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진짜가 가지는 힘(4)
“그동안 신세 졌습니다.”
“어인 말씀을요. 마을의 은인이십니다.”
떠나는 적호단을 배웅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요 며칠 경계 어린 눈으로 보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하나같이 이별을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어찌 일은 잘 끝나신 겁니까?”
“예. 어쨌든 우리의 임무는 적사문 토벌이었으니, 임무는 잘 마친 편이지요. 남은 적사문의 행태를 살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일이니, 더 필요하다면 맹에서 조사단을 보내든지 할 것입니다.”
“아, 예.”
적호단주의 말에 현씨 세가의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무탈하십시오.”
“이 촌무지렁이들이야 적사문도 없어진 마당에 별 탈 있겠습니까. 단주님과 단원들이야말로 언제나 건강하길 바라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적호단주가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현씨 세가 가주와 마을 사람들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조용히 마을에 머물러 준 것만도 고마운데 황태자의 행패에서 마을을 구해 주기까지 했으니, 그들의 극진한 태도도 이해할 만했다.
마을 사람들은 적호단이 마을을 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적호단이 완전히 산을 내려오고.
한동안 말이 없던 적호단주가 진화에게 물었다.
“이제 없느냐?”
“예. 전부 마을을 내려갔는지 확인하고 바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건강하길 바라긴, 니미! 빌어먹을 것들!”
적호단이 마을을 벗어나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진화의 기감에 누군가 적호단을 따라붙은 것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지금껏 감정을 누르고 입을 꾹 닫고 있던 적호단주였다.
적호단주는 감시자가 사라졌다는 말에 참았던 욕지거리부터 뱉어 냈다.
“스스로 촌무지렁이라 하면서 감히 정의맹을 농락해? 젠장! 끝까지 낯가죽 뻔뻔하게 실실 쪼개는 걸 아구창을 찢어 놓으려다 겨우 참았구먼.”
적호단주가 현씨 세가 가주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그 끔찍한 광경.
비밀스러운 재단 아래 피를 모은 것이 분명한 네모난 흔적.
적사문에 있던 자들이 남은 흔적은 모조리 치웠으나, 산속에 묻어 둔 흔적까지 모두 치우진 못했다.
남궁진혜와 수색조가 발견한 관.
적사문의 비밀스러운 지하에서 시작된 관이 다름 아닌 적호단이 묶었던 마을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호단주는 물론 적호단원들 모두 마을 사람들의 행태에 소름이 돋았다.
적사문과 그쪽 마을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한편으로는 천연덕스럽게 자신들에게 순박한 산골 백성들의 모습을 연기한 것이 아닌가.
적호단주는 현씨 세가 가주가 마을의 은인이라며 제 손을 잡을 때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떨쳐 버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백매단은 도착했나?”
“정의맹에서 벌써 보내 놨다고 했습니다.”
적호단주의 물음에 부단주인 남궁진혜가 답했다.
“재단이 들켰고 조사단을 보낼 거라 정보를 흘렸으니, 놈들도 곧 움직이겠군.”
“그 뒤를 백매단이 놓치지 않을 겁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환마제가 있는 곳을 알려 주겠지요.”
“망할. 그때 반드시 우리가 간다. 마음껏 분풀이를 해 주지.”
“망할 늙은이 아구창은 그때 찢어 버리면 됩니다.”
적호단주와 남궁진혜가 사이좋게 이를 갈며 다음을 기약했다.
덩달아 적호단원들의 분위기도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아미타불, 이러다 누가 산적인지 누가 적호단인지 모르겠군.”
적호단 일행의 맨 끝에는 험한 산세를 지나다 뭣도 모르고 적호단을 습격한 산적들이 잡혀 있었는데, 현오의 말마따나 잡고 있는 사람과 잡혀 있는 사람이 거의 구분이 가지 않았다.
* * *
황도, 낙양.
화려한 낙양 저자에 새로운 볼거리가 떴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전국 각지에 몰려든 사람과 물자로 없는 것이 없다는 낙양이었지만, 황족의 행차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황태자 전하 천세-! 천세--!”
“와아아아아! 태자 전하!”
사람들은 군대의 선두에서 금빛 갑옷에 백마를 탄 황태자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비록 이 행진을 위해, 부상자가 빠진 표기군은 줄어든 세를 보존하기 위해 급하게 중앙에 대기 중이던 병사를 보충하고, 황태자는 잃어버린 명마 대신 마시장에서 웃돈을 주고 산 관상용 말을 타야 했지만 말이다.
