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진짜가 가지는 힘(2)
귀천성은 한순간 들불처럼 일어나 중원의 절반 이상을 먹어 들어갔다.
역천마제와 다른 마제들의 압도적인 힘도 힘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들의 사상과 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각자 가지고 태어난 능력만큼 얻어 가는 세상! 기득권, 위선자들이 하늘의 순리라 말하는 건 결국 그들이 만든 가짜 질서일 뿐이다. 진짜 하늘이 내린 순리를 따라라! 우리가 본래 그러했어야 할 세상으로 되돌릴 것이다!”
역천마제의 사상은 매력적이었다.
능력은 있으나 기존 세력에 눌려 지내던 많은 무림인과 문파 들이 귀천성에 동조했다.
무림인만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과 학자들, 많은 좌절한 관리들이 역천마제에게 동조했다.
그들 모두가 움직이자 세상이 움직였던 것이다.
“허허허, 수오야, 저길 보아라.”
한적한 시골 마을.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사람들을 보며 스승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저를 불러 ‘저 모습을 꼭 보여 주고 싶었노라.’ 말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들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제 몫을 가질 수 있다면.
수오처럼 세상에서 버려지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이라.
지금은 잠시 주춤하지만 귀천성이 부활하면 저런 세상을 만들 것이다.
‘스승님!’
수오는 눈을 반짝거렸다.
다정하고 자애로우면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스승, 위대하고 거대한 역천마제 님, 놀라울 정도로 강한 마제들이라면, 정말로 그런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승님, 당신이 먼저 나를 버렸어!’
스승은 변했다.
“하하하하! 좌장군이 황도로 상소를 보냈다고 하는구나! 유약한 황태자도 해냈으니 황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겠지! 날짜를 두 달은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이 죽이는 건 백성들이었다.
순리를 거부하고 그릇된 욕심으로 군림하고 있는 위선자들이 아니라 산골에서 순박하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한 달 뒤 그믐, 의식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거지촌에서 주워 온 더러운 여자는 환마제 님을 살리기 위한 제물이 아니었다.
더러운 여자가 환마제를 대신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여자는 백성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죽이게 만들고,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다.
‘당신은 역천마제 님을 배신했어.’
그러니 나 또한 당신을 배신하려 한다.
* * *
“이게 역천비록이라고?”
광마제의 눈빛에 이채가 번득였다.
수오는 아픈 눈을 하고 역천비록을 보느라 광마제의 눈빛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았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가짜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단숨에.”
“호오.”
“그런데…… 그것을 역천마제 님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광마제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버려지고 떨고 있는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광마제가 수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
광마제는 놀라는 수오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수오가 놀라고 당황한 듯한 얼굴로 광마제를 보았다.
“아해야, 네 스승도 인간이다. 실수는 겁이 나고, 실패는 부끄럽지.”
광마제가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
수오의 눈빛이 일렁였다.
마르고 연약한 몸, 신경질적이고 거친 목소리로 혼현마제를 긁어 대던 노인은 이제 없었다.
지금의 광마제는 수오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건강해졌다.
어디 건강해지기만 했겠는가.
단단하게 돌아오기 시작한 풍채에 약간 살이 올라 혈색이 돌기 시작한 안색.
약간 쳐진 눈꼬리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노신선처럼 깔끔하게 다듬은 백염과 백미, 비단 도포를 멋지게 걸친 당당한 옷차림,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리던 눈에는 이제 따뜻한 정광만 가득했다.
“내가 사사건건 혼현마제와 부딪히는 건 그가 너무 급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홀로 귀천성의 부활을 준비해 와서인지, 과하게 부담을 안고 있는 것 같더군. 그도 사람이니 가끔은 틀린 판단을 한다. 가령…… 제물로 데려온 계집을 마제로 만들려는 것과 같은.”
움찔.
마치 자신의 속을 꿰뚫은 듯한 광마제의 말에 수오가 크게 놀랐다.
하지만 광마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릇된 결정이야. 팔현성의 자리는 아무나 되고 싶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모두 진실로 정해진 운명이 있지.”
“……!”
딱 수오와 같은 생각이었다.
‘팔현성의 자리!’
진실한 운명대로 정해진 자리라면, 그건 내 자리다!
수오의 눈빛이 강하게 불타올랐다.
