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진짜와 가짜(2)
공교롭게도 적호단과 표기군의 목적지가 같았다.
적호단은 적사문이라는 도문을, 표기군은 적사문 인근 마을에 숨어든 민란군의 본거지를 토벌하기 위해 움직였다.
결국 서로의 원활한 임무를 위해서는 함께 움직여야만 했다.
혹여 어느 한쪽이 먼저 움직인다면 적사문이 민란군을 돕거나, 적호단이 민란군을 상대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하지.”
“충!”
적호단주의 명에 적호단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처음 진화가 좌장군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일까.
황태자와 표기군은 이후로 진화를 찾지 않았다.
당연히 임무를 위해 적호단을 부르는 일도 없었다.
물론 진화와 적호단도 따로 표기군을 찾지 않았다.
“저 웬수.”
적호단주가 슬쩍 진화를 째려보았다.
적호단주가 표기군을 찾지 않은 것은 순전히 진화 때문이었다.
적호단주야 진화를 완벽하게 적호단 원수덩어리 십 호쯤으로 대하지만, 어쨌든 진화는 동해왕 파군장군으로 황실을 대표해서 무림과 협력 중인 신분이었다. 그런 진화가 표기군과의 협력을 거절한 마당에 적호단주인 그가 진화의 결정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진화가 단지 귀찮아서 좌장군의 초청을 거절했을 것이 뻔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때아닌 눈치 싸움이었다.
적호단이 일어서면 감시하고 있던 표기군도 준비를 시작하고, 표기군이 출발 준비를 마치면 적호단도 함께 출발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살피며 상대를 따라서 움직이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 속에, 태연한 사람은 진화뿐이었다.
찌릿.
한쪽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고개를 돌린 진화는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진화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황태자의 눈빛엔 살기마저 맺혀 있었지만, 제 손으로 개미도 죽여 본 적 없는 사람의 살기에 진화가 위협을 느낄 리 없었다.
꾸벅.
진화가 태연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알은척을 하고 곧장 자리로 돌아갔다.
“저러다 곧 터지겠군.”
“공자님께서 황태자의 속이 터지든 뭐든 신경이나 쓰실까?”
“만두 터지는 건 신경 쓰던데. 어째 황태자의 처지가 만두보다 못하군. 아미타불.”
남궁구와 남궁교명, 현오가 애꿎은 표기군 군사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황태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적호문과 표기군이 함께인 듯 함께가 아닌 채 산으로 들어간 지 한 시진.
산길을 타고 고개 하나를 넘자, 작은 마을이 보였다.
검은 기와로 장식된 꽤 큰 장원에는 도문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이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흑백이 아닌 홍백색이었다.
“적사문이로군.”
정파와 도문을 배신하고 귀천성에 귀의한 부도(不道)한 집단.
그들을 발견한 적호단주 팽치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복수의 시간이네.”
“바로 갈까요?”
“망설일 생각인가?”
“흐흐, 그럴 리가요.”
적호단주 팽지와 일 조 조장 서장원이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적호단 말단부터 시작한 그들은 적사문에 갚지 못한 빚이 있었다.
“홍의십-조들, 길 뚫어라! 가자-! 저 배신자들을 전부 죽인다!”
“추—웅!”
공교롭게도 적호단 단복의 색이 붉은색이었다.
어쩐지 신이 난 듯한 적호단주의 명에, 홍의십수로 불리던 관도생으로 이뤄진 적호단 십 조가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선두는 단연 남궁진화였다.
적호단에 있어 민란군 따위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일반 백성을 향한 학살은 결코 정파 무림인들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표기군 입장에서도 껄끄러울 수 있는 무림인들을 적호단이 맡아 준다면 지금까지처럼 피해 없이 민란을 진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생각으로 함께한 길.
표기군은 사전에 아무 언질도 없이 적을 향해 돌진하는 적호단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마을에 있는 민란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적사문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저, 저기!”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젊은 장수들의 눈에 제일 앞에서 무림인들을 끌고 있는 동해왕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때.
“표기군은 들으라!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역도 무리를 벌한다-!”
“추웅!”
젊은 장수들은 물론 군인들의 시선까지 적호단에 빼앗길세라, 황태자의 고함이 울렸다.
히이이이잉---!
새하얀 백마가 산길을 뛰어내리기 전 크게 울었다.
황금색 갑주를 입은 황태자가 팔을 내리고, 한제국이 자랑하는 정예 표기군이 마을을 덮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황태자에게도 더없이 만족스러웠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새하얀 백마와 빛나는 황금 갑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수들과 군인들의 시선이 다른 곳에 있었다.
