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부릅뜰 진(瞋) 불 화(火) : 움직이는 제국(5)
정의맹이 모든 정파 무림 무단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귀천성의 공격에 대한 정의맹의 대응은 이전 생에 진화가 기억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쉐에에에엑---!
퍼---억!
“서둘러라! 빨리 정리하고 오늘 밤 안으로 표혈문과 적사문까지 친다!”
“추-웅!”
적호단주 팽치의 외침과 함께 적호단원들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적들을 베기 시작했다.
거의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전투.
적호단은 그들을 포로로 잡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결정이었지만, 이 또한 정의맹의 결정이었다.
포로들을 이동, 체류시키는 데에 드는 시간과 비용, 인적자원을 아끼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귀천성 포로들이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진짜 귀천성 성도들은 교화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역천마제의 사상과 신념을 따르는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귀천성을 따랐고, 이전 전쟁에선 그들을 살려 두는 바람에 많은 정파 무인들이 되레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래서 정의맹과 총군사인 제갈가주는 이전보다 더 철저하고 잔인하게 이번 전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적호단이 이렇게 일방적인 전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파지지지지짓---!
“끄아아아악-!”
푸른 불꽃과 함께 고통스러운 비명이 전각 안을 크게 울렸다.
표혈사마의 둘째, 황호추마(黃虎椎魔) 전두.
작은 마을의 푸줏간을 운영하다, 자신의 딸을 죽인 호족과 그 집안은 물론 마을에 있는 사람들 전부를 망치로 때려잡은 인간 도살자. 자신을 추적하는 관병 이백을 죽이고 그대로 귀천성에 투신했다.
그는 어떤 모진 고문도 이겨 낼 듯 단단한 사내였지만, 하얀 뼈가 드러나도록 온몸을 관통하는 푸른 불꽃에는 별수가 없었던 듯했다.
전두는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공중에서 발버둥 치다가 결국 죽었다.
털썩.
땅으로 떨어지며 전신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새하얗게 익은 피부는 검게 탄 핏줄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눈을 감지 못한 전두의 얼굴은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두, 두야!”
눈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중년인이 피눈물을 흘렸다.
표혈사마의 첫째이자 표혈문주, 금수신마(禽獸殺魔) 강효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죽은 의동생과 그를 죽인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운 얼굴과 압도적인 힘 그리고 신비로운 푸른 불꽃.
‘천신의 재림인가? 아니면…… 천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신이면 어떻고, 천벌이면 어떠한가.
지금 세상이 더 지옥 같고, 사람들은 전부 개새끼보다 못한데!
“씨발, 뼈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릴 테다-!”
표혈문주가 피눈물이 흐르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탓-!
거대한 덩치가 땅을 박차고 빠르게 전두를 죽인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휘이이익-!
양손으로 든 거대한 도끼가 사내의 몸을 동강 낼 듯 힘차게 돌아갔다.
파팟-!
콰-앙! 퍼-억!
사내가 피한 자리에 깊은 도끼 자국이 남았다.
표혈문주 강효경은 도끼가 땅을 찍을 반발력을 이용해서 다시 도끼를 옆으로 휘둘렀다.
휘이이익---!
아슬아슬하게 사내의 옷자락을 스치고, 사내의 검이 표혈문주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휙! 휙휙휙- 채—앵!
표혈문주는 거대한 도끼를 손바닥에서 자유자재로 회전시키며 사내의 검을 막고, 반대로 사내의 비어 있는 옆구리를 노렸다.
휘이이익--!
곧 저 아름다운 몸뚱어리가 두 쪽으로 쪼개서 피를 뿌릴 것을 상상하며 포혈문주의 양팔과 등에 빠짝 힘이 모였다.
그때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포혈문주의 귓가에 울렸다.
“내 이름은 남궁진화, 당신을 죽인 자의 이름이지. 지옥에 가서 전해.”
“어, 어떻……!”
표혈문주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두 쪽으로 나뉜 것은 그의 몸이었다.
표혈문주는 진화의 검을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막은 것은 이미 자신의 몸을 베고 나오는 검이었다.
“문주님-! 씨발, 전부 쳐라--!”
진화는 별다른 말 없이 대장 격으로 소리친 사내의 앞으로 움직였다.
쉐에에엑---!
파밧파밧팟-!
진화의 손에서 펼쳐진 섬점십삼검뢰 여여일식이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수십 명의 사내들 사이에서 뇌전을 번뜩였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몸을 관통한 뇌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심장을 멈추었다.
진화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조용히 피가 흘러나왔다.