수오는 격동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것을 보자마자 스승님께서는 가짜라는 걸 알아보셨습니다. 스승님만이 아는 표식이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있지만?”
우물쭈물 입술을 깨무는 수오에게 광마제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수오는 시종일관 자애롭게 저를 대하는 광마제에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며 결심을 확고하게 했다.
“시간이 중요한 듯했습니다.”
“시간이라…….”
“일전에 권마제 님께서는 최종 제물인 남궁금영을 두고 한수림에게 집착했습니다.”
“사패천주의 아들이라는 그?”
“그렇습니다. 한수림과 남궁금영은 같은 날에 태어났지만 생시만 달랐습니다. 그때 스승님께서는 만의 하나라고 하셨지만…….”
“음, 혼현마제가 한수림을 독살한 것이 단지 본성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구나.”
광마제가 수오의 말에 몹시 흥미가 동한 얼굴을 했다.
수오는 어렵게 꺼낸 말을 찰떡같이 잘 알아주는 광마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호오, 시간이라…… 그런데 이상하구나. 과연 누가 이런 정교한 가짜를 만들어 낸 것일까?”
순간 광마제의 눈빛에 강렬한 이채가 스쳐 지난 듯했다.
‘됐어!’
수오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광마제를 보며 격하게 일렁이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저도 잘…….”
수오는 고개 숙여 저의 태도가 이상하지 않게, 자신감 없는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광마제가 다시 수오의 어깨를 토닥이며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허허허, 너는 아무 걱정 말거라. 내 잘 알아보고, 네 스승에게도 크게 문제가 없도록 조치하마.”
“아!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오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광마제에게 부탁했다.
광마제는 허리 숙인 수오의 얼굴을, 수오는 그를 내려다보는 광마제의 얼굴을 끝끝내 보지 못했다.
수오가 급히 사라지고, 광마제는 제 앞에 내려진 역천비록을 보았다.
“허!”
광마제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자애롭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고, 따뜻하던 눈빛은 새빨간 광기로 일렁였다.
“새끼 뱀이로군. 혼현마제가 꼭 저 같은 놈은 제자로 삼았어. 아니, 그 때, 그 시에 천명을 받은 놈들은 다 저 모양인 건가? 살모(殺母)의 순간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더러운 거지 계집년이 저도 앉지 못한 자리에 앉는다니 새끼 뱀도 열이 받은 모양이군.”
광마제는 어린 뱀이 제게 원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연기를 하는 것은 쉬웠다.
어린놈의 연기에 맞춰 주기만 하면 되니까.
“혼현마제 놈이 왜 이딴 걸 만들었을까. 혼란? 글쎄. 흐흐흐, 혼현마제가 뭘 숨기고 있는지 한번 알아볼까?”
광마제의 눈빛이 희번덕거렸다.
그리고 역천비록을 두고 등을 돌리며 말했다.
“흑표야, 그걸 챙겨 안으로 오거라.”
스윽.
광마제의 등 뒤에 검은 표범 가면을 쓴 인영이 나타나 역천비록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당연한 듯 광마제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광마제가 태연하게 뒤를 맡기는 인물.
흑표의 등에는 낫처럼 생긴 아주 짧은 삭 두 개가 메어 있었다.
삭 대의 끝에는 검은 마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 * *
눈이 부신 듯,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한쪽에서 아주 단정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더니, 육신이 못된 성질머리를 그대로 따라간 듯합니다.”
“……쓰불, 닥쳐라. ……그러게 누가, 단전을 부숴, 놓으랬냐?”
잠에서 갓 깨어났기 때문인지, 제갈길현은 이전보다 더 피로한 듯 말이 늘어졌다.
의선의 말에 따르면 제갈길현의 모든 기운이 그의 회복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라 했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제갈길현은 순조롭게 회복 중인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전은 부서진 게 아니라 조금 망가진 것입니다.”
제갈가주는 농담 같은 시비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대신했다.
그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쪽에 있던 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천수현인 제갈길현의 눈이 목소리를 향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망할! ……남궁강은 아니겠고, 그 여우 같은 큰놈이나 망나니 둘째도 아니면…….”
“여우 같은 큰놈의 큰자식입니다. 남궁진휘라 합니다.”
남궁진휘의 자기소개에 제갈길현이 눈을 도르르 굴려 제갈가주를 찾았다.
“단전을 부숴 놓더니, 이제는 내 울화통을 터뜨리려고?”
