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부릅뜰 진(瞋) 불 화(火) : 움직이는 제국(3)
“빌어먹을 세상, 다 죽어 버려라!”
“와아아아아----!”
허름한 옷, 아니 거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저마다 몽둥이나 농기구, 돌을 주워 들고 호족들의 집을 덮쳤다.
“이, 이놈들이 미쳤구나! 막아라! 전부 막아!”
퉁퉁한 풍채에 귀한 비단을 걸친 사내가 막무가내로 소리쳤지만, 그의 하인들조차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파악-!
“으악! 무, 무슨 짓이냐? 하지 마! 살려 다오!”
“죽어! 이 돼지 새끼야--!”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몽둥이를 내리쳤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한 번, 두 번.
퍽! 퍽! 퍽!
“사, 살려…….”
퍼-억!
피가 튀고 살이 곤죽이 되며 감각이 무뎌졌다.
혈향이 짙어지면서, 점점 공포심도 마비된 듯했다.
겁을 먹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탐욕스럽고 잔인하게 변해 갔다.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짐승을 잡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이게 바로 천벌이다-!”
“하늘의 벌이다! 네놈들도 대가를 내놓으란 말이야!”
“우아아아아---!”
점점 커진 목소리는 힘을 얻고, 사람들은 두려움을 잊고 호족들의 집은 물론 관에까지 쳐들어갔다.
“죽어라!”
“저놈들을 죽여라!”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잔인하게 외쳤다.
그리고 피가 튀고 살이 터져 나가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잃은 것이 없었던 약자들은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죽여 갔고,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던 이들은 당황 속에서 죽어 가거나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시작된 민란이 결국 황도에도 전해졌다.
* * *
한제국 조정.
탕--!
“한중의 민란이 극심해져서 군문을 흔들 정도다. 한데 왜 이에 대해 아무 대책을 내놓지 않는 것인가!”
“신 정위 상복 아룁니다. 신제국이 군사를 움직여 한중군이 이를 경계하는 사이에 황망하게도 신제국과 본 제국의 경계에서 빚어진 일입니다.”
“경계?”
“아뢰기 망극하오나 역적들의 제 소유를 주장하는 곳이라 관리의 힘이 미약하고 호족들은 근처 귀천성 세력과 합세한 바, 이 민란을 신제국이 조장한 것이 아니라면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정위 상복은 총명하고 결단력이 좋아 황제가 신임하는 신하였다.
특히 황제가 그의 장점으로 꼽는 것은 상황의 전후를 파악하는 통찰력이었다.
이번에도 무림에서 들어온 정보를 알고 있는 황제로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만큼 추측해 낸 상 정위의 능력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면 상 정위의 생각은 무엇인가?”
“소신의 생각에 이번 민란은 길게 이어질수록 역도들의 조정에 이를 이용하고자 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니 군을 파견하여 조속히 이를 마무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이들도 상 정위의 생각에 동의하는가?”
“신 복신사마 맹경 아뢰옵니다. 역도 조정의 군대 움직임을 보자면 곧 한중을 노리고 있는 것이 명백한 바, 상 정위의 생각이 백번 옳다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군부에서 명망이 높은 노장군 맹경까지 동의하자, 신하들이 다 함께 황제에게 주청을 올렸다.
황제는 상대를 신제국으로만 좁히고 은근히 무림을 무시하고 있는 신하들의 좁은 시야가 아쉬웠지만, 상황 판단이 나쁘지 않았다는 데에 만족했다.
“민란을 다스리는 데에 누가 적합하겠는가?”
황제의 물음에 젊은 장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앞으로 나섰다.
이미 인정받고 있는 장군들은 제압하기 쉬운 민란으로는 크게 공을 인정받기 힘들었기에 뒤로 물러났다.
오히려 개중에는 은근히 자신들의 수하를 밀면서 그들의 공을 챙겨 주려는 이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결국 젊은 장수들을 두고 군부에서 옥신각신 나서는 그때.
“신 태자 한유강 아뢰옵니다.”
갑자기 황태자가 나섰다.
대전 안에 순간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황태자에 대한 평가는 둘로 갈렸다.
하나는 황제를 전혀 닮지 않은 작고 마른 체격에 무예 수련을 멀리하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는 평가. 다른 하나는 학문에 관심이 많아 학자들을 가까이하며, 세심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는 평가.
하지만 상반된 평가에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황태자가 군사적으로는 재능이 없다는 것.
