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266)화 (266/425)

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진짜가 가지는 힘(1)

탕-!

“이런 빌어먹을 돼지 새끼가 감히!”

사례교위 조정호가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분노하게 한 전서를 쥔 채 아버지 조위례를 찾았다.

“아버님!”

안에서 글씨를 가다듬고 있던 조위례의 획이 어긋났다.

매서운 눈빛이 조정호를 향했다.

“예를 잊었구나!”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조위례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정호가 가져온 전서를 조위례의 앞에 보였다.

그러자 조위례가 붓을 놓으며 슬쩍 웃어 보였다.

“그래, 야단맞아서 기가 죽을 놈이면 하남조가 장손이 검을 들지도 않았겠지.”

“아버님-!”

“허어, 참 성가시게 재촉하는구나!”

조위례가 눈살을 찌푸리며 전서를 들자, 그제서야 조정호의 입이 다물어졌다.

잠시 전서를 읽던 조위례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흐음, 그래도 네놈이 착실하게 자리를 잡은 모양이야. 이런 것이 네 손에 닿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아버지?”

조정호가 의아한 듯 조위례를 불렀다.

전서의 내용을 보고 자신처럼 분노할 줄 알았던 조위례가 과하게 여유롭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허허허, 인석아. 조정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이 하남조씨 가문의 가주는 나다.”

“아! 아셨으면 연락 좀 주시지요.”

조위례의 말에 조정호가 허탈한 듯 자리에 앉았다.

“오늘 오전에 전갈이 왔더구나. 오히려 네가 빨리 알아서 놀라는 중이다.”

조위례의 말에 조정호가 씨익 웃었다.

조위례의 인정을 받자니, 사례군에 정보력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 보람이 느껴졌다.

“중원 천하에 하남 조씨의 녹을 먹은 관리가 없는 곳이 없다. 한중군에서도 급히 전갈이 오더구나. 좌장군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말이야.”

조위례가 천천히 조정호와 자신의 앞에 찻잔을 놓고 찻물을 따랐다.

쪼르르르르. 

물 따르는 소리에 차분해졌다. 

“차에는 물이 가장 중요하다. 완전히 잘 끓은 물을 경숙(經熟), 그렇지 못하고 설 끓은 물을 맹탕(萌湯)이라 하지.”

찻주전자에 뜨거운 김이 오르고, 곧이어 진한 차향이 코끝에 전해졌다.

조위례가 짙은 향을 풍기는 찻잎을 주전자에 넣고, 다시 찻물을 부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투차(投茶)지. 차를 먼저 넣고 탕수를 붓는 하투(下投), 탕수를 반쯤 붓고 차를 넣은 뒤 다시 탕수를 더 붓는 중투(中投), 탕수를 먼저 붓고 그 위에 차를 넣는 상투(上投) 등 방법은 많으나 겨울에는 하투, 여름에는 상투, 봄·가을에는 중투를 하는 것이 좋다. 차를 우리는 시간을 맞춰 향의 농도를 조절하기 위해서지.”

잠시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자, 조위례가 우러난 차를 잔에 따랐다.

은은한 차향이 기분 좋게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갑자기 웬 다도냐고 묻지 않는구나.”

“저도 나이가 얼마인데요. 아버님이 차에 빗대어 이야기하길 좋아하신다는 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허허, 그렇구나. 너도 이제 적당히 시간을 우렸구나.”

조정호의 대답에 조위례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황자 저하가 황태자의 위엄을 상하게 했다고 상소를 올릴 거라지?”

“모함입니다. 수하들을 보내 흑군에 있는 관리들에게 제대로 된 보고를 받아 올 것입니다.”

조정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자 조위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관리들의 보고는 내가 받을 터이니, 너는 좌장군의 상소를 그대로 올리거라.”

“예?”

조정호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자 조위례의 미소가 서늘한 비소로 변했다.

“폐서인의 오라비가 아직도 제 주제를 모르니. 이참에 본인의 위치를 알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어찌하시게요?”

“알맞은 온도가 될 때까지 물을 끓여야지. 그리고 투차를 하고 기다리면, 차향을 맡고 손님이 오지 않겠느냐. 오랜만에 조정에 나서야겠구나.”

“……!”

조위례의 말에 조정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손자를 잃고 죄책감에 정사에서 물러섰던 조위례가 그 손자를 위해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잠들어 있던 하남 조씨 일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민란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가 움직였다.

무지렁이 백성들이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나선 민란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조정 인물들에게 중요한 건 군대였다.

‘군대가 움직인다.’는 사실 하나.

황실과 조정 사람들에게 민란이 가지는 의미는 그것 하나였다.

군대가 움직이면 수많은 이권이 움직인다.

수백, 수천 군인들의 물품 하나하나에 수많은 상단이 달라붙었고, 그들이 쥐여 주는 황금이 조정 신료들의 손에 떨어졌다.

