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진짜와 가짜(1)
적호단은 표혈문을 치고, 흑군과 광한군, 한중군 일대 귀천성 세력의 마지막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적사문을 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적사문(赤絲門)은 본래 붉은 옷을 입는 도가 계열 문파로, 첩첩산중으로 이어진 흑군과 광한군 외각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도가 계열 문파의 구심점이었다.
다만 그들은 귀천성과의 전쟁 중에 역천마제에게 감화되어 귀천성의 편으로 돌아섰다.
믿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들의 배신은 정의맹에 큰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들로 인해 광한군 외곽의 정의맹 소속 도가 문파들이 전멸을 당했고, 한중까지 길이 열리면서 정의맹 세력이 뒤로 밀려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의맹이 한중으로 밀려날 때, 적호단주 팽치는 적호단의 말단으로 당시 전쟁에 참여했었다.
“복수의 시간이군.”
백성들과 중소 문파의 후퇴 시간을 벌기 위해 수많은 적호단원들이 죽어 갔었다.
적호단주 팽치 또한 그때 많은 동료를 잃었었다.
“익숙한 길이네요.”
그때 당시 팽치와 함께했던 일 조 조장 서장원이 감상에 젖은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곧 마을이죠? 괜찮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대가 적사문이 꽉 잡고 있는 곳이라…….”
“꽉 잡긴…… 사람들은 그냥 사는 거지. 나라가 바뀌는, 무림이 어찌 되든. 백성들은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뿐이다. 괜히 경계하고 위협하지 마라.”
“예. 밑에 애들한테 단단히 주의시키겠습니다.”
“…….”
너한테 한 말인데 왜 애들한테……?
적호단주 팽치가 황당한 얼굴로 서장원을 보았다.
그러자 서장원이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서장원의 표정에 적호단주 팽치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허어! 참. 그때도 그랬었나? 내가 깜빡했네.”
적호단주 팽치는 그제야 서장원이 말단 단원이었던 팽치와 함께 들었던 말을 그대로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방금 팽치가 한 말은 전대 적호단주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제 내가 단주님처럼 생각할 만큼 칼밥을 먹었다는 건가?’
적호단주 팽치는 새삼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단주님은 거기서 잘 계시는가 모르겠군.”
“……잘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하늘은 왜 보십니까?”
“낙양 하늘이 저쪽이던가.”
전대 적호단주 당재는 은퇴 후 사천당문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다.
적호단주와 서장원이 추억에 젖어 있을 때, 앞서 정탐을 갔던 적호단원들이 급하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마을에 군대가 있습니다.”
“군대?”
적호단원의 말에 적호단주 팽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을 급히 불렀다.
깜박깜박.
“……아이 씨.”
적의 앞에선 눈도 깜짝하지 않는 것이 무림인의 기본.
제 앞에서 무방비로 깜박이는 눈을 마주하며 적호단주 팽치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소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보자니 ‘아, 이 새끼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 중앙군이네요?”
저쪽에서도 적호단을 눈치챘는지 군인 몇이 확인하고 달려갔다.
그나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던 진화가 군인의 어깨에 있는 금색 중앙군 휘장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진화가 덤덤한 얼굴로 적호단주 팽치를 보고, 팽치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됐다. 가 봐라.”
결국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적호단은 마을에서 제국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 * *
적호단이 마을에 들었다.
적호단은 적사문 본거지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일전엔 정의맹 소속이었던 작은 세가에 묵기로 했다.
“단주님.”
“현가주님, 오랜만입니다.”
적사문이 바로 산 아래에 정의맹 소속인 세가를 남겨 둔 것은 실로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적아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것이 이 산골 마을을 특징이었다.
적사문은 제법 큰 문파라 어떤 대의를 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산골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그들끼리 뭉쳐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이 마을을 대표 하는 현씨세가도 마찬가지였다.
정의맹에 협조하기는 하지만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고, 세가 소속 무사들도 겨울에 먹을 식량을 사냥하거나 종종 있는 산적을 대비하는 마을 청년들이 전부인 곳이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허허, 그저 거래일 뿐인 걸요. 저희는 잠시 쉴 곳을 드리고, 적호단에선 저희의 가죽을 곡식으로 바꿔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현가 가주가 적호단주를 향해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약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경계하고 웅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적호단주는 현가 가주의 말에 섭섭해하지 않았다.
다만 현가 바로 맞은편에 있는 큰 장원을 향해 시선을 힐끗거렸을 뿐이다.