표혈문주의 방 밖을 막고 있던 남궁구와 남궁교명, 현오가 갑자기 조용해진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
안쪽의 광경에 누군가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한중강자라던 표혈문이 이렇게 끝나는군.”
“저놈들이 알 리 있었겠어? 적호단에 경지를 넘어선 절대 고수가 숨어 있을 줄은…….”
자신들이 봐도 할 말을 잃을 정도로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표혈문주의 방에서 서 있는 사람은 진화 혼자였다.
그리고 진화의 발밑에는 피가 웅덩이를 이룰 정도로 수십 명의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디 죽은 자들에게 지옥의 맛을 보여 주소서.”
현오의 불경 소리에 남궁구와 남궁교명도 아찔한 광경에서 깨어났다.
“이제 올라오는 놈들도 없는 걸 보니, 아래쪽도 정리가 끝난 모양이군.”
“바로 밑엔 팽가 형제랑 다른 녀석들이 막고 있고, 그 밑에는 부단주가 막았을 테니까.”
“암. 어지간해서는 우리 집 마녀를 뚫고 들어오긴 힘들지.”
적호단의 전략은 간단했다.
진화가 수뇌부를 정리하는 동안 진화의 조원인 관도생들이 진화를 보호하고, 적호단은 그사이 적들을 완전히 부숴 놓는다.
적호단이 진화의 실력을 완전히 신뢰하기에, 상대가 진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정보의 불균형을 이용한 전략이었다.
“이제 남은 건 적사문인가?”
진화가 덤덤한 얼굴로 일행에게 다가왔다.
“피 닦으십시오.”
남궁교명이 품에 있던 수건을 진화에게 건넸다.
붉은색 적호단 단복이 검게 보일 정도로 피를 적신 진화의 모습에 남궁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녀가 또 기겁하겠네. 도련님은 그냥 태워 죽일 수도 있으면서 이렇게 꼭 피 칠갑을 해야겠어?”
남궁구의 타박에 진화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편하게 죽으면 곤란하잖아.”
진화의 대답에 남궁교명과 남궁구가 눈을 크게 떴다.
진화의 귀천성에 대한 원한이 지독해서? 아니다.
그저 뇌전에 당한 이들의 비명을 듣자면 결코 진화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사문만 처리하면 한중에 있는 귀천성 놈들의 구심점은 전부 없어지는 건가?”
“구심점?”
현오가 처음 듣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에 남궁교명이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귀천성도든 뭐든, 사람이 살려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귀천성 놈들의 물자를 보관하고 큰 거래를 성사시키는 문파들을 먼저 처리하는 거다.”
“한마디로 말려 죽이는 거지. 귀천성도 놈들, 역천마제 돌아오고 금방 제 놈들 세상이 될 듯 날뛰더니만, 이제 한동안 쳐들어오는 건 꿈도 못 꿀 거다.”
남궁구가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현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쳐들어오는 놈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아예 쳐들어올 생각도 못 하게 미리 정리를 하는 거로군.”
“다른 곳도 시작했겠지만, 아무래도 이쪽이 제일 빠르지. 누구 덕에.”
남궁구가 슬쩍 진화를 보며 말했다.
확실히 적호단이 한중군에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겨우 사흘 만에, 하루에 하나씩 세 개의 문파가 완전히 부서졌다.
그로 인해 한중권문을 공격하던 귀천성 무사들의 공세가 멈추었다.
다만 진화가 죽인 귀천성 마두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대단한 터라, 소문이 퍼지면 금방 이 전략도 쓰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놈들이 우리 도련님을 보고 꽁지 빼기 전에 부지런히 사냥하러 가자고.”
남궁구의 말과 함께 진화를 선두로 일행은 적막이 감도는 표혈문 건물을 나갔다.
밖에는 일방적인 학살마저도 정리 중인 적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을 붙이고 떠난다.”
“충!”
죽은 자에 대한 존중도 없었다.
적호단주의 명과 함께 적호단은 표혈문에 불을 붙이고 다시 여정을 이어 갔다.
정의맹의 결정은 단호했다.
귀천성의 말살.
정의맹은 정파 무림의 정의와 자존심을 승리에서 찾기로 결정했고, 그 첫 번째 방법이 바로 선제공격이었다.
곧 사방에서 정파 무림의 승리 소식이 들렸다.
동시에 창천화룡 남궁진화를 비롯한 새로운 영웅들의 이름이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
* * *
“모두 죽여라-! 무도한 반역자들에게 지엄한 황실의 위엄을 보이라!”
“추—웅!”
황태자의 외침에 일천 명의 군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눈에도 그러했다.
두근두근.
언제나 그리던 순간이었다.
