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꽃 화(花)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투기장(1)
한제국 황궁.
황태자가 돌아온 뒤 처음으로 조정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겨우 민란이었지만 그간 약점을 극복하고 군공을 세운 황태자가 어떤 상을 받게 될지,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실한 것은 황제가 황태자와 표기군에 내리는 포상에 따라, 앞으로 황태자의 입지와 민란 제압에 나설 삼황자와 사황자가 얻게 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신료들은 기대에 찬 얼굴로, 어떤 이들은 비장한 얼굴을 하고 대전에 올랐다.
“좌장군이 이제까지 폐서인의 오라비로 전장만 떠돌지 않았나. 이제 대장군 반열에 오르고 황태자께서 약관을 넘기셨으니, 황도에 세를 만들려는 거지.”
“그걸 원씨와 허씨 집안에서 순순히 보고만 있겠는가?”
“글쎄, 같은 날 회합을 가진 것으로는 세가 비등비등했다더군.”
동료의 말에 다른 신료들의 눈이 커졌다.
“좌장군의 집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긴 황태자의 유일한 외숙이 아닌가. 군부에는 따르는 젊은 장수들도 많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중앙 관료지. 끈도 없는 젊은 신료들로 뭘 하겠나.”
“끈이야 좌장군과 황태자 자체가 끈이지.”
은근히 좌장군의 편을 드는 자도 있고, 그것을 깎아내리는 자도 있었다.
아닌 척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은 아마도 회합에 참석했거나 이미 편을 정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회합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이나 아직 자리를 정하지 못한 이들 또한 그것을 알면서 모르는 척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뭐, 어찌 되었든 오늘 보면 알겠지.”
“늦기 전에 움직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남기는 말을 끝으로, 젊은 신하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대전을 오르는 계단 앞에서 북회대장군, 통칭 위장군 원수경과 표기대장군, 통칭 좌장군 표서량이 서로 마주쳤다.
“허엄!”
“장군, 오셨습니까.”
“오랜만이네, 좌장군.”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황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격조하였습니다.”
“허허허, 공무가 바쁜 사람이니 아니 그렇겠나.”
사흘 동안 서로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위장군과 좌장군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흘 동안 이어진 세력 규합과 과시는 신하들의 말처럼 경합세를 보였다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표기대장군부로는 젊은 장수들과 신진 관료들이 몰려들었고, 북회대장군부에는 대사마가 이끄는 실무직에 있는 관료들과 이미 막대한 군벌을 형성한 장수들이 함께했다.
결국 서로 편만 확인한 채 첫 조정 회의를 맞게 된 셈이었다.
서로 불편한 얼굴로 인사를 나눈 채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그때, 조금 앞서가던 위장군이 대전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허! 음!”
크게 헛기침을 한 위장군이 대전 한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이어 대전에 들어온 좌장군도 안으로 들어오려다 말고 멈칫하고 말았다.
위장군이 급히 어디론가 간 이유.
좌장군 또한 대전 한쪽에 참석한 조위례를 발견한 것이다.
태사 조위례.
신료들 위의 신료이자, 황제가 조언을 구하는 한제국의 장자방.
지금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황제의 간청으로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태사 직만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남 조씨 일문의 영향력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좌장군이 궁금한 것은 그가 갑자기 조정 회의에 참석한 이유였다.
‘역시 사례교위가 뭔가 눈치채고 알린 모양이군. 하지만 늦었다. 이 황도에 목격자라곤 우리 표기군밖에 없으니까. 늘그막에 손자 편들어 보겠다고 나타난 모양이지만, 소용없다.’
좌장군의 입꼬리가 자신만만하게 비틀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 조위례에게 다가갔다.
좌장군이 다가오자 신료들이 눈치를 보며 길을 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태사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넉살 좋게 건네는 인사.
“허허허, 황태자께서 군공을 세우고 첫 조례가 아닌가. 노구라도 이끌고 참석해야지 않겠나.”
조위례가 사람 좋게 웃으며 좌장군의 말을 받았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정말로 황태자의 군공을 축하하기 위해 온 사람 같았다.
“큰일도 아닌데요.”
“아니지, 아니지. 그간 황제 폐하께서도 기다리셨던 소식이 아닌가. 허허허! 미리 축하하지.”
“태사의 축하라니 가문의 영광이로군요.”
‘구렁이 같은 영감.’
조위례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자, 좌장군도 그저 웃으면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황제 폐하 납시오--!”
태감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신료들이 몸을 숙이고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서로 많은 생각이 뒤엉키는 속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누가 뭐래도 주연이라는 듯, 황태자와 좌장군이 당당하게 황제의 앞에 나와 부복했다.
중서령이 엄숙한 얼굴로 황태자의 공을 읽어 내렸다.
