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부릅뜰 진(瞋) 불 화(火) : 움직이는 제국(2)
달빛도 구름에 가린 까만 밤.
진화가 정의맹 담장을 넘었다.
순식간에 전각 지붕을 밟고 정의맹 본관으로 올랐다.
까만 어둠 속에 숨은 기척들이 느껴졌으나 굳이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탁.
진화가 열려 있는 창을 통해 총군사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자네?”
제갈가주가 깜짝 놀라다 못해 경악한 얼굴로 진화를 보았다.
“혹시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까?”
진화는 제갈가주의 반응이 의아했다.
“밖에…… 아닐세.”
정의맹 본관을 지키는 무사들에게 미리 진화가 방문할 것이라 알려 두었지만, 진화가 이곳까지 오기 전에 그에게 먼저 알려 준 이는 없었다.
진화의 접근을 알아차린 이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남궁진화가 암살자였다면 난 죽었겠군.’
제갈가주가 떨떠름한 얼굴로 진화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 밖에서 자신처럼 놀라고 있을 무사들을 은근히 째려보았다.
제갈가주가 맞은편에 앉은 진화를 보았다.
은은한 촛불 아래 담담한 얼굴이 제갈가주가 보기에도 천상화에 뒤지지 않았다.
‘운이 좋은 양자라 생각했는데, 운이 나빴던 황자님이었다라…… 어느 쪽이든 남궁세가가 큰 행운을 잡았군.’
속은 쓰리지만 이제는 씁쓸하게나마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오늘 일도 정의맹 본관을 지키는 무사들을 탓할 수 없었다.
나이를 떠나 경지를 넘어선 무인.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몸속에 스며든 독기를 태울 수 있는 무인이라니.
그의 성공을 귀로 듣고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완벽한 패배로군.’
홀로 남궁세가를 이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제갈가주는 그렇게 홀로 패배를 인정했다.
제갈세가는 혼현마제로 인해 가문의 평판이 흔들리는 것은 간신히 막았으나, 가문의 무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로써 황제의 은인까지 되어 승승장구하는 남궁세가를 따라잡기란 요원한 일이 된 것이다.
다만 제갈가주는 자식들의 실패에 대해서만큼은 혼현마제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갈세가의 자식들이 혼현마제의 계략에 빠져 망가졌다고 했지만, 제갈가주는 그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제갈후현은 세가의 기대를 배경 삼아 오만하고 이기적이었고, 제갈용성은 비뚤어진 복수심에 혼현마제가 아닌 누구의 손이라도 잡았을 것이었다. 제갈소현은 명가의 직계로 살아남기엔 너무 어리석었으며, 제갈지현은 능력보다 큰 야심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했다.
반면,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부담감을 짊어지고도 남궁진휘는 훌륭하게 저를 보좌하고 있었고, 오빠와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남궁진혜는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았다.
게다가 누구보다 차별받는 위치에 있었던 남궁진화는 스스로 절대고수가 되어 보였다.
제갈가주는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고도 이런 차이가 났다면 그 차이는 바로 자신의 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라 판단했다.
가문과, 귀천성과의 전쟁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그 절반의 실패는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갈가주는 한번 실패했다고 주저앉을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부탁이 있어 보자고 했네.”
“말씀하십시오.”
제갈가주의 말에 진화가 기다렸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제갈가주는 진화가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영리하기까지 하군. 하긴 깨달음의 벽을 넘어선 사람의 사고가 부족할 리 없지.’
제갈가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한수림을 치료했다는 것을 들었네. 정의맹을 대표해서 감사하네.”
“대의 같은 거창한 의도가 아니라, 제 작은 인연을 위해 한 일이었습니다.”
“하나 결과적으로 대의를 가지게 되었지. 무림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네.”
제갈가주의 말에 진화는 겉으로 티내지 않았지만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제갈가주가 남궁진휘와 군사부에서도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칭찬해 주는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제갈세가 가주, 현우수사 제갈성진. 지독하고 집요한 대의의 설계자…… 그런데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데?’
진화는 제갈가주의 솔직한 인정에 놀라는 한편, 머릿속으로 다른 것을 떠올렸다.
현재 제갈가주는 몹시 신중하면서도 합리적인 방향으로 정의맹을 이끌고 있었다.
어떤 사심이나 계산 없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귀천성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화는 이런 제갈가주가 물러나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제갈가주 대신 제갈지현이 전면에 나섰다.
제갈지현이 권력을 잡고 나선 정의맹의 방향이 달라졌다.