“중앙군이더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산 넘어 민란군을 제압하러 오셨답니다.”
현가 가주는 일부러 황태자의 군대임을 알렸다.
이 무림인들이 행여 관군과 부딪혀서 마을에 피해를 입힐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황태자의 군대라…… 알겠습니다. 부딪히지 않게 주의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적호단주의 말에 현가 가주가 안심한 듯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현가 가주의 감사는 불과 삼 초도 가지 않았다.
“단주님, 군인 놈들이, 아니 장군이, 아니 누가 찾아왔는데요?”
“뭐?”
적호단주가 얼굴이 와락 구겨지고, 옆에 있던 현가 가주의 얼굴로 하얗게 질렸다.
활짝 열린 현가 대문으로 장수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저 군인들 여기 오는데?”
“뭐야? 저놈들이 왜 여길 와?”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적호단원이 웅성거렸다.
무림인과 관군들은 같은 잔에 담기더라도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동떨어진 존재들이었다.
군인들은 무림인들을 무도한 무법자들로 취급했고, 무림인들은 군인들을 황실의 연약한 방패쯤으로 취급했다.
무림인과 관군은 그렇게 서로를 얕보고, 이렇게 마주칠 때도 서로 모르는 척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군인들이 먼저 적호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갑주를 입은 군인들이 기어코 현가 대문을 넘자, 적호단원들의 눈이 한곳을 향했다.
어수선해진 공기.
검을 닦고 있던 진화가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진화도 놀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
“가 봐야겠어.”
진화가 걸음을 옮기자, 자연스럽게 남궁구를 비롯한 관도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진화가 대문 앞으로 나오고 장수들의 눈이 진화를 향했다.
역시.
정찰 나갔던 장수가 단번에 알아본 것도 이해는 되었다.
인세의 것이 아닌 듯 아름다운 외모는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기 힘든 것이었다.
정찰대 장수의 말처럼 동해왕 한진화가 이곳에 온 것이다.
‘설마 진짜 이곳에 오고도 태자 전하께 인사를 안 왔을 줄이야.’
사실 정찰대를 이끈 장수의 말에 황태자와 좌장군은 진화의 방문을 기다렸다.
표기군 장수들도 당연히 진화가 황태자가 있는 곳에 인사를 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적호단이 마을에 들어서서 짐을 풀 때까지 진화는 소식이 없었고, 결국 황태자의 인내심이 먼저 닳아 버렸다.
황태자가 노성을 터뜨렸고, 좌장군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표기군 장수들을 이곳으로 보냈다.
황태자가 직접 갈 수는 없으니 장수들을 앞세운 것이다.
누군가는 불만스럽게 진화를 노려보고, 또 누군가는 호기심을 담아 신기한 듯 보았다.
진화는 그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그들을 내리눌렀다.
“읏!”
장수들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들은 경악한 얼굴로 급하게 진화를 보았다.
진화는 웃으면서 이미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진화의 무릎 아래 위치가 그들의 자리라는 듯.
그 모습에 장수들은 지금의 이 기운이 동해왕의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장수들을 감싼 기운은 점점 더 무겁게 그들을 옥죄어 오며, 끝내는 그들을 무릎 꿇렸다.
“크읏!”
“…….”
“표, 표기군 비장 우효근이 이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표기군 비장 정지영이 이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표기군 비장군 다섯이 진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그들을 옥죄던 기운이 사라졌다.
표기군 젊은 장수들의 얼굴에는 이제 놀라움을 넘어 감탄이 어려 있었다.
그건 적호단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진화는 그저 남궁세가 막내 공자이자 사고뭉치 관도생들의 우두머리, 혹은 적호단이 풀어놓은 비장의 무기라는 생각이 강했다.
같은 적호단에 진화를 한 떨기 꽃, 혹은 세 살짜리 아기 대하듯 하는 남궁진혜의 존재 때문도 있지만, 진화 스스로 신분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가 본격적으로 위엄을 세우고 표기군 장수들이 진화에게 무릎을 꿇는 광경을 보자, 적호단 사이에도 오묘한 침묵이 흘렀다.
“용건은?”
“민란군 토벌을 위해 저희 표기군을 이끌고 황태자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표기군 장수의 말에 금방 적호단원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진화는 심드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서?”
“예? 아, 혹시 황도나 떨어져 계셔서 모르고 있으셨나 하여, 좌장군께서 형제간에 자리를 마련하여 초대한다 청하셨습니다.”
