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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72)화 (272/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꽃 화(花)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투기장(2)

“결론을 내리겠다.”

“하교하소서.”

황제의 말 한마디에 문무백관들이 용좌를 향해 몸을 엎드렸다.

“사방에 역적들이 날뛰고 나라는 혼란하며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란을 토벌하기 위해 나간 군대가 오히려 군량미와 조세에 차질을 빚은 일은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하나 일방의 말만 듣고 판결할 수는 없는 일. 황태자와 표기군의 폭거에 대한 관리들의 상소에 관해서는 따로 조사관을 보내 낱낱이 실정을 파악토록 한다.”

“실로 마땅한 결정이옵니다, 폐하!”

“또한 황태자의 몸에 상처를 남기고 군의 일을 방해한 것 또한 중차대한 문제다. 하나 이 일 또한 일방의 말만 들을 수 없음이니. 동해왕 한진화에게 입궁을 명한다. 이 일 또한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상벌을 정하겠다!”

“뜻대로 하시오소서, 폐하!”

“현지 조사관과 동해왕이 입궁하는 대로 판결을 내릴 것이다. 오늘 조례는 이만 파한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지엄한 용좌의 결정이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황태자와 좌장군은 물론 문무백관이 모두 그 말을 받들었다.

혼란스러운 전개를 이어 가던 조정 회의가 끝이 나고.

신료들은 모두 황제가 이치에 맞고 합당하게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상황이 황태자와 좌장군에게 불리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조정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신료들이 다시 삼삼오오 뭉쳤다.

백성들의 죽음?

유감스럽지만 그건 평소라면 문제로 삼기조차 어려운 사소한 일이었다.

조세 차질? 군량미 부족?

그 또한 다른 곳을 쥐어짠다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신료들에게 문제는 단 하나, 황제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해왕까지 입궁시키다니, 무슨 생각이실까요?”

“설마 이황자 저하를 모함했다는 핑계로 황태자 전하를…….”

“어허! 입조심하시오. 고작 그만한 일로 태자 전하가 어찌 되겠소?”

이번만큼은 황태자파와 삼황자파, 사황자파가 따로따로 헤어졌다.

이번 일로 황제의 심중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직감한 듯했다.

중립을 지키고 있던 노신들도 이번만큼은 바람처럼 흔들렸다.

“다른 때면 몰라도, 요즘같이 신제국이 불안한 때에 전방의 군량미 부족은 큰 문제가 아닙니까. 게다가 한중 태수 공복야는 한중 공씨 가문의 유력자입니다. 완전히 조 태사의 사람도 아니었던 자가 돌아선 것을 보면…….”

“어허! 이사람, 입조심하라니까! ……전 왕자비를 폐서인시키고도 폐하께선 장자를 황태자에 올리고 그 외숙을 살려 두었소. 앞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소.”

“그건 그렇지만…… 사실 그 정통성을 따져도 이황자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흐음.”

노신들이 흔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외가가 탄탄한 삼황자와 사황자의 앞에 무신들과 문신들이 줄을 설 때에도 노신들이 중심을 지켰던 건, 제국에 ‘정통성’을 확립하겠다는 황제의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정통성 면에서 폐서인된 전 왕비를 어미로 둔 황태자보다 명문 출신 정통 황후 소생의 장자인 이황자가 더 나아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태사까지 나섰소. 이는 하남 조씨 가문이 움직이겠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소.”

“흐음. 일단 기다려 봅시다. 이황자 저하가 오고 나서 폐하의 태도를 보면 그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소?”

이제 와 황태자나 유력 황자들의 줄을 타기엔 조금 늦었다.

하지만 그래서 새롭게 올라오는 적통 황자의 동아줄이 탐스러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말은 신중하자고 했지만, 노신들의 시선이 느긋하게 퇴궁하고 있는 태사 조위례의 뒤를 좇았다.

중서령은 흔들리는 노신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최근 정의맹은 귀천성 소속 문파들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내고 있었다.

말이 쉬워 연결 고리를 끊는다지만, 백매단과 연맹 문파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읽고 적의 이동 경로를 예측해서 적보다 한발 빠르게 무단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직접 싸우는 무단들의 활약도 중요했지만, 모든 일의 중심에서 정보를 취합해서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군사부의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해서 부군사인 남궁진휘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생의 배웅을 나오는 것조차 끝까지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배를 타고 가면 금방일 것이다. 청화상단주가 직접 나서고 구와 교명이까지 가니까, 형이 한시름 놓으마.”

“예, 걱정 마십시오, 형님.”

진화는 바쁜 남궁진휘가 직접 포구까지 배웅을 나와 준 것만으로 감사했다.

“나는? 나한테는 할 말 없어?”

