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진짜와 가짜(3)
“단주님!”
적호단원들은 기어코 적사문주와 도망친 문도들의 흔적을 찾아냈다.
하지만 적사문 뒤편의 산을 돌아 빠져나간 것만 확인했을 뿐, 이어진 흔적까지 추적해 내지는 못했다.
“빠져나간 지 꽤 시간이 지난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적호단주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부서진 적사문 문밖을 노려보았다.
표기군이 마을을 헤집으면서 벌이는 학살의 소리가 부서진 문밖에서부터 들리고 있었다.
약한 여자와 아이의 비명, 힘없는 백성들의 발악 소리.
하지만 반란은 감히 무림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오히려 죽어 가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적호단주는 다른 것을 생각했다.
“정의맹을 배신하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마을을 버리다니. 놈들도 각오를 한 모양이군.”
이렇게 작은 마을, 게다가 적사문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마을이었다.
식구 중에 적사문도가 있거나, 대대로 적사문을 섬겨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을을 버리다니.
결국 적사문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택한 것이다.
다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자신들의 사람들만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귀천성의 편에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을 다 버리다니…….”
일 조 조장 서장원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죽은 적사문도들의 시체와 문밖의 광경을 보았다.
문밖에선 표기군의 학살이 계속되고 있었다.
“죽여-! 반역은 삼족을 멸하는 대죄다-!”
“아아악! 그대들이야말로 천벌을 받을 것이다!”
“입을 찢어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살려 두지 마라!”
퍽! 퍽!
“으아악!”
백성들이 저주와 함께 황태자의 고함이 적호단의 귀에 꽂혀 들었다.
조정의 일이라 적호단원들은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황태자의 처사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굳은 얼굴로 문밖은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건 진화와 관도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등신짓도 가지가지지.”
“오.”
진화가 황태자를 향해 혀를 차며 말하자, 관도생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지만 바로 코앞에 형제가 있지 않은가.
비록 몇십 년 만에 만난 이부형제이긴 해도.
“……끄억! 아,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시원해서 그만. 하하하.”
“더러운 놈.”
“더럽게 시원했나 보네. 큭큭큭.”
진화의 눈치를 보며 욕지거리를 참고 있던 일행은 현오의 트림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철수한다!”
적호단주는 적사문의 흔적을 쫓을 추격조를 남기고 적호단의 철수를 결정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을, 심지어 밖에서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서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 *
돌아오는 길은 거의 두 시진이 걸렸다.
발걸음도 그리 가볍지 않기도 했지만 남은 적사문의 습격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호단은 기습의 위험이 높은 협곡이나 절벽의 잔도를 피해 고개를 빙빙 둘러왔다.
“젠장, 놈들의 흔적으로 봐서는 급하게 대피한 형국이 아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요?”
“뭘 물어! 어느 병신 같은 것들이 동네방네 귀하신 분 행차를 알렸겠지!”
적호단주가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누가 기습을 알렸는지는 뻔했다.
인근에 황태자가 백마를 타고 황군을 지휘한다는 소문이 쫘-악 퍼져 있었다.
황태자의 공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소문이 태반이었다.
일부러가 아니라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 토벌전이 인근에 그리 상세하게 퍼졌을 리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자식들 꼴 봤잖아. 민란군이 어디 군이더냐? 황태자의 말을 들었잖아. 벌레만도 못한 것들을 다 죽이라니…… 쓰불, 황군에게 민란은 그냥 더러운 쓰레기 치우는 거나 같아. 잔뜩 공과나 부풀리고 여기저기 알려 가면서 군사나 과시하는 거지.”
“아. 그래서 황군을 그렇게 열심히 노려보신 겁니까?”
“황태자를 두드려 팰 순 없으니까!”
적호단주가 화풀이를 하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놀란 적호단원이 저도 모르게 진화의 눈치를 살폈다.
마침 진화가 선두로 오면서 적호단주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적호단원의 시선을 받은 진화가 싱긋 웃었다.
“저한테 패라고 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군요. 명이 없었군요.”