“황제 폐하, 신 황태자 한유강, 폐하의 명을 받아 한중의 민란을 제압하고 귀환하였나이다!”
황태자와 좌장군을 필두로 표기군이 대전 앞에 도열하여 무릎을 꿇었다.
절도 있는 모습이 사뭇 정예군 같아, 그 앞에 있던 황태자조차 이때만큼은 기세라는 것이 생긴 듯했다.
“수고하였다. 군의 노고를 치하하여 술과 고기를 하사하니,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조당에서 성과를 자세히 보고하라.”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의 말에 황태자의 마음이 울렁였다.
대전에서 내려다보는 황제의 덤덤하고 냉엄한 눈조차 오늘은 그다지 겁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대전으로 돌아가며 황태자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기까지 하자, 황태자는 비로소 자신이 뭔가 해낸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분간은 황태자가 의기양양하겠군.”
“이황자, 아니 삼황자께서 이 기회를 무척 아까워하시더니.”
“각주군의 민란 토벌은 삼황자와 사황자가 함께 나갈 듯하더군요. 귀빈전과 미인전이 손을 잡은 것을 보면, 이번 황태자의 공이 크긴 큰가 봅니다.”
“허허, 그런가요.”
당당하게 군을 데리고 물러나는 황태자를 보며 신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수군거렸다.
벌써 몇몇 신료들은 황태자와 좌장군을 찾아나선 지 오래였다.
조당에서 오래된 노신들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다른 혈기 왕성한 신료들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허어, 황태자 전하의 얼굴에 완전히 자신감이 붙었구려.”
“좌장군은 어떻고. 황도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군사들은 물론 은밀하게 포섭할 신료들까지 표기대장군부로 불러들였다는군.”
“허허허, 좌장군도 제법일세.”
좌장군 표서량의 정식 명칭은 표기대장군.
한 제국에는 중앙 정예군이라 불리는 다섯 군대가 있었는데, 그중 황제 직속의 황룡군을 제외한 네 개의 군대는 각각 제국 최고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네 명의 대장군이 맡고 있었다.
표기군을 맡고 있는 표서량은 다른 대장군들과 마찬가지로 따로 대장군부를 가지고 있었다.
“저치도 이제 욕심이 생기는가 보군.”
“허허허, 욕심은 진즉에 있었지. 그걸 언제 드러내느냐 하는 문제 아닌가.”
노신들은 황태자의 뒷배로 야심만만한 행보를 보이는 좌장군 표서량의 모습을 몹시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흥미는 흥미일 뿐.
혈기 왕성한 젊은 장군의 행보에 함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노신은 아무도 없었다.
“군공을 세웠으니 당분간은 황태자 전하의 위세가 오르겠구먼.”
“암, 하나 있던 약점이 사라진 격이 아닌가.”
“……글쎄.”
그동안 황태자는 온화한 성품이라는 칭찬 끝에 다소 유약하고 예민하다는 평가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그런데 이번 민란 진압을 무사히 해내면서 군공을 세웠으니. 지금이야말로 유일한 흠결이라 여겨지던 유약하다는 평을 떼어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좌장군과 황태자의 기세가 이처럼 등등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걸음 무거운 노신들처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학장원.
하남 조씨 일가의 장원으로 황도에서 황궁 다음으로 큰 곳이었다.
어떤 이들을 조씨 일문을 향해 중원 제일의 부자라 했고, 어떤 이들은 중원 제일의 명문가라 불렀으니.
현학장원에는 일부러 사람을 끌어모으지 않아도 하루에 수백 명의 손님이 드나들고, 지금도 매일 수십 명의 식객이 머물고 있었다.
특히 현학장원에 머무는 식객 중에는 중원에 이름난 학자부터 조정 신료들의 스승이라 불리는 학자, 조정에 뜻을 둔 젊은 학자들이 수두룩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하남 조씨와의 인연을 끝까지 이어 가는 편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야말로 하남 조씨 일문이 조정에 가진 진정한 힘이라 할 수 있었다.
“부서령이 왔다 갔습니다. 스승을 뵙는다는 핑계였지만, 표기대장군부의 소식을 전해 주더군요.”
조정호가 부서령이 전해 준 전서를 아버지 조위례에게 전해 주었다.