남궁진혜가 아니꼬운 눈으로 남궁진휘를 향해 물었다.

이번 황제의 부름에 남궁진휘가 나서서 특별히 남궁진혜를 합류시켰다.

남궁진혜는 애초부터 위험한 황도에 진화 혼자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어쨌든 남궁진휘가 일부러 저를 넣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라면 남궁진혜의 말을 세 번 꼬아서 받아치고 단번에 못 알아듣는 남궁진혜를 비웃고도 남았을 남궁진휘가, 이번에는 남궁진혜의 손을 꾸욱 잡았다.

“뭐, 뭐야?”

남궁진혜가 당황해서 팔을 빼려는데, 남궁진휘가 힘을 줘서 남궁진혜의 손을 잡았다.

손안으로 뭔가 쪽지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무슨 일 있어?”

“황궁의 것들이 감히 진화의 형제 노릇이 하고 싶은 모양이야.”

“뭐?”

남궁진혜의 눈빛이 대번에 사납게 변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남궁진휘가 서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를 믿지 않아. 그래서 보내는 거다. 남궁세가에는 은인지황(恩人之皇)의 자격으로 황금 면패(免牌)가 세 개나 있으니까.”

황제가 황자를 구해 주고 길러 준 남궁세가의 은혜에 고마워하며 황금 면패를 세 개나 내려 주었다.

그 어떤 죄를 짓더라도 반드시 형을 면죄해 주는 금패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료들조차 하나 가지기 힘든 것이었는데, 황제는 남궁세가에 그것을 세 개나 내려 주었으니.

“세 놈까지는 괜찮겠네.”

그리 쓰라고 준 것은 아닌 게 분명했지만, 남궁진혜는 자신만만했다.

이번에는 남궁진휘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오오, 이거 큰일이군. 오랜만에 심장이 쫄깃쫄깃한데?’

‘좋냐? 지금 웃음이 나와, 이 미친놈아?’

남궁교명이 눈빛을 반짝이는 남궁구를 노려보았다.

모두가 밝은 가운데 오직 남궁교명만 낯빛이 점점 죽어 가고 있었다.

“소공자님, 어서 타시지요.”

청화상단 상단주, 전 이장로이자 남궁교명의 아버지인 남궁경옥이 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일까.

이전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검게 탄 얼굴에 두툼한 근육질의 모습이 잘 어울렸다.

“잘 부탁하오.”

“걱정 마십시오.”

청화상단주가 소가주인 남궁진휘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배를 출발시켰다.

양청현에서 낙양 포구까지.

청화상단의 용정선으로는 하루면 도착할 것이었다.

“교명아.”

“아버지.”

“사흘은 황도에 머물 것이니, 여차하면 배로 오거라.”

“…….”

듬직하게 내뱉는 청화상단주의 말이 너무 진지해서, 남궁교명의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다음 날 아침.

청화상단의 용정선이 포구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 황궁에서 나온 금군과 사례교위 조정호가 진화 일행을 맞았다.

“저하,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 사례교위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이곳은 모두 무탈하였습니다.”

“그…… 태사께서도 건강하십니까?”

진화는 아직 외숙, 외조부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만 했다.

전서에는 어찌 잘 썼는데, 얼굴을 마주 보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화가 미안한 마음에 조정호의 눈치를 보는 듯하자, 조정호는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예. 정정하십니다. 안 그래도 저하께서 오시면 저하의 글 스승을 하실 거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예…….”

진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동안 어머니 팽연화와의 약속 때문에도 남궁세가에 보내는 전서만큼 황궁과 하남 조씨 가문과도 전서를 주고받은 진화였다.

황제와 황후는 진화의 전서에서 진화의 어린 시절 모습을 발견하고 반가워했지만, 태사인 조위례는 다섯 살에서 멈춰 있는 진화의 글씨에 기암을 한 바 있었다.

진화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자 사례교위 조정호가 싱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남궁 소저, 오랜만이오. 어째 이전보다 더 강해진 모습이오?”

조정호가 남궁진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오, 교위님은 알아보시는군요. 하하, 그간 성취가 좀 있었습니다!”

“호오, 그래요? 그거 참 축하하오.”

“뭘요! 밥 먹고 하는 일이 싸우는 건데, 이거라도 늘어야지요! 핫핫핫핫!”

조정호는 처음부터 양팔의 소매를 뜯고 나타난 남궁진혜의 모습에 덕담 삼아 건넨 말이었지만, 남궁진혜는 겸양 따위는 잘 모르는 무인이었다.

남궁진혜는 조정호의 칭찬에 한층 우람해진 팔근육을 드러내며 화통하게 웃었다.