“사특한 무리가 법도를 해치고 민도를 혼란케 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한중과 광한, 흑군의 역도 이천여 명이 규합하여 관리와 백성의 목숨을 해치기에 이르렀다. 이에 황제 폐하께서 친히 황태자와 표기군을 보내 이를 토벌케 하였으니. 폐-하, 황태자 한유강과 표기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아 일대의 민란을 모두 토벌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과정에 무도한 무리의 공격에 황태자 전하께서 부상을 입고, 표기군 마흔두 명이 목숨을 다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니, 이를 통촉하여 주십시오.”
중서령이 감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황태자의 공과에 대해 보고했다.
그리고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태자와 좌장군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민란에 황제의 군대 수십 명이 상한 것은 적절치 않다. 태자는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황제의 물음에 황태자가 눈매가 움찔거렸다.
제대로 된 아비라면, 제국의 황태자인 자신을 지키지 못한 표기군에게 화를 내어야 하지 않은가?
일부러 다 나은 목의 상처 위에 붕대를 떼지도 않았건만, 그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부황의 처사가 야속하게 느껴지자 황태자의 입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그때, 좌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 좌장군 표서량 아룁니다.”
“짐은 태자에게 물었는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태자 전하께서 결코 병사들의 실책을 말하지 않으실 것이기에 부득이 소신이 나섬을 가납하여 주십시오!”
“호오, 태자는 말하지 않을 병사들의 실책이라…….”
좌장군의 말에, 황제가 흥미가 동한 얼굴로 황태자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좌장군을 보았다.
“그래, 좌장군. 그대가 말해 보라. 병사들의 실책이 뭐지?”
“예, 폐하.”
순간, 좌장군의 시선이 조위례가 있는 곳을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누구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입가에는 슬쩍 미소도 지어진 듯했다.
물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무척 안타깝고 비통했지만 말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마지막 흑군에서 민란을 토벌할 때 신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순조롭게 민란을 토벌하고 돌아오는데, 무림의 무리가 태자 전하의 목숨을 노린 것입니다!”
“뭐라, 무림인들이 태자의 목숨을 노려?”
“그러하옵니다. 흑군 민란에 무림인들과 협조 중인 동해왕 저하를 만났사온데, 신이 저하를 도울 처지가 아니었던지라. 동해왕 저하와 무림인들의 전투가 끝을 맺지 못하고 불미스러운 무리가 도주하여 태자 전하를 노린 것입니다. 그들과 준비되지 않은 전투로 태자 전하를 지키며 병사들이 큰 피해를 입고, 그때 동해왕 저하께서…….”
좌장군이 차마 말을 못 하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황제가 나서 그의 말을 재촉했다.
“좌장군은 계속 말을 이으라.”
“예, 폐하! 감히 무도한 무림인이 태자 전하의 지척까지 다가오고, 동해왕 저하께오서 그곳에서 곧장 전투를 벌이신바. 그 틈에 태자 전하의 옥체를 상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신의 불찰이니, 신을 탓해 주시옵소서!”
앞뒤가 다른 말을 자연스럽게 뱉으며, 좌장군이 천하의 충신처럼 대전에 머리를 박았다.
그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가 머리를 숙였다.
“아니옵니다. 전장이니만큼 태자인 제가 스스로 몸을 지켜야 했습니다. 군사들은 그저 저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부디 몸을 소중히 다루지 못한 소신의 실책만을 탓하여 주십시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태자와 좌장군의 말에 조정 분위기가 술렁였다.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실책이라 말하지만, 누구도 동해왕의 실책에 대해서는 감싸지 않는 모습에 그들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하지만 무림의 일을 도맡은 동해왕 한진화가 제대로 처신을 하지 못해 표기군에 피해를 주고 황태자가 상처까지 입었으니, 이는 결코 작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대들의 말에 따르면, 누구의 탓도 아닌 동해왕 한진화의 탓이로군. 다 된 민란 토벌에 무림의 싸움을 끌어들여 군에 피해를 입히고 제국 태자의 몸에 상처까지 입혔으니.”
황제의 깔끔하고 직설적인 정리에 황태자와 좌장군도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니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쯤 되자 신료들이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설마 황태자가 삼황자나 사황자도 아닌 이황자를 경계할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으니, 위장군과 대사마 일파마저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모두의 눈이 조위례를 향했다.
조위례야말로 황태자의 군공을 축하하러 왔다가 된서리를 맞게 된 격이었으니.
모두의 걱정스러운 시선 속에서, 태사 조위례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좌장군과 황태자를 보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 신료가 급히 대전으로 들었다.
“무슨 일이냐?”
“예, 폐하. 방금 막 한중과 광한, 흑군의 태수에게서 상소가 올라왔나이다!”
신료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좌장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좌장군이 조위례를 보았다.
“가져오라.”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중서령이 젊은 신료에게서 상소를 받아 왔다.
“마침 태수들의 상소가 왔다니, 함께 보면 되겠군.”
좌장군 표서량의 귀에 황제의 말이 이토록 불길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으윽, 조위례! 이걸 노린 건가?’
태사 조위례가 갑작스럽게 조정 회의에 나타난 이유.
좌장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태사 조위례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 좌장군을 보았다.