콰과광----광----!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적사문의 굳게 닫힌 문으로 푸른 번개가 내리꽂혔다.
이제 거의 모든 군사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 * *
진화가 검을 휘둘러 대문을 베어 내고, 그 뒤에 달려온 팽가 형제가 문을 완전히 부숴 버렸다.
“전부 죽인다!”
“추웅!”
안에 와글와글 기다리고 있는 적사문도들.
그들의 수를 보고도 진화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고, 관도생들 또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막아라-!”
“이놈들! 더는 들어가지 못한다-!”
붉은 도복을 입은 적사문도들이 진화와 일행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때, 남궁구와 남궁교명, 현오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쉐에에엑---!
챙! 챙! 쉐에엑-!
남궁구의 천풍검법은 복잡한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부는 바람과 같았다.
특히 무한보와 함께 움직이는 남궁구는 적사문도들의 손가락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그들의 팔과 다리를 무작위로 베었다.
파팟-! 팟--!
“허어! 극락왕생하시게.”
“염불은 염병! 이래 봬도 도문 사람들이잖아! 얘들은 우화등선이잖아!”
현오의 축언에 남궁교명이 딴지를 걸었다.
누가 소림을 향해 무림의 자애로운 등불이라 했던가.
현오의 주먹에서 펼쳐지는 금강붕산권은 바위를 가루로 만드는 파괴력으로 가는 곳마다 적사문도들의 머리를 터뜨리며 피분수를 일으켰다.
남궁교명은 거기서 멀찍이 떨어져서 대연십수식을 펼치며 적사문도들의 질서를 부수고 있었다.
질서가 부서진 틈으로 다른 관도생들이 뛰어들었다.
“허어! 대체 뉘시길래 손 속이 이리 잔인하단 말이오!”
다른 적사문도들과는 확연히 다른 복장.
적삼이라도 하나 더 걸치면 윗전이라 했던가.
진화는 현오가 알려 준 불문과 도문의 비밀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선 노도장을 향해 다가갔다.
쉐에에엑--!
퍼—엉!
적사문은 귀천성에 귀의하기 전에도 인근 도문들의 구심점으로 이름 높던 곳이었다.
그들이 가진 명성에 걸맞게 노도장이 그린 유려한 태극이 진화의 천뢰우전을 막아 냈다.
무당의 태극권처럼 세심한 기운의 조절.
세찬 물살을 받아 내는 강처럼 변칙적인 기운의 강약을 담은 권법이 강기 일변의 진화의 검을 막아 내다 못해 진화를 몰아붙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진화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음?”
“무당보다 작군.”
“뭐라!”
진화의 말에 노도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중원 제일 도문이라는 무당과 비견될 곳이 몇 있겠냐마는, 진화의 말은 그 몇 군데에 적사문이 있다고 생각한 노도장의 자부심을 건드렸다.
“누가 감히 적사문의 도를 업신여긴단 말인가-!”
우-웅.
노도장의 도포가 크게 펄럭이며 그 안의 거대한 기운이 진화에게 쏘아졌다.
“세찬 물살도 감당할 수 있을 때의 일이지. 종지만 한 그릇으로 감히 바다를 논할까.”
노도장이 쏘아 낸 장기를 본 진화가 공중을 밟듯 몸을 꺾어 기운을 흘려보내고, 땅으로 내려서던 힘을 이용해서 그대로 노도장을 향해 검을 뻗었다.
“청해(靑海)를 보여 주지.”
진화의 검에서 푸른 검강이 빛을 뿜고, 동시에 뇌전을 담은 창궁무애검법 동해창공(同海蒼空)이 노도장을 덮쳤다.
파파파파팟----!
“크어어어억!”
노도장의 목을 향해 날아간 번개는 팔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는 노도장을 그대로 본관 안쪽으로 날려 버렸다.
퍼----엉!
굉음과 함께 부서진 적사문 본관의 문.
그 안으로 진화와 관도생들이 뛰어들었다.
밖에 있는 이들은 이미 적호단주와 다른 적호단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 * *
한제국의 정예군을 멋지게 지휘하며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다짐.
황태자의 다짐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색, 같은 재질의 적색 무복.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독 진화만 눈에 띄었다.
태생부터 다른 듯 우러러보게 되는 자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기품.
진화가 달려 나가자 표기군 장수들의 눈이 저절로 진화를 좇았다.
쉐에에에엑----!
하늘에서 쏘아진 듯, 새파란 번개가 굳게 닫힌 문에 내리 꽂혔다.
퍼---엉!
