸렸다.
“무진 님!”
은요는 아이처럼 반가운 얼굴로 한달음에 혼현마제에게 달려갔다.
“어찌 나오셨어요? 제가 온다는 걸 아셨나요?”
“도착할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선건궁 서거전의 지붕에 까마귀들이 잔뜩 앉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수오는 저걸 질문이라고 하는 독마제도, 그걸 받아 주는 혼현마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미친 여자 장단을 받아 주시는 걸 보면, 저 여자가 역천비록을 들고 온 게로군.’
수오가 뭐가 웃긴지 깔깔 웃으며 혼현마제의 팔짱을 끼고 들어가는 은요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 * *
한낮의 유희를 찾는 연인들처럼 다정했던 분위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탕!
콰광-!
죽간이 바닥으로 사정없이 버려지고, 죽간이 있던 상자도 바닥에 떨어졌다.
죽간을 읽던 혼현마제가 몇 줄 읽지도 않아 그것을 집어 던지고 상자도 쳐 내 버렸기 때문이다.
“무진 님!”
놀란 은요가 혼현마제를 불렀다.
혼현마제는 파르르 떨리는 눈매를 겨우 참으며 매서운 눈으로 버려진 죽간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짜다.”
“네?”
“가짜라고! 네가 놈들에게 속았구나!”
낮게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처럼, 혼현마제가 목소리를 죽이고 은요를 질책했다.
크게 소리치는 것보다 억지로 긁어내린 목소리에서 더 큰 분노가 느껴졌다.
독부 은요는 그때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죽간과 혼현마제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자애롭게 그녀를 마중 나갔던 혼현마제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기사년 병진월 을해일 진시라고? 내가 바꿔 놓은 가짜잖아!’
몇 줄까지 확인할 것도 없었다.
최종 제물에 대해 적어 놓은 생년월일이 혹시 몰라 제가 만들어 둔 가짜였던 것이다.
그 뒤로 적힌 문장들은 제가 만든 가짜조차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한, 가짜 중에서도 하품이었다. 아마도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급조품이었던 게 분명했다.
‘하긴 나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내 역천비록을 제 놈들이 어떻게 알겠어! 이게 진짜인 줄 알고 그럴듯하게 꾸며 우릴 속이려 한 거겠지. 그렇다면 놈들이 진짜라고 가진 것도 결국 내가 만든 가짜일 터! 달라질 것은 없다.’
불처럼 타오르던 혼현마제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진짜 역천비록을 빼돌린 것이라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지만, 혼현마제는 금세 평정을 찾았다.
결국 자신의 역천비록은 누구도 찾지 못한 상태인 것이니.
“멍청하게.”
혼현마제가 싸늘하게 은요를 내려다보다 교성흑오대를 움직이기 위해 자리를 벗어났다.
혼현마제의 싸늘한 말에 맞아 얼음이 된 듯, 은요는 그가 자신을 지나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급한 것도 아니니까. 천수현인 그 빌어먹을 놈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당장 누구도 내 진짜 역천비록은 찾지 못하겠지.’
자신은 이미 제갈무진의 육신을 얻었다.
게다가 제 몸을 터뜨려 천수현인에게 복수까지 해 줬으니,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잘된 일이 아닌가.
그 누구도 제 비밀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을 확인한 셈이니 말이다.
냉정하게 집무실을 나가는 혼현마제의 입가엔 비릿한 웃음마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이이…… 아아아아악-! 빌어먹을! 젠장! 빌어먹을! 아아악!”
쾅! 팍. 팍. 팍. 팍!
얼음처럼 굳어 있던 은요는 혼현마제가 나가자마자 주체할 수 없이 폭발한 분노를 터뜨렸다.
“나를 속여! 감히! 이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감히!”
퍽. 퍽. 퍽.
굽이 높은 신발에, 바닥에 있던 죽간과 상자가 엉망으로 짓밟혔다.
그렇게 분을 풀고서야 독부 은요가 겨우 분을 가라앉히고 숨을 골랐다.
“감히 이 독부를 속여? 하! 확실히 그때 재밌는 게 있었구나! 발칙한!”
낭랑한 코웃음에 독기가 서리고, 새까맣게 어둠으로 물든 눈동자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다그닥.
망자의 것인 듯 섬뜩한 손톱을 달그락거리던 독부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원한을 가진 모든 사람을 끔찍하게 죽였던 악녀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혼현마제와 독부 은요가 나가고 침묵이 내려앉은 방.
조용히 기둥 뒤에서 수오가 나왔다.
수오는 처음부터 그들의 곁에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무시하고 있었다는 게 옳을까.
그들의 생각이 어떠하든 수오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그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었던가.
수오는 차라리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이게…… 가짜라고?”
수오가 바닥에 널브러진 죽간을 들었다.
‘사부는 이게 가짜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독부 은요의 발길질에 엮어 놓은 실이 끊어지거나 정렬이 흐트러졌지만, 안에 암호를 알아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수오는 죽간들을 조용히 챙기고 그 자리를 치웠다.
평소 그가 하던 일이라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 *
한수림이 깨어나고, 홍랑대부는 확신했다.
“권마제가 죽고, 수림이가 죽을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살았지요.”
의선은 운명, 정확히 역술이라는 것에 조금 회의적이었다.
중원에는 깨알처럼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는데, 생일과 시가 겹치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냐는 것이다.
하지만 홍랑대부 초산하의 생각은 달랐다.
“생일과 시가 겹치는 사람은 많지만 천문은 다릅니다. 운명을 점칠 때는 그날의 천문이 어디를 향하는가도 중요하지요.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에, 놈들도 그것을 알아보았을 겁니다.”
“하아, 글쎄요. 그때의 천문이라니, 그걸 계산할 수 있단 말이오?”
“후후후, 하늘의 순리는 제법 이치에 맞게 흐릅니다. 변하지 않기에 순리(順理)라 부르는 것이지요. 이치를 꿰고 있다면 순리에 따라 천문을 계산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습니다. 천문을 읽고 계산하여 이치를 비트는 것이 술법의 본질이랍니다.”
홍랑대부의 말에 의선이 순수하게 놀랐다.
그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천문을 계산한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의선의 마음을 읽은 홍랑대부 초산하가 가는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말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 이 역천비록의 운명이라는 것을 좀 더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마침 우리에게 비교할 대상도 있소. 생년, 월, 일, 시를 정확하게 아는 이들이 두 명이나.”
홍랑대부 초산하의 말에 의선도 눈을 빛내며 동조했다.
천문을 살펴 비교하는 것은 역천비록 연구에 있어서 의선이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향이었다.
이 또한 홍랑대부 초산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의선은 이 도전을 기회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한수림이 깨어났다는 것이 주요 인물들에게 알려지고.
새로운 도전을 결심한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다.
“제갈가주가요?”
“그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와 주길 바란다는구나.”
남궁진휘가 전하는 말에 진화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진화의 머릿속에 숨소리도 고요하던 방문이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