* * *
“광한군 태수 장무격이 아뢰길. 표기군이 민란을 제압하며 과도하게 민가 이백 채에 불을 놓아, 마른 날씨에 불이 옮겨붙으며 임야 일만 평을 불태우니. 앞으로 징세를 감당하기는커녕 군량미를 수급하는 것조차 힘이 든다고 합니다.”
“하, 하오나……!”
“스읍! 태자의 발언은 허하지 않았다. 중서령은 상소를 마저 읽으라!”
“예, 폐하. 표기군의 약탈과 과한 살생으로 한중군의 마을 다섯 곳이 절멸하고 농사를 지을 백성이 없으니. 게다가 황폐해진 땅을 수습할 인력마저 부족할 지경이라 하옵니다.”
중서령이 하나하나 상소를 읊을 때마다, 황태자와 좌장군의 얼굴이 창백하게 식어 내렸다.
“흑군 태수의 상소에 따르면, 흑군의 특수함을 통촉해 주시기를 간청한다고 합니다. 산중 협곡으로 이어진 마을은 관과 무림이 서로 얽혀 있어, 이번에 동해왕 전하께서 표기군에 의한 불필요한 마을의 절멸을 막고 귀천성의 무도한 무리를 막아 주시니, 흑군 백성들이 모두 그 은혜에 백골난망이라 전하였습니다. 다만, 가뜩이나 부족한 임야와 마을이 큰 피해를 입었으니, 급히 군량과 병력의 지원을 바란다고 합니다.”
“…….”
중서령이 세 개의 상소를 마저 읽고 나자 대전 안에는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가 조용히 좌장군과 황태자를 내려다보고, 두 사람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벌벌 떨었다.
“좌장군. 태자.”
“예, 폐하.”
“그대들의 실책이 아까 그것이 끝이 아니었나 보군.”
“오, 오해이옵니다, 폐하! 민란으로 관이 유명무실하여 병사들과 관리들은 자리를 지키지 못했으니, 그들의 상소는 열악한 현장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호오, 태수들이 제대로 현장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경들은 어찌 생각하오?”
좌장군의 변명에 황제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불이 붙은 공을 던지듯 신하들 사이로 화제를 던졌다.
의기양양하던 좌장군이 갑자기 이황자에게 비수를 던진 후 신하들은 혼란스러운 듯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하자, 신하들은 벌 떼처럼 황제가 던진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공을 차듯 말을 던지며, 황태자와 좌장군의 실책과 그 여파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상을 받으러 나온 자리가 벌을 받는 자리가 되어 버린 좌장군과 황태자.
좌장군은 신료들이 목소리를 높인 사이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선 조위례를 노려보았다.
‘역시 네놈의 수작이었더냐! 내가 이대로 순순히 당할까!’
벌겋게 달아오른 시선에 조위례가 좌장군과 눈을 마주쳤다.
조위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덤덤하게 좌장군의 시선을 받아 냈다.
휘하의 신료들을 앞세워 뒤로 물러나 있던 위장군 원수경과 대사마 허임은 그런 조위례의 모습에 감탄하는 동시에 경계 어린 시선을 보냈다.
조위례는 그들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이 순간의 승리를 만끽했다.
어쩐지 향기롭고 끝 맛이 단 용정차 생각이 절로 나는 듯했다.
* * *
조위례가 한중과 광한, 흑군의 태수들을 움직인 것을 모를 이는 없었다.
지방관의 삶은 갈수록 팍팍하고 힘든데, 좌천이나 다름없는 그 생활에 하남 조씨 일문의 도움은 가뭄 속의 단비라. 지방관들 중에 하남 조씨의 녹을 먹지 않은 자가 없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미친 늙은이. 그걸 하필 조정 회의에서 터뜨려?’
‘……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움직인 거지?’
위장군 원수경이 살짝 질린 눈으로 조위례를 보는 동안, 대사마 허임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기상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상소를 올렸는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조위례는 그런 허임을 향해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놈들의 좁은 머리로는 상상도 못 할 곳에서 움직였지.’
세상에서 가장 빨리 움직이는 이들이 누구일까 생각하면 쉬웠다.
바로 상인들.
지방관들 중에 하남 조씨의 녹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면, 상인들 중에 이 위험한 세상을 해치며 남궁세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심지어 남궁세가의 상인들은 세상 그 어떤 봉화나 파발보다 빨리 상소를 황도까지 배달하고, 현지의 여론을 움직였다.
탁.
“그러게 감히 누굴 건드려? 우리가 그리 둘 성싶었더냐.”
남궁진휘가 황도에서 보내온 전서를 두고 싸늘하게 냉소했다.
황도에서 보내온 전서에는 진화를 모함하려던 좌장군의 실패와 함께, 황제가 이 일의 시비를 명명백백 가리기 위해 진화를 찾을 거란 소식이 적혀 있었다.
“멍청한 황손들이 진화의 형제 노릇을 하려는 모양이니…… 진혜를 붙여 줘야겠군. 뜨거운 맛 좀 보라지.”
남궁진휘가 심술궂게 웃으며 진화와 남궁진혜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