제갈지현은 남궁세가를 비롯한 중소 문파의 희생을 발판으로 정주와 낙양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켰고, 결론적으로 정파 무림은 사패천보다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제갈세가는 지금보다 더 커졌지…… 현재 제갈후현이 죽진 않았지만 몹시 실망스러운 상황일 텐데 제갈가주는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는다. 심지어 안색도 밝고 눈빛엔 정광이 또렷하다. 이런 사람이 이전 생엔 자식의 죽음으로 심병을 얻어 죽었다고? 제갈지현에게 뒤를 맡기고?’
진화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궁세가, 나아가 정도 무림 전체를 위해서 제갈지현보다 지금의 제갈가주가 정의맹을 이끌어 가는 것이 훨씬 나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한수림의 옆방에 누워 계신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예. 총군사의 부친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수림 소공자와 같은 이유로 벌써 수십 년째 누워 계시지.”
제갈가주의 말투에서 조금 지친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갈가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담담하고 단호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했다.
“자네에게 부탁할 것은 천수현인 제갈길현을 같은 방식으로 치료해 달라는 것이네, 지금처럼 누구도 모르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사뭇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네가 짐작할지 모르나, 한수림과는 위험부담의 차원이 다를 것이네.”
아니면 협박이었던가.
“한수림의 치료를 실패했다면 정사 연합에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네. 하나 딱 그 정도네. 하지만 천수현인 제갈길현은 정도 무림의 승리의 상징과 같네. 그의 죽음은 정도 무림 전체의 사기를 크게 깎아내릴 것이네. 아직 내 명성과 신뢰가 아버님에 미칠 정도는 아니거든.”
냉정하지만 정확한 현실 파악이었다.
그래서 진화 또한 부담 없이 냉정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을 수 있지 않습니까? 위험하게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것보다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생존해 있는 게 중요하니까요.”
진화의 말에 제갈가주도 동의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상황이 어렵게 되었네. 내 부친께서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셨거든.”
제갈가주가 처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단전까지 독기가 침범하고 있네. 단전이 부서지면 독기를 막고 있던 기운도 사라질 테지. 그 전에 치료를 시도라도 해 보려는 것이네.”
“…….”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네. 성공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무림에 알려질 일은 없을 걸세. 귀천성 놈들이 노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 돌아가신다 해도, 자네 이름은 털끝 하나 언급되지 않을 것이네. 내 모든 모략을 동원해서 얼마든지 놈들의 음모에 장렬하게 전사하신 것을 꾸며 주지.”
제갈가주의 단호한 말에 진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겨우 참았다.
진화가 황당한 눈으로 제갈가주를 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제갈가주는 여전히 당당할 정도로 단호했다.
“부친이 살아나신다면 제갈세가의 은인으로 모시겠네. 또한 독마제가 뿌리는 미증의 독에 대한 유일한 해결사로, 어쩌면 십이좌회에 최연소로 이름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네. 정의맹의 이름으로 추천해 줄 수도 있네.”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진화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진화의 말에 제갈가주가 약간, 아주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진화는 거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제갈가주가 앞으로도 정의맹을 이끌어 가고 천수현인이 깨어나 그와 좋은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면, 분명 남궁세가와 앞으로 있을 전쟁에 좋은 일이었다.
“단전까지 독기가 침범하고 있다면, 독기를 태우다가 자칫 단전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네.”
진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갈가주가 답했다.
이번에는 진화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하고 제갈가주를 볼 정도였다.
“단전이 무인에게 생명보다 중요하다지만, 부친은 그럴 정도의 무인은 아니셨으니까. 어차피 지금도 수십 년째 누워만 계셨는데, 전력에 도움이 될 거란 기대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네.”
기가 막힐 정도로 솔직하고 냉정한 말.
제갈가주가 실은 이런 성품이었던가.
“이제 와 그분이 필요할 정도로 어설프게 정의맹을 이끌지도 않았네. 그저…… 살아 있는 천수현인 제갈길현을 원할 뿐이네. 부탁하지.”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그래서 더 당당하게 부탁하는 태도.
‘큰일이군.’
진화는 어쩐지 제갈가주가 마음에 들 것 같았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숨겨 주겠네.”
마지막까지 진화의 부담을 덜어 주는 제갈가주의 말에, 진화는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내려앉혔다.
* * *
신제국 선건궁.
새로운 귀천성이 된 그곳에 복귀한 독마제, 독부 은요가 역천마제를 향해 몸을 굽혔다.
“주군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역천마제는 늘 그렇게 자애로운 태도로 독부를 반겼다.