작은 쪽지에는 표기대장군부에 든 신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쥐 같은 놈들이 꽤 많이 움직였군.”
조위례가 전서에 적힌 이름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다행히 우리 쪽 사람은 없습니다. 좌장군이 원귀빈 쪽에 있는 젊은 장수와 허미인에게 붙은 젊은 신료들을 골라서 연통을 보냈더군요. 노리는 바가 너무 명확해서…… 안 그래도 북회대장군부에서 대사마 허임까지 들어서 논의 중이라 합니다.”
“허허, 백날 의논해 보라지. 황태자의 기세를 어디 대화를 나눈다고 꺾을 수 있겠느냐.”
“삼황자와 사황자가 각주군 민란 진압에 나설 것이 확실하더군요.”
“늦었다. 뭐든 처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다음은 이미 빛이 바랬지.”
조위례는 조정호의 보고에서 느껴지는 삼황자와 사황자 측의 노력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들이 들으면 서운하다 할 수 있겠지만, 한제국을 다시 부활시키고 지금의 황제를 옹립하기까지 중원의 정치를 움직인 조위례의 판단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조정에서 물러난 지금까지도 황제는 조위례에게 태사의 자격을 쥐여 주고 심심찮게 그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아들이 조정호 또한 대장군의 반열에 오르고도 조위례의 말은 무조건 경청하는 편이었다.
“좌장군이 신료들을 규합하여 우리 황자님을 모함할 것입니다. 황태자의 기세가 이 이상 오른다면 황자님이 곤란해지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정호가 불안한 듯 물었다.
좌장군의 움직임은 미리 쭉 읽고 있었지만, 새삼 그 움직임이 예상보다 기민하고 동조하는 신료들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위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보아라.”
조위례가 조정호가 전해 준 쪽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좌장군이 젊은 장수, 젊은 신료 들만 따로 연통한 것이 무엇 때문이겠느냐?”
“언제나 위로 오르기를 갈망하는 자들이니 움직이기 쉽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그래. 하지만 위로 오르고 싶기는 다른 신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뭐가 좋아 순번을 기다리며 삼황자와 사황자의 밑에 줄을 서 있겠느냐.”
“…….”
“눈치가 빤한 이들이다. 흐흐흐, 전 황후를 폐서인시킬 때도 납작 엎드려 살아남았던 좌장군도 눈치가 빤하니 그놈들에게는 연통을 안 한, 아니 못한 것이지.”
조위례가 맹렬하게 눈치를 보고 머리를 굴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웃음을 흘렸다.
“문제는 황태자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이 충분하겠는지요?”
“허허허, 그래, 문제는 황태자지.”
조심스럽다 못해 결벽적일 정도로 완벽을 기하는 조정호다.
아들의 성품이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위례는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적의 움직임을 읽고 뒤를 잡은 상황.
다른 젊은 신료나 장수 들은 신이 나서 흥분했을 상황에, 이런 때일수록 더 신중을 기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 이제 슬슬 뒤를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의 약점은 유약하다거나 군공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군공이라면 좌장군이 넘치게 채워 줄 수 있다.”
“하면……?”
“황태자의 약점은 외척이 없는 것이다. 정치판에서 외척이란 자식의 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와 결혼이라는 거래를 한 국모, 황후의 집안을 말함이지. 황태자의 약점은 폐서인의 자식이라는 그 자체다.”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
황태자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혈통으로 이어지는 황실의 힘이자 한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얼마든지 물어뜯기는 것이 조정과 정치판이라.
조위례가 어설프게 이를 드러낸 좌장군과 황태자를 마음껏 비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황실을 대신하여 외척이 쌓을 수 있는 영향력…… 전장에서 세운 전공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좌장군도 알게 되겠군.”
그러게. 황태자의 약점을 없애려 했다면 군공이 아니라 다른 외척을 만들든, 후계를 만들든 했어야지.
조위례가 여유롭게 남궁세가에서 보낸 용정차 들이켰다.
* * *
한중의 협곡을 벗어나자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산적들은 한중권문에 넘기고, 적호단은 한수를 타고 그대로 정의맹으로 복귀했다.
정의맹에 도착하자마자, 진화는 의외의 인물에게 초대를 받았다.
“형아, 이건 운명이야! 날 책임져!”
“…….”
방긋 웃으며 꽃을 내미는 아이를 보며 진화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대체 뭘 비는 건지, 강무련이 한수림의 뒤에서 진화에게 두 손을 모아 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