돈은 사람을 움직인다.

신료들은 돈으로 사람을 사고 자신의 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다른 황자들의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었다.

황자들이나 후궁전에서 신료들을 움직여 세력을 끌어모으기도 했으니 말이다.

“황태자가 있긴 하지만 그게 왜요? 이제까지 황태자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 무사히 황제가 된 사람이 얼마나 있답니까?”

“맞습니다. 게다가 현 황태자에게 뭐가 있습니다. 든든한 외척이 있습니까, 줄을 선 신료들이 있습니까. 막말로 황제 폐하도 내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료들이 황태자의 앞에 줄을 서지 않은 게지요.”

“그래서, 두 분은 이번에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글쎄요. 이번에 원빈께서 움직이신다는데…….”

“하지만 이번 원정의 보급은 허 대인께서 담당하신다고 합니다.”

상인들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갔다.

그와 함께 조정 신료들 또한 자리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사마, 이번에 사도들은 어찌 구성하실 참인지요?”

“허허, 이미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새삼 다시 구성할 필요는 뭐 있겠소. 대사농께서 근래 징세가 원활하지 않다하시니 국세를 절약할 방도를 찾아 움직일 생각이오.”

“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대사마 허임의 말에 신료들이 눈빛을 번뜩였다.

아, 대사마 허임과 대사농 정조인 사이에 뭔가 거래가 있구나!

별 뜻 없이 이어진 짧은 대화였지만,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의미 없이 하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정에서 관직에 꿰찬 이들 중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곧 바람에 쓸려 나갈 테니.

그만큼 신료들이 나누는 대화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들이 죽고 사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대사마 허임의 입에서 대사농 정조인에 대한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터.

더욱이 대사농 정조인은 귀빈 원씨와 위대장군부 원수경과 친분이 깊었다.

‘염녕전과 영수전이 손을 잡았구나!’

신료들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의 후궁 중에서 직위를 받고 전각을 하사받은 이들은 단둘뿐이었다.

염녕전 귀빈 원씨와 영수전 미인 허씨.

두 후궁은 자식을 여럿 낳을 정도로 황제의 총애를 다투는 데다 각자 장남과 차남의 나이가 같아서 서로를 보길 원수 보듯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집안마저도 대사마를 필두로 한 명문 문인의 집안과 군부에서 뼈가 굵어 이번에 대장군부가 된 집안이라, 이제까지 조정에서도 각자 영역을 지키며 팽팽하게 맞서 왔다.

그런 이들 손을 잡았다니.

‘썩어도 준치라고, 황태자가 공을 세우는 게 경계가 되긴 한 모양이야.’

신료들이 눈을 반짝였다.

누군가는 오늘 밤 대사마의 장원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는 위대장군부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좌장군이 자리를 비운 표기대장군부를 찾을지도 몰랐다.

한편.

조정의 녹을 오래 먹은 신료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모여들었다.

“중서령께서는 이번에 어디로 움직이실 겁니까?”

누군가 은근하게 던진 질문에 중서령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지금 민란이 더 심화되었다는 상소와 함께 황태자의 공을 추켜세우는 상소, 그리고 이황자 저하께서 황태자 전하와 부딪혔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중서령의 말에 노신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예?”

“아니, 이황자 저하께서 어쩌다…….”

중서령은 노신들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은근히 웃었다.

“마침 일이 겹친 게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이황자 저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민란 진압을 방해하고 위엄을 상하게 했다는 상소가 올라왔지 뭡니까.”

정말 웃겨서 웃는 건지, 기분이 상해서 웃는 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였다.

“허어! 그런 것이…….”

“아니, 그런 것이 올라오다니. 밑에 놈들이 미친 겁니까?”

“허허허, 글쎄요. 어찌 되었든 이것이 올라온 것을 보면, 어르신께서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은근히 던지는 중서령의 말에 노신들이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황태자와 대적하기 위해 귀비전과 미인전이 손을 잡았는데, 거기에 어르신까지…….”

“이거 판은 복잡해지겠군요…… 결과는 뻔하겠지만.”

노신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서령을 보았다.

중서령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에게 은밀하게 말을 전하는 것 자체만으로, 노신들은 앞으로 돌아갈 판세를 읽었다.

조정의 온갖 세력이 얽혀 혼돈 양상이겠으나, 승자는 언제나 판을 뒤집을 준비가 된 사람이었으니.

그날.

중서령은 황제의 앞으로 세 가지 상소를 모두 올렸다.

첫 번째는 황태자의 공적이 적힌 보고였고, 두 번째는 민란이 늘어났다는 상소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황자의 무례함을 고발하는 상소였다.

* * *

황제에게 올라간 보고대로, 흑군 일대에서 일어나던 민란은 들불처럼 번져 무도군과 백제성까지 이어졌다.