문이 터져 나가고, 놀란 표기군 병사들이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해왕이 무림인이라는 걸 소문으로만 들었던 장수들은, 실제로 대면하게 된 동해왕 한진화의 무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파파파파파팟---!
적호단과는 다른 불에 타는 듯 새빨간 홍의를 입은 수십 명의 도인들.
그 속에서도 진화는 춤을 추는 듯 자유롭게 움직였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황족.
그중에서도 하늘이 내려 준 장수, 천장이라 불리던 현 황제를 꼭 닮은 무위였다.
“전부 죽인다-!
“추-웅!”
진화의 명에 검을 빼 든 무림인들이 무기를 든 적을 향해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었다.
채—앵! 챙챙--!
처음 보는 무림인들의 전투.
하늘을 날아오를 듯 담을 뛰어넘고 건물 외벽을 타는 것은 물론.
퍼----억!
콰---앙!
강인한 주먹으로 돌담을 부수고, 적의 살과 뼈를 부수었다.
목숨을 걸고 이어지는 혈투.
가슴이 진동하지 않는다면 무인이 아닐 것이다.
표기군 장수들 또한 짙은 혈향을 풍기며 강인하게 적사문을 뚫고 들어가는 적호단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가 감히 적사문의 도를 업신여긴단 말인가!”
“청해(靑海)를 보여 주지.”
진화가 본관 입구를 막아 선 노도장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엑-!
퍼-엉!
적사문의 정문을 부수었던 것보다 강렬한 번개가 노도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노도장이 급히 양팔로 진화의 공격을 막았지만, 진화의 번개와 함께 안으로 밀려났을 뿐이었다.
단호한 결단력과 압도적인 힘.
적과 아군 모두의 경외심을 자아내는 영웅.
바라던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졌다.
단, 자신이 아닌 한진화에 의해서.
황태자는 진화에게 시선을 빼앗긴 표기군을 보며, 백마를 타고 그들을 앞에선 자신이 온갖 오물을 뒤집어쓴 듯 초라하게 느껴졌다.
“뭐, 뭘 보고 있는 것이냐! 전부 죽여라! 민란군이다! 제국을 거스른 놈들에게 천벌을 내려라! 내 명을 따라라! 황명을 따라-! 내 명을 따라 놈들을 죽여! 무림 놈들에게 지지 마라! 황군의 힘을 보이란 말이다!”
황태자가 붉게 달아오른 악귀 같은 얼굴로 발작을 하듯 소리쳤다.
황태자의 고함에 표기군도 바짝 기세를 끌어 올린 채 마을 곳곳에 숨어 있는 민란군을 상대했다.
두려움에 숨어서 벌벌 떠는 백성들의 모습이 정말 아랫마을 호족의 집을 침탈하고 징세관을 죽인 사람들이 맞나 싶었지만, 황태자의 명은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적사문주를 찾아 안으로 들어가려던 진화가 잠깐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 * *
적호단의 전략은 진화가 수뇌부를 죽이는 동안 관도생들이 진화를 보호하고, 그사이 적호단이 머리를 잃은 적을 몰살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핵심은 진화가 수뇌부를 죽이는 것이었다.
한데 웬걸, 적사문 사대호법이라는 이들을 죽이고 나서 적사문주도 찾았지만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진화의 기감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없지?”
“이 주변으로도 숨은 고수는 느껴지지 않는다.”
당황한 진화의 말에 남궁구와 일행도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들도 장원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적사문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적호단주가 사납게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이런 개새끼가-!”
적호단주 또한 적사문주가 없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주변에 흔적 수색해라!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충!”
적호단주의 말에 적호단원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진화가 적호단주를 향해 다가갔다.
“적사문주가 없습니다.”
“적사문주도 없어?”
적호단주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되물었다.
적사문주의 부재를 알아차린 것이 아니었던가.
되려 진화가 당황해서 물었다.
“……또 누가 없는 것입니까?”
“수-많은 놈들이 없다.”
“네?”
“정보와 달리 인원수가 모자란다고. 죽은 놈들을 봐라. 다 나이깨나 먹은 놈들이다. 쥐 새끼 같은 적사문주 놈이 젊고 쌩쌩한 놈들은 전부 어디로 빼돌린 게 분명해. 으드득!”
첩첩산중.
이미 귀천성의 연락망을 모조리 부수고 적사문 하나만 남아 있었다.
“아랫마을에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바깥소식은 전혀 몰랐어야 할 적사문이 어떻게 우리의 습격을 알고 도망을 쳤을까. 응?”
마치 숨은 먹잇감을 찾아 두리번거리듯 적호단주 팽치가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잔뜩 독이 오른 시선이 한군데에서 멈췄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황태자와 표기군이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