검 대신 책을 잡으면서도, 항상 머릿속에는 이런 상상을 그려 왔다.
무소불위, 무적의 군주.
자신이 수많은 군사의 앞에서 용감한 군주처럼 소리치고, 군사들은 그의 목소리에 기세를 끌어 올리는 모습.
그 상상이 실제로 이뤄진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
황태자의 군사들 앞에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살려 줘! 제발 살려 주세요-!”
“아아악---!”
“아이는 안 돼! 아아악! 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감히 역적들과 함께했던 이들까지 끌고 나와 벌을 내렸다.
“천벌을 받을 것이다-! 네놈들이야말로 천벌을 받아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잃은 젊은 여인이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여인의 저주 같은 절규가 백마를 타고 즐거운 듯 이 광경을 보고 있는 황태자에게 향했다.
“저, 저! 저년을 죽여라! 죽여! 전부 죽여라-!”
놀란 황태자가 고함을 지르며 명령을 내렸다.
퍼어억-!
어느 군사가 휘두른 도끼에 여인의 머리가 깨지며, 여인은 비명도 없이 죽었다.
“이이익! 뭣들 하느냐! 전부 역적 놈들이다! 국법을 어긴 놈들이란 말이다! 전부 죽여라-!”
놀란 황태자는 지레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인에게 겁을 먹은 것을 숨기기 위해 더 잔인한 명령도 서슴치 않았다.
“불을 질러라! 놈들의 흔적을 전부 태워 버려-!”
황태자의 명령에 마을 하나가 불길에 휩싸였다.
“잘하셨습니다. 황제는 백성을 두렵게 만들 줄 아셔야 하는 법입니다.”
“하하, 하, 그, 그렇지요. 화, 황제가 되려면 위엄을 보여야지요. 하하하.”
좌장군 표서량의 칭찬에 황태자가 어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흑군에서 벌어진 민란도 이제는 거의 정리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한정된 임야가 모두 불에 타고 중요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곳들이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어 버렸다.
길이 망가지고 마을이 없어지면서 흑군은 물론 인근 군현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호족들과 관리들의 불만도 민란이 아니라 황태자군을 향했다.
하여 이 모든 소식은 다시 황도로 올라갔다.
탕-!
“지방 관리들의 원성이라니요! 감히 이 황태자가 민란을 제압하는 데에 그자들은 돕지는 못할망정 상소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황태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곁에서 눈을 감고 있던 좌장군은 물론, 그런 좌장군의 곁에선 표기군 장수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무덤덤한 속에서 혼자 불같이 화를 내는 황태자의 모습이 퍽 이질적이었다.
좌장군이 손을 들자 장수들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황태자의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좌장군의 명을 따르는 모습.
황태자가 표기군과 완전히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인 동시에, 처음부터 표기군을 이끄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장수들이 나가고, 좌장군이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흥분한 소처럼 날뛰던 황태자가 당연한 듯 얌전해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좌장군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일견 좌장군을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정치는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황자들이 황태자 전하가 큰 공을 세울 것을 경계하지 않을 리 없지요.”
“그, 그건 그렇지만…….”
“전하께서는 폐하의 명을 수행하면 그만입니다. 완벽하게 민란을 제압하면 누가 감히 실책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겠죠?”
“예. 지금까지 잘하고 계십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폐하의 마음에 드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이번에야말로 훌륭하게 군을 이끌고 황실의 위엄을 세우신다면, 폐하께서도 전하를 달리 보실 겁니다.”
“하긴, 온갖 잡소리에 휘둘려 뭐 하겠습니까. 부황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되지요.”
황태자가 가장 바라는 것은 황제의 인정이었다.
좌장군은 황태자를 칭찬하면서 애당초 그가 세웠던 목표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안정된 황태자를 향해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성심을 강건하게 하십시오. 다신 아랫것들에게 마음을 보이지 마세요. 태산같이 굳건한 군주의 위험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예, 예, 외숙.”
매섭게 날아드는 좌장군의 눈빛에 황태자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자신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황태자의 모습에 좌장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황태자가 마음을 다스리는 와중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좌장군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문밖에서 표기군 소속 장수 하나가 급히 들어와 몸을 숙였다.
“정의맹 적호단이 마을에 들었습니다.”
“정의맹? 무림 놈들이 아니냐.”
고작 무림 놈들의 등장에 이 난리란 말인가.
좌장군의 질책성 눈빛이 젊은 장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자 젊은 장수가 머뭇거리듯 말했다.
“적호단에 동해왕 전하께서 계십니다.”
“뭐야!”
탕-!
방금까지 들은 충고는 온데간데없이 황태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좌장군 표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