실로 황실 여인들이나 황도의 귀한 집 영애들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색이 너무 다르면 섞이지도 않는 법이지. 그런 때는 더 짙은 색이 다른 색을 덮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던가?’

조정호는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진휘가 굳이 남궁진혜를 함께 보낸 이유를 짐작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조정호가 진화 일행을 황궁으로 안내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늠름하고 꼿꼿한 자세, 당당한 태도.

금군과 사례군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으로 귀환하는 이황자의 모습은, 화려한 백마를 타지 않아도 사람들의 이목을 한눈에 끌었다.

“진화야-!”

아들을 만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황후는 창신궁 밖에까지 나와서 진화를 맞았다.

“황후마마, 소자 한진화 무탈하게 환궁하였사옵니다.”

“아가!”

궁중 예절도 팽개친 채 황후가 달려가 진화를 끌어안았다.

아직 어머니라는 말조차 어색한 진화는 어색한 자세로 그 녀에게 안겼다.

황후는 그런 진화조차 사랑스러운 듯 진화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안타까운 듯 보았다.

* * *

진화를 호위하고 자리로 돌아온 사례교위 조정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느긋하게 차를 즐기던 태사 조위례가 힐끗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황자님은 잘 도착했더냐?”

“예. 방금 궁에 모셔다드리고 온 길입니다.”

“그런데 대낮부터 웬 한숨이냐?”

조위례가 낯빛이 어두운 아들을 타박하며 혀를 찼다.

“저하께서는 아직 황후마마와 저희가 어색하신 듯합니다.”

“……왜?”

사례교위 조정호가 한숨을 쉰 이유를 짐작한 조위례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러자 조정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는 그조차 좋아서 버선발로 궁을 뛰어나오시는데, 저하께서는 아직 모후, 아니 어머니 소리가 나오지 않으시니. 황후마마도 티는 내지 않으시는데, 그 속이 오죽하시겠습니까. 두 분 모두 보기에 안타까워서…….”

“허어, 어찌하겠느냐. 세월의 힘을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결국 마음의 병까지 얻는 것을 지켜보는 조위례나 조정호의 마음도 편할 리 없었다.

“조금 서운하다 한들, 우리보다 저하의 사정을 헤아려 드려야 한다. 그분이 어찌 구출되고, 어찌 컸는지 들었지 않느냐.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익숙해지다 보면 그분도 마음의 문을 열 것이다. 행여 옆에서 채근하지 말거라.”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전서에는 외조부, 외숙이라 써 주시지 않느냐. 허허허.”

“외숙이 아니라 애숙이라 보이지만요.”

“허허허허!”

조정호의 말에 조위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조정호는 조위례를 따라 크게 웃을 수 없었다.

여전히 걱정거리가 남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황제 폐하께서 나와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의복을 정제하는 대로 대전으로 데려가려는지 엄 태감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

“아직 황궁에 익숙지 않으신 분입니다. 역시, 황제 폐하의 독대 전에 뭔가 언질을 주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조정호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진화가 도착하자마자 황제가 독대를 할 것은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조정호는 그 전에 진화에게 조정 분위기가 사태가 흘러가는 양상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조위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전서로나마 진화에게 상황을 전해 주지 못한 것도 조위례가 그것을 말렸기 때문이다.

“아서라, 황제 폐하가 어떤 분인데. 뭔가 미리 알고 나서 행여 말을 꾸며 하거나 변명처럼 풀어 한다면 오히려 크게 실망하실 것이다.”

“황자 저하 성품에 그러실 것 같지는…….”

“그러니. 미리 상황을 알고 간다면 아무리 솔직하게 말한다고 한들 대답을 미리 생각해 두게 될 터이니. 황제 폐하께선 그조차도 알아차릴 것이다. 차라리 저하의 성품대로 솔직하게 날것 그대로 상황을 고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후우, 아버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조위례의 말에 조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호는 늘 그랬듯 오랫동안 황제를 모신 조위례의 판단을 믿었다.

다만 조위례와 조정호가 간과한 것이,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본 것은 황제이지 진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화는 의관을 정제하자마자 황제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황태자와의 일을 묻는 황제에게 솔직하게 답했다.

“멍청하게 기습 방비도 제대로 안 하고 산을 내려가다가 습격을 받더군요. 황태자 때문에 표기군도 적사문 잔당에게 제대로 힘을 못 쓰고, 그러다가 적사문 잔당을 놓칠 순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적사문주는 정의맹에서도 벼르고 있던 자라, 부득이하게 끼어들어 황태자의 목숨을 구해 주게 되었습니다.”

“허어, 부득이하게?”

“……본의 아니게……라고 해야 합니까?”

“허어!”

황제가 기가 막힌 듯 탄식하고, 엄 태감을 비롯한 태감들이 소리 없이 진화를 향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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