시켰다면 팼을까, 황태자를?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인데, 진화의 웃는 얼굴을 보자니 자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적호단원이었다.
그때, 진화가 손을 들어 적호단을 멈춰 세웠다.
“뭐야?”
“앞에…… 소란이 있습니다. 적사문의 기척 같은데, 황군과 함께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진화의 말에 적호단주가 얼굴을 찡그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제가 먼저 가서 알아봐도 될까요?”
“같이 가자고 해도 혼자 갈 거잖아. 빨리 꺼져.”
적호단주의 허락이 있고, 진화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전원, 앞에 적이 있다. 조용히 접근한다.”
“충.”
적호단주의 명에 적호단이 조용히 몸을 낮추고 기척을 숨겼다.
그리고 천천히, 남아 있는 사냥감을 노리기 위해 주변으로 흩어졌다.
* * *
적사문이 황군의 소문을 듣고 습격을 눈치챘을 거란 적호단주의 예측은 옳았다.
다만 그들이 눈치챈 것은 오로지 황군의 움직임이었다.
“어차피 황군이 온 이상 모든 이들이 죽을 것이다. 가족들을 두고 우리가 어찌 편히 살 수 있겠느냐.”
적사문주의 말에 문도들의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미 예상하긴 했지만, 지금쯤 그들의 부모, 형제, 친지들이 사는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었다.
“살지 못할 바에는 식구들의 복수를 해 주고 가야지. 천신께 황태자와 황군 놈들의 목숨을 무릉도원의 대가로 삼자꾸나!”
비틀어진 도의 길.
하지만 적사문주는 물론 아무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천신이 보내온 기적을 보았기에, 하늘의 도가 아닌 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반드시 복수하겠습니다.”
젊디젊은 문도들이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의 입구.
지금쯤 그들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험한 길을 피해 온다 해도 아랫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적사문주와 문도들은 입구에서 숨어 황태자와 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적사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마을 입구를 둘러싼 숲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휘이이익--! 휙휙휙휙-!
히-이이이잉!
“적이다! 태자 전하를 보호하라!”
표기군이 황태자와 좌장군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퍽퍽퍽퍽!
“크억!”
공력이 실린 화살이 어디 범인이 날리는 그것과 같을까.
화살이 방패를 뚫고 표기군 군사들의 몸에 박혀 들었다.
“커헉!”
“아아악-!”
얼굴에 튀는 핏방울에 황태자가 비명을 질렀다.
황태자는 어느새 자랑하던 백마에서 내려 표기군에 의해 둘러싸인 후였다.
그런데 방패를 뚫고 들어온 화살에 황태자의 앞에 있던 군사가 맞았다.
그것도 머리를 뚫고 들어온 화살이 입을 뚫고 나온 채로.
군사의 피가 황태자에게 튀자, 황태자는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아아악! 치워라! 내 앞에서 이것을 치우란 말이다-!”
죽은 군사의 자리를 금세 다른 군사가 채웠다.
하지만 황태자의 비명 섞인 말을 듣지 못한 군사들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죽은 군사를 향해 ‘이것’이라 말하는 작태에, 황태자를 지키면서도 군사들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전하를 지켜라! 마을 안으로 이동한다!”
좌장군이 화살을 쳐 내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표기군이 방패를 든 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움직여라! 빨리-! 외숙! 외숙-!”
표기군에 의해 이동하면서도 황태자는 연신 불안한 듯 소리를 지르며 좌장군을 찾았다.
그때, 가지고 있던 모든 화살을 퍼부었던 적사문이 행동을 시작했다.
휘이이익---!
퍼---엉!
“으아아아악!”
적사문주의 장기에 표기군의 방패가 터져 나갔다.
동시에 안에 있던 표기군도 무사할 리 없었지만, 비명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전하를 지켜라!”
비명도 없이 죽은 표기군의 자리를 다른 군사들이 창과 도끼를 뽑아 막아섰다.
“가족들의 복수다-!”
“천신께 대가를 치러라--!”
검을 든 적사문도들이 표기군을 덮쳤다.
챙-! 챙--!
쉐에에엑---!