제갈길현의 말에 제갈가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터질 울화통이었다면 진즉 터뜨렸을 텐데 말입니다.”
제갈가주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는 제갈길현에게 유감이 많은 듯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저 제갈길현이 깔고 누운 침상, 저 좌활백설옥 안에 가문의 원수나 다름없는 혼현마제의 역천비록이 있다는데!
문제는 제갈길현이 몸을 회복하기 전까진 좌활백설옥을 깨뜨릴 수도, 혼현마제의 역천비록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좌활백설옥을 깬다면 제갈길현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울화통을 터뜨리고 싶은 사람은 단연코 제갈가주였다.
“제갈세가는 이미 그렇게 된 것이고, 일단 또 잠드시기 전에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죠.”
“…….”
이미 그렇게 되었다니.
심지어 ‘글러먹었다’라고 말하려다가 눈치를 살피고 말을 바꾼 것이 보였다.
그런데 정말 열이 받는 건, 그게 맞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남궁세가 놈은, 왜, 온 것이냐?”
“부군사로 제갈가주님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시급하게 여쭐 것이 있어 왔고요. 듣는 즉시 남궁세가의 매응을 날려야 하거든요.”
“…….”
말끝마다 맞는 말이다.
제갈가주는 고통받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슬쩍 뒤로 빠졌다.
그러자 마음이 급한 남궁진휘가 급하게 물었다.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정의맹 적호단이 환마제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한중 너머 그 일대에서 환마제가 이상한 교단을 일으켰을 때와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흐으. ……환마제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거겠지. 귀천성에게, 팔현성의 자리는, 후우, 중요하니까.”
남궁진휘의 말을 들은 제갈길현이 피곤이 몰려오는 듯 조금 느릿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궁진휘의 마음만 급해졌다.
“그들을 찾을 방법이 있습니까? 어떤 식으로 환마제를 키우는지 알고 계십니까?”
“피. 피를 찾아야지. 환마제는…… 키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걸세. 무수히 많은 피가…… 필요하니 전쟁을 이용…… 실수를…….”
“천수현인!”
남궁진휘가 급하게 제갈길현을 불렀다.
하지만 점점 숨을 느리게 뱉던 제갈길현은 어느새 다시 눈을 감았다.
조용히 있던 의선이 다가와 제갈길현의 상태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진휘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콧구멍을 막으면 다시 깨시지 않을까요?”
“암살 논의라면 아들인 내가 없는 곳에서 하는 것이 어떻겠나?”
남궁진휘와 제갈가주의 농담을 들으며, 의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깨어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잠드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 천수현인께서 무사히 회복 중이라는 희소식입니다.”
“후우…….”
“참 다행한 일이군요. 감사합니다.”
의선의 말에 남궁진휘와 제갈가주가 안도인지 뭔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알아낸 정보만이라도 적호단에 보내겠습니다.”
“그러지. 아, 그리고…….”
“알고 있습니다. 천수현인께서 깨어나신 것은 철저하게 함구하겠습니다.”
남궁진휘가 속을 들여다본 듯 제갈가주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미 진화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언급을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남궁진휘가 매응을 날리러 나가고, 제갈가주가 죽은 듯 잠에 빠진 제갈길현을 보았다.
“역시 남궁이라 만만치 않지요?”
아버지를 향한 제갈가주의 말에 의선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제갈길현의 입꼬리도 미미하게 올라간 듯했다.
남궁진휘가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매응이 그의 팔에 내려앉았다.
남궁진휘가 다정하게 매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기 조각을 먹였다.
고기를 다 받아 먹은 매응이 응석을 부리듯 그의 손에 부리를 비볐다.
“그래, 그래, 힘들지. 요즘 따라 널 찾는 사람들이 많구나.”
남궁진휘가 제 손가락에 핏자국을 닦는 매응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영악한 녀석.
“빨리 날아야 한다. 적호단도 그렇지만, 본가에 전할 소식이 중요해. 같잖지도 않은 놈이 감히 내 동생의 형 노릇을 하려는 모양이거든.”
남궁진휘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입가에 지어진 미소 또한 서늘한 비소로 남아 있었다.
“진혜에게 갔다가 곧바로 본가로 가거라.”
휘이이익--!
파드드드드.
남궁진휘의 명과 함께 그의 팔을 딛고 매응이 힘차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