“꺄아아아악---!”

“던져! 던져!”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중에 밑에서는 사람들이 고함과 함께 ‘던져’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절벽에서 여인이 던져졌을 때.

“와아아아아아----!”

산을 울릴 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환호성은 곧바로 다른 사람이 끌려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태수 놈이다! 백성들의 피고름을 쥐어짜 부귀영화를 누리는 놈이지!”

“던져라! 던져라!”

퉁퉁한 덩치의 중년인이 끌려나오고, 곧 사람들의 환호 속에 구덩이로 던져졌다.

“아아아악-!”

쿠-웅.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잔인한 소리가 함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붉은 옷을 입은 사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외쳤다.

“이제까지 백성들이 받은 고통! 모두 저자들 때문이었다! 저들이 바치지 않은 대가로 만백성이 고통받았으니!”

“우우우우우---!”

사제의 말에 사람들이 절벽 아래로 야유를 보내고 저주를 퍼부었다.

수십 명이 사람들이 떨어진 절벽 아래에는, 마찬가지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발가벗겨져 온몸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제라도 천신께 정당한 대가를 바치라-! 저들의 대가를 바쳐 백성들에게 구원을 내려라-!”

사제의 말과 함께 절벽 아래에서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무릎 꿇린 사람들의 목이 땅으로 떨어지고, 머리를 잃은 몸은 사방으로 피를 뿜었다.

“아아아아!”

“천신이시여---!”

근처 백성들이 피를 맞으며 뭔가에 홀린 듯 하늘을 향해 빌었다.

사람들의 광기 어린 목소리, 비명과 시체와 피가 가득한 광경, 그리고 코가 아릴 정도로 짙은 혈향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군요.”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수오의 말에 혼현마제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래, 보아라! 누구의 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붉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수십 명을 죽이고도 모자란지 사람들이 다른 제물들을 끌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절벽에서 던지기 시작했다.

퍼—억!

쿵!

뼈가 부서지고 피육이 뭉개지는 소리가 이질적일 정도로 익숙해졌다.

금세 벌건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천천히 피가 땅을 적셔 들어갔다.

“저 땅이 모두 만년독수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

수오와 혼현마제의 사이로, 붉은 옷을 걸친 여인이 다가왔다.

옷이 더 야해졌다. 그리고 더 화려해졌다.

안에 입은 속옷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은 여인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혼현마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본성의 부활을 위해서는 마제들이 힘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제가 환마제의 힘을 갖게 된다면 만년독수의 완성을 훨씬 앞당길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남았지?”

“독지의 완성이 코앞입니다. 앞으로 석 달만 주시면 그믐입니다.”

여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수오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으나,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혼현마제는 그저 검게 변해 가는 땅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군대가 움직여 저들을 전부 죽인다면? 그 군대마저 모두 죽인다면?”

“……그, 그러면 한, 두 달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혼현마제의 물음에 여인이 크게 놀란 듯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대답했다.

혼현마제가 그런 여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누구의 피인지 상관없다고. 누가, 얼마나, 어떻게 죽든, 결국은 우리의 승리일 것이다. 저런 벌레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앞당길 생각만 해라. 천하를 휘어잡을 마제가 되는 일이다.”

은밀하고 음흉한 악마의 말이 달콤하게 여인의 귀를 사로잡았다.

“예.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여인이 한껏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수오는 여인의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두 사람이 그를 신경 쓰지 않아 표정을 관리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저딴 거지 계집이 마제가 된다고? 글쎄, 그게 마음대로 될까.’

수오가 목걸이로 만들어 건 죽립 조각을 움켜쥐었다.

‘스승님, 당신은 역천마제 님을 속였어. 그리고 마침 그 증거가 내 손에 있네. 후후, 저 계집을 마제로 만들 시간에, 당신은 당신 자리나 걱정해야 할 거야.’

수오는 평소처럼 저를 도발하려는 여인의 눈빛을 무시한 뒤 몸을 돌려 나갔다.

* * *

총관이 조용히 몸을 숙이고 들어왔다.

“어찌 되었느냐?”

“상소는 무사히 전해졌다 합니다.”

“그래? 허허허, 곧 황제 폐하께서 노성을 터뜨리시겠구나. 황태자가 돌아올 날짜는?”

“이레 뒤입니다.”

“그때에 맞춰서 상소들이 도착할 수 있도록 하거라.”

“예.”

총관이 몸을 숙여 공손하게 방을 나가고, 태사 조위례는 조용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후-릅.

공기와 함께 은은한 차향이 입안과 코, 머리까지 전해졌다.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용정차라 했던가.’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차였다.

조위례는 자신의 취향까지 살뜰하게 살펴 보내는 남궁세가의 정성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등판하는 전장에 더할 나위 없는 동지로군.”

조위례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빈 찻잔에 차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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