그런데 그런 황태자가 스스로 민란을 제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호오, 태자가?”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보았다.
황제 또한 세간의 평가를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소자 이제 약관을 넘겼습니다. 제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허!”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황제의 반응에 황태자가 용기를 얻어 말을 이었다.
“또한 황궁에만 있으면 세상에 대한 소견이 좁아질 수 있으니, 이참에 백성들의 삶과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소자, 반드시 어리석은 백성들을 벌하고 돌아오겠나이다!”
황태자 한유강의 말에 신료들이 뒤로 빠졌다.
젊고 경험 없는 황태자가 안전하게 경험을 쌓기에 민란은 좋은 소재가 된다고 생각했기에, 누구도 그를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신료들이 모두 찬성하는 기색이자,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좌장군 표서량.”
“예, 폐하.”
“그대가 표기군을 이끌고 황태자를 보필하라.”
“명을 받듭니다, 폐하!”
“무운을 바라지. 황태자도 무사히 돌아오라. 이만 조정을 파한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어전 회의가 끝나고 황제가 자리를 뜨자, 신료들도 삼삼오오 뭉쳐서 밖으로 나갔다.
화제야 한 가지였다.
갑자기 황태자가 나선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심심치 않게 적통 황자 한진화에 대한 말이 나오면서, 대전에 남아 있는 황태자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 갔다.
“다들 없는 놈에 대해 떠들어 대는군요.”
“말 그대로 없는 이입니다. 동궁으로 가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좌장군이 여유롭게 황태자를 달랬다.
그런 좌장군의 권유에 마지못해 나가면서 황태자의 눈은 마지막으로 비어 있는 용상을 향했다.
‘공을 세울 것입니다. 부황께서 그놈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공을 세울 것입니다!’
황태자가 입술을 앙다물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남아 있던 황제의 눈들은 끝까지 사람들을 좇았다.
“좌장군과 동군전으로 갔다고?”
내관의 말에 황제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겁 많은 놈이 왜 욕심을 내나 했더니, 좌장군이 부추긴 모양이군.”
황제는 오늘 황태자가 나선 것에 대해 겨우 그 정도 평가를 내렸을 뿐이었다.
사뭇 박한 평가에 태사 조위례가 쓴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매정하게 구시니 자꾸 엇나가시는 겁니다.”
“흥, 그렇게 엇나갈 것이라면 나는 비뚤어졌어도 한참 삐뚤어졌어야지요.”
황제가 조 태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조 태사는 황제의 말에 시원하게 웃었다.
“허허허, 재밌는 말씀이로군요. 폐하에 대한 제 평가가 박했다는 겁니까?”
“아니오?”
“이런, 그게 제 탓이로군요, 폐하께서 이리 비뚤어지신 것이.”
조 태사는 자신이 박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연스럽게 황제를 비뚤어진 제자로 만들었다.
그런 조 태사의 능청스러움에 황제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태사 덕에 내가 이리 웃습니다.”
“다행이군요.”
“요즘은 웃을 일이 많습니다. 황후도 기운을 차려 가고, 태사께서 황궁 출입도 해 주시고 또…… 벼르고 있었던 버러지들도 꿈틀거려 주니 말입니다.”
황제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조 태사는 황제가 들고 있던 문건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잠깐 눈을 감았다.
깜깜한 평온 속에 코끝으로 혈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또 피바람을 불겠구나.’
황제는 배부른 범이었다.
범은 배가 고플 때도 사냥을 하지만, 그저 눈에 거슬려도 물어 죽인다.
“사례교위에게 좌장군의 주변을 살피라 하십시오.”
“저는 은퇴한 태사 나부랭이지, 종정이 아닌데요.”
호가호위하던 여우도 은퇴하면 겁나는 것이 없는 법이었다.
황제가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는 조 태사를 노려본 뒤, 옆에서 웃음을 참고 있던 태감에게 말했다.
“……사례교위 들라 전하라.”
“예, 폐하.”
태감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나갔다.
“우리 황자님은 소식이 있습니까?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매정하지 않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 태사의 얼굴에 화사한 온풍이 불었다.
그것은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에서 꼬박꼬박 보내옵니다. 의무적이긴 하지만 본인도 가끔 전서를 보내는데…….”
황제가 말을 멈추고, 조금 난감한 얼굴로 무언가를 꺼냈다.