표기군 장수의 말에 진화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초대는 감사하나 정중히 거절한다 전해라.”
“예?”
진화의 말에 표기군 장수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좌장군의 초대를 거절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무림의 임무를 수행 중이다. 좌장군이 초청한다고 금방 자리를 뜰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서. 황태자 전하에게 이황자가 아쉬워했다 전하게.”
진화가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하는 말에 표기군 장수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좌장군의 초대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황태자의 초대가 아닌가.
아니, 혹시 좌장군이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표기군 장수들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이황자를 억지로 데려갈 수 없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대로 말을 전하는 것.
결국 표기군 장수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가고.
뒤늦게 와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적호단주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황태자라며? 막 그래도 되는 거냐?”
“아, 괜찮습니다. 안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요.”
적호단주를 향해 진화가 씨익 웃어 보였다.
황실에 원하는 것이 없으니, 황태자에게 굳이 친절할 이유도 없다.
진화의 대답에 적호단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 * *
“아아아악-! 이 건방진 놈이 감히-!”
표기군 장수가 진화의 말을 전하고 나간 뒤, 황태자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평소 예민하기는 하지만 조용하고 안정적인 성격이라는 평을 듣던 황태자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진화에 대해서는 그런 평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좌장군 따위의 초청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라…… 허허허허.”
표기군 장수는 진화에게 들은 대로 전했지만, 좌장군은 진화의 속뜻까지 찰떡처럼 알아들었다.
그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외숙, 이놈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 전하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외숙?”
설마 자신의 말을 직접적으로 긍정할 줄은 몰랐는지, 황태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좌장군을 불렀다.
좌장군 표서량이 황태자를 똑바로 보았다.
“지금처럼 동생에게 무시당하고 바보같이 화밖에 낼 줄 모르시니, 이황자가 감히 전하를 업신여겨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외숙!”
탕-!
좌장군의 말에 화가 나서 소리쳤던 황태자.
그러나 좌장군이 탁자를 한번 내리치자 눈을 질끈 감으며 겁을 먹었다.
그 한심한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한심한 모습을 제 손으로 만들었으니. 아니, 이렇게 만들기 위해 십수 년 동안 맞지도 않는 보모 노릇을 하며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그것을 상기하며 좌장군은 자애로운 목소리로 황태자를 달랬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짊어졌으니 오만방자한 것도 이해는 가지요. 그런 것에 일일이 휘둘릴 것 없습니다. 정 형으로서 위엄을 찾고 싶으시면, 보여 주시면 그만입니다.”
“보, 보여 줘요? 어떻게요?”
“무림인들이 가는 곳이 적사고개라 합니다. 마침 우리와 목적지가 같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황태자가 놀라 물었다.
그는 표기군 장수들이 황태자인 그에게는 하지 않은 보고를 좌장군에게만 했다는 것엔 전혀 문제를 못 느끼는 듯했다.
본래 이렇게까지 멍청한 위인은 아닌데, 아마도 이황자의 존재가 황태자의 이성을 마비시킨 듯했다.
좌장군으로서는 참 다행한 일이었다.
“놈들이 적사문이라 하는 무림 방파를 치는 동안, 우리는 인근 민란을 모두 정리하면서 본때를 보이면 됩니다. 이황자에게 진짜 군주가 될 사람은 일개 무사로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다, 황태자로서 군대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무부와 황태자의 격차를 보이시란 말입니다.”
“하! 외숙의 말이 맞습니다. 고작해야 천한 무부들과 어울리는 주제에, 황태자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단단히 보여 주고 말겠습니다.”
황태자가 살의를 불태우며 눈을 빛냈다.
좌장군 표서량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시 후.
황태자를 향해 자애롭게 웃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좌장군 표서량이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의 곁으로 기다리고 있던 부관이 다가왔다.
“알아보라는 건?”
“민란군과 얽힌 일은 없다고 합니다.”
“따로 황명을 받은 것이 없다고?”
“예.”
부관의 말에 좌장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하남 조씨는?”
“없습니다.”
좌장군의 거듭된 확인에 부관이 고개를 저었다.
눈빛으로 다시 물어도 부관의 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좌장군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럼, 정말로 이 새파랗게 어린 황자 놈이 나와 황태자를 무시한 거라고? 믿는 구석도 없이? 허! 허허허. 애송이 황자 놈이 어미 하나 믿고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조만간 집안 어른 무서운 줄 알려 줘야겠어.”
좌장군 표서량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