“태자 전하를 지켜라! 전하를 안으로 모셔라!”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사문도를 베어 내며 좌장군이 외쳤다.
하지만 몸을 떨며 군사들 속에 숨은 황태자가 걸음을 옮기지 않는 이상 표기군이 그를 안으로 데려갈 방법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표기군의 희생이 커졌다.
“쥐 새끼처럼 숨은 것이 누구더냐-!”
챙! 챙!
쉐에에엑-!
“크아아악!”
적사문주가 앞으로 나아가며 그를 가로막은 표기군 군사들을 베었다.
피처럼 붉은 검기가 피를 끌어내는 듯 검이 지난 자리에 군사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퍼---억!
적사문주의 왼 주먹이 젊은 장수의 가슴을 부쉈다.
“커억! 안 돼-!”
“죽어라-!”
푸욱!
끝까지 적사문주의 발목을 잡는 장수의 심장에 검이 꽂혔다.
그 모습에 누구도 적사문주를 향해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나를 지켜! 아아악! 나를 지키라고! 저놈을 죽여라! 저놈을 죽여!”
황태자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는 젊은 장수들에게 제 앞을 막게 하거나 곁에 있는 군사들의 등을 떠미는 등, 서로 상반된 명령을 내리며 이기적인 행태를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오히려 적사문주에게 빈틈을 보였다.
“이--놈! 이 미물보다 못한 놈-!”
표기군의 반도 되지 않는 제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다하고 있었다.
적사문주는 제자들의 젊고 푸릇한 생명을 끊는 이유가 군사들 틈에 숨은 한심한 애송이라는 사실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퍼-억! 팟-!
적사문주의 권기에 유명무실하던 방패가 산산조각이 나고,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젊은 장수들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전하--!”
좌장군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적사문의 제자들이 수십 명에 달하는 표기군을 죽이고 좌장군의 앞을 막아섰다.
필사의 각오로 덤벼든 그들의 끈질김에 좌장군조차 애를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네놈의 목숨을 대가로 바치거라!”
“으아아악! 외숙---!”
적사문주의 두 눈이 피보다 붉은 기운을 뿜고, 피투성이가 된 그의 검이 황태자의 목을 노렸다.
그 순간.
채----앵!
“아아아악-!”
죽었구나 싶던 황태자의 비명과 함께 그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충분히 깊지 못했다.
적사문주의 검이 황태자의 목을 베기 전에 그의 검을 멈춘 또 다른 검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놈은!”
“도망친 사냥감이 여기 있었구나.”
피비린내 나는 검을 맞댄 상황에서도 검은 눈이, 아니 검은 눈 속에서 번뜩이는 무언가가 적사문주의 혼을 사로잡았다.
그때.
“이황자 저하!”
“저하-!”
황태자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인물을 알아차린 표기군이 진화를 불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적사문주가 진화의 검을 밀어냈다.
파팟--!
불꽃이 튀며 적사문주와 진화가 동시에 물러났다.
“아아악! 아아악! 아악!”
불꽃에 놀란 황태자가 피가 흐르는 목을 잡고 정신없이 비명을 질렀다.
표기군 장수들이 급하게 황태자를 에워쌌다.
그들은 황태자를 보호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황족에는 진화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는 그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고 적사문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황자라고?”
“……남궁진화다.”
“뭐? 남궁?”
깊은 산골.
귀천성이 완전히 부활하지 않은 마당이라 그런지 적사문주는 새롭게 나타난 적통 황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적호단 소속이다. 도망친 사냥감을 찾으러 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보며 적사문주는 혼란스러운 듯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가 잃은 것은 단지 지금 할 말뿐이 아니었다.
새롭게 나타난 적통 황자가 무림인이라는 것, 무림인 중에서도 남궁세가의 직계이자 정의맹 적호단 소속이라는 것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적사문주는 문도들과 마을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었다.
남은 제자들을 살리고 도망칠 기회마저도.
“적사문 놈들을 죽여라--!”
“추웅!”
“와아아아아---!”
어느새 숲속에서 적호단이 뛰어나와 남아 있는 적사문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