옥함에 고이 보관한 전서인데 그것을 받아 든 조 태사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흐음…….”
조 태사의 신음에 황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때와 글씨체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군요. 황후가 귀엽다며 즐거워합니다.”
황제의 말에 조 태사도 마지못해 웃고 말았다.
“이번에 오신다면 단단히 가르쳐 드려야겠습니다.”
조 태사는 이 대째 황실의 스승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 * *
진화는 결국 제갈길현의 앞에 섰다.
한수림과 달리 까맣게 죽은 안색과 눈 밑이 움푹 꺼지도록 마른 몸체.
비단 금침과 밑에 있는 좌활백설옥이 가득한 방이 무색하도록 병색이 완연했다.
그가 한때는 무림을 좌지우지했던 십이좌회 일인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행색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제갈길현이 몸속이었다.
“단전에 독기가 섞여들었습니다. 최대한 단전을 건드리지 않아 보겠지만…….”
무인에게 단전을 잃는 건 죽음과 비견되는 일이었다.
단전에는 평생이 담겨 있었다.
무인으로서의 내공, 치열한 고민, 심상, 깨달음, 목숨을 건 세월.
막상 그런 상황 앞에 놓이자 진화는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옆을 보자 제갈가주가 단호한 눈빛으로 진화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진화의 손에 뇌전이 번뜩이고, 그대로 제갈길현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화는 제갈길현의 팔을 통해 말초에 있는 독기를 태우고 곧바로 뇌를 침범하려는 독기부터 막았다.
‘아버지의 단전이 부서지는 건 괜찮지만 멍청해지는 건 조금 곤란하긴 하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제갈가주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제갈길현의 내기에 섞여 들어가 검은 독기를 태웠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천수현인 제갈길현의 정수인가.’
단단하게 뭉쳐진 그릇.
거대한 연못 같기도 하고 호수 같기도 했다.
잔잔하고 평온하며 청명한, 무인 제갈길현이 쌓아 놓은 단전이었다.
검은 독기가 넘실거리는 중에도 물결처럼 출렁이면서도 단단하게 버티는 그것을 보며, 진화는 무림에서 가장 위대한 현인이라 불린 천수현인의 진수를 보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검게 물들어 탁해진 겉을 없애기 위해서도 제갈길현의 호수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제 잘못은 아닙니다.’
진화는 과감하게 뇌전을 뿜었다.
타닷!
“끄으……!”
덜덜덜덜덜-!
수십 년 동안 숨 한번 크게 쉰 일이 없던 제갈길현이 신음을 내며 온몸을 달달 떨 정도로 괴로워했다.
의선이 놀라 제갈가주와 진화를 보았다.
홍랑대부 초산하가 부적을 태우고 향의 개수를 늘렸다.
의선의 손도 부지런히 금침을 꽂았다.
방에서 담담하게 있는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진화와 제갈가주뿐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제갈길현의 치료에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숨 한번 크게 쉬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다만 한수림과 달리 천수현인 제갈길현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이런 쓰불…….”
깨자마자 걸쭉한 욕지거리를 뱉는 것도 한수림과는 달랐다.
“깨셨습니까?”
“……호로 새끼냐?”
담담하게 묻는 제갈가주도 놀라웠지만, 밑도 끝도 없는 욕설로 자신의 상태를 묻는 제갈길현의 말엔 진화는 물론 의선과 홍랑대부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전이 완전히 부서진 건 아니랍니다.”
제갈가주에게는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쓰불. ……더럽게 아프네.”
제갈길현이 신음을 내며 불평했다.
그저 살아 있는 아버지를 보고 싶을 뿐이라던 효심 넘치는 아들과 무림에서 가장 위대한 현자라 불리는 아버지의 감동적인 재회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진화와 의선, 홍랑대부가 상상하던 무림의 현인, 천수현인의 모습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어쩐지 열심히 치료해 주고도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때.
“병신처럼 누워 있었지만 귀는 뚫려 있었다. 네가 광마제의 최종 제물이었다고?”
제갈길현의 눈이 진화에게 향했다.
“네 운명 또한 역천마제의 심장에 닿아 있겠구나.”
제갈길현이 진화를 향해 사납게 웃었다.
독기는 없어졌지만 고통스러운 치료를 겪으며 제갈길현의 행색은 이전보다 망가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눈 가득 헌헌하게 빛나는 현기가 칼날처럼 뿜어져 나오자 모두가 압도당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