“놈들에게서 역천비록을 빼앗아 왔다고?”
“별일 아니었어요.”
“허허허, 무진이 네게 신세를 졌구나.”
역천마제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은요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수줍은 척 고개를 숙였다.
“벼, 별말씀을요.”
“비록을 받고 고맙다는 말은 했습니다.”
“허허허! 무진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사람도 다 있군.”
혼현마제가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고, 역천마제가 웃으면서 상황이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독부 은요와 혼현마제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혼현마제의 비록이라는 건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지?’
심장이 크게 뛸 정도로 불안해졌다.
역천마제는 실패나 패배에 너그러운 주인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위험했다.
그의 속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야 했다.
독부 은요와 혼현마제는 능숙하게 복잡한 머릿속을 숨기고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리로 갔다.
“우리에게 있는 역천비록은 어떻게 되지?”
“주군의 것은 이미 제 머릿속에 있고, 제물의 위치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는 내 육체를 회복시키는 것이 낫다.”
“광마제의 것이 가장 급하지만…….”
“광마제는 늘 스스로 하지.”
혼현마제가 슬쩍 광마제를 보자, 역천마제가 나서서 화제를 끊었다.
“광마제를 제외하고 주군의 것과 권마제, 검마제와 독마제, 환마제의 것이 정의맹에 있고, 제 것과 혈마제, 소리마제의 것은 우리 쪽에서 확보 중입니다. 다만, 검마제와 독마제는 이미 젊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고, 환마제는 새로운 역할에 잘 적응 중입니다. 앞으로 힘의 보충이 있다면 별문제 없을 것입니다. 이대로 정의맹의 헛수고를 지켜봐도 나쁠 것 없지요.”
혼현마제의 말끝에 싸늘한 비소가 걸렸다.
검마제와 독마제, 환마제에게 필요한 건 시간과 힘이지 새로운 육체가 아니니, 정의맹이 가진 그것들은 전혀 급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리마제의 자리는 혈사문주에게 영입을 권유 중이나 사실, 암림혈귀갑만 완성된다며 누구에게 그 자리를 주든 상관없지요.”
감히 귀천성의 제안을 계산하고 있는 혈사문은 곧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예정이었다.
이미 한번 만들어 보았던 암림혈귀갑이었다.
충분한 혈정만 모을 수 있다면, 새로 만든 암림혈귀갑이 다섯 살짜리 꼬마도 살인자로 만들어 줄 것이었다.
“권마제는 자리를 비워 두기로 했습니다. 남궁금영 또한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당분간 살려 둘 생각입니다.”
혼현마제는 당연하게도 한수림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충분히 무르익을 시간뿐입니다.”
혼현마제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공손하고 충성스러운 태도 너머로 충만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에 역천마제 또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진, 시간을 가져올 계획이 있겠지?”
역천마제가 혼현마제를 재촉했다.
역천마제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조차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혼현마제 또한 그런 역천마제의 태도를 예상한 듯 답했다.
“독부가 하후대장군부에 독을 풀어 놓았습니다.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신제국의 황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 ‘시간’이군.”
혼현마제의 대답에 역천마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몇몇 신료들의 협조가 늦다고 하는군요. 조만간 군사들이 모아지는 대로 신료들을 정리하겠습니다.”
“황제는?”
“그는 아직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가 있어서요. 당분간만 참아 주시지요.”
혼현마제가 비릿하게 웃으며 사정하듯 말했다.
역천마제 또한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마제와 혼현마제는 가벼운 대화로 황제의 목숨을 연장했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황궁에서 주인을 내쫓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다른 마제들은 그렇다 쳐도 궁인들마저 아무 동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궁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일에만 집중했다.
애초에 역심을 바탕으로 시작된 신생 제국이었다.
급조된 제국의 궁인들에게 목숨보다 귀한 충성심이 있을 리 없었으니.
신제국 궁궐은 이미 거대한 제국의 권위보다 눈앞의 공포에 지배당한 지 오래였던 것이다.
“다행히 환마제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호오, 성취가 빠르구나.”
“소소하게 민란부터 시작해서 뿌리부터 한제국을 흔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우리 귀천성이 움직인다면…… 제국과 무림은 서로를 도울 생각도 못 하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뿌리부터라…….”
“사방에서 뿌려 대는 피가 우리에게 시간을 가져올 것입니다.”
혼현마제의 눈빛이 음흉한 야심으로 번들거리고, 선건궁에서부터 짙은 혈향이 밖으로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